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삶
믿음을 가진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 감동을 드리는 것이 모든 신자들의 열망이다. 반면 ‘가짜’ 신자들에게는 그런 간절한 의욕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신앙을 개인적 이익 추구라는 시각에서 본다. 은혜로 말미암아 능력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적 이득, 호사스런 생활 방식, 탐욕 등에 붙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자기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창의력, 재주, 통찰, 자원, 기타 삶의 혜택과 경건한 능력을 끼친다. 아파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줄 아는 그들의 삶은 당연히 모든 면에서 형통하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다행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 모두를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벧후 1:3,CEV).그 능력은 다름 아닌 그분의 엄청난 은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죄사함’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진리의 요구대로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그분께 순종할 마음도 주시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능력도 주시나니”(빌 2:13,NLT)라는 말로 그것을 확증했다.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비범하게 살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다. 우리는 용서만 받은 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 예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제 이 새로운 본성으로 성령과 연합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그분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 열매를 맺으며, 거룩하고 능력 있고 비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놀라운 은혜에 접속하는 길은 믿음이다. 믿음은 은혜를 우리 삶 속으로 날라 주는 송수관과 같아서 우리 안에 죄를 용서받을 믿음밖에 없으면 우리는 다분히 열매 없는 패배의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죄를 용서받고 경건함을 이룰 믿음밖에 없으면 삶은 깨끗해지지만 장애물과 역경이 우리를 가로막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고 경건하게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모든 신령한 복까지 받을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그[그리스도]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라는 명령을 능히 수행할 수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과 해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우리 모두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환히 밝히는 존재들이 될 것이다...(요약)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삶
당신이 비범하게 살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시는 분이 있다. 그분은 여느 좋은 아버지처럼 자녀들의 성취와 행복을 기뻐하는 아버지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다!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 순간은 당신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고로 발휘하는 때다. 그분의 탁월하신 계획 역시 우리가 비범하게 살 때 드러난다. ‘비범함’.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인지 듣기만 해도 평범함과 현실 안주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 솟는다. 이 말은 ‘보통 수준보다 뛰어나다’, ‘평범함을 벗어나다’로 정의된다. 비범함의 반대는 평범함이다! 솔직히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삶의 의미가 여태까지 알고 보아 온 것 이상이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들 안에는 평범함을 초월하려는 타고난 갈망이 있다. 우리는 비범한 삶을 동경한다.
대중의 마음과 관심을 사로잡았던 최고의 영화들에는 항상 비범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슈퍼맨>,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매트릭스>, <엑스맨> 등. 2009년 현재, 역대 최고 블록버스터 영화 25위 중 17편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거의 70퍼센트다. 왜 그럴까? 우리가 본래 ‘비범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계획과 현실은 맞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오랫동안 기독교를 거부하고 피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긋난 기독교인들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의 결점을 지적하기에 빨랐고, 수동적이거나, 시류에 역행하며, 무지했다. 신자가 되면 개성과 창의력, 탁월함과 열정을 잃을 것 같았다.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을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런 시각은 본래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주신 삶과는 반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시키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당신이 누구이고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당신은 그 역할 속에서 비범한 일을 이루도록 지음 받았다. 하지만, 기존의 신자들, 그리고 현 문화는 내게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축소시켰다. 왜 그런 왜곡이 생겨났을까? ‘이 세상의 임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 세상의 신’으로 불리는 사탄이 세상의 시스템을 지배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자기 본연의 존재(놀랍고 특별한 위업을 수행할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요즘의 평판과는 대조적으로 초대교회의 큰 고민 중 하나는 신자가 초인적 영웅이나 신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드라라는 도시에서는 군중이 흥분해서 외쳤다. “신들이 내려오셨다! 이 사람들은 신이다!” 바울은 그들을 확실히 바로잡아 주었다. 기록에 보면 교회를 향한 예루살렘 성 전체의 태도는 이랬다. “백성이 칭송하더라”(행 5:13) 이처럼 교회를 우러르는 마음이 우리 세대에도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사랑하실 수 없고, 거꾸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분은 우리를 덜 사랑하실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는 우리 책임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런즉 우리는 …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 5:9)우리 모두에게는 부모를 기쁘게 하려는 타고난 갈망이 있다. 이것은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가장 근본적인 갈망의 반사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가장 큰 만족은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심을 알 때 온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는 큰 상을 얻는다. 미래의 어느 날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이 땅의 짧은 시간 동안 행한 대로 상을 받게 된다. 죄에 대한 영원한 심판은 예수님의 피로 없어졌지만 신자로서 자신의 수고에 대한 상이나 해는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은 받았으되 심판대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상을 다 잃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잃을까? 성경의 답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십자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결정되지만, 영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신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로 결정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에 목표를 정하셨다.
