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문제
죄책감과 수치감도 슬픔의 여정 속에 끼어듭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들은 다양합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될 때는 즉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죄책감은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때론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경험하기 쉬운 또 다른 경향은, 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나쁜 일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고인이 행했던 선한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만약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무엇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의 ‘만약 ~했더라면’ 하는 목록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난 상처를 입었어요’ 또는 ‘난 화가 나요’라는 표현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미 지난 일은 흘러갔습니다. 그 일은 바뀔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나 많은 고통을 지고 있어서 더 이상 자기고발이나 자학, 자기 비하 등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적어보고 크게 읽은 다음에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리곤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죄책감을 거두어 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죄책감이 남아 있으면, 결코 회복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분노의 문제
또 다른 감정은 분노입니다. 그것은 불쾌하고 성가시며 항의하는 감정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나 상처, 두려움, 무기력감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부당함을 선언하거나,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하기를 바라며 슬픔 가운데서 항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고통에 대한 반응입니다. 때로 이러한 분노는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을 향해 폭발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노는 죄가 아니라 감정의 정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분노는 슬픔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론 고인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때로 버림을 받았거나 희생을 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주시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신앙이나 믿음이 소용없는 것처럼 보여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십시오. 슬픔으로 인한 분노가 하나님을 향해 생기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실로 인한 반응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일지’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자신과 자신의 분노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표출하더라도 자신의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유지하는 한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자신의 분노를 포기하십시오. 분노에는 목적이 있지만, 많은 경우 목적을 다 이룬 후에도 남아 있게 됩니다. 다윗은 분노에 차서 질문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의 단계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 6)
슬픔이 가실 때가 있을까요?
마침내 슬픔이나 우울증, 낙심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슬픔에 젖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무기력감 때문에 꼼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는 피동적이 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을 바라보던 태도까지도 바꾸어 버립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빛과 평화, 기쁨을 경험하는 대신에 그 반대의 감정을 느낄 뿐입니다. 그럴 때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은 흔히 우울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심하게 우울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울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슬픔처럼 우울증도 하나의 여정이지만 무미건조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광야의 불편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감정적으로 낙심된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 가운데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자요 질고를 아는 자(사 53:3)이십니다. 슬픔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나의 감정을 어떻게 할까요?
혹자는 슬픔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기에 가장 깜깜한 밤과 같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다양한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는 썰물처럼 떠나갑니다. 우리들에게 밀려오는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마침내 그러한 감정들을 정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것같이 생각됩니다. 또한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상실과 슬픔의 시기에도 거친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여,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감정을 억누르고 틀어막는 것은 가능하지만, 오랫동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글이나 말로 표현하게 되면 혼자서 그 무게를 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표현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잘 극복해가고 있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에게 ‘난 당신이 이렇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마음껏 슬퍼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노만 라이트 지음, 역자 금병달 목사, 김정진 사모, 노란숲>
쑥부쟁이;
줄기는 곧게 서며 뿌리줄기가 짧고, 위쪽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짧은 털이 난다. 뿌리에 달린 잎은 꽃이 필 무렵 없어지는데 길이 65cm, 나비 13cm로 뭉쳐난다. 긴 타원형이며 밑부분이 점점 좁아지고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다. 줄기에 달린 잎은 좁고 어긋나며 길이 20∼30cm, 나비 6∼10cm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꽃은 연한 자주색 또는 하늘색으로 피는데, 두상화가 가지와 원줄기 끝에 달리며 산방꽃차례로 달리며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난다. 설상화는 하늘색이고 관모는 흰색이다.
쑥부쟁이와는 피는 시기도 비슷하고 꽃모양도 비슷해 구분이 쉽지 않은데 잎을 보면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는 것이 쑥부쟁이이고 개미취는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으나 쑥부쟁이처럼 굵은 톱니가 아니다. 또 개미취는 위부분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지는게 특징이다.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데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라는 꽃은 없다. 들에서 피는 국화과의 식물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요즘은 구절초, 개미취와 더불어 쑥부쟁이를 흔히 들국화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들국화라고 하면 노란색의 감국, 산국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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