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라블레는 15세기 말에 쉬농 근처의 라 드비니에를에서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라블레의 출생연도에 관해서는 1483년이라는 설, 1493∼1494년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 후 1511년경 프란체스코 교단에 수련 수도사로 들어갔다가 1520년까지 방데 지방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로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교육기관이 따로 있지 않고 공인된 교육기관으로는 교회나 수도원이 유일했기 때문에 어엿한 가문의 자제들은 종교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지식인들 역시 그러했으며,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 역시 수사로서 출발했다. 라블레는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종교생활을 시작했고 적어도 12년간 수사로 지냈다.
1523년 라블레는 다른 수사와 함께 그리스어 원전을 탐독했는데 이것이 수도원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교회의 공인된 언어는 라틴어였으므로 그리스어는 이단시되었다.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어는 중세 기독교 사회의 이념과는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가 유일신 사상인데 반해 그리스 문화는 유일신이 아닌 다신 혹은 범신사상이라는 점도 그 중 하나였다. 어쨌든 라블레는 이 때문에 프란체스코 교단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관대한 베네딕트 교단으로 이적한다.
수사에서 의사로
이후 라블레는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왜 그는 수사의 신분을 떠나 난데없이 의사가 되었을까? 아마도 휴머니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라블레의 작품에는 해부학뿐만 아니라 생리학적 지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종교생활을 통해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늘 보아왔던 라블레가 그 고통을 치유해 주는 의학에 심취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학연구에만 안주할 수 없었던 라블레는 직접 진료에도 임했다. 그는 1532년부터 1535년까지 리옹의 자선병원에서 진료했으며, 이후 1534년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수행의사가 되어 로마로 떠난다.
휴머니스트 라블레의 활동은 저작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중세의 기독교 질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봉건적 정치체제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도약하려는 각국 군주들의 의지가 교황권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는 결국 종교전쟁으로 번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고 휴머니즘(인본주의) 사상을 설파하는 작품과 작가는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책을 놓고 교회에서는 금서라 하고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라블레의 작품 역시 1543년 전까지는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다가 이후로는 에라스무스, 칼뱅 등과 함께 금서목록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라블레 소설 속에서 문제된 것은 바로 종교적 사상이었다.
막을 내리시오, 희극은 끝났소
라블레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라블레가 벨레 추기경을 따라 세 번째로 로마에 다녀온 때는 1549년. 추기경은 그대로 로마에 머물러 있었고, 프랑스로 돌아온 라블레는 소르본대학의 신학자들로부터 공격대상이 되었다. 그 때 오데 드 콜리뉘 추기경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라블레의 생애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라블레는 1550년 자신의 전 작품에 대해 10년간의 출판허가를 받는다. 그 배경에는 프랑스 왕과 교황청 사이의 긴장된 대립관계가 있었다(너무도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세 유럽 국가와 교회사를 잘 알아야 할 정도다). 이후 라블레는 비교적 평온한 상황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로마에서 돌아온 뒤 벨레 추기경은 라블레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그 덕택에 전원에서 온화, 평온, 안락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1551년에는 사제직을 위임받아 활동하다가 1553년 초에 사직했다. 1553년 3월, 라블레는 파리에서 “막을 내리시오. 희극은 끝났소.”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계보
라블레는 일반적으로 『팡타그뤼엘』로 총칭되는 몇 권의 소설을 쓴 작가로 알려져 있다. 1532년 라블레는 ‘알코프리바스 나지에 Alcofrybas Nasier(본명의 낱말 순서를 바꾼 이름)’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소설 『팡타그뤼엘』을 출판한다. 원래의 제목은 『위대한 거인 가르강튀아의 아들이자 디프소드의 왕, 지극히 명망 높은 팡타그뤼엘의 두렵고도 가공할 무훈과 용맹』이다.
『팡타그뤼엘』
가르강튀아의 아들이자 거인 계보의 막내인 팡타그뤼엘을 낳다가 그의 어머니 바드백은 죽는다. 어려서부터 팡타그귀엘은 남다른 육체적 힘과 식욕을 나타낸다. 어린 거인의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가르강튀아는 유식한 학자들을 아들의 친구로 삼게 하는가 하면 여러 대학들을 순방하며 지식을 쌓게 한다. 또한 그는 파리에 가 있는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교육 이념과 프로그램을 장황하게 개진한다. 그 결과 ‘심오한 학식의 소유자’가 된 팡타그뤼엘은 대단히 복잡한 소송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솔로몬에 비유되기도 한다.
