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1849년 12월 22일 오전 9시, 페테르부르그의 세묘노프 연병장에는 총살형을 선고받은 21명의 사형수들이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 서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든 국가사범들이었다.
사형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첫째 조가 처형대 위에 세워졌다. 가장 죄가 무거운 페트라쉐프스키와 소위보 몸벨리, 그리고 비평가이자 작가인 그리고리예프가 눈이 가리워진 채 말뚝에 묶였다. 그들 앞에 선 사수들은 일제히 세 사람의 가슴에 총을 겨눈 채 구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말을 탄 한 관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크게 외쳤다.
“사형을 중지하시오! 하해와 같은 황제의 명으로 사형을 중단하시오.” 이 잔인한 처형극은 다시는 모반을 꾀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꾸며진 각본이었다. 사형수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사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형수에 포함돼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일부는 정신질환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나 불치의 병에 걸렸고, 심한 동상으로 손발을 절단하기도 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혹한 속에서 자신이 추위를 느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의 미묘한 감정만은 그의 글 속에서 자주 언급했다. 그해 12월의 어느 아침의 극적인 체험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어느 작가들보다 더 날카롭게 인간의 심연을 파헤칠 수 있었으며, 인류의 과오와 고통을 깊게 통찰할 수 있었다.
번민과 고통으로 승화된 작가의 생애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의사인 아버지가 일하는 모스크바의 자선병원 관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는 상당히 난폭하고 질투심이 강했으며, 자식들을 사랑보다는 엄한 벌로 대했다. 반면에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상냥하고 온순하며, 신앙심이 깊었다. 그녀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으며, 아이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았고,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색하고 의처증이 심한 남편의 학대에 시달린 탓에 1837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에 대해 항상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을 갖고 있었으며, 어머니가 들려준 성경 이야기는 훗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줬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보통 사람이 경험하기 힘든 운명적인 사건들을 겪었다. 앞에서 언급한 사형 직전의 경험 못지 않은 특이한 사건은 1839년 다로보예의 영지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떤 이는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노가 살해한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단순한 심장발작이었다고 전한다.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은 작가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으며, 그는 평생동안 아버지의 횡사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작가의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 사건은 그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843년 가까스로 공병학교를 졸업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걷잡을 수 없는 문학에의 열망으로 다니던 직장을 곧 퇴직하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성공에 대한 열의와 노력의 결과인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5년 5월에 완성)은 벨린스키를 비롯한 당대의 최고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작가로서의 행운을 가져다 줬다. 처녀작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현대인의 병적인 심리상태를 다룬 『분신』,「프로하르친씨」,『여주인』,「폴준코프」,『네토츠카 네즈바노바』등의 작품들을 내놨으나 더 이상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조잡한 형식과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 그리고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기괴한 요소 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됐으며, 그로 인해 벨린스키, 네크라소프, 투르게네프 등 당대의 문인들과 결별하게 됐다.
184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쉐프스키 비밀 모임에 연루돼 사형 선고와 감형을 받은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는데, 그 후로 간헐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더니 평생 간질병에 시달리게 됐다. 시베리아 유형은 작가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동시에 대단히 소중한 것을 줬다. 감옥에 있었던 4년 동안 그는 온갖 부류의 죄수들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냈으나, 밑바닥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러시아 민중에 대한 면밀한 성찰의 기회를 가졌다. 그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더욱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 이 값진 체험은 『죽음의 집의 기록』과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유형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제2창작기
1859년 유형지에서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중단됐던 문학활동을 재개하면서 제2의 창작기를 맞는다. 수용소 생활 중에 경험했던 소재들을 작품화했으며, 형 미하일과 잡지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또한 유럽여행을 통해 맹목적인 이성과 돈에 의해 가치가 좌우되는 서유럽의 허구적 현실을 목격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병든 아내를 외면하고 정부와 사랑에 빠졌으며, 도박으로 수중의 돈을 다 날린 채 무일푼이 되기도 했다.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1864년에 발표했는데, 이 『수기』가 씌어진 시기는 러시아 내외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시기였지만, 도스토예프스키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는 농노제 폐지와 토지 개혁, 서구 사상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인한 진보와 보수세력의 갈등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절친한 후견인이었던 형 미하일과 폐결핵을 앓고 있던 아내의 죽음, 잡지의 강제 폐간과 형이 남긴 채무, 형수와 조카들의 부양 등 고통스럽고 절박한 상황을 맞닥뜨린다. 다급해진 그는 선불을 조건으로 출판업자와 가혹한 조건의 계약을 맺는데, 만일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향후 9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저작권을 출판사에 내줘야 했다. 그는 작품을 빨리 써내기 위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를 소개받고 그녀의 도움으로 『도박자』와 『죄와 벌』을 연재할 수 있었다. 마침내 1867년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는데, 이때 도스토예프스키의 나이가 46세, 안나는 21세의 젊은 처녀였다. 나이 차에도 그들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원만했으며,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안나의 배려와 끝없는 헌신은 작가의 작품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결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와 함께 4년 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에 머물면서 『백치』, 『영원한 남편』, 『악령』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천성인 도박벽과 낭비벽으로 여러 차례 곤경에 빠졌는데, 매번 안나의 이해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마침내 『악령』의 성공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겨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됐을 뿐아니라 그때까지 시달려왔던 재정적 어려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집필을 하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전력으로 작품활동에 매달리는데, 개인 잡지격인 『작가일기』를 펴내고,『미성년』을 완성했으며, 마지막 대작인『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발표했다. 1881년 1월 28일 그는 아내가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성경 구절을 들으며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것은 마태복음서 3장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11월 하순의 어느 날 바르샤바발 페테르부르그행 열차의 3등 객실에서 므이쉬킨 공작과 로고진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므이쉬킨은 로고진으로부터 나스타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불행한 과거를 가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해 예판친 장군을 찾아간 공작은 우연한 기회에 나스타샤의 사진을 보고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키워갔다.
