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족들의 철저한 냉대 속에서 자란 주인공 펠릭스는 한 무도회장에서 모르소프 백작부인을 만나 남모를 연모의 정을 품는다. 마침 요양차 방문한 시골 마을에 그 부인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펠릭스는 백작과 친분관계를 맺고 그 집을 빈번히 드나들면서 그들과 친해진다. 집주인인 모르소프 백작은 심한 우울증에 걸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닌 노인. 그리고 두 아이는 몹시 허약한 체질로 걸핏하면 중병을 앓아 부인을 걱정시킨다. 부인은 지금껏 남편의 포악한 성격과 허약한 아이들 사이에서 체념과 인내로 일관된 헌신의 나날을 보내왔으나 펠릭스의 출현으로 그 어둡고 지루한 생활에 한줄기 빛을 느낀다.
펠릭스는 부인의 권유로 파리로 진출, 곧 왕의 신임을 얻어 요직에 진출하고,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부인의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한결 더 대담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부인은 끝까지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요구한다. 이윽고 펠릭스는 영국 귀족인 더들리 후작부인을 만나 마침내 육체적인 사랑에 빠져버린다. 결국 이 소식은 모르소프 부인에게도 알려지고, 펠릭스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게 되는데...(요약)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펠릭스 고독하고 괴로웠던 어린시절을 겪은 인물로 모르소프 부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숭고한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
모르소프 백작부인 저명한 귀족 르농쿠르 후작의 딸. 결혼 이후 모르소프 백작의 괴팍한 성격과 건강치치 못한
아이들 사이에서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성녀 같은 인물이다.
모르소프 백작 시대의 흐름을 잘못 타고난 왕당파 열성당원. 매우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더들리 공작부인 영국 귀족부인으로서 모르소프 백작부인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
사랑에 있어서 매우 과감하고 정열적이지만 그만큼 쉽게 꺼져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고독한 어린시절에서 운명적인 사랑으로
갓난아이였던 내가 부모님의 어떤 허영심에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펠릭스의 유년기는 어머니로부터의 냉대와 아버지의 무관심, 그리고 형제들의 괴롭힘으로 점철된 고통의 연속이었다. 형이나 누이들이 잘못한 일은 으레 그가 뒤집어쓰게 마련이었고, 3년간이나 시골의 낯선 집으로 보내져 그곳 하인들의 동정심을 살 만큼 그는 완전히 가족들의 관심 바깥에 있었다.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혼자 있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고, 남들과 어울릴 줄 몰랐던 펠릭스는 학교에서도 급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던지라, 많은 시간을 몽상에 잠기거나 독서를 하며 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오라토리오회의 중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8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족 중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고, 심지어 라틴어 작문과 번역으로 상을 타게 된 날에도, 그가 간절히 편지를 썼건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르뇌트르 기숙학교에 다니던 시절, 12년 만에 가족들과 만났던 순간에도 그는 조그마한 실수를 매섭게 질책하는 어머니의 모습만을 대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결국 극도의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펠릭스는 이러한 답답한 환경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마침 그 순간 어머니를 만나는 바람에, 결국 그는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향한다. 그러나 시골에서도 역시 상황은 변치 않아서 그의 극진한 노력에도 어머니의 냉담함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모든 가족들의 관심은 여러 면에서 출중한 그의 형 샤를에게만 쏠린다.