어느 날 우연히 파뉘르쥬를 만나게 된 그는 이 떠돌이 허풍쟁이에 대해 이내 깊은 우정을 느낀다. 뛰어난 말재주를 가진 이 자는 짓궂은 장난질로 사람들을 골탕먹이는가 하면, 천하고 야비한 농담도 마구 지껄여댄다. 팡타그뤼엘은 디프소드인이 아버지의 고장을 침공한 것을 알게 되자 동료들을 대동하고 파리를 떠난다. 그는 자기 소변으로 적군을 수몰시킴으로써 쉽게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디프소드인들의 용병 거인들의 수장 루 가루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그를 물리친다. 전쟁의 와중에 화자 알코프리바스는 팡타그뤼엘의 거대한 입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그는 기묘하게도 우리의 현실세계와 유사한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다.
1532년 『팡타그뤼엘』을 출간한 지 10년 정도 지나서 라블레는 세 번째 소설『제3서』를 1546년에 출판한다. 그 원제목은 『선한 팡타그뤼엘의 영웅적 행적과 언술에 관한 『제3서』이다. 거인전의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되는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소르본대학의 검열에 걸려들었지만 여러 차례 재판을 거듭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3서』
디프소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팡타그뤼엘은 파뉘르쥬에게 포상으로 영지를 떼준다. 하지만 파뉘르쥬는 흥청거리며 살다 이내 파산지경에 빠진다. 이를 점잖게 꾸짖은 팡타그뤼엘에게 그는 빌려주고 빌려쓰는 것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주의 생리를 다스리는 법칙이라고 말하면서 빚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다. 그 다음 날 파뉘르쥬는 팡타그뤼엘에게 만약 여자에게 배신당할 염려만 없다면 결혼하고 싶다면서 자신의 망설임을 실토한다. 팡타그뤼엘은 이에 대해 충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먼저 호메로스와 비르길리우스의 책을 우연히 펼치게 되었고 거기서 미래에 대한 예언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낸 구절에 대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꿈에 의한 점을 시도하는데 이것도 서로 상반되는 해석으로 인해 결론을 얻지 못한다. 뒤이은 무녀, 시인, 점성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팡타그뤼엘은 신학자, 의사, 철학자, 법관 등 네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다. 법관 브리두아가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광대 트리부레에게 그를 대신하게 한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뉘르쥬의 의심과 두려움을 가시게 하지 못한다. 끝으로 뒤늦게 등장한 법관과 광대에게서도 결과는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되자 이 두 사람은 가르강튀아의 허락을 받아 디브 부테이유의 신전을 찾아가기로 하고 수사들과 동행하기로 한다. 항해를 준비하면서 배마다 팡타그뤼엘리옹이라 불리우는 기적의 식물을 싣는다. 인간을 신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놀라운 특성을 가진 이 기적의 풀이 찬양된다.
『제3서』가 나온 지 2년 후, 그 후속으로 『제4서』를 출판했는데, 그 원제목은 『선한 팡타그뤼엘의 영웅적 행적과 언술에 관한 제4서』이다. 이 시기에 라블레는 뒤 벨레 추기경을 따라 로마에 가 있었는데, 리옹을 거쳐 로마에 가는 길에 출판업자에게 원고를 건네주어 그 해 가을 출판된다.
『제4서』
팡타그뤼엘, 파뉘르쥬과 일행은 마침내 디브 부테이유의 신전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이들은 랑트무와에서 돌아오는 한 척의 배를 만나게 되는데 파뉘르쥬는 양을 사고 파는 상인과 싸움판을 벌이다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한다. 파뉘르쥬가 이를 복수하기 위해 한 마리의 양을 사서 바다에 내던지자 양떼가 모두 뒤따라 바다 속에 뛰어들었고 급기야는 상인과 양치기까지도 따라 들어간다. 안나젱 섬과 쉘리 섬을 거쳐 프로퀴라시움 섬에 다다른 팡타그뤼엘 일행은 쉬카누인들의 기이한 생활방식을 목도하는데, 이들은 얻어맞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항해 중 배는 무서운 폭풍을 만나고 파뉘르쥬는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수사 장은 그의 비겁함을 조롱한다. 일행은 교황의 숭배자들인 파피만느의 섬에 도착한다. 그 곳의 주교는 교황의 모든 교시를 수합한 성스러운 책 『교황령집』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그 섬을 떠나 항해를 계속하던 일행은 바다 한복판에서 이상한 웅성거림을 듣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1년 전에 있었던 전투 때의 말들의 함성과 소란스러운 소리인데, 한겨울의 추위로 얼어붙었다가 날이 풀리면서 녹아내린 것이다. 메세르 가스테르 섬에서 일행은 위장의 전능한 힘을 상징하는 이 인물에 대한 숭배의 흔적을 발견한다.
라블레가 죽은 후 10년 즈음에 거인전의 마지막 권 『제5서』가 출판되었다. 사후에 발표된 이 작품이 라블레가 직접 쓴 것인가 하는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일반적인 결론은 라블레가 죽은 후 그의 원고를 입수한 출판업자나 작가가 부분부분 덧붙이거나 수정했을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틀은 라블레의 것이라는 데 모아진다.