“우리는 그가[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그분이 미리 계획해 두신 길로] 행하게 하려[그분이 준비해두신 선한 삶을 살게 하려]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이 당신의 길을 미리 계획하셨지만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만드심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자유의지가 개입된다. 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다른 영적 수단을 통해 각자의 사명을 찾아내고, 부지런한 수고를 통해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를 이야기할 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이루기보다는 “주는 대로 받아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이 귀한 성도들이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설계하신 놀라운 사명을 평범한 실존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내 인생을 향한 그분의 뜻을 구하여 찾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고 썼다. 좀 더 거칠게 옮긴 역본도 있다. “미련해지지 말라. 대신 주께서 너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라”(CEV)
당신은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에 있어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가?”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사도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 모두를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벧후 1:3,CEV)
여기 답이 있다.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절대로 슬그머니 달아나지 않게 하라. 이 말과 더불어 다음 말도 잊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과연 당신에게 있으나 그 능력을 활용하여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당신 몫이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에게 능력을 똑같이 나눠 주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각자 자신이 받은 바에 충실하기 원하신다. 달란트 비유에 그것이 확실히 나온다. 한 종은 다섯 달란트, 한 종은 두 달란트, 한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각각 열 달란트, 네 달란트를 남긴 두 종에게 주인은 똑같이 칭찬하신다. 두 종에 대한 주인의 즐거움과 기쁨은 똑같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맡은 일을 수행할 은사와 능력과 재능을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것에 관해서는 내 몫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받은 것으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심판이 있다.
이와 비슷하지만 강조점이 아주 다른 비유가 있다. 므나의 비유이다. 열 명의 종은 모두 똑같이 한 므나씩을 받았다. 달란트 비유와 달리, 이 비유의 므나는 다른 수준의 사명이나 특별한 은사를 가리키지 않는다. 므나는 은혜, 기본적 믿음, 하나님의 사랑 등 모든 신자에게 똑같이 주시는 선물들을 가리킨다. 삶의 일반 분야에서는 우리 모두 받은 것이 똑같다. 므나 비유 속의 종들은 므나를 열 배로 늘린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다섯 배를 늘린 종은 다섯 고을 권세를 받았다. 므나를 묻어 둔 종은 호된 책망을 받았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똑같이 주신 자원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은혜 안에 답이 있다
은혜 안에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있다
성경은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 당신과 나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능히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적적으로 주셨다는 그 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답은 “그분의 은혜”다. 먼저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선행, 봉사, 주일 성수 기타 내 쪽의 어떤 선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순간부터 왕 앞에 설 때까지는 이 은혜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는 삶을 위한 은혜도 똑같이 하나님의 호의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힘으로는 얻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한, 처음 구원받을 때만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는 것도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한 뒤로 자기가 엉망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을 거두셨을 거라는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분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신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다 갖다 쓴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듣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과 더불어 중요한 경고가 있다. 이 용서를 악용하여 뻔뻔하게 죄짓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뻔뻔스럽게 죄짓는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는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의 마음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은혜로 구원이 유지된다. 그것 말고도 훨씬 많다! 은혜는 죄 사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기도 하다.
“[예수]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여기보면 “행하는 게 좋다”고 하지 않고, “행할지니라”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해야 한다! 이것은 제안이나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땅히 기대하시는 바다. 다행히 하나님은 명령을 주실 때 반드시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은혜의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행동할 수 있다. 은혜의 참 뜻을 총의 비유로 제시해 볼까 한다.