나스타샤 필립포브나는 뛰어난 미색에 오만하고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귀족 신분이었으나 일찍 양친을 여읜 그녀는 이웃의 돈 많은 지주인 토츠키에게 농락당한 뒤 9년 동안 그의 정부 노릇을 했는데, 토츠키는 벼락부자가 된 예판친 장군의 큰 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기 위해 나스타샤를 예판친의 비서인 가냐와 결혼시키려고 궁리 중이었다. 이런 이기적 계획을 눈치 챈 나스타샤는 격심한 분노에 몸을 떨며, 모든 남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을 내놓아 경매에 부쳤다.
나스타샤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로고진은 10만 루블의 금액을 제시하고, 그녀의 집에서 파티가 열리던 날 10만 루블을 들고 나타난다. 마침내 그녀는 로고진의 청혼을 받아들였는데, 그 순간 어쩔 줄 몰라하던 므이쉬킨이 나서서 그녀에게 또 청혼을 하는데....(내용 요약)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므이쉬킨 간질병을 앓고있는 26세의 공작.‘백치’라 불리는 순진무구한 영혼의
소유자로 나스타샤와 아글라야 사이에서 방황한다.
나스타샤 불행한 과거를 가진 토츠키의 정부. 므이쉬킨과 로고진 사이에서 갈등한다.
로고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27세의 청년. 나스타샤를 지독히 사랑한다.
예판친 50세 가량의 퇴역 장군. 아글라야의 아버지.
아글라야 예판친 장군의 셋째 딸. 므이쉬킨을 사이에 두고 나스타샤와 연적관계에 놓인다
토츠키 나스타샤의 보호자이자 그녀의 정부.
가냐 예판친 장군의 비서. 속물이며 야심가인 그는 돈 때문에 나스타샤와 결혼할
계획을 세운다.
레베제프 가난한 허풍쟁이 관리. 속물적 광대인 그는 사람들 앞에서 종종 「묵시록」을 해 석한다.
이폴리트 17세 가량의 젊은 청년. 무신론과 진보사상의 추종자.
콜랴 가냐의 남동생.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로 므이쉬킨을 잘 따른다.
운명적 만남
11월의 끝 무렵, 유난히 포근한 어느날 아침 9시경, 바르샤바를 출발한 페테르부르그 행 열차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열차의 3등 객실 창문가에는 두 승객이 날이 밝을 무렵부터 일어나 마주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26세 가량의 공작 므이쉬킨으로, 움푹 들어간 볼에 하얀색 짧은 턱수염을 한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간질병과 정신 질환의 치료를 위해 오랫동안 스위스에 머물다 러시아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오랜 병으로 인해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외국에서의 고독한 생활 탓에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교제라든가, 분주한 도시 생활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유독 ‘한 곳을 집중하는, 생각에 잠긴 눈’을 갖고 있었다.
그와 마주앉은 다른 한사람 역시 27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그는 한달 전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사망한 상인 세묜 로고진의 장남이었다. 무분별하고 정열적인 성격의 그는 어느 날 나타난 나스타샤 필립포브나에게 매료돼 아버지의 지불 대금을 털어 그녀를 위한 선물을 샀다. 그후 집을 뛰쳐나와 숙모의 집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막대한 유산의 상속인이 되어 페테르부르그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로고진은 공작에게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면 함께 나스타샤를 찾아가자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한 므이쉬킨은 우선 예판친 장군 집으로 향했다. 장군 부인의 먼 친척인 그는 뛰어난 글씨체로 예판친의 비서가 됐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장군과 그의 비서인 가냐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가냐가 나스타샤와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스타샤는 뛰어난 미색에 오만하고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다. 귀족 신분이었으나 일찍 양친을 여읜 그녀는 이웃의 돈 많은 지주인 토츠키에게 농락 당한 뒤 9년 동안 그의 정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츠키는 벼락부자가 된 예판친 장군의 장녀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기 위해 나스타샤를 가냐와 결혼시키려 한다. 이런 생각에는 자신의 여자였던 그녀를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두려는 호색가다운 면모가 드러나 있으며, 나이 든 예판친 장군조차도 그녀를 탐내고 있다.