어떠한 탈출구도 보이지 않던 암담한 상황 속에서 뜻밖에도 그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어놓은 큰 사건이 일어난다. 왕자를 위한 무도회에 형 샤를 대신 그가 집안을 대표해 참석하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펠릭스는 일종의 흥분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처음 접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무도회는 한마디로 열광의 도가니였고,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함을 한데 가져다놓은 것처럼 보였다. 왕당파에 속하는 수많은 명망 있는 인물들과 각 지방의 유력한 가문 사람들, 그리고 세련되고 기품을 지닌 귀부인들이 한데 어울렸고 곳곳에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화와 아름다운 음악과 춤이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고, 이곳에서 역시 그는 외톨이일 뿐이었다. 낯선 분위기에 지치고 압도당하여 무도회장 한구석에 소리없이 앉아 있는 펠릭스의 주변이 한 순간 갑자기 찬란한 빛으로 휩싸인다. 마치 외로워하는 그를 위해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흰옷을 입은 백합과도 같은 여인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 여인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갑자기 자신도 모를 신비하고 강한 힘에 이끌려 백옥과 같은 그녀의 어깨에 키스를 퍼붓는다. 그러자 그의 행동에 놀란 여인은 당혹스러움을 나타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유도 결과도 알 수 없는 이러한 펠릭스의 충동적 행위는 그의 내면 깊숙이 억눌려 있던 여러 감정들을 깨나게 한다. 그는 이 무도회 사건 이후로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삶을 느끼며 동시에 이름도 모르는 그 여인에 대한 깊은 애정에 빠져버린다. 이렇게 상사병에 빠진 그의 모습은 마치 무슨 큰 병을 앓는 사람처럼 가족들에게 비춰졌고, 어머니는 그를 친구의 저택이 있는 프라펠르로 보낸다.
어떠한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무도회의 바로 그 천사가 바로 그곳에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부인이 살고 있는 곳은 골짜기 언덕의 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클로슈구르드라는 저택, 모르소프라는 백작의 소유였다. 백작은 철저한 왕당파 지지자로서 젊은시절 열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밀려 시골에 머무르고 있으며, 백작부인은 유력한 집안인 르농쿠르 출신이었다.
부인을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애쓰던 펠릭스는 프라펠르 저택의 주인인 세셀과 함께 클로슈구르드를 방문하게 된다. 모르소프 부인은 무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꽃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도 그리던 부인과의 만남으로 펠릭스는 엄청난 흥분을 느꼈고, 부인 역시 그를 알아보고 동요를 보인다. 부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펠릭스는 그녀가 외모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찬 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펠릭스는 매마른 모정에 대한 향수와 함께 부인에 대해 더욱 강한 애정을 느낀다. 특히 병약한 두 아이 마들렌느와 자크에 대한 부인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식사 도중 모르소프 백작이 돌아왔는데, 첫인상부터가 쇠약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철저한 왕당파인 백작은 펠릭스의 집안이 왕에게 충성하는 명망 있는 집안임을 알고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며 환대한다. 펠릭스는 계속 부인과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백작의 마음에 들 필요를 느꼈고, 따라서 백작의 비위를 맞추면서 많은 대화를 갖는다.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던 백작 역시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펠릭스를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렇듯 백작의 호감을 산 펠릭스는 어려움 없이 클로슈구르드를 드나들게 되었고 자연스레 부인과의 만남의 시간도 많아졌다. 점차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이 가정의 속사정 역시 어느 정도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백작은 어린아이같이 변덕이 심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이러한 남편과 허약한 아이들 사이에서 부인은 끝없이 헌신하면서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역시 냉담한 가정환경 속에서 고통받았던 적이 있기에 펠릭스는 그녀의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자연히 부인과 펠릭스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공감이 형성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주사위놀이 도중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백작이 치명적인 실수로 지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백작의 모난 성격이 폭발해 마치 정신병자와 같은 발작를 일으킨다. 백작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 펠릭스와 부인은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때 펠릭스는 무도회에서의 일과 그 이후 자신이 느꼈던 엄청난 애정, 그리고 불행했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부인 역시 펠릭스와 비슷했던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와의 공감대를 형성해나가고, 이어서 결혼생활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 등 숨겨왔던 가정생활의 문제들을 고백한다. 펠릭스는 적당한 기회에 사랑을 고백하지만 부인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내세우며 정열적인 사랑을 거부한다. 결국 펠릭스는 부인과 영적으로 결합하겠노라 맹세한다. 부인은 이를 허용하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큰어머니가 애칭으로 불렀던 앙리에트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고 한다.
숭고한 첫사랑의 경험
첫사랑의 여자에 관해서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식은 자기 것, 그녀의 집도 자기 것, 여자의 행복은 자기의 행복이며 여자의 불행은 자기의 최대의 불행이다.
