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백범 김구!

[중산] 2011. 1. 7. 17:16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저 나라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어서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들에게 이 범인(凡人)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요약)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경순왕의 8대 손이 충렬공, 그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병자년 7월 11일(이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해주 백운방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 없는 난산이었다.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던 차에 우리 동네에서 10리 쯤 떨어진 학골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문으로는 당시 굴지되는 큰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각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 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 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대어 가는 일이 많았다.

 

나는 과거에 응시하기로 하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과거는 매우 실망스러웠고 그 말씀을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려다가 석 달 동안 독방에서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나는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信好 信好不如心好 : 얼굴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우리 동네에서 20리 쯤 떨어진 갯골에 오응선과 최유현이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동학이란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어 이 사람들을 찾아보고 입도할 결심을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도 허락해 주셨다. 동학에 입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한편 포덕에도 힘을 쏟았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홍역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하루는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날아들더니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양 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구월산의 내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에서 석 달을 숨어 지내다가 텃골 부모를 찾아뵙고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나라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평양을 거쳐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 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를 배경으로 김홍집을 처단하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렸다.

 

나는 치하포의 객주에서 단발한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장연에 산다고 했으나 서울말을 쓰고 있었다. 조선말에 능숙했지만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나는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러자 망설임과 울렁거림이 가슴에 넘쳤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이 떠올랐다.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手丈夫兒 : 가지를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나는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왜놈의 복장을 걷어차니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그러자 왜놈이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손목을 힘껏 밟은 즉 칼이 떨어져 굴렀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셨다.

 

소지품을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식후에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고 이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 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알리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서 목이 떨어진다고 해도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나는 해주 옥에 갇혔다.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나는 경무관 김윤정을 향하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를 때려죽였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했다. 나는 옆 의자에 걸터앉은 일본 순사를 향하여 다시 소리쳤다.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었더니 와다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으로 가득찼다.

 

이로부터 심문은 다 끝나고 나는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또한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의외에 여기서 내 20 평생에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죄인, 강도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어쩐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않았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의 반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있었다.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때가 되었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여 『대학을 읽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사형은 취소되었다. 이것이 병진년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상감이 사형 죄인의 재가를 마쳤을 때 입직 승지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인 것을 보고 임금께 아뢴즉, 내 사형을 중지시키기로 결정하고 인천 감옥으로 전화를 하셨던 것이라 했다.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들 임금이 아무리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며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고 생각하였으므로 탈옥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고 하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 원하는 것도 내가 죄인이 아님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내가 만일 옥중에서 죽어버린다면 왜놈만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을 탈옥일로 잡고 나는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왔다.

 

마곡사에 도착하여 이 서방은 머리를 달걀처럼 밀고 와서 내게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곧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이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를 때 머리가 선뜩하여 보니 내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셔서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해서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서울 유인무의 집에서 묵다가 불길한 꿈을 꾸고 서둘러 해주로 길을 떠났다. 꿈에 아버지가 황천(黃泉)이라고 글을 쓰라고 하셨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정성껏 사탕을 하였지만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가셨다.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 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드렸다. 어느 날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나는 여옥이란 처녀를 만나 1년 후 탈상을 하고 성례할 텐데 그 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는가 물었다. 여옥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처녀의 어머니가 그런다고 대답하여 약혼이 되었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 될 사람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 성례를 치르려는데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그녀는 내가 간지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혼인을 하였다.

 

민족에 내놓은 몸

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 운동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 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 운동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세를 살펴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는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蔑爾)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 난 첫딸이 찬바람을 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로 헌병이 찾아와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양산학교 직원들이 나 모양으로 불려와 있었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고 하고 우리를 끌어내 서울로 가는 차에 태웠다. 나는 최고심문실로 끌려갔는데,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에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 순사 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도변이 놈이 나를 보고 첫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속에 품은 비밀은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없이 다 자백을 하면 괜찮거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 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전후 일곱 번 심문 중에 도번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올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지방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과 나를 비롯한 7명은 징역 15년이었다. 7년, 5년은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살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위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보는 동안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하는 자인 것 같았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김구(金龜)를 고쳐 김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 국적을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하고.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나는 가출옥으로 나왔다.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마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어머니는 낙루하시면서 화경이가 죽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는 화경의 무덤을 찾아보아 주었다.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고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동지 15명과 함께 배를 타고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안창호 동지가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자 나는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내가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하였다. 나는 시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다. 안 내무총장은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나는 사양했으나 도산이 강권하였으므로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의 국모 복수 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의식!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리. 나는 민국 5년에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고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민국 8년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 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을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권

3 ·1 운동의 상해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말았으며, 제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여 사양하였으나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제 나이가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 선생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씨의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그로부터 1년 후 미국에 부탁한 돈이 왔고 2개의 폭탄도 만들어졌다. 하나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1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그 길로 나는 이봉창을 안공근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2개와 돈 300원을 주었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 처연한 빛이 감돌자 이봉창은 자신이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자며 빙그레 웃음을 띄었다.

 

기다리던 1월 8일 중국 신문에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라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비록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고 동지들이 위로했다.

나는 이에 힘을 얻어 암살과 파괴 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그 즈음 윤봉길 군이 나를 찾아왔다. 중일전쟁도 끝나고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탄한 뒤,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나는 폭탄 2개를 가지고 김해산 군 집으로 가서 김 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만주)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 군의 기색을 살피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정절 경축 대성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 야촌 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이튿날 신문에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 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서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에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되었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 문물, 질준 중화라는 것이 이조 오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 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을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 싸움과 의뢰심뿐이다.

 

오늘날로 보아서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의 민족 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유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 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바칠 때까지 현 상태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 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상해임시정부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 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화강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을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가죽 상자 8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고 중경에 거류하는 500여 명 동포들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대표단을 두었다.

 

나의 소원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너나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일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온다. 나는 우리 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우리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직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구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 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백범일지”에서 일부 요약 발췌, 김구 지음, 소담출판사>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런 랜드!  (0) 2011.01.12
철학이 필요한 이유!  (0) 2011.01.12
눈사태!  (0) 2011.01.06
귀농!  (0) 2011.01.06
윈스턴 처칠!  (0) 201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