예판친 장군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므이쉬킨은 장군 부인을 비롯한 세 딸들에게 ‘스위스’와 ‘사형’ 그리고 ‘시골 처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한편 장군의 셋째 딸 아글라야를 사랑하면서도 토츠키로부터 나스타샤와의 결혼 조건으로 7만 5천 루블을 받기로 돼 있는 가냐는 공작을 통해 아글라야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전달하는데, 가냐의 헛된 욕망을 됨됨이를 잘 아는 그녀는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았다.
정말 이런 자와 결혼할 작정이오?
가냐와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서 묵기로 한 므이쉬킨은 가냐의 아버지 퇴역장군 이볼긴이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판친 장군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 가족들 내에서도 나스타샤에 대한 문제로 언쟁이 오갔다. 그런 말이 오가고 있는 자리에 갑자기 나스타샤가 나타나자 가냐의 가족들은 모두 당황한다. 사진으로 이미 그녀를 본 공작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자리를 얼버무리려는 허풍쟁이 이볼긴 장군은 신문에서 읽은 ‘발바리 사건’을 마치 자신이 실제 경험한 것인 양 떠벌인다.
바로 그때 요란스러운 인기척을 내며 로고진이 그의 시종인 레베제프와 행색이 추한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로고진 일동의 무례한 출현에 가냐를 비롯한 그의 가족은 몹시 흥분했고, 나스타샤는 불안한 호기심으로 로고진을 바라본다. 석 달 전 카드놀이에게 가냐의 속임수로 수중의 돈을 몽땅 잃어버린 적이 있는 로고진은 가냐에게 ‘돈에 환장한 인간’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나스타샤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래, 당신은 정말 이런 자와 결혼할 작정이오?” 거만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나스타샤는 여태까지의 태도를 바꾸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을 생각을 하셨죠?”
가냐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나스타샤의 대답에 로고진은 가냐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조건으로 10만 루블을 제안하고, 실내는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므이쉬킨은 그녀를 향해 나무라는 투로 소리쳤다. “그래, 당신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인가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갑작스런 공작의 반문에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던 나스타샤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저녁 공작은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파티가 열리는 나스타샤의 집을 찾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출현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반가워했고, 나스타샤는 처음에는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만족스런 얼굴로 그를 대했다.
그 자리에는 가냐를 비롯해 토츠키와 예판친 장군, 레베제프, 장안의 백작부인과 영애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프티죠 놀이’가 시작됐고, 예판친과 토츠키 이야기로 한창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나스타샤는 ‘가냐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므이쉬킨이 머뭇거리며 이를 말리자 그녀는 곧 결정을 바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파티장은 다시 술렁거렸다. 사방에서 그녀를 부르며 뜻밖의 결정에 의아해하는 말들이 오갈 때 갑자기 로고진이 등장했다.
로고진의 청혼과 가냐의 상처
로고진은 낮에 가냐의 집에서 나스타샤에게 약속한 대로 10만 루블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마침내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광경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므이쉬킨이 나서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며, 자신이 막대한 유산을 상속하게 됐다는 편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공작이 진정 자신을 이해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안 나스타샤는 그의 순수한 마음을 접은 채 로고진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나스타샤는 로고진이 건넨 10만 루블을 불 속에 던져 가냐가 그것을 끄집어 낼 경우 그 돈 모두를 그에게 주겠다고 한다. 사람들은 술렁거리고 나스타샤는 유유히 돈을 불 속에 던졌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가냐는 모욕감과 당황함으로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만다. 나스타샤는 그런 가냐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타다 남은 돈을 꺼내 가냐의 몫으로 남겼다. 마침내 그녀는 로고진의 트로이카를 타고 예카체린고르로 향했고, 반쯤 넋을 잃은 므이쉬킨은 허겁지겁 달려나와 그들의 마차를 뒤쫓아갔다.
이틀 뒤 므이쉬킨은 유산 상속 문제로 급히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가 약 6개월 가량 페테르부르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괴이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스타샤와 로고진이 모스크바에 있다는 것이 그 소문이었다. 나스타샤가 로고진과의 결혼을 목전에 두고 번번이 사라졌는데, 모스크바에서 로고진에게 붙잡힌 그녀는 다시 결혼을 약속한 뒤 얼마전 세 번째로 행방을 감췄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예판친 장군 가족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토츠키와 큰 딸 알렉산드라와의 결혼 계획은 깨지고 말았다.
사실 로고진에게 청혼을 받은 나스타샤를 따라간 므이쉬킨은 다음 날 새벽 5시경에 집으로 돌아왔었다. 모욕감으로 기절했던 가냐는 그를 기다려 나스타샤가 남긴 돈 뭉치를 그녀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다. 그 뒤 가냐는 아버지 문제로 시달리며 동생 콜랴와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한편 콜랴는 므이쉬킨 공작이 남긴 편지를 장군의 셋째 딸 아글라야에게 전하는데, 거기엔 그녀에 대한 공작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세 번 도망치다
6월 초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므이쉬킨은 레베제프의 집으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공작은 그로부터 로고진과 나스타샤에 대한 사정을 적은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레베제프는 나스타샤가 로고진과의 결혼식 전날 도망치길 벌써 세 번째인데, 레베제프에게 도움을 요청해 자신의 처제 집에 그녀를 숨겨줬다는 것이다.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므이쉬킨은 레베제프의 별장이 있는 파블로프스크에서 묵기로 했다.
