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노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노소의 이동, 건강과 질병, 어리석음과 지혜의 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상품의 생산처럼 세 부분(젊음, 직업, 고령)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신체를 장악한 에일리언처럼 갑자기 사람 안에 다른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이다. 변덕스럽고, 삭막하고, 탐욕스럽고 ,지치고, 병든, 인간.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런 공포의 카탈로그들을 리스트로 끝없이 채워놓았다. 전문 서적을 보면, 나이가 들면 성장하는 뇌의 용량을 오감에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잘못 보고 잘못 듣는 걸 그렇게 보상해야 한단다. 때문에 젊은이들이 보기엔 노인들이 유유자적하고 까다롭고 느려 보이는 것이다.
노인의 수가 증가하고, 노인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마지막 질문들’이 전혀 새로운 권력을 발휘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25세 때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는 건 정신적 사치였다. 하지만 다수가 50세를 넘긴, 그래서 주관적인 여생이 30년밖에 남지 않은 사회에서 사치품은 생필품이 된다. 이런 다수의 다수에겐 남은 여생이 고통과 질병, 고독과 쇠약, 정신박약과 죽음 같은 인간의 원초적 공포와 체념으로 깊이 물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두 번 짓밟힌다. 노인에 대해 떠돌고 있는 편견과 말들, 그들을 사회에서 내모는, 그저 생물학적 종의 일원으로만 규정하는 편견 때문에 짓밟히며, 실제 전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죽음으로 끝나게 될 노화 과정에 의해 짓밟힌다. 그래서 21세기에는 벌거벗은 삶이 바로 정치가 된다고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이 말했다. “노화는 정치가 될 것이다. 노화는 여론 조사, 선거 프로그램, 마케팅을 위한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다.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노인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미 몇 년 전에 마케팅 전문가들은 노인 집단을 젊은 노인, 중년 노인, 신참 노인, 고령의 노인으로 구분한다.”
<“고령 사회 2018”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랑크 쉬르마허 지음, 나무생각, 역자 장혜경님, 나무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