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 운명이 아니라면
기꺼이 난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서
사랑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머지않아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천재와 광기의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횔덜린
횔덜린이 두 번째 가정교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인 곤타르트의 부인, 주제테였다. 예술적 공감대가 많았던 탓에 횔덜린과 그녀는 서로에게 깊이 끌린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횔덜린은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표현한다. “난 무엇이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네. 하지만 이 여자를 본 뒤부터 내가 가진 지식들이 다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친구여, 마침내 내 영혼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았네.”
그러나 가정교사와 안주인과의 사랑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결국 3년 만에 헤어진 횔덜린은 이 이별을 통해서 인생의 종막을 예감하게 된다. 정처 없는 방황의 굴레 속에서 그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고, 병원을 전전하면서 불치의 정신병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당신이 내 운명이 아니라면 기꺼이 난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서 사랑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머지않아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뜨겁고도 절망적인 편지를 주고받았던 연인 주제테가 죽자 시인 횔덜린은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채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자신을 이해하고 아끼는 사람이 모두 떠나간 후 그의 정신까지 황폐해졌던 것일까? 그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최후의 순간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고...”라고 읊었듯이, ‘티나’라는 섬에서 보낸 유배 생활이 그가 자신에게 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처벌이 아닌가 싶다.
혁명과 사랑의 시, 그러나 정신병으로 끝나다
횔덜린은 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네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태어났다. 1788년 튀빙겐대학 신학과에 들어간 그는 이때부터 헤겔, 셀링과 친교를 맺고 철학을 논하는 한편, 그리스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쓴 시들은 클롭슈토크, 실러의 영향이 짙으며, 범신론적 세계관이 싹트기 시작한다. 졸업 후 성직 생활이 싫은 그는 가정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예나로 가 피히테의 강의에 심취한다.
23세 때 슈투트가르트에서 실러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칼프 부인집의 가정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을 쓰기 시작하는데, 26세 때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집의 안주인인 주제테가 그 소설의 모티프다. 횔덜린은 그녀에게서 그리스적인 미(美)를 발견했고, 그녀도 그의 순진한 심정을 보고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詩篇)에 등장했으며, 그 작품들은 모두 불후의 명작이 된다. 이 부인과의 사랑에 의해서 횔덜린은 선인들의 모방을 버리고, 시작(詩作)의 독자적 경지를 개척한다.
결국 곤타르트 씨의 오해를 낳아 집을 나오게 된 그는 그후 친구 집에서 기식을 하며 고독한 생활을 보내면서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1797∼99)의 완성에 전력을 기울인다. 30세 되던 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정신 착란 증세가 심해진다. 이후 2년 간에 씌어진 『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 『귀향 R ckkehr in die Heimat』 『라인강 Der Rhein』등의 시들은 그의 정신적인 긴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들은 다소 난해하지만, 그가 남긴 시들 가운데서 최고봉으로 꼽힌다. 결국 그는 37세부터 73세에 죽을 때까지 정상적인 사람이기보다는 광인으로 더 많은 나날을 비참하게 보낸다.
조국을 잃은 청년, 히페리온이 폐허가 된 자신의 조국 그리스에 오게 된다. 전쟁의 끝이라 조국의 땅을 밟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감회에 젖는다. 하지만 번성하던 조국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고 잔재만 남아 있는 조국... 번성했던 그 땅의 풀과 땅, 꽃과 하늘... 그것들이 주는 향수에 괴로워하는 청년, 히페리온. 그는 독일로 망명했을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벨라르민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하늘이 맑게 갠 어느날, 한 지인(知人)으로부터 한 통의 초청장을 받게 된다. 생각지도 않는 초청에 들뜬 그는 육지에서 맡아보지 못했던 바다 내음과 공기를 온몸으로 맡으면서 항해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에게 일어나게 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동경과 평화로 가득 차 있는 히페리온, 그곳에서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데....(내용 요약)
히페리온 멸망한 조국 그리스를 그리워하는 청년. 우연히 운명적인 사랑
디오티마를 만나 애달픈 사랑을 한다.