레베제프의 집을 나온 공작은 어디로 갈지 망설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로고진의 집에 도착했다. 로고진은 그가 올 것을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로고진은 얼빠진 사람 마냥 나스타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오델로처럼 거칠고 난폭하고 이기적인 성격의 로고진은 나스타샤에 대해서만은 한결같은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므이쉬킨은 그와의 대화에서 나스타샤에 대한 사랑이 단순한 애정의 수준을 넘어 일종의 광적인 숭배 같은 것이며, 마치 열등아가 예쁜 인형을 수중에 넣듯이(혹은 사냥꾼이 목표물을 추적하듯이) 그렇게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스타샤는 로고진과의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로고진은 막을 수 없는 나스타샤의 변덕스러움이 그녀가 므이쉬킨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로고진의 지적에 흥분한 공작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원예용 칼을 집어든다. 로고진은 얼른 그 칼을 뺏으며 종이 칼이라 둘러댔다. 므이쉬킨을 배웅하며 문득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던진 로고진은 십자가를 교환하고 의형제 맺으며, 나스타샤를 양보할 의사가 있다고 말한다.
로고진의 집을 나온 므이쉬킨은 거리를 배회하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줄곧 '돌발적인 행동'이 맴돌았다. 그는 파블로프스크행 기차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충동적으로 나스타샤가 묵고 있는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파블로프스크로 떠나고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그의 뒤를 쫓고 있는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다. 로고진의 눈이 불현듯 떠올랐는데, 그 눈길은 이미 호텔까지 따라와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선 므이쉬킨 앞에 로고진이 나타났다. 그것은 냉소로 일그러진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칼날 같은 것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손을 드는 순간 공작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계속 조짐을 보이던 간질병 발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뒤로 넘어지며 머리를 계단에 부딪치고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놀란 로고진은 허둥지둥 그 자리를 달아났고, 마침 호텔 식당에서 공작을 기다리던 콜랴가 나타나 그를 방으로 옮겼다.
알 수 없는 사랑의 실체
이틀 후 회복된 므이쉬킨은 레베제프의 가족과 함께 파블로프스크로 향했다. 공작이 파블로프스크의 별장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레베제프와 가냐의 식구들, 예판친 장군의 가족들 등 공작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새로 도착한 진보적 성향의 4명의 젊은이, 즉 레베제프의 조카인 독토렌코와 그의 친구들, 이폴리트, 켈케르, 부르도프스키가 등장하면서 파티의 분위기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므이쉬킨의 유산 상속에 관한 비방조의 기사를 신문에 올린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은 부르도프스키가 므이쉬킨에게 유산을 남겨준 파블리쉬체프의 사생아란 점을 들어 그에게 마땅히 돈을 나눠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르도프스키는 지적 오만을 내세우며 공작의 돈을 거부하는데, 그 때문에 한바탕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심한 말기 결핵증세를 보이던 이폴리트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연설을 늘어놓자 파티는 완전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돼 끝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므이쉬킨은 그를 찾아온 예판친 장군부인에게서 아글라야와 가냐의 관계가 발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부인은 그와 나스타샤와의 관계를 추궁하는데, 므이쉬킨은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아글라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여동생에 대한 오빠의 애정 이상이 아니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미 아글라야가 므이쉬킨에게 보낸 편지를 본 부인은 딸의 솔직한 마음이 공작에게 있음을 눈치채고서 흥분해 그의 손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므이쉬킨이 건네준 편지를 통해 아글라야가 나스타샤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군 부인은 몹시 불쾌했다. 그녀는 이제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아글라야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과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에게 그 딸이 애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딸의 내심을 눈치챈 부인은 더 이상 딸의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예판친 장군의 집에는 첫째, 둘째 딸과 그녀의 약혼자, 그리고 그의 친척이자 나스타샤로부터 모욕을 당한 예브게니 파블로비치가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공작이 나타나자 그들은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문학과 대중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공작은 이폴리트가 그의 별장으로 옮겨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아글라야가 나타났다.
장군 집안의 귀염둥이인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에 오만한 콧대, 일종의 허영심과 이상을 지닌 인물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그동안 아무런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어린 아이와도 같은 순수한 영혼과 지적 고상함을 간직한 므이쉬킨이 어느날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공작이 사람들 앞에서 바보 취급당하는 것에 실망과 분노를 느낀 그녀는 애증과 자존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사람들 앞에서 공작과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소리질렀다. 그때 므이쉬킨 역시 무의식 중에 이렇게 소리지르고 말았다. “나는 당신에게 청혼한 일이 없습니다. 아글라야 이바노브나!”
