낭만만으로는 귀농에 성공할 수 없다!
귀농을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갑작스레 외톨이가 될지 모른다. 아내는 농사짓자는 내 말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도시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귀농을 선택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해 한순간 결심이 꺾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반대를 외치는 가족을 끌고라도 데려갈까 싶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혈혈단신으로 칠곡의 허허벌판으로 내려갔다.
농사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일이었다. 낫질부터 서툴다 보니 잠시도 허리를 펼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휴일이 없었다. 대신 주말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 대하듯 어색하게 인사했다. 넥타이를 매고 단정한 차림으로 다니던 아빠가 흙 묻은 작업복을 걸치고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내는 지친 표정으로 아이들 뒤에 서 있었다. 때로는 가족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주말이면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대화가 줄어들었다. 우리는 가족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긴 침묵 끝에 눈물을 흘리며 ‘이혼’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헤어져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아내로 하여금 ‘이혼’을 고민케 한 것은 나였다. 그러나 나는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농을 접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가족과 귀농 가운데 하나를 요구했다. 나는 낭떠러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일은 봉합되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막 내가 할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귀농이란 이처럼 기존 생활과의 완벽한 단절일 수밖에 없는가. 아내가 ‘이혼’을 말하고 돌아간 날, 나는 혼자 있는 방안이 싫어 농장을 빠져나왔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사실 이 마을 사람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농 첫날,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시골의 정서를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착 전부터 경로당과 마을을 오가며 유지들에게 점수를 많이 따놓은 터라 그들은 나를 환영해주었다. 몇 차례 기분 좋은 술잔이 오갔다. 어르신들은 마을 발전을 위해 앞장서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렇게 즐겁고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귀농을 결심하고 내려와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세상 처음 자유를 맞본 수인(囚人)처럼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구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립감은 커져만 갔다.
텃세는 있다, 그렇다고 이방인으로 살 것인가!
고향 농촌으로 귀농한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귀농인은 토착민과 갈등을 겪게 된다. 특히나 굴러온 돌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박힌 돌의 질투심도 급격히 커진다, 내가 칠곡과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0년째이다. 그 사이 칠곡군 농정심의위원, 녹색농촌체험마을 추진위원장, 군문화원 이사 등등 지역농업계의 유지가 되었지만 집단적인 질투심은 끝이 없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나는 이방인인 모양이다. 그동안 피땀 흘려 시설을 갖춘 덕분에 칠곡에도 도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이런 노고를 수고했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에 숨어서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농사지은 일이 참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송광매원이 이룩한 수많은 공모전의 수상은 바로 피땀어린 노력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상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뒷말이 잡초 자라듯이 무성해졌다. ‘아니, 군청에서는 왜 상을 골고루 나누어주지 않고 한쪽에만 편중을 시키는 거야.’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곳이 시골이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고 특히 악의적인 귓속말을 통해 은밀히 퍼진다. 그렇게 돌고 돌던 소문이 지자체 기초의원의 귀에 들어가고, 어느 날부터 행정당국의 압력이 시작된다. 더불어 지자체의 지원이 뚝 끊어진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그 덕분에 나는 중앙 정부에서 진행하는 국책공모사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사실 지방 정부의 지원 예산은 재정상 열악할 수밖에 없고, 알게 모르고 지자체 선거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나아가 중앙 정부에서 전국적인 경쟁을 뚫고 과제에 선정되면 물심양면의 지원뿐 아니라 명예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앙 정부 사업에 뛰어들면서 정보 수집, 사업계획서 작성 방면에서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왕따로 살면서 지역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쓸데없는 오해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중간 정도만 가야 할까. 내가 선택한 해답은 ‘철저하게 지역민으로 거듭나라’였다. 기왕이면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 될 필요가 있다. 나는 비전을 제시하며 우리가 가는 길이 결국에는 지역 전체를 위한 길임을 시간 날 때마다 설명했다. 동시에 작업 환경을 개선하며 발전 방향을 실물로 보여주었다. 지금도 나는 선별 시설, 유통 시설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돌이켜 보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사람들은 내가 가는 길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았고, 나는 그들에게 농장을 개방하여 이곳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과정은 계약재배 농가를 늘리는 데도 한몫을 했다.
연고도 없는 도시 떠돌이가 농사짓겠다고 기어 들어와서는 요란스럽게 시설 갖추고 하는 모양새가 지역민으로서는 보기 언짢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귀농인은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필요가 있다. 농촌의 청사진을 보여주어야 할 때도 있고, 숱한 편견을 깨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게 귀농인의 몫이라고 한다면 너무 부담이 클까. 그러나 그 도전의 성취감을 그 무엇에 비교하겠는가.<“송광매원 서명선의 귀농 경영”에서 요약 발췌, 서명선 지음, 지식공간 >
* 언론을 통해 ‘귀농 교과서’로 알려진 서명선 대표의 귀농 과정과 성공 노하우를 담은 책. 44살의 나이에 귀농, 불과 10년 사이 연매출 30억의 농기업 '송광매원'을 일구어낸 저자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 책은 농사에 문외한이었던 직장인이 매출 30억의 성공 귀농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은 고군분투의 현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