벨라르민 히페리온이 조국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 망명했을 때 우정을맺은 독일인
디오티마 히페리온의 운명적 사랑
우정의 그루터기
조국을 잃은 청년, 그가 고뇌하고 있는 것들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국의 풀과 땅, 꽃과 하늘... 그것들이 주는 향수에 괴로워하는 청년, 히페리온. 그는 독일로 망명했을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벨라르민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벨라르민에게
사랑하는 조국 땅은 나에게 또 다른 기쁨과 번민을 안겨준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코린트 지협의 고지(高地)로 산책을 하러 간다.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처럼 내 혼은 가끔 바다와 바다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내가 딛고 서 있는 햇볕에 이글거리는 산과 산은 양쪽에서 그 소맷부리를 시원스럽게 바다에 씻기고 있다. ‘만약 내가 천 년 전에 이곳에 서 있었더라면…….’ 이제야 과거를 회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폐허가 된 고대의 돌더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타인이 내 조국의 일을 물어볼 때, 나는 늪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과연 내 조국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느날 그의 정신적 지주이던 스승 아다마스가 우연히 그리스 땅에 오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만나자마자 이별을 약속하지만 그 뒤에 남겨진 스승의 소중함은 히페리온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된다.
벨라르민에게
자네는 플라톤과 스텔라(플라톤의 제자)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는가? 나도 그를 그렇게 사랑했고, 또 그렇게 사랑받았었다. 오오, 나는 분명 행복한 청년일 것이다. 대등한 자끼리 친구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클 수 있도록 끌어올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일 것이다.
내 스승, 아다마스는 인간을 낳은 근원의 힘을 찾기 위해 이곳 폐허가 된 땅, 그리스에 왔었다. 아직도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로 다가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나는 그의 인사말과 그의 질문 하나하나가 뒤에서 들리는 듯하다.
나는 아다마스와 함께 스인루스 산상에 갔었다. 우리가 산상에 닿았을 때는 아직 새벽이었다. 우리가 멀리 주위를 내다보고 있었을 때 태양은 벌써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양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와 함께 황폐해진 우리 국토와 신전과 그 신전의 원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신과 같아지도록 해라.” 아다마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태양신 쪽으로 향했다. 그때 아다마스가 내게 들려준 한마디, 한마디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지금까지 슬프면서도 즐거워진다. 인간이 이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안 있어 우리는 헤어졌다. 난 허전한 마음을 꾹 참으면서 마지막으로 그를 껴안았다. “저에게 축복의 말을 한마디만, 아버지시여.”라고 그를 바라보며 나는 속삭였다. 그는 너그러운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이 사람을 지켜주소서. 보다 나은 시대의 신령들이여, 그리고 당신의 불사의 경지로 이 사람을 끌어올려 주소서, 당신들 하늘과 땅의 모든 다정한 힘이여, 이 사람과 함께 있어 주소서…….”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음에는 신이 있단다. 그 신은 물의 흐름처럼 운명을 인도하고 지배한다. 그리고 만물은 그 신의 영역에 있다. 그 신이 특히 너와 함께 있기를…….”
하나이기에 아름답다
하늘이 파랗게 갠 4월 어느날, 어느 한 지인(知人)이 칼라우레아로 히페리온을 초대하게 된다. 배에 오른 히페리온은 육지에서 맡아보지 못했던 바다 내음과 공기를 온몸으로 맡으며 항해하기 시작한다. 도착한 그 곳은 소나무 골짜기의 흐름 속에서 레몬 숲과 종려나무와 가련한 풀과 성스런 포도로 무성했다. 히페리온은 말할 수 없는 동경과 평화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기이한 힘이 히페리온을 점령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히페리온은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그 이야기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띄우는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벨라르민에게
나는 한때 행복한 적이 있었다. 벨라르민이여. 그렇다면 지금도 행복한 것이 아닐까? 그녀와의 만남이 한순간으로 그쳤다 해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그리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 내 눈앞에 나타났던 것을.