그 순간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다.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늘어놓는 므이쉬킨의 모습에 모두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아글라야 역시 일종의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런데 공원을 나와 거리를 산책하던 중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공작 일행 앞을 지나던 한 패의 군중들 속에 나스타샤가 끼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브게니 파블로비치에게로 다가와 그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건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글라야는 흥분해서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봤다.
이폴리트의 자살 미수 사건
거리에서의 놀라운 사건은 장군 부인과 딸들을 경악시켰고, 므이쉬킨은 2층에 혼자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아글라야는 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쪽지를 건넸다. 잠시 후 장군과 함께 그곳을 나서면서 공작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가 얼마 전 아글라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과 그녀와 나스타샤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나스타샤가 아글라야와 므이쉬킨을 맺어주기 위해 일부러 예브게니를 중상하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네 거리에 혼자 남은 공작은 정신을 가다듬고 좀전에 아글라야가 건네준 쪽지를 읽었다. 거기에는 ‘다음날 아침 7시에공원의녹색벤치에서기다리고있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흥분과 일종의 경악을 느끼면서 므이쉬킨은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얼마 뒤 공작은 지금까지 한번도 느낀 적이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어두워진 공원을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배회하다 벤치에 앉아 상념에 빠진 공작 옆에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바로 창백한 얼굴을 한 로고진이었다.
로고진의 출현은 공작을 혼란스럽게 했다. 로고진은 나스타샤가 공작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이 너무나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를 아글라야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또 두 사람이 결혼하고 나면 자신도 로고진과 결혼하겠노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스타샤가 그런 자신의 의도를 이미 아글라야에게 편지로 알렸다는 것이다. “이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공작은 소리쳤다. 므이쉬킨은 로고진과 함께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흥겨운 야유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날은 바로 공작의 생일이었다. 일동은 환성과 축하를 보내며 공작을 맞아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얘기 거리를 찾아 쉴새없이 떠들며, 그중 레베제프가 나서서 일장 연설을 해댔다.
그런 다음 상기된 표정의 이폴리트가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나 「나의 필요불가결한 해명」이란 논문을 낭독했다. 그는 병 때문에 제한된 시간 속에서 창 밖, 집 담장을 바라보며 붉은 벽돌담이 주는 종말과 영원의 느낌 때문에 우울해졌다고 말하면서, 병에 걸려 죽느니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자살은 자의식의 최상의 행위인 것이었다. 하지만 해명을 들은 참석자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런 상황을 접한 그는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뇌관이 없었던 탓에 총이 발사되지 않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당황한 그는 일부러 뇌관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달라고 사람들에게 간청하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마침내 공작 앞에 선 나스타샤
흥겹게 시작됐던 므이쉬킨의 생일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쓰러진 이폴리트로 인해 주위는 술렁거렸고 공작은 그가 또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몽롱한 눈초리로 공원을 거닐던 그는 벤치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앞에는 아글라야가 서서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아글라야는 므이쉬킨에게 나스타샤에게서 받은 세 통의 편지를 보여줬다. 자신과 공작이 하루빨리 결합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여주며 그가 나스타샤를 사랑하는지 되물었다. 므이쉬킨은 나스타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결코 사랑이 아니라 그렇게나 “아름답고 불행한 여인”을 진정으로 구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그의 이런 반응에 불쾌해 하며, 얼떨결에 가냐와 결혼하겠다고 말해 버린다.
방으로 돌아온 므이쉬킨은 아글라야에게서 받은 나스타샤의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그는 전처럼 어두운 공원으로 나가 오랫동안 배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꿈 속에서조차 계속 그를 따라다니는 여인의 환영을 발견하고서 멈춰 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라 실제 모습이었다. 바로 나스타샤가 서 있었던 것이었다.
공작은 가슴이 뛰는 듯한 흥분을 억제하지 못한 채 실성한 사람 마냥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움켜쥐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손에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행복하시죠? 행복하시죠?” 그녀는 누구한테 쫓기는 듯이 급하게 물어댔고 서둘러 말을 마쳤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나는 내일 떠나겠어요. 앞으로 다시는....끝까지 당신을 보지 못할 거예요.” 그때 로고진이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가면서 므이쉬킨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본능적 사랑과 구원의 사랑
약 1주일 후 가냐의 여동생은 오빠에게 아글라야와 므이쉬킨의 혼담이 진행 중이라고 전해줬다. 사실 예판친 장군의 가족들은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장군부인은 ‘백치’ 같은 자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장군과 두 딸은 공작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아글라야의 진심을 좀처럼 알 수 없었기에 망설이고 있었다. 아글라야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공작을 놀려대며 짓궂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므이쉬킨에게 고슴도치를 선물한 그녀는 가족들 앞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실례지만...당신은 나와 결혼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공작은 흠칫 놀라서 물러서더니 갑자기 활기를 띠며 대답했다. “그러나....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지금도 역시.” 그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결혼을 원한다고 답했다. 순간 좌중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아글라야의 변덕스런 질문에 므이쉬킨이 당황하긴 했으나 그녀가 공작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글라야의 변덕은 날로 심해갔다. 그러던 중 공작은 레베제프로부터 그녀가 로고진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장군의 별장에서 야유회가 열리던 날 므이쉬킨 공작은 보통 때와 달리 상당히 고무돼 기독교와 러시아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고조됐고, 그는 거의 이성을 잃고 떠들다가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을 본 장군 부인은 공작을 사윗감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마음 먹는데, 마침 아글라야가 갑자기 거만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난 여태까지 그이를 미래의 남편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단 말예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예요.”