시간을 몇 백 년 거슬러 올라가 1717년으로 가 보자. 그때는 총기가 처음 발명되기 1년 전이다. 어떤 사람이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바다 한복판의 무인도에 혼자 갇혔다. 그를 섬사람이라고 하자. 섬의 해안은 늘 짙은 안개로 가려져 있어 배가 근처로 지나간다 해도 배에서는 섬이 보이지 않는다. 섬에는 식수도 많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도 있고, 야자수에 높이 매달린 코코넛도 곳곳에 있다. 섬사람은 몹시 배가 고파 동물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쫓아다녀 보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코코넛을 따러 야자수에 오르려 해보지만 얻은 것은 다리와 팔의 상처뿐이다. 코코넛은 그림의 떡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나운 야생 곰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늘 긴장해야 한다. 곰이 올라오기 힘든 집채만 한 큰 바위를 찾아내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선 사다리까지 끌어올려 버렸다. 이제 밤낮없이 바위에 갇힌 것이다. 섬사람은 배만 고픈 게 아니라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누워 자기가 불편해 수면 부족으로 피곤하기까지 하다. 이쯤 되자 이 남자의 좌절과 탈진은 극에 달한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21세기 말의 사람이다. 과거를 돌아보다 섬사람의 곤경을 알게 된 그는 사랑과 염려로 구조에 필요한 지식과 장비를 모아 섬사람을 구하러 왔다. 그의 이름은 메신저다. 메신저는 정확히 61일 후에 섬 근처로 배 한 척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해 준다. 또 다른 배가 지나가려면 수십 년이 더 지나야 하기에 배가 지나갈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고, 해시계까지 만들어 준다. 그리고 총을 주며 방아쇠를 당기는 법을 가르쳐 준다. 총을 처음 본 섬사람은 ‘빵’하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란다. 메신저는 이 총소리가 바다 위 멀리까지 퍼지므로 배의 나팔소리가 들리면 총을 쏘라고 가르쳐 준다. 메신저는 총이 곰이나 사슴, 멧돼지 등을 죽일 수 있음도 가르쳐 준다. 나무의 코코넛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알려 준다. 그리고 여러 번 연습시켜 섬사람의 조준 실력이 좋아진다. 그는 섬사람을 바닷가에 있는 모래가 깔린 동굴로 데려가 사슴가죽으로 입구를 막고, 곰 두어 마리를 잡아 요와 이불도 만들어 편안히 자라고 한다. 수 백발의 총알이 든 총 상자도 준다. “61일 동안 쓰기에는 아주 넉넉할 것입니다.”
섬사람은 이제 감사에 겨워 어쩔 줄 모른다. “메신저님, 총을 받았으니 저는 무엇을 드려야 될까요?”
메신저는 웃으며 대답한다. “이 총은 당신에게 주라고 내 주인이 주셨고, 그분은 타임머신의 주인이고, 아주 큰 부자랍니다. 난 선물을 전달한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가 총을 받자 메신저는 사라져 버린다. 총은 그의 목숨을 건져 줄 뿐 아니라 남은 두 달을 편안하게 살게 해줄 것이다.
그는 구원받았다! 눈치챘겠지만 메신저는 구원의 길을 전해주는 주의 종을, 메신저의 주인은 주님을 가리킨다. 총은 하나님의 은혜, 과분한 선물을 가리킨다. 섬사람이 구원받은 것은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메신저의 주인이 보낸 선물 때문이다. 61일의 기간은 이 땅에서 섬사람에게 남은 수명을 가리킨다. 배는 그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번에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 하나만 바꾸어 보자. 그리고 그 차이를 살펴보자.
메신저는 총을 쏘아 선장에게 알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총의 다른 기능은 말해 주지 않는다. 이제 섬사람은 살아날 길은 찾았지만 남은 61일 동안 섬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는 없다. 메신저는 사라지고, 섬사람은 섬에서 빠져나갈 길이 생겨 기쁘지만, 남은 기간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겁이 난다. 다시 좌절이 밀려든다. 그는 자기 손안에 있는 물건의 잠재력을 모른다.
그렇다면 요지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은혜가 선물임을 배웠고, 그 은혜로 천국의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간과해 온 것이 있다. 이 은혜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느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배가 도착하기 전까지 총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전하지 않았다. 은혜의 이 부분을 모르다 보니 많은 교인들이 구원받기 전과 별 다르지 않게 살고 있으며, 삶의 많은 부분에서 패배하고 있다.
존더반 「성경 용어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무력함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 은혜의 특징이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우리 힘으로는 살 수 없었지만 이제 그것이 가능해졌다. 은혜가 그 능력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할 능력을 받았다. 은혜는 우리에게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을 준다. 비범하게 살아갈 능력을 준다! 그분이 뜻하신 구원은 오는 세상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는 완성품이다.
