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인터넷, 관료주의의 시대
2000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미국인의 25%가 혼자 살고 있었다. 1인 가구가 7%에 지나지 않았던 1940년대와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2006년 《미국 사회학 리뷰》에 게재된 대규모 연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미국의 사회적 고립: 지난 20년간 지인 네트워크의 변화>라는 제목의 이 연구는 미국인들의 ‘절친 네트워크’를 조사했다. 여기서 절친이란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거나 조언을 구할 만큼 가까운 지인을 뜻한다. 조사 결과 1985년에는 미국인의 10%가 절친이 없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2004년에 이르러서는 절친이 없다는 응답이 25%로 늘었다. 결론적으로 지난 20년 동안 미국인들은 친밀한 지인을 잃었고, 특히 가족이 아닌 지인의 수가 크게 감소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친구들끼리 또는 이웃들끼리 직접 접촉하는 일이 갈수록 줄어든다.
인터넷은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SNS)에 수백 명의 ‘친구’가 있다지만 그것은 절친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전문가들은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의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가 사람들에게 허구적인 연계의 느낌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지지만 실제 인간관계와 똑같은 지속적인 만족감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페이스북 이용자가 급격히 늘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연계에 굶주려 있음을 보여준다. 문자 메시지와 트위터와 같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또한 오히려 고립감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중이 억압적인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불행한 원인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확인할 기회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인적 능력이 부족해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은 억압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집단적 자신감을 공급해주는 결속을 가지지 못한다.
사회적 고립이 심해지는 원인들 중 하나는 사회가 점점 관료화된다는 것이다. 관료화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단조로운 기계음으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전화기에 대고 30분 동안이나 큰 소리로 질문에 답했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것이 기계의 ‘메뉴’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기계가 헷갈려 하다가 진짜 사람을 연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전화기에 대고 횡설수설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자존감과 품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우리 사회의 관료화와 비인간화 과정의 아주 작은 단면일 뿐이다.
오늘날 미국인들 대다수는 의미라든가 사회적 연계를 향한 그들의 인간적 요구와는 무관한 직업에 종사한다. 지난날의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비록 이윤의 도구로 전락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이윤을 요구하는 주체는 피와 살을 가진 상사와 사장들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사람을 상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처지가 개선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자동응답기에 대고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든다.
거짓말쟁이, 위선자, 이기주의자, 그리고 기업 미디어
이 책의 목표는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주 폭넓고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거짓말쟁이, 이기주의자, 위선자들의 농간에 넘어가서 집중력을 잃거나 분열하거나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14세 소년이었던 1970년, 베트남 전쟁이 확전을 거듭하자 나도 슬슬 징집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전쟁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나와 멀리 떨어진 존재인 권력 기구들은 냉담하기만 하고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내가 다리를 잃거나 생명을 잃어도 그들은 상관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내가 전쟁 포로가 된다면 전쟁을 지속할 구실이 하나 더 생기기 때문에 그들이 기뻐할 것도 같았다. 이것이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이다. 그런 현실이 두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나에게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니.
열네 살짜리 소년도 알고 있었던 바와 같이, 우리를 베트남 전쟁에 밀어 넣은 것은 민주당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확대한 사람은 닉슨 이전의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었다. “헤이, 헤이,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이셨나요?”(베트남전 당시 청년들이 풍자적으로 외쳤던 구호이다.) 나는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조언하는 엘리트들이 대부분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닉슨은 베트남전 종전에 관한 비밀 계획에 관해 거짓말을 했고 캄보디아 폭격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어른들은 닉슨과 존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면 거짓말쟁이를 알아보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우파 진영의 위선적인 엘리트주의자들로는 ‘치킨호크(chickenhawk)’와 ‘네오콘 콘맨(neocon con man)’이 있다. 치킨호크란 전쟁과 군사개입을 지지하면서 자기는 군복무를 극구 기피하는 정치인과 전문가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네오콘 콘맨이란 자유와 애국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엘리트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사기꾼들을 말한다. 자신이 대중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훌륭한 이상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엘리트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기업 미디어는 대중의 정치적 행동을 민주당 VS 공화당, 자유주의자 VS 보수주의자, 원주민 VS 이주민, 백인 VS 흑인, 급진파 VS 중도파 등의 전쟁으로 묘사한다. 기업 미디어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이런 식으로 보도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1) 힘없는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놓고 서로 미워하거나 서로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2) 모든 활동가들은 거짓말쟁이 또는 자아도취자 또는 위선자라는 냉소주의를 유포한다.
(3) 사람들이 정치 참여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든다.
(4) 무력감, 패배주의, 숙명론을 조장한다.
<“Get up Stand Up(깨어나라 일어나라)”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브루스 E. 레빈 지음, 역자 안진이님, 베이직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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