부인이 와락 성을 냈지만 아글라야의 머릿 속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돼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뜬 므이쉬킨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일어났다. 오늘 중으로 뭔가 결정되는 비상한 사건이 발생하리라는 기대가 그를 짓눌렀다. 오후 1시가지나자장군부인은딸들을대동하고서그를찾아왔다. 그동안의 애정사건을 접고 ‘영원한 친구로 남자’는 말을 남기며 일동은 일어나는데, 아글라야는 므이쉬킨에게 그날 저녁 집에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다.
친구로 남자는 아글라야의 느닷없는 저녁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은 곧 풀렸다. 장군 가족 일행이 나간 뒤 30분 뒤 이폴리트가 들어왔는데, 그날 저녁 아글라야가 나스타샤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공작은 적잖이 놀랐으나 저녁 7시경 므이쉬킨은 아글라야와 함께 로고진과 나스타샤의 숙소로 향했다. 마침내 네 사람이 마주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글라야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 나스타샤 앞에서 그녀를 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나스타샤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를 들먹거리며 나스타샤의 진의를 다그쳤다. 처음엔 가만히 듣고있던 나스타샤도 이성을 잃고 므이쉬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주저 없이 내뱉고,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 또한 확신했다. 두 여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양됐다.
운명적 사랑, 그리고 그 파국
마침내 아글라야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나스타샤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 공작의 팔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었다. “당신은 내 것이야! 내 것! 하마터면 나는 당신을 그 여자에게 내줄 뻔했어요! 무엇 때문에? 나는 미쳤어. 이봐요, 로고진 당장 나가요!...”
로고진은 한참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모자를 집어들고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공작은 나스타샤의 곁에 붙어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돌보며 진정시켰다.
두 여인이 마주한 지 2주일 후 므이쉬킨은 나스타샤와의 결혼 준비로 분주했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온갖 괴상한 비방조의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작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에게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사랑의 정도는 서로 다른 것이었는데, 그는 아글라야를 인간적으로 사랑하지만 나스타샤에게 자신의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정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백치’라고 수군거렸다.
드디어 결혼식 날, 공작은 마차를 타고 교회를 향했다. 구경꾼들의 수군거림과 외침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스타샤가 나타났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군중들의 야유는 환호로 바뀌고, 막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예기치 못한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군중들 속에 있던 로고진이 어느새 계단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손으로 나스타샤를 번쩍 안아 마차에 태우고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손 쓸 새도 없었기에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므이쉬킨은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해 로고진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하녀는 주인이 없다고 그를 돌려보냈다. 몇 번을 되돌아와서 다시 묻고, 또 여러 곳을 수소문하며 나스타샤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녀는 아무 데도 없었다. 어떤 상념에 사로잡혀 거리로 뛰쳐나온 므이쉬킨은 그곳에서 로고진과 마주쳤다. 그는 공작을 따라오고 있었다. 로고진은 어제 나스타샤와 자신의 집에 도착해 지금까지 그곳에 있었지만, 하녀를 시켜 공작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므이쉬킨은 로고진을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휘장이 쳐진 침대 위에 나스타샤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선 공작은 심장이 멎는 듯한 놀라움에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로고진은 언젠가 므이쉬킨을 행해 쳐들었던 나이프로 그녀를 살해한 것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나스타샤의 침대 옆에서 눈물을 흘린 채 잠들었다.
두 달 뒤 로고진은 15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이폴리트는 병이 악화돼 숨을 거뒀고, 므이쉬킨은 스위스의 정신병원에 다시 들어갔다. 의사의 말로는 공작의 지능조직이 완전히 파괴됐다는 것이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아글라야는 가족과 함께 페테르부르그를 떠나 외국으로 가서 가짜 폴란드 백작에게 속아 결혼을 올린 뒤 가톨릭 신자가 됐으며, 그녀의 가족들은 러시아를 그리워하며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가운데 하나인 『백치』는 작가의 두 번째 여행기간(1867-1871) 동안에 구상, 집필된 것으로 1867년 봄 페테르부르그를 떠나면서 『러시아 통보』로부터 이미 작품에 대한 선불을 받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로 원고를 보냈는데, 이 소설은 1868년 『러시아 통보』 에 연재됐으며, 1874년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첫번째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후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노름꾼』과 『죄와 벌』을 끝낸 뒤, 지친 심신을 달래고 고갈된 정신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두 번째 유럽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재정 상태와 악화된 건강, 남은 친지들에 대한 걱정 등으로 좀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으며, 첫 유럽 여행에 들떠 경이로운 흥미를 느끼는 아내와는 달리 미래에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그는 유럽과 러시아를 비교하면서 전보다 더 심한 정도로 유럽인들을 비난하고, 아내 외에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않았다. 이런 작가의 폐쇄적인 생활은 심해진 우울증과 간헐적인 간질병 발작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더 확고해진 러시아적 구원 사상의 영향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러시아적 구원사상 서정적으로 담아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라는 평을 받는 『백치』는 이런 배경 속에서 집필됐으며, 작가는 그 주제를 조카인 소피아 이바노브나에게 보내는 편지 1868년 1월 1일자에서 잘 설명했다.