『제5서』
팡타그뤼엘과 그의 일행은 먼저 종소리 울리는 섬에 도착한다. 그 곳은 온갖 종류의 새들과(그 새들의 이름은 교회 성직자들의 이름을 본 뜬 것들이다) 단 한 마리뿐인 새 파프고(Papegaux 교황이라는 뜻을 본뜸)로 가득하다. 기쉐 섬에서 일행은 샤푸레(법관을 상징)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다. 그 후 앙테레쉬 섬에 도착하는데, 이 섬의 여왕 켕트에상스는 노래로 병자들을 치유한다. 뒤이어 가공의 섬들이 계속 등장한다. 에스크로 섬에서 승려들은 단음절만으로 대답하고, 사텡에서는 사람들이 우위-디르라 불리는 꼽추 주위에 몰려든다. 마침내 항해자들은 그들의 목적지 디브 부테이유 신전에 다다른다. 지하의 긴 통로를 지나 그들은 여사제 바크뷔크의 영접을 받게 되는데, 바뉘르쥬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받은 대사제는 부테이유로부터 “마셔라.”라는 단 한 마디 말을 듣는다. 바크뷔크는 다음과 같은 신탁을 설명한다. “디브 부테이유는 당신들을 그리로 보낸다. 당신들이 직접 이 모든 일의 해설자가 되시오.”
그랑구지에와 가가멜의 아들 가르강튀아는 잔치가 벌어지던 날 태어난다.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마시자! 마시자!”라고 외쳐댄다. 아들의 영리함과 비범함에 이내 탄복하게 된 아버지는 아들을 교사에게 위탁하여 교육받게 한다. 그런데 이른바 소피스트라 할 수 있는 교사의 낡고 형식주의적인 교육은 오히려 아들을 멍청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르강튀아를 파리로 보내지만 그 곳에서 그가 처음 한 짓은 노트르담 성당의 종을 훔쳐낸 일이다. 그러나 그는 새 교사 포노크라트를 만나게 되어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규제를 지향한 새 교육방법에 따라 훈련을 받는다. 하루의 일과는 완벽하게 짜여져 지적 학습은 육체적 훈련과 한 쌍을 이루고 고전의 학문적 연구는 사물들에 대한 직접적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던 중 목동과 빵장수들 사이의 분쟁이 발단이 되어 피클로콜 왕이 그랑구지에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마침내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내용요약)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그랑구지에 가르강튀아의 아버지로 선량하고 덕이 있는 왕
가르강튀아 이 소설의 주인공. 올바른 교육을 통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완벽한 인물이 된다.
포노크라트 가르강튀아의 스승으로 가르강튀아에게 바른 교육을 하려 애쓴다.
장 데 장토뫼르 수도원의 수사로 피클로콜 군대를 전멸시키는 용맹하고 완벽한 수사다.
피클로콜 이웃 나라 왕으로 가르강튀아의 나라를 침공하나 무참히 패배한다.
가르강튀아의 탄생
그랑구지에는 낙천적이고 누구보다도 술을 잘 마시는 왕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팔파이오 왕국의 가가멜이라는 천하일색의 공주와 결혼하여 훌륭한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얼마 전 그랑구지에 왕은 큰 소 36만 7천 14마리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낙천적이고 인심이 후한 왕은 모든 국민을 모이게 하여 잔치를 벌였다. 왕은 여왕에게 내장 요리는 그다지 썩 좋은 것이 아니니 가급적 먹지 말라 하였으나 여왕은 소 내장으로 만든 요리를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설사를 했다.
이렇게 잔치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무렵, 가가멜은 서서히 산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보통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면 “응애응애”하고 울기 시작할 텐데, 가가멜이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마시자! 마시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마치 천하 만 백성에게 한 잔 하라는 듯 말이다. 이런 출생이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원래 술과 축제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는 주피터(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났으며, 지의 여신 미네르바는 주피터의 귀에서 태어났음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랑구지에 왕은 아들이 태어나던 순간에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마시자! 마시자!”하는 우렁찬 소리를 듣고는 “맙소사, 주량이 참 세군!(Que grand tu as!: 크 그랑 튀 아)”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들의 탄생을 맞아 최초로 아버지가 한 말대로 이름을 정하는 히브리인들의 전례에 따라 아들의 이름을 ‘가르강튀아 Garguantua’라고 정하도록 권한다. 그는 이 권고를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산모도 흡족해하였다. 어쨌든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은 아이에게 포도주를 먹인 다음 예수님의 초상 앞에서 세례를 주었다.