펠릭스는 계속해서 클로슈구르드를 드나들며 부인과의 애정을 확인해나간다. 이제는 한가족처럼 되어버린 그는 백작의 무능과 성격적인 결함을 낱낱이 알게 되고, 동시에 부인에 대한 동정과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부인이 요구하는 순수한 사랑과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펠릭스와는 달리 부인은 한 번의 키스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절제하는 모습을 유지한다. 펠릭스 역시 이러한 부인의 뜻을 존중하여 부인에게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바치며 정신적인 행복을 맛본다.
며칠간의 행복했던 나날이 지난 후 백작의 광증은 날로 심해져가고 부인의 고통을 커져만 간다. 펠릭스는 고통받는 부인 곁에 계속 머물기 위해 자크의 가정교사가 되겠노라 말하지만 부인은 자신 때문에 갇혀버리는 삶을 살아선 안되며, 더욱 출세해 앞으로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펠릭스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펠릭스는 파리로 떠나게 된다. 파리로 향하는 펠릭스에게 부인은 마치 어머니 같은 애정이 담긴 편지를 전한다. 그것은 파리생활에 있어 필요한 자세와 처세술, 무엇보다 여자관계를 조심하며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할 것을 당부하는 사랑과 충고의 말로 가득 찬 편지였다. 파리에 간 펠릭스는 부인의 충고에 따라 조심스럽게 사교계에 접근하며, 결정적으로 부인의 아버지인 르농쿠르 후작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후작의 추천으로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직무를 맡는데, 그의 성실성은 국왕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던 중 부인에게서 아버지인 공작에게로 온 편지를 우연히 보게된 펠릭스는 모르소프 집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음을 알게 된다. 때마침 국왕의 칙서를 전하는 일을 맡아 그길에 클로슈구르드에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부인과 다시 만난 펠릭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깊은 애정을 확인하고, 부인 역시 그가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건강을 회복할 만큼 그와의 재회를 기뻐한다. 부인은 그가 없어 고독했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깊은 모성애와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다시 파리로 돌아간 펠릭스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국왕의 재임 중에는 절대로 해임되지 않는 참사원 청원심리관이라는 직책에 임명된다. 게다가 역시 모르소프 부인이 연결해준 블라몽 공작부인의 후원을 얻어 사교계의 중심으로 진출한다. 모르소프 부인에게서 온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된 국왕은 그와 부인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그에게 특별휴가를 내준다.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 기쁨에 펠릭스와 부인 모두 크나큰 행복을 느끼지만 크로슈구르드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백작의 신경증적인 증상은 날로 심해져만 가고, 심지어는 없는 병도 만들어내 부인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인은 펠릭스에게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고 위로를 구하지만,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정절과 순수한 정신적 사랑에 대한 마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쇠약하던 백작이 결국 몸져눕는다. 그렇게도 자신을 괴롭히던 남편이건만 부인의 상심은 엄청나게 컸다. 부인은 일종의 죄책감에 빠져 남편을 걱정하고 그의 회복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한다.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마치 성녀와 같은 모습으로 남편을 간호하는 부인에게 감동받은 펠릭스 역시 부인 곁에서 여러가지를 성심껏 돕는다. 이렇듯 거의 부부와 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며 부인과 펠릭스 사이의 친밀감은 더욱 깊어진다. 이러한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백작도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회복이 진전되어감에 따라 예전의 광증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부인은 개의치 않고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듯 남편의 짜증을 받아주며 계속 간호에 정성을 들인다.
그러던 중 국왕으로부터 급히 돌아오라는 전갈이 도착한다. 펠릭스가 갑작스레 떠나야 하자, 부인은 가장 든든한 지원군을 잃게 된 상심에 빠진다. 파리로 돌아간 펠릭스는 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없이 분주한 생활에 빠져든다.
정열과 순수함 사이에서
그 부인은 육체의 애인이었으며 모르소프 부인은 영혼의 아내였다.
모르소프 부인의 편지에는 백작의 어찌할 수 없는 광증에 덧붙여 두 아이들까지도 차례로 병에 걸려 그녀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음이 암시된다. 펠릭스 역시 이러한 부인의 고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괴로울 따름이다. 이 무렵, 그와 모르소프 부인 사이의 순수한 사랑이야기가 파리 사교계에 퍼지게 되었다. 방문하는 살롱마다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많은 귀부인들로부터 호감을 얻는다.