“... 이 장편의 의도는 내가 오래 전부터 남몰래 품어 온 것인데, 너무 어려운 일이라 오랫동안 착수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란다. 이번에 작업을 착수하게 된 계기는 우리의 생활이 너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이 장편의 중요한 의도는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는 데 있단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왜냐면 그것은 한량없이 큰 과제이기 때문이지. 아름다운 것은 하나의 이상으로, 그 이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문명화된 유럽에서도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야.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란다. 따라서 이 무한히 아름다운 인물의 출현은 말할 것도 없이 영원한 기적인 거야... 기독교 문학에 나타난 아름다운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은 돈 키호테란다. 그런데 그가 아름다운 것은 동시에 우스꽝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 타인의 조소를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연민이 표현돼 있기 때문에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란다...그런데 나는 내 작품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몹시 두려워하고 있단다”.
이렇듯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에 대한 염원은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작가는 그 형상의 구현을 백치인 므이쉬킨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
『백치』는 언뜻 보아 서로 다른 환경과 개성의 소유자들인 두 남녀의 애정 이야기를 다룬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그리스도 공작’ 므이쉬킨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그려지고 있다. ‘백치’란 용어는 러시아어로 ‘바보’라는 뜻 외에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인간, 나아가 고대 러시아 문학 속의 ‘유로지브이(성자 바보)’와 맞닿아 있다. 아글라야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 그는 ‘진지한 유형의 돈키호테’며, 위대한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푸쉬킨의 「가난한 기사」이기도 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고귀한 인간의 소명에 충실한 그는 기독교적 인류애를 실현하는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의 화신으로 ‘그리스도 공작’의 역할을 감당한다.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은 므이쉬킨을 중심으로 상호 연결돼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한결같이 백치인 그의 불가사의한 매력에 사로잡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로고진과 나스타샤, 그리고 아글라야 외에도 비열한이면서 ‘묵시록’의 해석을 즐기는 레베제프, 냉소적 허무주의자로 자살을 시도하는 이폴리트, 주위의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아 므이쉬킨의 연민을 받는 이볼긴 장군, 돈의 노예로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가냐, 아글라야를 사랑한 진보적 사상가 예브게니 파블로비치 등 모두가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응시하며, 그에 의해 휘둘림을 당한다. 이는 므이쉬킨이 뛰어난 논리와 이성을 소유한 이론가나 사상가로 자신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타인을 자신 가운데로 무한히 받아들이는 광대한 심장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스타샤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전형적인 러시아 여성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리의 여자를 자처하면서도 그녀는 마음 속 깊이 순결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으며, ‘참다운 인간’으로서 므이쉬킨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한다. 아글라야에 대한 질투로 므이쉬킨에게 자신을 선택도록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스타샤는 점점 더 광적으로 변해가는 로고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언젠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로고진에게서 타락한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고 그에게 이끌린다.
이런 그녀의 이중성은 결혼식 당일 절정을 이룬다. 나스타샤가 교회에 들어서려는 순간 군중 속의 로고진을 발견하고 그와 함께 도망쳐버린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므이쉬킨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로고진을 따라가 그의 손에 죽고 만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공작의 사랑이 동정임을 알아차렸으며, 아글라야에 대한 그의 사랑이 본능적인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환상은 현실 그 자체
“내가 이 장편을 살려내는 일에 성공한다면 나 자신을 살린 셈이 되지만,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는 작가의 각오 아래 씌어진 『백치』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가장 애정을 느꼈던 작품으로 작가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예술에 있어) 현실이란 것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환상적인 것, 예외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종종 현실의 본질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보기엔 일상적인 현상이나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는 이미 리얼리즘이 아닙니다....나의 환상적인 『백치』가 바로 현실 그 자체, 만연된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각 층에는 이런 유형의 인물이 당연히 생겨날 때입니다.”
므이쉬킨의 형상은 소중한 토양, 순박한 민중들과 유리된 혼돈과 타락의 암울한 러시아를 비추는 한줄기 빛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그리스도 공작’의 존재를 통해 진정한 형제애적 인류애의 도래를 기대했다.
<“백치(Идиот)”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저 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Фёдор Михаи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1821∼1881)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제2의 고골’이라는 찬사를 받은 러시아 문학의 대부. 오랜 유형생활에서 얻은 러시아민중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작품의 토대가 됐다.