가르강튀아의 잘못된 교육
한 해가 지나갔다. 그 동안 가르강튀아는 어찌나 살이 쪘는지 턱이 열여덟 개는 되어보였고 좀체로 울지도 않았다. 비만 때문에 대소변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였으면서도 술을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고 마시는 재주를 가졌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뚱뚱한 아이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까? 가르강튀아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재단사들이 당시 유행인 옷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속옷을 만들기 위해서 사텔로 천 500m, 양복 조끼를 만들기 위해서 흰 나사지 813m, 양복 바지를 만들기 위해 흰 나사지 1,105m, 허리띠를 만들기 위해서 1,509마리의 개가죽이 필요했다. 또 팬티를 만들기 위해서는 흰 나사지 16m가 필요했는데, 그 모양은 보기에도 화려한 두 개의 아름다운 황금 고리에 멜빵이 끼여 있었고, 그 멜빵에는 일곱 가지 보석이 반짝이는 금으로 만든 고리가 달려 있었다. 팬티 앞부분에는 금실, 은실로 된 자수에다가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진주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구두를 만드는 데에는 눈이 시원해질만큼 파란 비로드 천 406m와 101장의 소가죽이 쓰였다. 외투용으로도 파란 비로드 천 108m가 쓰였으며 군데군데 진주를 박은 황금빛 무늬가 화려하게 외투를 장식하고 있었다. 모자를 만들기 위해 흰 비로드 천 302m 가량이 쓰였고 진귀한 새의 깃털로 장식을 마무리했다.
세 살에서 다섯 살 때까지 가르강튀아는 부친의 명령대로 적당한 규율에 따라 양육되었다. 그 시기는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마시고, 먹고, 자고, 흙탕 속에서 뛰어노는 때였다. 하지만 가르강튀아는 보통 아이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술을 마시는 것도 그랬고, 방문객을 재치 있게 골려주는 것도 그러했다. 아들의 영특함에 놀란 아버지 그랑구지에는 아이를 교육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명망 있는 당시의 대 궤변학자들에게 맡겨진 가르강튀아는 여러 가지 책을 공부했으나 그랑구지에가 보기에는 아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아니라 오히려 머리가 이상해지고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그랑구지에는 귀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포노크라트라는 선생에게서 배운 한 젊은이가 그리도 영특할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유데몽이라는 그 젊은이를 시험해 본 그랑구지에는 그의 영특함과 총명함에 질투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포노크라트를 가르강튀아의 스승으로 삼기로 하고 가르강튀아의 파리 유학을 위해 포노크라트, 유데몽을 동행시켰다.
가르강튀아, 파리로 유학을 떠나다
한편 때마침 이웃 나라의 왕이 아프리카산 암말을 그랑구지에에게 보내왔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훌륭하고 거대하였다. 원래가 아프리카에서는 항상 무엇인가 진귀한 것이 생기는 바, 그 암말의 크기는 코끼리 여섯 마리를 합쳐놓은 크기였으며 가공할 만한 힘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꼬리의 힘에 대해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파리로 향하던 가르강튀아 일행이 오를레앙을 지날 때였다. 그 곳에는 길이 15km, 폭 7km 넓이의 큰 숲이 있었다. 이 숲에는 쇠파리와 말벌 종류가 우글거려서 보통 말이나 당나귀들에게는 사람으로 치자면 산적을 만나는 것과 같은 셈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일행이 숲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말벌떼가 암말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암말은 그 꼬리로 말벌떼를 쫓고는 뒤따라가 닥치는 대로 꼬리를 휘둘러 숲 전체의 나무를 쓸어버렸다. 가르강튀아의 암말은 그 동안 다른 말들이 당했던 일들을 기발한 방법으로 복수했던 것이다. 나무가 사라지자 말벌도 쇠파리도 사라지고 그 숲은 논밭으로 변해 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가르강튀아는 일행을 향해 “굉장하군(Je trouve beauce).”라고 말하였으며, 여기에서 기원하여 그 지방은 후에 보스(Beauce)라 불리게 되었다. 그 주인에 그 짐승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굉장한 주인과 굉장한 말,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파리로 향했다. 가르강튀아 일행이 파리 시내를 구경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감탄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귀찮았던지 가르강튀아는 “이 녀석들은 여기서 피로연이나 환대에 대한 답례를 하라는 것이로군. 그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어디 술값을 좀 주도록 할까. 그냥 줄 수는 없겠고, 장난으로만 주도록 하지.”하더니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이때 가르강튀아의 오줌에 빠져죽은 사람은 무려 26만 418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이 뤼테스에서 지금의 파리(Paris)가 된 것이다.