그녀의 이름은 아름다움이다. 자네는 원하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 있는가? 지금도 나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느낌으로 알 수는 있다.
과연 그녀와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강물이 바다로 순리대로 흘러가듯이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넓고 넓은 바다로 흘러가려 한다. 그리고 그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은 바로 내 운명적인 사랑, 디오티마… 당신과 함께 내 삶은 시작한 것이다. 내가 당신을 몰랐을 때의 나날은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오오, 디오티마여, 디오티마여, 그대 숭고한 사람이여!
벨라르민에게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도록 하고, 하루하루를 헤아리는 것을 그만두자. 두 개의 영혼이 이처럼 서로를 예감하는 순간에 비하면, 몇 세기의 세월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노트라가 처음으로 나를 그녀의 집으로 안내해 주던 그때의 저녁을 그려본다. 그녀의 모친은 사려 깊고 부드러운 여인이었고, 그녀의 동생은 솔직하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그 두 사람의 태도와 말투에서, 그들이 디오티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내 귀볼에 그 깨끗한 숨소리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심정을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다. 그때 나는 떨리는 마음을 조아리면서 어떤 말도 그녀에게 건넬 수가 없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황혼은 우리의 이별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난 그녀에게 “편히 쉬십시오, 천사의 눈이여!” 라는 말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운명의 그날, 가슴 떨린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네. 아니 난 영원히 그 마음 그대로 살 거라네.
어느날 디오티마가 아프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히페리온이 간직할 수 있는 행복도 잠시였던가. 그녀와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벨라르민에게
그녀는 내 것이 아니었던가? 운명의 여신이여, 그녀는 내 것이 아니었던가? 깨끗한 샘물이여, 그것을 증언해 주지 않으련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다소곳이 듣고 있던 나무들과 햇빛과 에덴이여, 그녀는 내 것이 아니었던가? 생의 온갖 음조 속에서 그녀는 나와 하나가 된 것이 아니었던가?
나만큼 그녀의 가치를 안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그리고 나만큼 그녀의 빛을 모은 거울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가 내 기쁨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찾아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장려함에 대해 놀라지 않았을까. 아아, 내 마음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녀 곁에 있었던 마음이 어디 또 있을까. 내 마음만큼 그녀를 채워 주고, 또 그녀에 의해 채워지고, 눈썹이 눈을 위해 존재하듯이 다만 그녀의 마음을 포옹하기 위해 존재한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두 사람은 하나의 꽃이 되었고, 우리 혼은 하나로 융합된 것이 분명하다.
더 이상 나아질 곳 없는 전쟁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알라반다에게서 소식이 오게 된다. 러시아가 조국의 불법 통치자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그것을 기회 삼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러 같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자 히페리온은 디오티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 전쟁터에서 그는 디오티마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전한다.
디오티마에게
나는 이제야 당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에피디우로스 산맥의 정상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 멀리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디오티마, 당신의 섬입니다. 그리고 그 앞쪽에 내 결전장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승리할 것인가 전사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내 혼은 행위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리스의 계곡들을 멀리 바라보는 내 눈은 마치 마술을 걸려는 듯 빛나고 있습니다. 또다시 일어서라 신들의 도시들이여…….
알라반다와 히페리온은 주민들을 지휘하면서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승리감에 도취된 주민들은 나쁜 짓을 자행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도적으로까지 변해 버린다. 지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심한 경멸과 멸시를 받게 된 히페리온은 삶에서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자신 앞에 놓여진 모든 것들이 덧없게 생각되었다. 심지어 디오티마에게 이별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디오티마에게
비록 소규모전이지만 우리는 세 번을 거듭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양군의 병사들이 뒤섞인 채 안타깝게 죽어가긴 했지만.
나바린은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지금 고대 스파르타의 폐허, 미시스트라의 성지를 우리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알바니아 군대에서 빼앗은 군기를 교외의 폐허에 세웠고, 승리의 기쁨으로 쓰던 터키풍의 터번을 에우로타스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후로는 그리스의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무척이나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을 만나, 당신의 손을 잡아 이 가슴에다 꼭 대고 싶습니다.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이 가슴은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와 내 자랑스러운 모습을 본다면 더없이 행복할 텐데... 나의 무리한 욕심이겠지요.