이때 마침 펠릭스는 명문의 영국 귀부인을 만나게 된다. 아라벨이라고 하는 그녀는 최고의 명성을 지닌 노귀족 더들리 공작과 결혼한 여자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명문가 출신다운 인품, 우아한 태도, 그리고 사교계를 휘어잡을 만한 뛰어난 재치와 매력을 가진 그녀는 평소 펠릭스의 성실함과 순수한 사랑에 호감을 가져왔던 터였다. 부인의 교묘한 접근에 펠릭스는 속에 억눌려 있던 쾌락적 욕망이 분출함을 느낀다. 결국 이 둘은 육체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아라벨 부인은 모르소프 부인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모르소프 부인이 잔잔한 호수처럼 깊은 사랑과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아라벨 부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라도 상대방을 유혹하고 적극적으로 욕망을 발산하는 그런 여자였다. 이렇듯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에 빠지자, 그러한 관계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사교계에 알려진다.
꾸준히 편지를 보내도 모르소프 부인에게서 전혀 답장이 없자 펠릭스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클로슈구르드로 떠나기로 작정한다. 펠릭스의 마음속 가장 깊은 부분을 모르소프 부인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라벨 부인은 이러한 그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이 기회를 교묘히 이용할 생각을 한다. 아라벨 부인은 펠릭스와 같이 떠나되 자신은 투르에서 머물면서 클로슈구르드 근처에는 접근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그를 유혹해, 동의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운명의 덫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모른다.
급하게 찾아간 클로슈구르드에서 만난 부인의 태도는 짐작대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오랜만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따뜻한 분위기는 자취도 없고, 오직 무관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냉담함과 형식적인 친절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소프 부인은 이미 펠릭스가 영국의 귀부인과 연애에 빠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펠릭스는 백작과 하인들의 말을 통해 최근 들어 전에 없이 부인이 회한에 사로잡혀 예전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였음을 알게 되었다.
펠릭스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부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부인은 요지부동인 데다 더 이상 앙리에트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절망 상태에 빠진 펠릭스는 간신히 부인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자신이 아라벨 부인과 사랑에 빠진 것은 젊은시절의 육욕을 잠재우지 못한 결과일 뿐이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단지 한순간의 육적인 애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모르소프 부인 역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부인은 이제는 그들의 관계가 예전처럼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투르에 머무르던 아라벨 부인과의 약속을 잊고 있던 펠릭스에게 모르소프 부인은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청한다. 부인이 가자고 하는 길이 아라벨과 만나기로 한 곳임을 알게 된 펠릭스는 당황하여 장소를 옮기려 하지만 부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그곳만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결국 펠릭스는 부인에게 아라벨 부인과의 약속을 고백한다. 그런데 부인은 자신의 눈으로 라이벌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샤를마뉴 벌판길에서 마침내 두 부인은 만난다.
아라벨 부인은 경멸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즉시 말을 달려 돌아가버린다. 클로슈구르드로 돌아가는 길에 모르소프 부인은 펠릭스에게 아라벨 부인에게 가보라고 한다. 아라벨 부인을 찾아간 그는 강력히 모르소프 부인을 두둔하지만 아라벨 부인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모르소프 부인의 보수적인 면을 비난하며, 자신은 그를 위해 몸과 마음 전부를 바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펠릭스는 극도의 정신적인 부담 속에 모르소프 부인을 다시 찾아간다. 그를 괴로워하는 부인의 모습에 깊은 상심과 회한을 느끼지만 차가움과 형식적인 친절로 대하는 부인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찾지 못한다. 갖은 노력 끝에 부인이 자신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음을 위안 삼아 펠릭스는 다시 파리로 떠난다.
골짜기의 백합, 마지막 잎새를 떨구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죽음과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모든 폭풍이 가라앉았을 때와 같은 맑은 표정과, 또 내가 여전히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얼굴을 보고 있었으나, 그것은 내 사랑에 응답해주지 않는 하얀 앙리에트의 얼굴일 뿐이었다.