가르강튀아는 한숨 돌릴 요량으로 한적한 곳을 찾았는데, 큰 성당이 그의 눈에 띄었다.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가르강튀아의 눈에 종이 들어왔다. 그는 종을 쳐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더니 자기 말 목에 걸면 안성맞춤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난 김에 가르강튀아는 종을 숙소로 가져와 말 목에 걸었다. 당시 성당의 종은 지금처럼 울리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시계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만일 종이 없으면 사람들의 일과는 엉망이 될 것이 뻔하였다. 놀란 파리 시민들은 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지만 가르강튀아의 체구를 보면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결국 신학대학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박학다식한 인물을 가르강튀아에게 파견해 종을 돌려달라 부탁하기로 했다. 가르강튀아 일행은 자기를 찾아온 대학자들을 상대로 실컷 장난을 친 다음에야 종을 돌려주었다. 이전까지 파리 시민들에게 존경만 받아오던 학자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거듭나기 위하여
이제 짓궂은 장난은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아 가르강튀아는 서서히 파리 유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부에 전념한다. 그는 스승인 포노크라트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공부하려 했으나 포노크라트로서는 지금까지 해 오던 가르강튀아의 오랜 습관을 고칠 필요를 느꼈다. 이전의 스승들이 가르강튀아를 바보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야 하는 것이었다. 잠자는 습관, 밥 먹는 습관, 공부하는 방법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제대로 뜯어고친 후에 드디어 가르강튀아의 공부는 시작되었다.
가르강튀아는 아침 4시에눈을떴다. 몸을 추스리는 동안 성서의 몇 페이지를 큰 소리로 낭독했다. 가르강튀아는 성서의 내용을 잘 받아들여 대자대비의 신을 숭상하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 후에는 화장실에서 밤중에 쌓인 나쁜 물질을 배설하였고, 그러는 중에도 스승에게 난해한 문제들을 질문하고 풀어나갔다. 하루일과의 시작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그 날의 하늘 상태를 살펴 일기를 가늠했고, 그런 후에는 몸단장을 하고 몸에 향료를 뿌리면서 전날의 수업을 복습하곤 했다. 그리고는 세 시간 정도 책을 낭독한 후, 밖으로 나가 좀 전에 읽은 책에 대해 토론했다. 토론이 끝나면 운동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심신을 연마해 나갔다. 운동 후에는 땀을 완전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점심을 기다리며 조용히 산책하면서 스승 포노크라트와 함께 좋은 명언을 암송했다.
식사 초에는 포도주가 나올 때까지 옛날 무사들의 위훈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 내용이 마음에 들 경우에는 모두 외워버렸다. 빵이나 술, 소금, 식물 등 식탁에 나온 일체의 것들의 특질, 효능 등에 대해서 토론하였고, 혹 막히는 부분이나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여러 서적들을 식탁으로 가져오게 해 검증하는 작업을 거쳤다. 가르강튀아는 배운 것은 반드시 무엇이든 외워버렸기 때문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의 절반을 아는 사람도 드물 정도였다.
식사 후에는 트럼프가 나왔다. 이는 승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학적인 사고방식과 계산능력을(예를 들어 확률 같은) 기르기 위해서였다. 트럼프를 하면서 가르강튀아는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매일매일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후에는 트럼프를 하곤 했다. 그 결과 수학이라는 학문을 이론적으로나 실제 면에서나 정말 잘 외우고 이해하게 되어서 대수학자조차 가르강튀아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수학이라는 학문은 그 자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리에 입각한 다른 학문, 예를 들어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가르강튀아는 전투용 말, 짐 싣는 말, 경주용 말 등 모든 종류의 말을 거침없이 다루었으며 마장마술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단숨에 마장을 백 번이나 돌고, 공중으로 도약하기도 하고, 큰 웅덩이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기도 하고, 둥근 원을 만들어 그 안에서 기술을 부리기도 했다. 승마뿐만이 아니었다. 사냥을 나가면 모든 종류의 짐승이 가르강튀아의 몫이었으며, 수영할 때에는 평영, 배영, 접영 등 전신을 사용하는 수영법이나 오늘날의 특공대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전투용 수영, 예를 들어 손에는 무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두 발만을 사용하는 수영법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시저가 창안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물에서 나와 곧이어 산으로 오르는가 하면 어느새 산에서 내려와 다시 다른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산에서는 고양이처럼 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다람쥐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가르강튀아는 검술도 능했는데 단검, 장검, 투창, 엽창, 도끼창, 활, 돌 등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었다. 이처럼 승마, 수영, 산악, 무기 같은 모든 종류의 육체적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은 바로 기초 체력인 바, 가르강튀아는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 커다란 납덩이 두 개를 만들게 했는데, 그 각각의 무게는 무려 8,700근이나 되었다. 