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반복된다
황제가 죄인이라면 죄인일 수밖에_ 팽월과 유방
천하를 평정한 후, 유방은 대대적인 논공행상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후방에서 온 힘을 기울인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치하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유방이 군신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사냥에 대해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냥개도 알고 있는가? “물론 잘 압니다.” “잘 되었구나. 사냥을 할 때, 사냥개는 전력을 다해 목표물을 포획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 또한 반드시 사냥개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대들이 용맹하기 그지없는 사냥개와 같다면, 소하는 바로 사냥개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신하를 바라보는 유방의 관점만큼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유방은 신하를 그저 목표물을 쫓는 사냥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단지 비유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황제의 교만이 절로 묻어난 말이다. 결국은 유방 또한 고대의 수많은 지도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의 황제치고 천하를 천하인의 것이라 생각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유방 또한 천하를 유씨의 것으로 여겼고,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한 양장과 모신들은 그저 자신이 이용한 사냥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천하가 태평해진 지금에 와서 사냥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방의 사냥개들 또한 잡아먹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초와 한이 자웅을 겨룰 때, 팽월이 장기간 초나라에 머물면서 유격전을 벌였다. 때문에 항우는 매번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후방이 불안하여 퇴각하기를 되풀이하다가 결국 해하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비록 팽월의 공로가 한신에 못 미친다고는 하나 개국공신이라 칭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장오와 한신이 잇달아 죽임을 당하자, 팽월은 자신에게도 화가 닥칠 것을 염려하여 매사에 각별히 주의했다.
그즈음 팽월의 부하 중 대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은 태복 하나가 장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유방에게 팽월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진평은 유방에게 이렇게 고했다. “팽월은 한신의 죽음을 슬퍼해왔으나 모반의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일단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만약 그가 스스럼없이 입궁한다면 모반의 뜻이 없는 것이니 관직을 빼앗아버리면 그만이고, 만약 오지 않는다면 모반이 분명하니 군사를 파견하여 정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분 또한 분명해집니다.”
그리하여 유방은 대부 육가를 보내 팽월을 데려오도록 했다. 팽월이 육가를 따라 도읍에 다다랐을 때, 저만치서 성문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호철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팽월은 황급히 다가가 주위사람들에게 그를 끌어내리도록 명했다.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황망한 일을 당하였습니까?” 팽월이 묻자 호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대왕께서는 위험한 지경에 있는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헌데 대왕께서 지금 성에 들어가시면 필경 위험한 지경에 빠질 텐데, 그땐 아무도 가서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신의 경우를 면하시려거든 부디 발길을 멈추시어 돌아가십시오!” “대부의 말씀은 참으로 고마우나 황제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소이다.”
팽월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육가와 가던 길을 재촉했다. 호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팽월이 입궁하자 유방이 엄하게 문책했다. “내가 친히 진희의 난을 평정하고 있을 때 그대는 어찌하여 도우러 오지 않았는가?” “당시 신은 정말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폐하의 명을 어기려던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흥, 그대의 수하에 있던 태복이 그대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인가!” “그 자는 공무를 게을리하여 제가 처벌하려 했습니다. 때문에 앙심을 품고 저를 모함한 것이니 폐하께서는 부디 소인에게 속지 마시고 저와 정면대질을 시켜주십시오.”
그러나 유방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위를 불러다 팽월을 심문하도록 했다. 이때 근신이 다가와 어떤 자가 급히 황제를 뵙기 원한다고 고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대부 호철이라 했다. 유방은 호철을 들게 한 후 물었다. “무슨 일로 예까지 왔는가?” “일찍이 황상께서 형양에 포위당하셨을 때, 팽월이 초군의 군량 보급로를 끊고 유격전을 벌여 구해드렸습니다. 이토록 큰 공을 세운 팽월을 이제 와서 소인배의 참소를 믿고 죽이려 하십니까? 이 일로 천하 사람들이 겁을 먹고 황상을 멀리하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호철의 말에 유방은 한참을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내 본디 팽월의 죄를 엄히 다스리려 했으나,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주어라, 단 그의 왕작을 몰수하고 서민으로 강등하여 촉땅으로 귀양보낼 것이다.” 단 한시도 모반지심謀反之心을 품어보지 않았던 팽월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크게 상심한 그는 눈물을 삼키며 귀양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튿날 팽월은 낙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여후의 행차를 만났다. 여후를 본 팽월은 복받치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바로 길가에 엎드려 통곡했다. 여후가 다가와 묻자 그는 그간의 일을 낱낱이 밝히며 하소연했다. “부디 신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황상께 잘 말씀드려 고향 창읍昌邑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여후는 짐짓 그를 달래어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후는 궁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 팽월은 천하의 명장입니다. 그런 자를 불러왔으면 당장 제거하여 후환을 방지해야지 어찌하여 살려서 촉땅으로 가게 하셨습니까? 이는 덫에 걸려든 호랑이를 다시 산으로 보내는 것과 같으며, 그랬다가는 훗날 분명 폐하를 해하려 들 것입니다. 마침 제가 도중에 그를 만나 다시 데려왔으니, 주저 마시고 그를 죽여 화근을 없애버리십시오!”
유방이 듣고 보니 여후의 말 또한 옳았다. 이에 그는 곧 팽월을 끌어다가 정위 왕염王恬에게 모반죄의 여부를 심문하도록 했다. 그제야 팽월은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났다가 또다시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염원이 팽월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진희의 반란 때, 그대가 병을 핑계로 출정명령을 따르지 않자, 그때부터 그대를 죽일 마음이 있으셨다. 그러나 어제 폐하께서는 옛 일을 생각해 목숨만은 살려주는 큰 은혜를 베푸셨거늘, 그대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여후를 따라 뒤돌아오고야 말았다. 때문에 황상께서는 자네가 분명 모반지심을 품었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원래 ‘회복은 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의 죽음은 폐하께서 각박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방은 한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팽월의 목을 베고 삼족을 멸했다. 고대에는 황제가 죄인이라면 무조건 죄인이 되어야 했다. 황제가 내린 죄명은 결코 피할 수도, 씻을 수도 없었다. 팽월의 ‘모반’ 또한 팽월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팽월은 황제의 근심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양장이나 모신이라고 해도, 전횡과 권모술수가 들끓는 정계에서 정세를 관찰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처신하지 못했다가는 한순간에 필생의 공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 관직을 잃는 것은 둘째 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는 치명적인 손상도 입을 수 있다.
<“권력의 숨은 법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리정 지음, 역자 이은희님, 미래의창>
▣ 저자 리정
역사문화연구의 전문가로 중국 역사와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국학(國學)에도 정통하며, 풍부한 저술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중국 고대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명철한 분석과 평가에 능하여, 중국 고대 제왕과 대신간의 협력관계와 용호상박 관계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리정이 저술한 『권력충고』 등의 역사서는 광범위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