은혜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은혜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천국의 약속뿐 아니라 그분의 능력도 포함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 내 삶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죄로 힘들어 했고, 열등감 및 초라한 자아상과 싸웠으며, 내 삶에 성령의 열매가 왜 이렇게 적은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내게 이미 그분의 성품이 있음을 깨달은 후부터는 삶이 안정되면서 축복이 흘러 나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첫 노트북 컴퓨터의 경험이 내 변화에 대한 좋은 예가 되겠다. 내가 컴퓨터를 켜고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었다. 얼마 후 어떤 컴퓨터 전문가가 내 옆에 앉아 여러 가지 기능을 보여 주었는데, 나는 놀라 그를 붙잡고 물었다. “그것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본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걸까? 그 사람은 내 컴퓨터의 여러 기능을 그냥 알려 주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있던 기능들인데 내 무지 때문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사 5:13)라고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생에 허락하신 은혜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이전의 나처럼 포로로 잡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다. 무인도에 있는 그 섬사람과 다를 바 없다. 남은 두 달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도 그는 총의 주요 기능 하나를 몰랐다.
“죄가 너희를 주장[지배]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죄가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들어섰고 예수님 자신의 본성을 지녔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우리 속사람은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으로 거듭났다. 우리는 죄에 굴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안에서 행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본성 가운데 행하지 않고 계속 죄에게 굴복한다면 우리는 다시 노예가 된다.
이쯤에서 당신은 두려워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 모른다. ‘아, 난 그렇게 살았는데! 반복해서 죄를 지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6장에서 말한 기쁜 소식을 떠올려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그냥 건성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음을 깊이 뉘우치며 이제 이 부분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죄의 종이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한 일에] 긍휼하심[자비]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는 하나님 나라를 진척시킨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진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고, 그분이 지상에서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
그보다 큰일이라니? 예수님은 “나를 믿는 너희 사도들은”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셨다. 이 놀라운 말씀은 그분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 그리고 주의 말씀은 무오하다! 그분과 연합하여 한식구가 되고 그분의 성품과 성령을 받은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기적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일도 할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은혜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란 거듭나서 성령으로 충만해질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시작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전까지도 물리적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을 망각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다.
“[그분이 재림하여 물리적인 나라를 세우실]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내면의 하나님나라]을 받고”(행1:7-8)
일단 성령께서 오셔서 인간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 나라와 그 모든 능력이 믿는 자 안에 있게 된다! 이제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 나라를 진척시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보다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셨다. 그런 주님이 이렇게 도전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이 땅에 천국을 가져와야 한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었듯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하나를 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귀한 책임이며 또한 기회인가!
일단 하나님 나라가 내면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 나라를 진척시킬 수 있다. 사업가, 전업주부, 의사, 교사, 정비공, 학생, 정치가, 부동산 중개사 등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우리 모두에게 위임하신다. 은혜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아갈 능력과 하나님 나라를 진척시킬 능력을 준다.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을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비범하게 살게 해준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영광이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분께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믿음으로 은혜에 접속하라
은혜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 얻는다
은혜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노력이나 공로로 얻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혜가 어디서 단절되었는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은혜의 증거가 왜 이리 적은 것일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분명히 답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1-2)
이 구절의 핵심 단어는 들어감이다. 그리스어 단어로는 프로사고게(prosagoge)인데, “접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은 “입장”이다. 이 단어의 다양한 쓰임새를 생각해 보라. 컴퓨터에서 정보를 얻으려 하는데 암호를 몰라 접근이 거부된다.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데 신원 조회를 거치지 않아 입장이 거부된다. 이 단어의 뜻을 보여주는 예가 또 있다.
당신 집 우물이 말라 식수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자. 길 저쪽에 있는 시의 대형 물탱크에 수백만 갤런의 식수가 들어 있다. 당신은 시민이므로 물탱크의 물을 마음껏 쓸 권리가 있지만 접근로가 없다. 물탱크의 주 송수관이 당신 집 옆으로 지나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에 가서 송수관 물을 집 안으로 끌어들일 허가를 받고, 마당을 파서 PVC 파이프를 설치해 송수관을 집으로 연결시킨다. 이제 물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접근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은 은혜의 송수관이다. 바울에 말에 물 예화에 쓰인 표현을 대입해 보자. “믿음의 송수관을 통해 우리가 필요한 모든 은혜의 물에 접근로를 얻었으며.” 우리가 은혜에 참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은 믿음이다. 믿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여태까지 이 책에서 신중히 살펴본 그 은혜에 들어갈 수 없다!
믿음의 파이프를 연결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다. 베드로의 마지막 서신을 보라.