파리로 돌아간 펠릭스와 아라벨 부인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진다. 아라벨 부인은 그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불륜은 최초의 육체적인 열정이 식기 시작하면서 허무와 고통을 불러오고, 펠릭스는 다시 한번 모르소프 부인의 정신적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할 때는 정신없이, 열렬하게 온몸을 바쳤다가도 막상 그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사교계 여성으로서 점잖을 빼며 자신에게 소홀한 아라벨 부인은 펠릭스의 마음속 깊은 사랑의 결핍을 메우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펠릭스는 모르소프 부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렇듯 아라벨 부인의 변덕에 지쳐 있을 무렵 펠릭스는 국왕과 르농쿠르 후작과의 대화를 통해 모르소프 부인이 몹시 위중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다급해진 펠릭스는 국왕에게 부탁해 휴가를 얻어 클로슈구르드로 떠난다. 온갖 회한에 사로잡혀 부인의 집으로 가는 도중 의사를 만나게 돼, 부인이 알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혀 죽어가고 있음을 전해듣는다. 부인의 임종을 위해 와 있던 신부는 저택에 도착한 펠릭스에게 부인이 죽음을 앞두고 크나큰 심적 갈등을 겪고 있으니,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한다.
펠릭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인은 그와 단둘이 만나기를 요구한다. 부인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주변 집기들을 모두 치우고 깨끗한 흰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그를 맞이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마음의 표시였다. 이러한 부인의 모습에 놀란 펠릭스를 보고, 부인은 신부가 말한 대로 심적인 동요를 보인다. 부인은 그동안 자신이 정열적인 사랑을 거부해왔던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 다시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와 마음껏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신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가운데, 펠릭스는 극도의 괴로움과 후회에 사로잡힌다.
잠시 밖으로 나온 펠릭스는 언젠가 부인이 그에게 앞으로 결혼해서 맡아달라던 딸 마들렌느를 만나지만 그녀는 그와 어머니 사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매우 냉담하다. 잠시 후 임종이 가까워짐에 따라 부인은 다시 예전의 숭고한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자식들과 비통하게 얼싸안은 뒤 부인은 펠릭스에게 조금 전에 한 말을 이해해줄 것과, 다시 예전같이 자신을 생각해줄 것과, 자신의 마지막 임종시에 곁에 있어줄 것을 부탁한다. 마지막 임종 순간을 앞두고 모든 가족들과 펠릭스가 모인다. 깊은 상심에 빠진 남편 모르소프 백작에게 부인은 오히려 자신이 그를 더 잘 보필하지 못한 점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펠릭스에게도 역시 용서를 구하고 자신이 죽은 후 읽어보라며 편지 한 통을 전해준다. 그간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던 점을 신부에게 고백한 뒤 부인은 펠릭스에게 마지막 시선을 보내며 조용히 숨을 거둔다. 삭막한 가정과 한 젊은 영혼에게 흔들리지 않는 빛을 주었던 ‘골짜기의 백합’은 그렇게 그 마지막 꽃잎을 떨구었다. 부인의 장례에는 수많은 이들이 참석해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던 부인의 넋을 기렸다.
부인의 죽음 이후 펠릭스의 존재는 클로슈구르드에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에게 냉담한 아이들과 여전히 변덕스러운 성격의 백작 사이에서 더 이상 그가 머물 곳은 없어진 것이다. 펠릭스는 부인이 마지막으로 전해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편지에는 펠릭스를 만난 이후 줄곧 부인이 느꼈던 사랑의 고통과 감정들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부인 역시 우울한 생활 속에서 펠릭스를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떴던 것이었다. 편지에는 그가 무도회에서 부인의 어깨에 퍼부었던 정열적인 키스 이후 부인도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사랑과 관능적 쾌락 사이에서 적지 않게 갈등했음이 적혀 있었다. 이러한 갈등에 시달리던 부인은 불륜에 빠지지 않고도 계속 그를 사랑할 방법으로 딸 마들렌느를 그와 맺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도 이미 그가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난 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특히 펠릭스와 아라벨 부인과의 관계를 전해듣고 난 후에는 생각하기에도 두려운 엄청난 질투에 사로잡혔고, 그때의 고통이 결국 죽음과도 직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가족들에게 애정을 가져줄 것과 특히 백작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며 끝을 맺었다. 편지를 읽은 후 펠릭스는 자신으로 인해 부인이 당한 고통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엄청난 후회와 절망에 몸부림친다.
