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자유’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유(시민적 자유)를 말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거나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다. 그는 정부의 권력적 억압 및 대중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소수 개인의 진정한 개성과 자유를 보호할 것을 강조한다. 자유는 개인의 인격적 성장과 사회 복지를 위한 조건으로써 중요하며, 자유의 증진을 위해서 무엇보다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에게 미치는 사회적 간섭을 제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창했다. 사회적 간섭이 허용되는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련된 행위에 한해서며, 자기 자신에 관련되서는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사상, 언론 출판의 자유, 각자의 기호와 인생설계의 자유, 단결의 자유를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 정하고, 이런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개인의 개성과 인격 성장이 보장되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이자 발전할 수 있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 ‘공리’는 사회적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윤리적 원리로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는 벤담으로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사실을 토대로 쾌락의 양적 측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밀은 이러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수정해, 양적 크기로 환원될 수 없는 질적 쾌락을 주장함으로써 공리의 성격을 전환시켰다. 무엇보다 밀은 전체의 행복과 공리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자유와 행복을 존중하는 가운데 추구될 수 있는 전체의 공리에 관심을 가졌다. “만족한 돼지이기보다는 불만스러운 인간이 되고 싶고, 만족한 바보이기보다는 불만스런 소크라테스이고 싶다.”는 밀의 유명한 주장은, 사회적 공리의 진정한 의미가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실현과 맞물려 있는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요약)
자유토론!
자신의 의견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충분히 자주,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토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 진리로서가 아니라 죽은 독단으로서 신봉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신봉된 진리는 그만큼 미신을 하나 더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단지 자기 자신의 주장만을 아는 데 지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문제 전반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논거가 정당하고 아무도 그것을 논박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그가 반대편의 이유를 논박할 수 없고 반대편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면 그는 어느 편의 의견도 선택할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의 백명 중 99명까지는 이런 상태에 있다.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사람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학설을 참된 의미에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만일 모든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 반대자가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일부러 반대자를 상상해 내서 그 반대자에게 가장 노련한 악마의 대변자 역할을 맡겨 가장 유력한 논증을 제시하게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자유로운 토론이 행해지지 않으면 단지 의견의 근거가 망각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견의 의미 자체도 망각되어진다. 자유토론 금지의 폐해는 지적 폐해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폐해이기도 하다.
의견의 다양성을 유익한 것으로 보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서로 싸우는 학설이 한 쪽은 진리이고 다른 쪽은 거짓인 경우가 아니라, 진리를 두 편이 부분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경우에서 보여진다. 이 때는 일반적인 의견이 진리의 일부분을 구현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반대편의 의견으로 진리를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체로 여론의 변혁은 진리의 일부분을 드러냄과 동시에 진리의 다른 부분은 억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우세한 의견은 비록 올바른 근거에 입각해 있는 경우라도 부분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일반적 의견이 망각하고 있는 진리의 부분을 다소라도 내포하고 있는 일체의 의견은 설사 그 속에 아무리 많은 오류와 모순이 섞여 있다할지라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 지성의 현재 상태에서는 오직 의견의 차이를 통해서만 비로소 진리의 모든 측면을 공평하게 다룰 기회가 생겨진다. 진리를 위해서는 의견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즉 의견의 다양성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의견의 자유와 의견을 발표할 자유가 인류의 정신적 행복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네가지 근거를 정리해보자. 첫째, 어떤 의견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 그 의견이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절대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설사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실제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또는 지배적인 의견이 전적으로 완전한 진리인 경우는 드물거나 절대로 없거나 하기 때문에, 진리의 나머지 부분이 보충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충돌됨으로써만 부여되는 것이다. 셋째, 일반적인 의견이 진리일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만일 그것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고 실제로도 논쟁되지 않는다면, 그 의견을 품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마치 편견을 품은 것과 같이 그것의 합리적인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넷째, 만일 자유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의견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 또는 약화됨으로써 그 의견이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생한 영향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행위와 성격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행복에는 관계되지만 다른 사람의 이익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어떤 부분 때문에 겪을 수 있는 불편은 주위의 악평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자신의 경우에 좀처럼 정당화하기 힘든 손상을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행위, 사기나 배신행위, 부정하고 무자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추궁하는 행위,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받게 될 위해를 막아주지 않고 본체만체하는 행위, 이런 행위들은 도덕적 보복과 형벌을 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대체로 사회적 도덕이나 의무에 관해서는 공중의 의견 즉 지배적인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경우가 많지만, 개인의 사적인 행위에 관해서는 공중의 의견이 잘못될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항구적인 관심은 발전해나가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인격적 성장에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도덕적, 과학적, 신학적인 모든 주제에 관련된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둘째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인생 계획을 스스로 설계하고 추구할 수 있는 자유도 보장돼야 하며, 셋째 집회결사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 버리려는, 즉 자기 자신을 포기해 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인격 성장(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관해서는 사회적 간섭을 허용했다. 자유가 존귀한 것은 쾌락을 증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과 인격이 완전한 전체로 조화롭게 발전할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자유는 개인의 인격적 성장을 위한 조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한 조건이 된다. <“자유론 on Liberty”에서 일부 요약 발췌, 존 스튜어트 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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