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고인에 대한 추억을 보관하기

[중산] 2011. 10. 26. 12:27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감정

슬픔의 감정들 가운데서 가장 은밀한 것은 안도감입니다. 사실 이러한 감정이 슬픔 속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자신 안에서 안도감을 감지하는 경우에도 놀라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복잡한 감정과 뒤섞이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은 흔히 사랑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은 후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때로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을 때, 경험해서는 안될 것 같은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지거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경우에는 고인뿐 아니라 보살피는 사람에게도 여러 방면에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안도감이 느껴진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달리 해결책이 없었던 상황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배신이나 신의의 저버림, 인격적인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한 안도감은 먼저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실을 자신에게 인정함으로써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큰 소리로 외치거나 글로 여러 번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고인에 대한 추억을 보관하기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과정을 지나면서 고인에 대한 추억이 희미해져감에 따라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인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런 감정도 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우리가 취해야할 새로운 역할 중 하나는 고인을 위한 역사가가 되는 일입니다. 애도자만이 고인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는 핵심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격체로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추억하는 일입니다. 이 작업은 결국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표현이며, 헝클어지고 복잡해진 추억들을 보다 분명히 하는 일이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게 될 내용들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회복_ 반드시 이루어진다

회복! 그것은 잡히지 않는 꿈같이 여겨질 것입니다. 회복은 정해진 목적지에 한번 도착하면 끝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어떤 날에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어떤 날에는 제자리로 되돌아간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과연 이 슬픔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요? 이 여정이 끝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요?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여정에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전환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인의 사망 후 3개월 정도에 가장 힘든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6∼9개월 정도 지나면 정서적인 면과 신체적인 면의 건강관계를 고려해야 할 수준이 됩니다. 다음으로 사망 1주기 때가 힘든 시기입니다. 슬픔이나 고통이 마치 처음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강하게 환기될 수 있습니다. 18개월쯤 되면, 지금까지의 시간들보다 훨씬 나은 시간들을 경험하면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자기 생활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이때가 바로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처리해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어떤 시점에서 슬픔을 흘려보내는 일은 이 여정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슬픔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인을 뒤에 남겨두고 자유롭게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안녕이라고 말하기

슬픔을 떠나보내는 과정의 첫 단계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편지를 쓰는 일입니다. 이러한 편지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감정들을 놓아 보내기도 합니다. 고인이 된 사람과 자신이 그리워하는 바나 바라는 바, 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애도의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배운 바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진실해야 합니다. 슬픔의 여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슬퍼하기슬픔을 멈추기를 허락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도의 과정을 통해 떠나간 고인에게 계속적으로 안녕이라고 말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안녕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변화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고통에 수반되는 가치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고통 그 자체나 고통의 과정에 있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부여됩니다. 우리는 슬픔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장점이나 잠자고 있던 달란트, 결코 사용해보지 않았던 능력, 이전엔 결코 보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 타인의 상처나 어려움에 대한 새로운 공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복이란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실감과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과,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는 것을 뜻합니다. 회복은 고인을 잊는다거나, 다시는 쓰라린 마음을 경험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공휴일에도 허전한 느낌이 없다거나 더 이상 슬픔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애도를 표현하는지를 배움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슬픔이여 안녕!

애도의 과정에서 혼돈상태가 끝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의 몇 가지 표시가 회복되어가는 상태를 말해줄 것입니다. 첫 번째 표시는 편안해진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데 묶여 있던 상태에서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보다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또 다른 표시는 내적인 힘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무력감이 사라지고, 이전에 하던 활동들을 예전처럼 다시 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 표시는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표시는 먹고 자는 일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성인이라면 대개 이러한 상태가 나타나기까지 18개월에서 24개월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위의 네 가지 표시 이외에도 회복하는 시간에 많은 변수들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고인에 대해 기억은 나겠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아픔도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애도가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소망이 슬픔을 대신하러 옵니다. 슬픔으로 꽉 막힌 하늘이 맑게 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제냐고요? 모든 애도의 시간을 마무리할 그 때가 바로 그 시간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1,4)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 60:20)<“마음껏 슬퍼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노만 라이트 지음, 역자 금병달 목사, 김정진 사모, 노란숲>

 

개미취 ;

줄기는 곧게 서며 뿌리줄기가 짧고, 위쪽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짧은 털이 난다. 뿌리에 달린 잎은 꽃이 필 무렵 없어지는데 길이 65cm, 나비 13cm로 뭉쳐난다. 긴 타원형이며 밑부분이 점점 좁아지고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다. 줄기에 달린 잎은 좁고 어긋나며 길이 20∼30cm, 나비 6∼10cm로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꽃은 연한 자주색 또는 하늘색으로 피는데, 두상화가 가지와 원줄기 끝에 달리며 산방꽃차례로 달리며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난다. 설상화는 하늘색이고 관모는 흰색이다.

쑥부쟁이와는 피는 시기도 비슷하고 꽃모양도 비슷해 구분이 쉽지 않은데 잎을 보면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는 것이 쑥부쟁이이고 개미취는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으나 쑥부쟁이처럼 굵은 톱니가 아니다. 또 개미취는 위부분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지는게 특징이다.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데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라는 꽃은 없다. 들에서 피는 국화과의 식물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요즘은 구절초, 개미취와 더불어 쑥부쟁이를 흔히 들국화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들국화라고 하면 노란색의 감국, 산국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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