끝없는 추억의 고리
하나의 영혼이 내 영혼 속에 있다. 우리가 어떠한 선을 베풀고 아름다운 말을 입 밖에 내놓을 때, 그 영혼이 이야기하고 그 영혼이 선을 베푸는 것이다.
마들렌느의 마음을 알기 위해 펠릭스는 다시 클로슈구르드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것은 완전한 상실감에 빠진 백작과 자신에 대해 더없이 냉담한 마들렌느의 태도뿐이었다. 펠릭스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생각했던 계획을 넌지시 언급해보지만 마들렌느는 단호히 거부하고, 심지어 이제는 더 이상 클로슈구르드에 오지 말아줄 것을 요구한다. 부인과의 옛 정이 깃든 집을 뒤로 한 채 펠릭스는 쓸쓸히 떠난다.
파리로 돌아온 펠릭스는 아라벨 부인을 찾아가지만 이미 그와의 사랑을 포기한 부인과 그녀의 집에 모인 이들의 조롱섞인 냉소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그후 펠릭스는 어떠한 여성과도 접촉하지 않고 오직 모르소프 부인과의 추억 속에 잠겨 정치에만 집중한다. 샤를 10세의 즉위 후 외교계로 진출한 그는 꾸준하게 출세의 길을 닦아나간다. 모르소프 부인과의 추억은 끊임없이 그를 지켜주고 안내해주는 마르지 않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이렇게 다른 모든 여성들에 대해 극도로 절제하던 주인공의 결의도 결국에는 꺾이게 되는데 바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고백한 대상인 나탈리라는 여성 때문이다. 그는 깊숙이 자리잡고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던 모르소프 부인과의 추억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심정에서 새 애인인 나탈리에게 이 글을 적어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탈리에 답장은 펠릭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나탈리는 예전의 사랑에 얽매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는 모르소프와 아라벨이라는 두 여인을 상대로 싸워나갈 자신이 없기에 그와의 사랑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며 결별선언을 한다. 그녀는 이러한 식의 고백은 상대방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가 숭고한 사랑의 여인과 정열적인 사랑의 여인 둘 다에게 고통을 준 것을 비난한다. 모르소프 부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벨 부인에게도 잘한 게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르소프 부인을 죽음으로까지 이끈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이렇게 몇 마디 감상적인 말로 대신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의 추억에 둘러싸여 여성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한 것이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향한 눈을 멀게 한 것이라며, 자신은 그와의 사랑을 끝마치겠노라고, 그리고 앞으로 만나는 여성에게는 사랑에 대한 추억의 짐을 지우지 말 것을 요구하며 편지의 끝을 맺는다.
<“골짜기의 백합 Le lys dans la vall e”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글쓴이 김모세님>
어머니와 여인, 그리고 문학
프랑스 근대 문학의 창시자이자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발자크. 어마어마한 다작과 인간세계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대가. 그 삶을 들여다보기는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많은 거장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발자크도 사랑, 야망, 성공과 실패로 점철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발자크가 펼쳐 보인 사랑의 여정이다. 발자크는 일생 동안 네 명의 여인들과 사랑에 빠진다. 얼핏 생각하면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지 의아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네 명의 여인들 모두가 남편과 아이를 둔 기혼여성이자 돈 많은 귀족들이었다는 지점에 이르면 호기심이 발동한다. 특히 그 중에는 발자크보다 서른세 살이나 연상인, 그야말로 어머니뻘인 여인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듯 범상치 않은 발자크의 애정행각은 그의 작품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발자크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고독의 나날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약간의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곤 했다. 발자크는 다섯 살 때 투르의 르게 사숙에 다녔고 여덟 살에 집을 떠나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방돔 기숙학교에 다녔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생활이 가져다준 애정결핍, 기숙학교의 엄격한 교육, 고독감으로 시달린 어린시절을 보내고 청년으로 성장한 발자크는 작품활동을 하면서 출판업과 인쇄업에도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하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곤경에 빠진다.