가르강튀아는 그것을 아령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신체를 단련한 뒤에는 몸을 마찰하고 땀을 닦은 후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어떤 목장이나 풀이 무성히 자란 곳을 지나면 가르강튀아 일행은 돌과 나무를 조사하여 초목에 관해 기록해놓은 책을 펴서 대조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 준비가 될 때까지 전에 읽은 내용을 복습한 후에 식탁에 앉았다. 저녁식사 동안에는 점심시간에 했던 것과 같이 적당한 공부가 진행되었고, 남은 시간은 문학이나 예술에 관한 토론으로 채워졌으며,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트럼프나 주사위 놀이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학식 있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외국 문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면 각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가르강튀아는 별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혹 유성이라도 나타나면 그 소재와 성좌의 모양, 위치 등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런 후 잠자리에 들기 전 가르강튀아는 스승을 상대로 그날 하루 동안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행한 일들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며 복습했다. 이렇게 해서 창조주이신 신께 기도를 드리고 신에 대한 신앙이 깊음을 맹세한 후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피클로콜 왕의 침공과 장 데 장토뫼르의 용맹함
가르강튀아의 고향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양치기들은 포도밭을 감시하며 까마귀가 포도를 따먹지 못하게 쫓고 있었다. 때마침 이웃 나라의 밀가루과자 장수들이 과자를 싣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배가 고픈 양치기들은 자기들에게 과자를 좀 팔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서로 사이가 좋아서 과자와 포도를 서로 바꾸어 먹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정색을 하며 과자를 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한 명은 계속 과자를 요청하던 양치기의 허벅지를 때리기까지 하였다. 이에 화가 난 그 양치기는 몽둥이를 던졌는데 그 몽둥이에 맞아 과자장수는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근처 농부들(가르강튀아의 국민)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왔다. 전후사정을 들은 그들은 과자장수들에게 달려가서 과자를 빼앗고 그에 상응하는 값보다 훨씬 많은 값을 치뤘다. 과자장수들은 놀라 도망을 갔는데, 이 일이 전쟁의 화근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과자장수들은 그 길로 피클로콜 왕에게 달려가 양치기들에게 당한 일을 부풀려 이야기했다. 왕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과자장수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는 군사를 모아 진격했는데, 그 군대는 질서나 절도도 없어 혼란스러웠고, 가난한 자나, 부자나, 성스러운 지역이나, 성스럽지 않은 지역이나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살육했다.
그렇게 약탈강도를 자행하는 피클로콜 군대가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을의 수도원에는 장 데 장토뫼르라는 품행이 방정한 수사가 있었다. 그는 젊고 원기왕성하며, 활달하고, 매우 두뇌가 명석해 두려움이라곤 몰랐다. 한 마디로 여태까지 보아오던 수사와는 전혀 다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자라는 구석이 없는 그런 수사였던 것이다. 이 수사가 수도원의 포도밭 일대에서 적군의 소음을 듣고 무슨 소란인가 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적군이 포도를 모두 따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장과 다른 수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우리들의 포도밭에 적병들이 침입하여 포도나무와 열매를 깨끗이 약탈하는 것은 신께서도 보고 계실 것입니다. 앞으로 4년 동안 포도 찌꺼기라도 주우려 해도 주울 것이 없을 것임을 모르시겠습니까? 만일 거짓이라면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습니다.”
수사 장 데 장토뫼르의 일장 연설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장과 나머지 사람들은 숨을 궁리만 하였다. 장 데 장토뫼르는 긴 법의를 벗어버리고 곤봉을 들었다. 그야말로 용감한 수사였던 것이다. 그 길로 그는 포도밭으로 나가 적군의 머리를 깨뜨리고, 어느 틈엔가는 저쪽으로 가서 팔다리를 부러뜨렸으며, 또 어느 틈엔가는 구석에 있는 적군의 척추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코를 으깨고, 모든 이빨을 뽑았으며, 대퇴골에 허벅다리뼈가 으스러지게 하였고, 만일 도망가는 적군이 보이면 뒷머리통을 으깨버렸다. 이렇게 장 데 장토뫼르가 전멸시킨 적군의 수는 13,622명이나 되었다.
귀향과 승리, 그리고 이상적인 수도원 건설
그러나 장 데 장토뫼르 수사가 지킨 마을을 제외한 다른 마을은 대부분 피크로콜의 군대에 피해를 입었다. 그랑구지에 왕은 파리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급히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나의 결의는 도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시키는 데에 있다. 공략함이 아니고 방어하며, 정복함이 아니라 충성스런 내 부하와 조상 전래의 영토를 수호함에 그 목적이 있도다. 피크로콜은 내 영토 내에 그 인연도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적의를 품고 침입해 왔으니 참을 수 없는 난행의 극치를 보이며 날이 갈수록 그 광폭한 소행이 더해가고 있는 형편이로구나. …사랑하는 아들아, 이 글을 본 즉시 돌아와 나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위급을 구원하길 바란다. 백성을 구하고 보호함은 사물의 당연한 이치에 속하는 것이며, 전쟁에 임해서도 유혈의 참사는 될 수 있는 한 근소해야 하는 법. 할 수만 있다면 만 백성의 생명을 구하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그대와 더불어 있기를 바라며….