디오티마에게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디오티마여! 내 부하가 분별없이 약탈하고 살육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포까지 죽이고 있습니다. 미시스트라의 그리스인은 아무 죄도 없었는데,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도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색이 된 그들의 우는 얼굴은, 천지를 향해 야만인에 대한 복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야만인의 선두에 서 있던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요? 나는 명예로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충실했던 부하 하나가, 내가 잔학 행위를 말렸다고 내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내가 미쳤다면, 이 상처에서 붕대를 뜯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내 피는 그 피의 고향, 이 슬퍼하는 대지로 돌아가겠지요.
나는 지금 다시 고독해졌습니다. 알라반다와 나는 조국을 살릴 수 있는 희망도, 승리에 대한 기쁨도 잊은 지 오래됐습니다.
앞으로 어찌 되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운명은 나를 방향도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받는 듯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몸이 타는 듯이 부끄럽습니다. 이 고행이 언제까지 계속되려는지…….
아아, 나는 당신에게 새로운 그리스를 약속했는데, 이제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이 탄식의 노래뿐이군요.
디오티마에게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았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저주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단념해 달라고!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정한 사람이여, 당신을 생각하는 내 마음은 말라 버렸습니다. 내 눈은 이제 생명이 있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내 입술은 바싹 말라 버렸습니다. 사랑의 향기로운 숨결도 이젠 가슴에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아아, 나는 마지막 기쁨조차 부숴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에서 솟는 탄식 소리가 무슨 소용일까요. 나는 당신에게 죄를 진 몸입니다. 나는 돌아갈 고향도, 쉴 곳도 없는 몸입니다.
안녕, 사랑하는 사람이여, 안녕.
영원히 작열하는 생명
한 장의 이별 편지만 남긴 채 히페리온은 러시아 함대의 승무원이 되어 해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중상까지 입게 되는데 알라반다의 지극한 간호 덕분으로 회복한다. 히페리온은 병상 중에서도 늘 잊지 못하던 사랑하던 디오티마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것은 디오티마가 그를 그리워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뿐...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는 히페리온, 그는 그 심정을 친구 벨라르민에게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벨라르민에게
그 접전이 끝난 뒤에도 나는 엿새 동안이나 단말마의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 병상 생활은 어둔 밤과도 같았다. 때때로 고통이 번개처럼 번쩍거려 그 어둠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겨우 의식을 차렸을 때 나는 곁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알라반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거의 혼자 나를 간호해 주었다고 한다. 이제까지의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눈을 뜰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글썽대는 친구를 볼 수 있다니 …더 이상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벨라르민에게
벨라르민, 난 이제 다친 곳도 어느 정도 나아가고 기분도 전보다는 한결 좋아진 것 같다.
이렇게 빨리 회복하게 된 것은 아마 계절 탓이 아닌가 싶다. 바람은 몽롱한 듯한 살랑살랑 불어오고, 밝은 햇빛은 꽃비처럼 부드럽게 내리비추고…….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와 공기와 햇빛을 만끽할 수 있다니 절로 눈물이 난다.
그런데, 그런데 이 아름다운 자연을 나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내 곁에 그녀가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난 궁금했다.
이때 알라반다가 “이것저것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좋아. 자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난 알라반다에게 내 심정을 털어놓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그녀가 내 곁에 올 수 있도록 하기로 말일세. 그녀가 내 고백을 다시 받아줄지 그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어쩔 수 없네. 난 결심했다네.
벨라르민에게
난 지금 무척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네.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내 곁에 영원히 두고 싶었던 그녀… 디오티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었지. 그런데 노트라가 대신 편지를 보내왔다네. 그녀가 쓴 마지막 편지와 함께 말일세.