발자크는 이러한 역경 속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베르니 부인이다. 베르니 부인은 발자크보다 서른세 살이나 연상으로 이미 손녀가 있는 할머니였다. 발자크는 어머니 또래의 이 부인에게서 그가 항상 바라오던 모성애적인 사랑을 받게 되고 그 즉시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거의 파산상태에 놓였던 처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찌 됐든 베르니 부인과의 사랑은 청년기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으며, 발자크는 이 사랑을 통해 용기를 되찾고 내적으로도 성장한다.
이러한 경험은『골짜기의 백합』의 모르소프 부인 등 작품 속 여러 인물에 반영되어 모성애 강한 여인상을 구현해냈다. 이후 발자크의 여인상은 이 베르니 부인이라는 모델에 고착되면서, 일생에 걸쳐 젊은 여인들보다는 40대 여인을 선호하게 된다. 즉, 발자크의 이상형은 결핍된 어머니의 사랑과 금전적인 궁핍을 채워주면서 평민 출신인 자신의 신분상승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돈 많은 귀족이었던 것이다.
1831년 발자크는 카스트리 공작부인이라는,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인으로부터 일종의 팬레터라 할 편지를 받는다. 그는 이후 이 여인에 대한 연모의 정을 키워나가지만 이 사랑은 그에게 작품활동의 중단과 정신적 상처만을 안기고 끝난다. 그 무렵 또 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그녀가 바로 베르니 부인 못지않은 영향을 끼친 한스카 백작부인이다. 한스카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이후 발자크가 사망하는 1850년까지 지속된다.
발자크의 나이 37세 때, 그에게 참다운 사랑을 가르쳐준 베르니 부인이 죽고 연달아 사업이 실패하면서 발자크는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애인 비스콩티 백작부인이 있었으며, 그녀는 이렇게 발자크가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특히 물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던 발자크는 1850년, 18년간 교제해온 한스카 부인과 우여곡절 끝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엄청난 다작이 가져다준 피로와 1848년 2월 혁명의 발발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그해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모든 것, 『인간희극』
발자크는 소설, 희곡,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걸쳐 초인적이라 할 정도의 작품을 썼다. 그의 글에서는 주제의 한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 글의 소재나 주제가 되었다. 그는 이같이 방대한 작품들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를 조망해주는 『인간희극 La Com die Humaine』이다. 단편과 희곡, 서한, 기고문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이는 발자크의 작품군 중에서 단연 가장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총 97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인간희극』속에는 약 2500여 명의 인물들의 삶이 살아숨쉰다.
각각의 작품은 당연히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체계적으로 배치된 데다가 인물들이 종횡무진 여러 작품에 다시 출현함으로서 입체감이 부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인간희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골짜기의 백합』은 『인간희극』의 두 번째 부분인 ‘지방생활의 장면들’에 속한 작품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감성적이고 순진한 청년과 절도 있고 헌신적인 부인 사이의 숭고한 사랑을 보여준다.
▣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골짜기의 백합』은 『인간희극』의 두 번째 부분인 ‘지방생활의 장면들’에 속한 작품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감성적이고 순진한 청년과 모성애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가족들에 헌신적이고 철저하게 절제된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부인 사이의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을 보며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전체적인 줄거리가 작가인 발자크의 전기적 자료와 상당부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펠릭스는 어린시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느끼고 자란 인물로 이것이 바탕이 되어 모성애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모르소프 부인에게 진한 연모의 정을 느낀다. 발자크의 유년시절 또한 그리 풍족한 사랑을 받은 시기라고는 할 수 없음을 전기적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주인공 펠릭스가 12년 동안 기숙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던 것과 마찬가지로 발자크의 어머니도 그가 기숙학교에 머무는 동안(물론 학교의 규칙상 어쩔 수 없다 해도) 단 두 번밖에 면회를 오지 않았다. 이 당시 발자크는 펠릭스처럼 고독한 시간을 명상과 독서로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유년시절의 경험은 발자크로 하여금 서른세 살이나 연상인 베르니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한 주원인이기도 하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절망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발자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준 베르니 부인의 모습은 작품 속의 모르소프 부인을 통해 그대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다분히 나이 많고 모성애가 풍부한 부인과 젊고 정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여인들 사이를 구분지어 전자 쪽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 역시 작가의 여성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발자크는 베르니 부인과의 사랑 이후 젊은 여인보다는 모성애 강한 중년 여인을 더욱 좋아했다.
