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길들이기!
자율
인간의 가치를 가름하는 요소 중 하나가 자율성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사람들은 자유를 열망하지만 원하는 행동 범위를 제대로 판단해서 선택하기란 매우 어렵다. 근대 이전은 자유의 침해를 상당히 많이 받던 시대였다. 규범에 매인 사회와 가족, 중압적인 전통, 그리고 강제적인 정치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마구 훼손했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서양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폭넓게 주어지면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국적까지 바꿀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 가치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고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오히려 무의미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자유와 더불어 선택의 과잉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의 눈앞에는 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선택의 과잉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에 빠뜨리거나 타락으로 이끌어 오히려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를 굳이 비교하자면 옛날에는 제한된 범위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안정된 지표가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 순간 제시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어진 모든 것을 다 품에 안으려 발버둥치다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완전히 탈진 상태로 고통의 수렁에 빠져 살게 된다. 과잉된 가능성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젊은이들은 선택이 어렵다는 변명으로 책임 회피를 함으로써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절망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알랭 에렌베르그는 욕망과 도덕적으로 금지된 강박증에 대한 갈등은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프로이트 시대와 선명하게 구분 지어졌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1968년 5월 혁명에서 관습의 해방이 선포된 후로 상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은 더 이상 금지된 규범으로 고통 받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가능성과 지나친 자율성 때문에 방황하며 화려한 성공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잠깐 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자.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마저 방해하는 그릇된 습관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혜의 스승들은 집단의 굴레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유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사랑
지식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성이 필요한 것처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행복을 위한 핵심 조건이다. 자유롭지 않을 때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처럼 사람들과 관계가 부적절할 때 삶은 삭막해진다. 따라서 자유와 사랑은 자기실현과 개인의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누군가’라는 대상이 늘 따라다닌다.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며 친구들과 배우자를 사랑한다. 이것은 수 세기에 걸친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고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철학에서 강조해온 헌신과 연민, 인간애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사회적 차원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작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밀려나 버렸다는 점이다.
현대 심리학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명백하게 정의했다. 타인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선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타인은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되기 때문에 사람을 사귀기 전에 반드시 자기 자신부터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품은 채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질투심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내면에 억눌린 열등감과 욕구 불만이 가득 쌓여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와 멸시는 종종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소중한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선 어린 시절에 받았던 ‘부드러운’ 사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바로는 어린 시절 받았던 ‘따스한 사랑’에 대한 기억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정서적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며 존경심마저 부여한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다는 확신이 자신의 가치에 대단히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유욕에 따른 지나친 집착이나 무관심 등으로 왜곡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비틀어진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되고 그 여파로 다른 사람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어린 시절 왜곡된 사랑 때문에 정서적 결핍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해도 성장해나가면서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은 트라우마도 배우자나 친구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극도로 변형된 이미지를 품는 ‘나르시스Narcissus’는 심각한 정서 장애 중 하나로 의학적 도움 없이는 완치가 어렵다. 이 증세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절대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에 숨어 있는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끈질긴 악순환의 반복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힘들겠지만 기억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 원인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상처란 녀석의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악순환의 굴레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역자 강만원님, 창해>
대운산 내원암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