“그의 신기한 능력[은혜]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볼 수 있다. 첫째, 생명(비범한 삶)에 속한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이라는 보배로운 약속 안에 있다. 둘째,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은혜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그러니까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의 말씀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된다. 모든 은혜는 그분의 말씀 안에 들어 있다. 은혜라는 선물을 유효하게 하려면, 즉 그 선물에 접속되려면,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믿음에 수반되는 말과 행동: 믿음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대로 하실 분임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말의 시인과 순종의 행위가 따라온다. 수반되는 말과 행동은 우리가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을 통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말한]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은 그 믿는 바대로 말한다. 이것이 믿음의 언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고 하셨다. 사람들은 평소에 믿는 대로 말을 하게 된다. 믿음이 먼저이고 말은 그 증거로 따라오는 것이다.
믿음에 수반되는 행동에 관해서는 사도 야고보가 분명히 말한다. “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보여 줄 수 없듯이, 여러분도 믿음 없는 행함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약 2:18,메시지). 영혼 없이는 인간의 몸이 죽은 것처럼 삶에 거룩함과 의로움의 열매가 없으면 믿음도 죽었거나 진짜가 아니다.
겸손히 믿을 때 은혜에 접속된다: 한 번 더 송수관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궁극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믿음의 송수관이 아니라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물이다. 최종 목표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 즉 은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에서 건짐받았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의 복은 내 힘으로 계명을 다 지켜야만 받을 수 있다고 잘못 믿고 있다. 물론 이런 입장을 취하면 다시 인간이 조종석에 앉게 된다. 이것은 율법주의적인 사고이며 은혜의 능력과 참 믿음을 가로막는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아브라함의 예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변 환경에 떠밀려 불가능한 것을 근거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근거로 살기로 결단했다.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고,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도 내 힘으로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없다. 유일한 해답은 그냥 겸손하게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월적 능력에 접속된다.
은혜의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다! 하지만 아직 이 땅에 물리적으로 임한 것은 아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은 장래에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것이며, 사탄의 영향력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백성인 우리 내면에 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그분의 통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땅[이] … 여호와의 것”(시 24:1)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인간에게 위임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하늘의 하늘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땅의 책임은 우리에게 맡기셨도다”(시 115:16, 메시지)라고 기록했다. 그 권세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악한 자의 수하에 남는다.
여기 엄숙한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가실 때 그분은 목숨을 위협하는 풍랑을 맞닥뜨려야 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일행이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초자연적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한 사람 예수께서 용감히 풍랑에 맞서 지배권을 행사하셔야 했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이제 주기도문을 이렇게 읽어도 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엄위하신 통치가 임하시오며 주권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입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세워지게 하소서.” 그야말로 놀라운 신비다!
우리는 은사와 소명이 다 다르기에 모두 목사나 교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처한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의 사업은 남들이 고전할 때도 번창하며 우리의 지역사회는 더 안전하고 즐겁고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의 음악은 세상 음악인들이 흉내 내고 싶을 정도로 참신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비범한 사람들이 손을 대면 창의력, 생산성, 안정성, 민감성, 재능이 넘쳐야 한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이 땅에도 나타나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비범한 사람은 환난까지도 오히려 기회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초대교회를 향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했다. 다시 말해서,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데는(비범하게 사는 데는) 반드시 방해가 따른다. 하지만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자의 눈에는 모든 방해가 기회가 된다.
마지막으로 남길 주의사항, 권고의 말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참 정체도 알았고 내 안에 거하는 지극히 크신 능력도 발견했으나 우리의 동기가 긍휼과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신에게뿐 아니라 자기 영향권 내의 사람들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긍휼이다. 긍휼은 그분의 믿음과 은혜의 배후 원동력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취지상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평범한 삶이나 비범한 삶이나 사랑 없이는 효력이 없으되 지극히 유익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니라
이 책에 나온 모든 계시를 충분히 깨닫고 비범하게 살려고 하되 사랑 없이 하려 한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긍휼과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능력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큰 효력이 있다. 당신이 우리 세대의 비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빈다! 일어나 빛을 발하며 그분의 엄위하신 통치와 영광스런 다스림을 드러낼 것을 믿는다.
<“존 비비어의 은혜”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존 비비어 지음, 역자 윤종석님, 두란노>
▣ 저자 존 비비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강연을 통해 크리스천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탁월한 강사이다. 매주 216개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메신저>의 공동 진행자이다. 또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부인 리자와 함께 1990년 ‘메신저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미국, 호주, 영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이 단체는 다양한 사역을 하며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전심을 다하고 있다. 현재 네 아들과 함께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는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의 책들은 48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 수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순종』, 『구원』, 『존중』, 『열정』, 『순종훈련』(이상 두란노), 『관계』(NCD)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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