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비용
복지가 사라진 사회가 인간의 생명 보존에 얼마를 투자해야 좋을지, 후손의 생명과 노인의 생명에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이미 사방에서는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그걸 전문 용어로 ‘바이오 정책’이라 부른다. 현재 태아의 조혈 세포와 유전자 코드 해독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이, 앞으로 우리의 삶에 동행하게 될 것이다. 바이오 정책은 21세기의 출입문 위에 있다. 그리고 방금 이 문을 들어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의 시작일 뿐 아니라 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날은 죽는 날이다. 노인의 건강복지 비용으로 14달러가 지출되는 데 반해, 아동 1인당 지출 비용은 겨우 1달러에 불과하다. 생의 마지막 몇 달에 복지예산의 70~90%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건강부 장관이 1990년대 초에 한 말이다. 이런 생명의 상대성은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래전부터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명을 도덕적 의미 및 경제적 의미에서의 비용 요인(후손들의 짐으로)으로 계산하는 경제, 도덕, 사회적 요인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생명 연장 장치를 14일만 일찍 떼어내도 전체 국민 보건 시스템이 개선될 것이라는 추측이 지금부터 나오고 있다.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의 이틀을 포기하는 건 이틀 휴가를 삭제하는 것과 비슷하게 유용할 것’이라고 말이다.
보건복지 비용을 둘러싼 논쟁과 나란히 죽음의 절약 효과에 대한 논쟁도 이미 시작되었다. 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발표한 이유는, 이미 1998년의 효용성 논쟁을 통해 경각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사의 안내를 받는 자살의 합법화를 통해 절감할 수 있는 총액은 비교적 적지만, 우리는 국민복지제도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이런 시술이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최고 재판소 앞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건강부와 그 직원들이 예산 압박 때문에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의사의 안내를 받는 자살을 선택할 것을 종용할 가능성이 있다. 환자의 고통은 의사의 경제적 명령 때문에 치료되지 못할 것이므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자살을 선호할 것이다.”<“고령 사회 2018”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랑크 쉬르마허 지음, 나무생각, 역자 장혜경님, 나무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