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내려놓기!
명상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의 고요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의식과 온전한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침묵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두렵고, 외부의 침묵을 통해 다가오는 내면의 정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육신이 피곤할 때 편안한 휴식을 취하듯, 정신도 일상을 지배하는 많은 생각을 내려놓고, 칼날 같은 긴장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명상’이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충전이며, 일상에 빼앗긴 자신을 재발견하는 정신적 행위이다. 명상은 깊은 침묵을 통해 이를 수 있다.
불교의 선사들은 명상을 하는 사람을 산에, 생각을 구름에 비유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산을 뒤덮었던 구름을 몰아내면 이내 다른 구름이 몰려온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대면 푸른 하늘에 군데군데 뭉게구름만 남는다. 그리고 한순간 구름에 가려 형태를 알 수 없었던 산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잡념이 사라지면서 내면의 맑은 의식이 살아나는 것이 바로 명상의 핵심이다. 의식을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마음 내려놓기를 방해하며, 자아의 발견을 가로막던 생각들이 구름처럼 자취를 감춘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육체 훈련과 마찬가지로 명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기적인 훈련이 중요하다.
종교적 명상은 심오한 영적 훈련을 요구하므로 전문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티베트의 불교에서는 내면의 침묵을 명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행을 위한 초보적 사전 준비로 간주한다. 엎드려 절하기, 만트라(주문) 암송, 시각화 훈련 같은 수행은 무지와 속박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영성 훈련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일신교에도 명상 형식이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묵상 기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면의 기도 즉, 침묵의 기도를 ‘하나님과 신자가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매우 간단한 설명이지만 나는 신자와 절대자 사이의 사랑을 이보다 아름답게 수식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무지
“무지無知는 모든 악의 근본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앎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진리로 남는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긍정과 부정을 분별하는 앎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아간다 할 수 있겠는가. 구별 능력은 가장 기본에 속하는 본능이며, 이것은 인간보다 동물이 더 발달했다. 동물은 생존에 위협적인 존재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인간도 이와 같은 본능이 있지만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순화되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 정당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다. 남들보다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가치는, 사실을 판단하고 지식을 활용하며 분석하는 ‘이성’이다. 나는 이것을 동물과 구별해서 ‘이성적 판별력’이라 부른다.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큰 역설은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가정이나 종교 그리고 사회의 일방적인 교육을 통해 얻은 확신에 대한 재고가 바로 그것이다. 무방비로 습득된 지식은 오류와 선입견으로 뒤섞이기 쉽다. 시대와 국가, 문화와 가정은 사실에 대한 제한된 관점으로 왜곡된 지식을 전한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참된 앎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다.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혜의 등불은 분별력과 올바른 선택을 돕는다. 동물적 본능과 타성에 젖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한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사회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근거한 서양의 전통 가치는 줄곧 신이 제시한 율법에 근거했다. 따라서 기존 가치는 근본적인 규범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고 넘볼 수 없는 원칙이 되었다. 서양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 역시 규범적인 율법을 제시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제정했다. 내 말은 이와 같은 율법을 무조건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수단이며, 인간성을 보장하는 보루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동시대 사회는 율법의 권위적 규범에 만족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변별력은 행위와 결과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정당한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 얽힌 물질적, 정서적, 감정적인 요인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태도는 아무 반론 없이 종교적인 믿음을 따르기보다 훨씬 어렵다. 무엇이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잣대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소중한 가치일까? 무지를 벗어나는 출발점이 바로 이런 인간애에 있음을 기억하자.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역자 강만원님, 창해>
녹차꽃과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