“히페리온, 그녀는 아름답게 죽었네. 그녀는 땅에 묻히기보다는 화장을 했으면 좋겠다 하여, 자네와 처음 만난 숲에다 뿌려주었다네.” 벨라르민, 난 더 이상 숨쉴 수 있는 안식처를 영원히 잃어버린 듯하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거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아무리 내가 운다고 해도 디오티마는 돌아오지 않겠지. 벨라르민, 나에게 가르쳐 주게나. 내 피난처가 어디 있는지. 칼라우레아의 숲인가? 그곳의 어두운 나무 그늘, 우리 사랑을 친절하게 보아 주었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저녁노을처럼 낙엽이 디오티마의 유골 함 위에 내려져 아름다운 수관이 만들어진 곳, 이윽고는 그 나무들도 재 위에 쓰러져 엎어지는 곳, 그곳이라면 내가 다시 내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난 알라반다에게도 가보려 했다네. 하지만 그는 이미 파멸해 버렸어. 높이 뻗은 가지도 비바람에 꺾여 버렸다네. 그 사람까지! 그리고 악동들은 그 나뭇조각을 주워다가 땔감으로 쓰고 있지. 그는 떠나갔어.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네. 모든 것이 끝났어.
그후 히페리온은 디오티마를 잃은 슬픔에 많이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 그리움과 괴로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디오티마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그가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혈관이 심장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듯이 모든 것은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 지금 비록 디오티마와 같이 있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하나의 생명으로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이 작품은 횔덜린의 유일한 소설로, 18세기에 살고 있던 그리스의 한 젊은이, 히페리온이 독일인 친구 벨라르민에게 그의 청년기부터 지금까지의 운명을 편지 속에 보고하는 형식과 디오티마와의 편지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와 내용은 방대하지만 주인공의 내면 세계가 잘 부각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770년 터키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그리스인들의 봉기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히페리온』은 횔덜린이 1792년 튀빙겐에서 집필하기 시작했다. 1794년에는 단편「히페리온의 단상」을 『탈리아』지(誌)에 게재했고, 1795년에는 산문으로 된 미완성 작품「히페리온의 청년기, HyperionsJugend」를 썼다. 그후 튀빙겐의 코타 사에서 1979년에 제 1부가, 1799년 제 2부가 각각 『히페리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음악적 운율로 시적인 표현
『히페리온 Hyperions』(1797-1799)은 무엇보다도 횔덜린의 시적인 문장이나 단어에 더 많은 진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음악적인 운율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메마른 우리의 감성에 촉촉하게 단비를 뿌려준다. 특히 조국에 대한 강한 집착과 향수, 친구와의 각별한 우정, 그리고 애달픈 사랑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시적인 표현으로 그런 감정들이 잘 묘사된 것도 있지만 그 내면에 담겨 있는 횔덜린의 생각들을 엿보도록 하자. 우선 횔덜린이 『히페리온』의 배경을 ‘왜 그리스로 했는가’ 이다. 이 당시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유럽 문화의 시발점인 고대를 문화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그리스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도 대중운동이라기보다는 지식층에 속하는 시민들의 운동으로 자리잡게 된다. 즉 고대로의 여행은 문화에 대한 교양으로 이해됐으며, 독일문학에서는 고대와의 결합으로 인해 문학의 귀족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한때 유행처럼 자리잡고 있던 고대에 대한 관심은 횔덜린에게도 있었다. 튀빙겐 시절, 그는 자유와 유럽 문화의 원천인 헬레니즘에 대한 사랑으로 몰두한 적이 있다. 이 관심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보면서 고대로의 문화여행을 간접 경험을 통해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으로 자리잡게 된다.