중년 부인과의 관계를 선호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 부인의 모성애에 기인한다. 어린시절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청년 발자크와 펠릭스를 베르니 부인과 모르소프 부인에게로 인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 속 모르소프 부인의 이미지가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어머니로서 나타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작가의 심리 속에서 결핍되어 있던 기본적인 사랑에의 욕구가 작품 속 이상적이고 완벽한 여성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성애와 관련해서는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는 물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작품 속 부인의 집이 엥드르 강가에 위치한 골짜기의 저택이라는 점과 펠릭스가 부인과의 사랑에 이상 전선이 생길 때마다 항상 향하는 곳이 바로 이 강이라는 점은 재미있다.
이 작품은 전체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따른다. 예를 들어 모르소프 부인과 펠릭스가 겪는 영과 육 사이의 대립,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사랑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르소프 부인과 더들리 부인, 또한 정열적이지만 가식적이고 냉혹한 파리와 무미건조하지만 은은하고 포근한 시골의 대립 등 모든 것이 둘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전자는 선하고 좋은 것으로, 후자는 악하고 나쁜 것으로 비쳐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모르소프 부인은 선하고 더들리 부인은 악하다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정신적 사랑이 육체적 사랑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 더들리 부인의 육체적 사랑에는 정신적인 면은 결코 없었단 말인가? 오히려 펠릭스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아닌가?
작품을 펠릭스의 1인칭 시점에서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사실 이러한 의문을 품기 어렵다. 펠릭스의 관점 자체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으로 일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지 이러한 관점을 벗어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 또한 제공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나탈리의 답장 부분이다. 나탈리는 모르소프 부인도 더들리 부인도 아닌 바로 펠릭스를 비난하고 있다. 두 부인이야 말로 우유부단한 펠릭스의 사랑에 희생당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서양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에서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는 지배적인 사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은 항상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집안 일이나 하며 가정에 헌신적인 여성은 바람직한 것으로, 그 반대의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여성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이 전도되는 요즘의 실정에서라면, 이 작품을 위와 같이 거꾸로 읽어보는 것 또한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 발자크의생애와작품
1799 5월 20일 베르나르 프랑수아 발자크와 안느 샤를롯 로르 살랑비에 사이의 둘째로 태어나다. 이후 4세 때까지 생 시르 쉬르 누아르의 한 유모에게 4세 때까지 맡겨진다.
1807 방돔 오라토리오회 중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6년간 기숙사 생활을 한다.
1813 파리에 있는 강세학교에서 기숙생 생활
1816 법대에 등록하고, 소송대리인 기요네 메르빌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한다.
1819 문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 레디기에르가에 있는 고미 다락방에서 기거를 시작한다. 비극 『크롬웰』을 쓰지만 실패한다.
1822 45세의 여인 베르니 부인과 교제한다.
1826 출판사, 인쇄소, 활자 주조소 경영, 모두 실패하고 엄청난 채무를 안게 된다.
1829 오노레 발자크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첫 작품 『올빼미 당원』을 발표한다. 이후 『결혼생리학』을 발표하여 문학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1832 카스트리 공작부인과 불행한 관계, 한스카 부인과 서신 교류를 시작한다.
1834 『으제니 그랑데』발표. 비스콩티 백작부인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1835 『고리오 영감』발표. 『파리시평』인수.
1836 『골짜기의 백합』에 관한 『파리 지』와의 재판에서 승소. 『파리시평』청산. 베르니 부인 사망
1841 퓌른느와 『인간희극』출판을 계약하다. 그후 17권 출판
1845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는다.
1850 3월 베르디체프에서 한스카 부인과 결혼하여 5월 파리에 도착한다. 8월 18일 사망.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묻힘. 빅토르 위고가 조사를 헌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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