- 아버지 그랑구지에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전갈을 받은 가르강튀아와 그 일행은 급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르강튀아는 그 동안 단련한 신체와 정신을 바탕으로, 또 수사 장 데 장토뫼르의 도움을 받아 피클로콜 군대를 무찌르고는 피클로콜 왕을 비롯한 적군을 상대로 이 전쟁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었는지 일장 연설을 한다. 그 후 가르강튀아는 수사 장 데 장토뫼르의 청에 따라 종래의 수도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수도원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텔렘의 수도원이다. 그 수도원은 남녀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검은 수사복 대신 세련되고 우아한 의상을 입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수도원 건물도 위압적인 대신에 아름답고 고풍스럽게 지어 강변의 풍경과 잘 어울리게 하였다. 그 안에서의 생활규칙으로는 종래의 전통적인 규율인 정결, 가난, 복종 대신 참으로 파격적인 표어인 “원하는 것을(혹은 원하는 대로) 하라”를 자랑스럽게 내걸었다. 수도원에서의 모든 삶은 법이나 규정,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사들의 의지와 자유의사에 의해 영위되기 시작했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라블레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를 간략하게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1483년 혹은 1494년에 태어나 1553년까지, 말하자면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큰 기둥의 역할을 수행했던 라블레가 프랑스 문학사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프랑스 문학 및 예술의 역사에서 16세기는 르네상스라 불려진다. ‘재생·부흥’의 뜻을 가진 르네상스란 고대문학의 부흥, 이른바 문예부흥을 의미하게 되며, 구체적으로는 16세기의 문학과 예술을 일변시킨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실 당시의 작가들 중 아무도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문화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므로 재생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항해술과 천문학의 발달 덕분에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하며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도 기독교의 교의에 공개적으로는 의의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개혁자들은 성직자를 비판하고 풍자가들은 사제를 조롱했다.
당시 학문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구와 인문학의 발달은 신학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이교 사상과의 접촉을 빈번하게 하였다. 산문 문학에 있어서 라블레는 당시 시대의 영도자였다. 라블레는 그 시대의 실태에 완전히 정통했으며 발자크처럼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모든 기술에 정통하고 있는 작가만큼 위대한 작가는 없다. 그는 법률, 스콜라 철학, 전쟁 등을 연구했으므로 법관, 궤변가, 군인들을 통렬하게 조롱할 수가 있었다. 그는 명랑하고 활기에 가득 찬 그 시대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었다. 팡타그뤼엘주의(主義)는 도덕에 대한 긴장완화의 효과가 있었고, 정의에 대한 의욕, 일상생활의 공허한 절차에 대한 멸시, 인간적인 사건에 대한 따뜻한 이해, 인간생활의 허무에 대한 공감 등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라블레는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층(사상적으로는 인문주의자, 계급적으로는 민중 bourgeoisie)에 속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문주의적, 민중적 사상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의 탄생을 축제에 삽입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왕이 민심을 알아보고 민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바로 축제다. 때문에 라블레는 작품의 앞부분에서 민중의 삶을 제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왕이 민중들과 장난치는 점과 가르강튀아가 그들 속에서 태어나면서 민중 앞에서 술을 마심으로써 민중과 친밀해지는 점이다.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이는 파격적인 것으로 축제라는 배경이 아니고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비록 현대의 일상에서 축제는 그 고유의 의미를 거의 상실했으나 축제에 대한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한 마디로 ‘일상생활의 단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에서는 모든 용인된 기호들이 변조되고, 뒤집히고, 파괴되는 쾌감을 맛볼 수 있고 이 쾌락 안에서 혼미스러우면서도 즐겁게 타인과의 관계맺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서구 문명을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가른다면, 중세까지는 절제와 균형을 중시하며 혼돈 상태를 거부하는 아폴로적인 경향이 서구 문명을 지배하였다. 그에 반하여 혼돈된, 술에 취해 약간은 광적인 축제 상태를 지향하던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은 아폴로적인 경향에 밀려 있었다. 절제와 균형만을 추구하던 아폴로적인 경향은 기독교의 교리와 잘 어울려 오랜 기간 서구 문명을 지배했으나 기독교의 쇠진과 더불어(르네상스의 개막과 더불어) 디오니소스적 경향에 서서히 잠식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혼돈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보다 나은 상태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혼돈을 축제라는 형태로 표출하려 했으며, 결국에 가서는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블레에게서도 자연을 추구하는 면모는 다분히 농후하다.