히페리온과 알라반다의 우정
히페리온에게 알라반다의 존재는 그 인생에 있어 큰 자리를 차지한다. 조국을 잃은 그에게 있어 대의(大義)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이 둘의 우정은 고대의 모범적 인물인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기톤의 우정이 그 모티브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영웅들의 우정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할 뿐 아니라 조국을 위해 희생의 의미도 함께 가진다. 또한 알라반다와 히페리온의 우정을 제우스의 아들인 디오쿠렌의 쌍둥이 형제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느날 맑게 갠 한밤중에 나는 하늘의 쌍둥이 별자리를 그에게 가리켜 보인 것이 있었다. 그때 알라반다는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저것은 별에 지나지 않는 거야, 히페리온. 두 영웅 형제들의 이름을 하늘에 써놓은 문자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 그들은 살아 있어. 용기와 신성한 사랑을 겸비하고 너는 신의 아들이야. 이 쌍둥이 별 중 하나인 카스토르와 너의 불멸의 정신을 나누지 않겠나.” 히페리온과 알라반다와의 우정은 그리스 신화의 위대한 우정과 결합되어 인류를 위한 구원하기 위한 모티프로 설명된다.
디오티마와의 애달픈 사랑
디오티마라는 존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횔덜린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히페리온의 단상」에 등장하는 멜리테(나중에 디오티마라 불리게 되는 인물의 이름이다)는 하나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여신적 형상은 예나의 초고 」히페리온의 청년기」에서 디오티마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은 1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주제테 곤타르트로 인해 더욱 구체화된다. 즉 횔덜린은 그녀에게서 디오티마를 확인하게 된다.
내가 사랑을 알고 난 후부터 나의 심정은 신성해지고
더욱 아름다운 삶으로 가득 차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그대들은 나를 더욱 주목하지 않았는가, 내 더욱 도도하고
거칠며 더욱 말 많고 속은 텅 비어 갔었기 때문이었나?
그후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에 대한 감정은 더욱더 구체화되고 사실감 있게 나타난다. 디오티마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녀로 인해서 조국의 필요성을 더 절감할 수 있게 되고 그녀가 있음으로 자연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고, 그녀가 있기에 친구와의 우정도 더 돈독해 질 수 있었다. 이렇게 그에게 있어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런 그의 사랑이 항상 함께 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나날이 나는 밖으로 나가 언젠가 다른 것을 찾는다.
나는 이 땅의 모든 길을 그들에게 오랫동안 물어왔다.
저 위 서늘한 고원, 모든 그늘들을 찾는다.
또한 샘터도, 정신도 안식을 갈구하며 위아래를 헤맨다.
(...)
아! 어디에 그대, 사랑하는 이여 지금 있느냐? 그들은
나의 눈을 앗아가고 그녀와 더불어 내 가슴을 잃었노라
그리하여 나는 방황한다. 그림자처럼 살아가야만 하고
오래 전부터 그밖의 것은 나에게 의미 없이 여겨진다.
나는 감사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추억조차도
마지막 것을 삼키지 않았는갸? 입술에서부터
고통은 나에게서 더욱 좋은 말들을 앗아가지 않았느냐?
- 」비가」 중에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자의 목표 없는 방황이 정밀하게 잘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별의 끝이 방황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우리는 보다 내면적으로 모든 것과, 우리가 보다 신성하게 평화로이 결합하기 위해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죽음은 현세와 초월적 세계의 합일로 나타난다. 죽음은 그 ‘근원’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디오티마는 정녕 죽음의 세계로 떠나갔지만 그녀는 하나의 영혼으로 자기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세계는 자연의 섭리로 인해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같이 귀속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임을.
▣ 프리드리히횔더린의생애와작품
1770 네카 강변 라우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궁정의 성직자였고, 어머니 역시 목사 가문의 출신
1772 아버지가 사망. 여동생 하인리케가 태어났다.
1774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는데 의붓아버지는 뉘르팅겐의 고크 시장이다.
1779 의붓아버지가 사망
1784-86 뎅켄도르프 초등학교 다녔다.
1786-88 마울부론 신학교에 다니면서 융과 오시안, 클롭슈토크와 실러에 심취
1788-93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보다는 헤겔, 셀링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들과 함께 루소, 칸트, 피히테를 연구. 그리고 실러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이상(理想)에 대해 감명을 받는다.
1843 6월 7일 튀빙겐에서 사망
<“히페리온(Hyperion)”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저 자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 lderlin(1770∼1848), 독일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