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앞에서 냉정해지기
재난 앞에 서다: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각종 재난이 몰고 온 고통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재난 속에서 비통에 잠긴 사람들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나는 냉정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 냉정을 잃어버리는 순간, 나는 내 직업에 책임을 다할 수 없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지금 이곳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문제에 부딪혔는지 알려야만 하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정보 파악을 토대로 상부의 정책결정자들이 정확한 대응방안을 마련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만 재난이 발생했을 때, 언론 매체가 많은 문제점을 발견해 구호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쓰촨 성 원촨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는 청두 시를 출발해 1천여 킬로미터를 돌아 그곳에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류(泥流, 화산 폭발 때 산허리를 따라 급격하게 흐르는 진흙더미)로 인해 이미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가 막힌 상태였다. 인부들이 도로를 원상태로 복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남성이 내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기자요? 그럼 지금 이곳에 소독약이 시급하다고 외부에 좀 알려주시오. 전염병이 유행하지 않도록 하려면 시체들을 당장 처리해야 해요.” 나는 즉시 휴대하고 있던 해사위성(무선통신장치)을 이용해 이 소식을 홍콩 본사에 전송했다. 재난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작지만 유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밤새 달려오느라 쌓인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재난 지역 주민들은 오랜 기다림과 기대감 때문인지 그들의 원망을 기자들에게 쏟아낼 때가 많다. 리셴 현을 지날 때였다. 오는 동안 촬영했던 뉴스 화면을 송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주민들이 모여들어 우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남자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고함을 쳤다. “당신네 기자들은 듣기 좋은 소식만 내보내려고 하지. 산 위에 아직 구조되지 못한 주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가서 보도하지 않는 거요?”
주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동료 기자가 일어나 대꾸하려고 했으나 내가 말렸다. 여진의 위험이 도사리는 길을 천 리가 마다하고 달려왔는데 이런 대접을 받은 동료 기자의 억울함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우리 직업은 재난 지역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분개하는 주민의 심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이 같은 대재난 앞에서 모든 사람을 신속하게 구조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그는 아직 가족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절박함에 그 분노가 우리에게 향했던 것이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일본에서 TV로 재난 현장을 보면서 어째서 저렇게 많은 학교들이 무너져버린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의문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엔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지진이 발생하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조 작업이지 원인과 책임규명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언론 매체는 재난 상황과 함께 대중에게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 또 재난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구조 작업 가운데 미흡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재난의 인위적 요인을 밝혀내 또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언론의 책임이다.
재난 지역에서 원자바오 총리를 취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나는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졌던 의문이 터무니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해도 정부에게 해명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향후 어떠한 방식으로 보완정책을 추진해 다시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원자바오 총리는 내 질문에 답변하면서 특별히 기자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기자는 감정적으로 변한 주민들을 이해하고 동정해야 하며 정부에게도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때 원자바오 총리의 매서운 눈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갑자기 선배 기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진을 보도할 때는 반드시 관대해져야 한다.
나는 지금도 ‘관대’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 중에 있다. 그 속에 담긴 뜻은 ‘정부를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것인가? 언론 매체의 역할은 성가시게 구는 것이 아니다. 언론 매체가 ‘부정적인 보도’를 한다고 하면 ‘청개구리의 태도나 성가시게 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더 ‘관대’해지기가 쉽지 않다. 내 생각에 언론의 ‘관대’함은 왜곡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일반 민중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게 할 수 있고 내재된 문제를 찾아내 개선시킬 수 있다면 이 언론 매체는 진정 ‘관대’한 보도를 한 것이다. 나는 ‘부정적 보도’, ‘긍정적 보도’라는 구분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껴왔다. 언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보도’와 ‘선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구조, 구호 활동을 하면서 부족했던 부분만 생각하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아예 구호의 손길조차 닿지 못하는 곳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재난 지역에서 민간자선단체가 호소하는 이재민 구호 내용, 그리고 언론 매체의 관련 보도기사를 살펴보면 틀림없이 소홀하게 다뤘던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모든 지역, 모든 이재민을 다 보살필 수 없을지 모른다. 이 때문에 여론이 잠잠할 리 없고, 만약 이런 여론에 즉각적인 대응이 이뤄진다면 오히려 소홀하게 다뤘던 부분 하나하나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 매체의 ‘감독 기능’을 부정할 때, ‘부정적 보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언론에 반감이 생길 수 있다. 어쩌면 이는 ‘물 반 컵’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라고 하지만 비판적인 사람들은 ‘반밖에 없다’고 한다. 언론은 대중에게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라고 알려줄 책임이 있다. 즉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물론 아직 ‘반이 부족하다’라는 사실도 알려줘야 한다. 즉 정부가 어떤 부분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상기시켜야 한다. 정부의 책임은 빨리 남은 반 컵의 물을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컵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물은 반 컵밖에 채우지 못한다.
이 역시 이상할 것이 없다. 컵이 커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요구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요구사항은 정부의 노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허심탄회하게 여론을 수용하고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언론의 보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사라질 것이다. 뉴스는 보도기사일 뿐이다. 보도 원칙에 따르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편견, 생각에 좌표를 찍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뤼치우루웨이 지음, 역자 이화진님, 시그마북스 >
거가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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