육체와 영혼을 되살리는 축제 한판
라블레의 작품은 한편의 거대한 축제라 말할 수 있다. 축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술과 웃음(해학)이 라블레의 작품에도 역시 빠지지 않고 전편에 걸쳐 등장하기 때문이다. 라블레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가 그 어원으로 볼 때 음주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가르강튀아의 부친 그랑구지에(Grangousier)는 ‘큰 목구멍’이라는 뜻이며, 가르강튀아는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라고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그랑구지에는 아들의 목청에 대해 “참 대단한 녀석이기도 하지!(Que grand tu as!)”라고 말하는데, 아버지의 첫 마디로 인해 아이는 가르강튀아라고 불리게 된다. 라블레는 이와 비슷한 식으로 ‘빵따그뤼엘’이라는 이름이 어원적으로는 “언제나 목마른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심지어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출생도 음식과 취태의 기호하에서 이루어진다. 가르강튀아는 아버지가 주관한 큰 향연의 날에 태어난다. 그리하여 그의 모친이 순대를 과식하게 되는 것이다. 또 갓 태어난 아기는 즉각 “술로 접대된다”.
라블레의 작품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초기 작품 『가르강튀아』에서 거인 가르강튀아는 태어나면서 ‘마실 것( boire)’을 달라고 소리쳤고, 그의 최후의 소설 『제5서』에서 바크뷔크 여사제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식탁도 “마셔라(Trinch!)”라는 한 마디 말이었다. 그리고 또 『가르강튀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도사 장이 “Et grand ch re!”라고 외치는 것은 ‘실컷 먹고 마시자!’로 풀이될 수 있다. 실컷 마신다는 것은 육체의 향락을 위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육체로서의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적 가치체계 아래에서 사람들, 특히 민중이 얼마나 억압받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역사가 확연히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위대함에 비해 그것(육체)은 허무였으며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없는 것과도 같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존재의 권리를 되돌려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축제’의 놀라운 효용이다.
해학과 익살, 웃음
축제에 있어서 술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웃음(해학)이다. 라블레의 작품에 있어서 웃음은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비판적인 요소로서도 중요하다. 그것은 민중적 전통 속에서 명맥을 이어온 또 다른 웃음의 줄기를 말한다. 전통사회에서 민중은 힘없고 억압받는 계층에 속한다. 이들은 예속과 억압 속에서 고개를 들 수도, 소리내 외칠 수도 없다. 다만 때때로 해학과 익살로 숨통을 트는 것이 고작이다. 말하자면 웃음은 말없는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라블레는 과장법, 저속한 표현과 행동, 외설스러운 표현, 그리고 비슷한 발음을 통해 비꼼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묘한 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중세적 전통의 성스러움, 신비로움, 영원성, 보편성은 온갖 쌍소리와 욕설과 음란함으로 범벅이 된 언어의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렇듯 라블레의 웃음은 중세에 대항한 무기인 것이다. 그러나 가공할 무기인 언어 앞에서도 살아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삶, 민중의 삶이다.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라블레의 중요성은 크다. 르네상스라는 시대상황을 고려해 볼 때 사상가로서의 라블레는 자유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개념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라는 표어를 창안해 낸 미슐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영웅을 골라내면서 라블레, 몽테뉴,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를 콜럼버스, 코페르니쿠스, 루터, 칼뱅과 함께 묶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그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의 계보를 찾으려는 데 관심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르네상스와 자유주의를 잇는 연결고리의 첫 인물로 라블레가 거론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16세기를 서구 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근대의 출발점으로 본다.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물리학에서의 뉴턴, 철학에서의 데카르트, 그리고 문학(특히 소설)에서의 라블레를 근대의 첫 번째 주자로 들 수 있다. 라블레가 동시대인들을 포복절도하게 하고 고민하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작품이 단순히 과장되고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 라블레의생애와작품
1483 18세기의 한 문서에 의거, 라블레 출생하다.
1494 몇 몇 연구가들의 주장에 의거, 라블레 출생하다.
1510 1512년까지 앙제 근처의 프란체스코 교단 라 본메트 수도원에 체류한다.
1515 프랑수아 1세 즉위
1519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
1524 프아투의 베네딕트 교단으로 이적한다.
1528 세속사제가 된다(파리 체류를 추정해볼 수 있다).
1531 몽펠리에 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에 관해 강의한다.
1532 리옹 자선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한다. 『팡타그뤼엘』 출간
1534 제1차 로마 체류 기간.『가르강튀아』 출간
1535 제2차 로마 체류 기간. 『1535년도 역서』 출간
1537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539 빌리에-코트레 칙령 발표
1543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가 고등법원에 의해 금서 조치를 당한다.
1546 『제3서』가 소르본 대학에 의해 금서 조치를 당하다. 메츠로 피신한다. 루터 사망
1547 마지막 로마 체류 기간. 앙리 2세 즉위하다.
1550 라블레의 작품에 대한 10년간의 출판 허가가 떨어지다.
1551 뫼동의 주임사제가 된다.
1552 『제4서』 완간
1553 라블레 사망하다.
1564 『제5서』 완간(가짜라는 설도 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글쓴이 양혁찬님>
▣ 저 자 프랑수아 라블레 Fran ois Rabelais(1483? 1493?∼1553)
“암담한 밤으로부터 해방된 우리 눈길은 태양이란 유일한 횃불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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