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저자: 헤르만 글라저 - 1928년 독일 뉘른베르크 출생. 에를랑겐대학교 등에서 독어독문학, 영어영문학, 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브리스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펜클럽 회원이며, 베를린 공과대학교의 명예교수로 문화와 인문학에 관해 많은 책을 저술했다.
불멸의 전당으로 들어서다 - 한 작곡가의 신격화
조각상의 인물은 전혀 강해 보이지 않고 다소 땅딸막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 누드의 흰 조각상은 응축된 에너지를 발산한다. 조각상은 음악의 거인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담고 있다. 엄청나게 큰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의자는 신의 옥좌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다. 조각상의 인물은 바로 음악의 거장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작곡가 베토벤의 신격화 작업, 다시 말해 그를 불멸의 전당에 들이는 일은 그가 생존할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즉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첫 정점에 도달했다. 베토벤의 장례식이 거행된 빈의 슈테판 성당에는 2만여 추모객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빈의 전체 인구가 29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대단한 추모 행렬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그의 사후 명성은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된다.
판타지 추진력으로서 충족되지 못한 소망 - 본에서의 어린 시절
어떤 예술가의 위대한 업적을 특히 그가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력의 원천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삶에 대한 단념 내지 체념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베토벤의 경우가 정확히 그러했다. 베토벤은 평생 동안 내적 궁핍함과 외적 궁핍함, 정신적 궁핍함과 물질적 궁핍함으로 심한 압박감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천재로서 자신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을 승화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녔다. 다시 말해 그는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고 예술로 발전시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녔다.
작곡가 베토벤은 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다. 따라서 본에서 보낸 시기는 그에게 있어 인생의 첫 국면이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 외상, 즉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겪는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 외상을 음악적 판타지로 승화한다. 베토벤은 부모 집에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경험한 듯하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즐겨 이야기하는 데 반해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피한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1787년 3월, 당시 열여섯 살인 베토벤은 음악교습을 받기 위해 빈으로 여행한다. 그는 빈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영원한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난다. 그는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 즉흥연주를 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에게 음악이 가져다준 성취감은 그가 다니던 학교나 그가 사귄 친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에게 학교나 친구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자신의 제자 카를 체르니(Karl Czerny, 많은 피아노 연습곡을 만들어 오늘날에도 피아노 기초 연습의 텍스트로 사용된다)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엄청나게 연습했네. 대부분 자정이 훨씬 지나서까지 연습했지. 그런 연습 과정에서 나만의 연주기법을 완성했고, 즉흥연주 실력을 시험하고 심화했네. 나는 외로움 속에서 나만의 음악적 판타지가 자유롭게 펼쳐지도록 내버려 두었네.”
베토벤은 20대 초반에 이미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는다. 이로 인해 그는 고립 상태에서 벗어난다. 이는 그의 겉모습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토벤이 살던 집 주인은 베토벤의 옷차림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담녹색 연미복, 버클이 달린 짧은 녹색 바지, 흰 실크나 검은 실크 양말, 굽이 검은 신발, 곱슬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가발 …” 베토벤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795년 홀로 된 모차르트의 부인이 빈에서 개최한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로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인다. 이때부터 베토벤은 피아노의 대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한다.
‘미적 가상’이란 제국에 사는 몽상가 - 빈에서 명성을 얻다!
1792년 11월, 베토벤은 쾰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도움으로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으로 유학길을 오른다. 빈에 유학 온 베토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명의 음악 스승들이 있다. 한 사람은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 음악교사이자 음악이론가인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이며, 또 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 오페라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질투심 많은 경쟁자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이다. 당시 막 빈슈테판 대성당의 지휘자로 발탁된 알브레히츠베르거는 대위법의 대가로 베토벤에게 대위법을 가르치고, 가톨릭 교회음악에 친숙하도록 도움을 준다. 1766년 빈에 와서 1788년에 궁정 작곡가가 된 살리에리는 베토벤에게 이탈리아 가곡의 작곡법을 가르친다.