▣ 도스토예프스키의생애와작품
1821 10월 30일(현재의 그레고리우스력(曆)으로는 11월 11일)에 마리야 자선병원의 관
사에서 아 버지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와 어머니 마리야 네챠예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4 10월 도스토예프스키와 형 미하일,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중학과정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1837 2월 27일에 어머니 사망
1838 1월 16일에 공병 학교에 입학
1839 6월 8일에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1840 11월 29일에 하사관으로 임명. 군생활을 지겨워하며 호프만, 실러,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 어, 라신, 괴테 등의 책을 탐독
1844 2월에 유산 관리인으로부터 일시금을 받고, 토지와 농노에 대한 유산 상속권을
포기 10월에 도스토예프스키 제대
1845 3월에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를 친구 그리고로비치에게 읽어주자 네크라소프
를 거쳐 유명한 평론가 벨린스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다. 『페테르부르그 선집』
에 「가난한 사람들」발표. 11월 어느날 하룻밤만에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쓰지만 벨린스키와 투르게네프로 부터 절도 없는 생활을 비난받았다.
「분신」과 「프로하르친씨」 잡지 『조국의 기록』에 발표
1848 「분신」, 「여주인」 실패. 도스토예프스키는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재정적 어려
움을 겪었다.
12월에 페트라셰프스키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 관심
『조국의 기록』에 「약한 마음」(2월), 「폴준코프」,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백야」 (이상 12월),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등 발표
1849 페트라셰프스키 집에서 열린 문학 모임에서 벨린스키가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
다는 이 유로 고골을 비난한 편지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4월 23일에 체포
11월 16일에 벨린스키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목으로 사형 선고
12월 22일에 세묘노프 광장에서의 총살형 직전, 황제의 특사로 시베리아 강제노동
형으로 감형 『조국의 기록』(1, 2월)에 「네토츠카 네즈바노바」 일부 발표
1854 2월에 출감
1855 12월에 『죽음의 집의 기록』 집필 시작.
1857 2월 6일에 친구의 아내였던 마리야 이사예프와 결혼
익명으로 『조국의 기록』에 「꼬마 영웅」 발표
1858 9월에 형 미하일과 함께 만드는 잡지 『브레먀(시대)』의 출판을 허가받았다.
1859 『러시아 말』에 「아저씨의 꿈」 발표
『조국의 기록』에 「스체판치코보 마을 사람들」 발표
1860 스첼로프스키의 『러시아 세계』에 불온한 표현을 뺀 『죽음의 집의 기록』 연재
1861 『브레먀(시대)』에 「상처 받는 사람들」 발표
『상처받는 사람들』Edouard Pratz에서 두 권으로 출간
1862 6월 7일에 서유럽으로 최초의 외국여행을 떠나 도박에 빠졌다.
1863 『브레먀(시대)』에 「악몽 같은 이야기」 발표
4월에 『브레먀(시대)』에 게재된 스트라호프의 기사 「치명적인 질문」이 폴란드
인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발행 중지 .5월에 『브레먀(시대)』출판 금지
1864 3월 21일에 새 잡지 『에포하(연대기)』 첫 호 발행
4월 16일에 부인 마리야 사망
1865 6월에 재정난으로 『연대기』발행을 중단
11월 1일에 출판업자 스첼로프스키와 작품 계약. 약속 불이행시 인세 지급 없이 이
후의 모 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기로 했다. 3천 루블을 받고 자신의 모든 작
품의 저작권을 팔았다.
스첼로프스키출판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 출간
1866 10월에 스첼로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
킨 고용 『노름꾼』, 『죄와 벌』 완성.
1867 2월 15일 저녁 7시에삼위일체대성당에서속기사안나와결혼
계속된 도박으로 재정상태 악화『죄와 벌』 수정판 바주노프 출판사에서 출간
1868 2월 22일에 딸 소피야 출생
5월 12일에 어린 딸 소피야 사망
11월에 『러시아 통보』에 「백치」 발표
1869 9월 14일에 딸 류보프 출생
11월 네차예프를 지도자로 하는 ‘민중의 복수’가 벌인 암살사건을 후에
『악령』에 이용
1871 7월 16일에 아들 표도르 출생 러시아 통보』에 「악령」 발표
1872 12월 말에 독감과 폐기종으로 고생하기 시작
바주노프의 「동시대 작가 총서」에서 『영원한 남편』 출간
1873 1월 1일에 도스토예프스키가 편집장을 맡은 『시민』지 제1호 발행
6월에 『악령』이 세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
일상생활과 문학이나 연대기적·정치적 내용을 담은 「작가 일기」를 『시민』지에 연재
『백치』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
1875 8월 10일에 아들 알렉세이 출생
『애국잡기』에 「미성년」(젊은 청년의 일기) 발표
1877 5월 16일에 아들 알렉세이 갑작스런 간질 발작으로 사망
1879 10월에 『러시아 통보』에서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소설 3부의 4번째 책까지) 출간
1880 11월 8일에 『러시아 통보』에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마지막 장들을 보냈다.
1881 1월 26일 상속 문제로 여동생이 찾아와 다투고 간 후 각혈 시작, 죽을 준비를 하다.
1월 28일 아침 7시, 아내에게 오늘 틀림없이 죽을 것 같다며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이날 저녁 8시 38분사망, 1월 31일에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