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용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문장은 기원전 28세기에 이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함무라비 왕은 부당한 폭력에 단호하게 맞서기 위한 조처로 자신들이 받은 손해만큼의 비율로 되갚은 것을 허용했다. 이 같은 보응법은 ‘토라Torah 율법서’에도 반복해서 나온다. 토라의 구절들은 폭력을 금하고 용서하라는 성경의 내용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붓다는 폭력에 맞대응하지 말고 연민과 존경을 보이라고 가르쳤다. 붓다의 가르침은 토라의 보응법과는 전적으로 다르지만, 예수가 전하는 용서의 메시지와는 의미상 맥락을 함께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사랑의 본질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용서와 비폭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대단히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부당한 공격을 당했으면서도 상대보다 불리한 입장이라 몸을 사리는 것이 비폭력은 아니다. 단지 힘이 모자라서 외적 대응을 하지 못했을 뿐이며 마음 한구석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는 증오가 가득하다. 어느 날 힘의 관계가 반전된다면, 다시 말해 상대보다 힘이 강해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당했던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보복하게 된다. 따라서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행위를 비폭력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음속 상처를 끌어안은 채 복수를 기다리는 하나의 전략으로 폭력의 또 다른 연장이라 봐야 한다. 비폭력의 윤리적 가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용서’이다.
용서란 잊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갈등과 고통을 다스리는 심리 치유 과정으로 상처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의 다짐이다.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 특성 때문에 종교계에서는 ‘신비로운 영성의 절정’이라 정의했다. 용서는 이성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야말로 폭력을 잠재우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독립을 이루게 해준 간디의 정치 구호 가운데 ‘아힘사Ahimsha’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과 ‘진정한 힘’에 토대를 둔 비폭력의 가치이자 승리의 근원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자신을 죽이는 사형 집행인들의 무지를 상기시키며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탄원했다. 예수가 택한 극단의 방법처럼,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의 행위가 사실은 충동과 두려움, 또는 누군가의 선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에게 습관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자신의 내면에 그 사람을 기꺼이 초대해 함께 호흡하는 과정에서 그가 무지하고, 불행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해 사랑과 용서로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자. 이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며, 물론 어렵지만 자신을 살리는 가치 있는 행동이다.
실패
현대 사회에 들어서 능력, 성공, 승리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생겼다. 치열한 성공 이데올로기는 가정과 학교, 사회를 통한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다그친다. 대중 매체는 쉴 새 없이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영상을 내보내어 주목받는 인생의 모델로 제시하고 패배자는 인생을 잘못 살았거나, 심지어 악의 전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아실현을 앞세우는 현대 사상의 그럴듯해 보이는 정신 유산으로서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유럽 계몽주의자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전횡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주고자 노력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강요된 사회이념의 틀에 갇힌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자유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새로운 사조였다.
능력 숭배는 빈틈없는 획일성을 요구한다. 이혼이나 실직도 심각한 개인적인 결함이자 실패로 간주한다. 따라서 여자의 경우 현모양처, 훌륭한 동반자, 멋진 섹스 파트너, 살림 잘하는 주부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을 잘하는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무능력자로 낙인 찍혀 그에 걸맞은 홀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논조에서 패배자가 겪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회가 부여한 규범에 따라 우리가 선택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한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패는 치유 불능의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때가 되었다.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으뜸 패는 인생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각성이다. 계획한 모든 일을 단박에 성공할 만큼 완벽한 능력의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실패할 수 있는 위대한 도전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획일적인 성공이 보장된 소극적 범주에 갇혀 살았다는 말과 다름없다. 패배가 두려워 성공에 안주하는 사람은 그만큼 실패할 확률은 낮지만 진정한 승리를 맛볼 가능성도 그만큼 작다.
그리스어로 ‘크리시스Crisis’에서 유래한 ‘위기’라는 단어에는 ‘분별이나 선택의 필요성’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패와 절망과 질병은 ‘더 이상 지속되면 안 된다’는 위기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선택과 더불어 변화를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과 위기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좀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고 명령하는 훌륭한 스승이다. 이것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기는 절대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썩고 악취 나게 방치하는 것과 같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실패나 질병이나 고통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라는 나의 논지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바란다. 누구에게도 일부러 위기를 겪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직업을 잃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심각한 병에 걸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자신을 훈련시키고 더 자라게 하며, 색안경을 벗고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일부 종파에서 주장하는 ‘고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며 성경을 잘못 해석한 명백한 오류이다. 예수가 겪었던 고통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닥쳐온 시련과 고통이 사랑과 진리의 계시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역자 강만원님, 창해>
11월의 부사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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