베토벤이 빈에 머무른 시기에 도시에는 일종의 알력관계가 있었다. 수도 빈과 군주제 사이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관계를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국가(Asthetischer Staat)’란 개념으로 특징지어 볼 수 있다. ‘미적 국가’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확신이 기초를 이룬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인간이 속박당한 채 태어난다면…” 그래서 베토벤은 관념주의적인 비약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족을 문화적 미덕으로 고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여기 미적 가상의 제국에서 평등이란 이상이 실현된다. 몽상가는 평등이란 이상이 본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기꺼이 보고 싶어 한다.” 이상 세계와 실제 세계는 근본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베토벤에게서 몽상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후 베토벤의 창작활동 전성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거의 같은 시기에 점점 청력을 잃어간다. 그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1798년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 소나타>(C단조, Op.13)의 첫 악장 도입부에 반영한다. 소나타의 도입부는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베토벤은 진지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주로 C단조를 선호한다. 이것이 <비창 소나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1800년에 <교향곡 제1번>(C장조, Op.21)을, 1802년에 <교향곡 제2번>(D장조, Op.36)을 작곡한다. 이 두 교향곡은 초기 작품과 양식 면에서 변화를 보인다. 초기 작품의 불같이 열정적인 분위기가 두 교향곡에서는 많이 완화된다.
1803년에서 1812년까지 10년의 세월은 베토벤의 인생 중반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그는 모든 형태의 음악에서 작곡가로서 최고의 업적을 일구어 낸다. 그는 이 시기에 유명한 작품을 많이 탄생시킨다. 1802년에 작곡한 ‘크로이처 소나타’로 불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제9번>(A장조, Op.47), 1806년에 러시아 외교사절이며 베토벤의 열렬한 후원자인 안드레이 라주몹스키 백작에게 헌정한 <라주몹스키 현악 4중주곡>(Op.59), 1808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D장조, Op.61) 등이 있다.
1813년에서 사망한 해인 1827년까지 14년은 마지막 창작활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로 인해 새로 작곡한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이 시기의 최고 걸작품은 1826년에 발표한 <교향곡 제9번>(D단조, Op.125)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제10번>을 작곡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진행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신성한 아름다운 불꽃으로서의 자유와 환희 -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창작활동의 정신적 토대
베토벤은 독일 계몽주의의 대표자 이마누엘 칸트,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인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과 같은 인물의 사상에 심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회정치적 이성의 편에 섰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걸맞은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감정에만 호소하는 멜로디 내지는 리듬적 역동성을 훨씬 넘어선다. 베토벤은 작곡을 통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것을 완벽하게 완성해 낸다. 그의 작품에는 일반 사람이 감히 근접할 수조차 없는 천재적인 능력이 표현되어 있다. 음악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베토벤의 천재적 작곡 능력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베토벤의 위대한 창작물 피아노곡,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무대음악, 서곡, 가곡, 실내악 등을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 전체가 그려주는 윤곽을 볼 수 있다. 베토벤의 전기작가이며 음악사 연구가인 파울 베커는 베토벤이 인류사에 가져다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적는다. “예술가의 자유, 정치적 자유, 개성의 자유, 의지의 자유, 행동의 자유, 신앙의 자유, 온전한 인간이 내적 활동이든 외적 활동이든 그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 바로 이것이 베토벤이 가져온 복음이다.… 여기에 교량이 있다. 이는 외견상 고독하게 서 있는 사람 베토벤을 자신의 위대한 동시대인과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이 교량은 그를 칸트와 연결해준다. … 이 교량은 그를 실러 그리고 괴테와 연결해준다.”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 오, 하느님! 저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순수한 기쁨의 날을 주십시오. …” 베토벤은 인생에서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음악의 급진주의자로서 그는 인류에게 소리의 우주를 선사한다. 베토벤이 선사한 소리의 우주는 인류에게 행복과 환희를 안겨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마음이 자유와 평화로 향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베토벤은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숭고함을 이룬 거인이다. 또한 음악예술에 매료된 거인이다. 그의 음악은 인간 존재가 짓눌리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관념성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거인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역자 김형민박사,현문미디어>
▣ 저자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1956년 슈타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의 뮌헨대학교와 프랑스의 보드로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독일 제2공영방송 ZDF에서 역사, 정치 및 문화와 관련된 방송물을 기획했으며, 많은 프라임타임 시리즈물을 제작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여러 언어로 소개되었다. 대표적인 저작물로는 『신의 축복과 함께 지옥으로-30년 전쟁(2003)』, 『임페리움-위대한 제국의 번영과 몰락(2004)』, 『성서의 수수께끼-성서의 비밀(2005)』, 『임페리움Ⅱ-위대한 제국의 번영과 몰락(2006)』 등이 있다. 이 책(2009)은 ZDF에서 골든아워에 방영된 6부작을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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