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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만남

[중산] 2011. 12. 26. 08:32

 

 

운명적인 만남

여행의 충동이 일어난 후 아센바하는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로 인해 두 주 후에나 뮌헨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트리에스트로 가서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 포올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먼저 여장을 푼 곳은 아드리아 해의 어느 섬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서 아센바하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아센바하는 별 이유 없이 예전에 갔던 적이 있는 베니스를 택했다.

 

 

베니스로 가는 배에 올랐을 때 아센바하는 갑판에서 젊은 한 무리가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빨간 넥타이를 하고 파나마 모자에다 최신 유행의 크림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유난히 수선을 떠는 게 눈에 띄었는데, 이 사내를 자세히 살피다가 아센바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눈과 입 언저리의 잔주름은 두꺼운 화장으로 가렸고, 머리는 가발이었다. 콧수염도 염색을 한 데다 누런 이빨은 값싼 의치임에 분명했다. 아센바하는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이 늙은이는 왜 이렇게 청년처럼 가장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 노인이 가짜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불쾌한 기분으로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도 습했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는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한숨 자고 나니 베니스에 거반 닿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차츰 육지가 눈에 들어올 때 아센바하는 아까 보았던 가짜 청년이 궁금했다. 노인은 술에 골아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정을 해대고 있었다. 그 꼴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추했다.

 

베니스에 내린 아센바하는 휴양지인 리도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기선정류소까지 갈 작정으로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검은 곤돌라는 죽음의 자리를 연상시켰다. 관처럼 검은 칠을 하고 검은 천을 두른 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호사스런 좌석이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들자 아센바하는 곤돌라가 기선정류소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기선정류소로 가라고 사공에게 외쳤을 때 그는 처음으로 밀짚모자를 삐뚜로 눌러쓴 잔인한 인상의 사공을 보았다.

 

 

리도로 가시는 거 아닙니까요?

 

알아서 모시겠다는 듯한 사공의 태도가 거슬려 아센바하는 방향을 돌릴 것을 요구했지만 사공은 막무가내였다. 아센바하는 이 바다 한가운데서 저 잔인한 인상의 사나이에게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은근히 두렵기도 하여 항의를 포기하고 말았다. 리도에 도착한 후 아센바하는 사공에게 삯을 주려고 잔돈을 바꾸어 선창으로 돌아와 보니 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에겐 면허증이 없는데 경찰의 순찰을 피해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래서 아센바하는 뜻하지 않게 공짜로 리도까지 오게 되었다.

 

호텔에 들어와 여장을 푼 방은 바다를 향하고 있어 전망이 좋았다. 아센바하는 창을 열고 흐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센바하는 호텔 휴게실로 내려갔다. 여러 나라에서 온 가지각색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정교사처럼 보이는 부인과 함께 앉아 있는 폴란드 아이들의 모습이 유독 아센바하의 시선을 끌었다. 소녀 셋과 막내로 보이는 열 네 살 가량의 사내아이였다. 무엇보다도 아센바하는 이 소년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창백한 얼굴, 품위 있는 용모, 죽 뻗은 콧날, 그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조각상과 같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누이들 셋은 수녀 같이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소년의 차림새에는 자유분방함이 깃들여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자 이 아이들의 어머니가 나타나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때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센바하의 시선이 소년의 것과 마주쳤는데 그 순간 아센바하는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날도 날씨는 좋지 않았다. 흙빛 하늘과 잿빛 바다, 거기에 썩은 냄새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불쾌해진 아센바하는 어차피 짐도 다 풀지 않은 터이니 곧바로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몇 년 전에도 베니스에 왔다가 날씨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돌아간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가서 아센바하는 아름다운 폴란드 소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소년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눈썹에는 기품이 서려 있고 귀를 덮은 고수머리는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센바하는 소년의 거룩하리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혼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센바하는 이렇게 결심했다. 바다와 해안은 나를 환영하지 않지만, 네가 머물고 있는 한 나도 여기 있겠어!

 

 

아센바하는 바닷가로 나가 방갈로 하나를 세내어 그 앞에 의자를 펼쳐놓고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근심 없는 얼굴로 마음껏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시선은 먼 바다를 향했다. 자주 접할 순 없었지만 그는 바다를 사랑했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완전한 세계였다. 그 완전함에 의지하여 휴식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바다를 동경했다. 이런 상념에 잡혀 있을 때 호텔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소년이 그의 앞을 불쑥 지나갔다.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던 아이들은 소년이 다가가자 이름을 부르며 환영하였다. 그때 아센바하는 소년의 이름이 탓지오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온 편지들에 회신을 보내고 원고를 쓰는 일에 손을 대어보지만 아센바하는 계속해서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소년은 아이들과 어울려 잘 놀고 있는데 그 중에 야슈라는 이름의 덩치 큰 소년이 탓지오와 가장 친한 것 같았다. 모래성이 완성되자 탓지오는 야슈와 어깨동무를 하며 물가를 걸어갔다. 아센바하는 야슈가 아름다운 소년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탓지오는 물로 들어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방갈로 쪽에서 폴란드 인 가족의 일행인 부인들이 아이가 걱정되는 듯 탓지우- 탓지우- 하며 이름을 길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달콤하기도 하고 야생적인 느낌도 있는 그런 울림이었다. 물에서 나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려오는 아이는 마치 하늘과 바다의 심연에서 솟아오른 젊은 신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센바하는 태고의 신화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황홀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이 곳에 계속 머물러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정오가 지나 객실로 올라간 아센바하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회색 머리털에다 지쳐서 예민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문득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명성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점심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탓지오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 속에서 아센바하는 탓지오를 아주 가까이 뜯어볼 수 있었다. 사지를 묶어놓는 그 아름다움에 다시 탄복하면서, 한편으로는 탓지오의 치아가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퍼졌다.

 

 

오후에는 베니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시의 탁한 공기로 인해 아센바하의 기분은 몹시 언짢아졌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 기름 냄새, 사람들의 향수 냄새, 운하에서 피어오르는 악취까지 숨통이 멎을 지경이었다. 밀리고 부대끼는 인파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열풍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고 열도 좀 오르는 듯 했다. 아센바하는 이렇게 건강에 좋지 않은 날씨에 베니스에 머무는 것은 엄청나게 해로운 일이라고 판단했다. 베니스가 아니라 다른 곳에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해안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다시 바꾸어 베니스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지배인에게 내일 체크아웃 하겠다고 통고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센바하의 마음에는 떠나기로 한 전날의 결심이 성급한 것은 아니었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기에 다시 바꿀 수는 없었다.

 

 

아센바하는 아침 일찍 자기를 태우러 온 택시기사에게 짐만 먼저 보냈다. 시간 여유는 빠듯했지만 그래도 아침식사를 하면서 탓지오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탓지오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던지고는 호텔을 나섰다. 운하를 통과하며 베니스를 다시 찬찬히 바라보자니 아센바하는 자신의 성급한 결정이 절실하게 후회가 되었고 알 수 없는 고통에 가슴이 메었다. 왠지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베니스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함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후회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에서 내려 기차시간까지 역에 닿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다급하게 역구내로 뛰어 들어간 아센바하는 우선 호텔에서 나온 직원을 찾아 짐이 제대로 부쳐졌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호텔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아센바하는 자기 짐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탁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황당한 실수라니!

 

그런데 그 순간 아센바하의 마음속에는 믿기 어려운 환희가 피어올랐다. 호텔 직원은 짐을 찾아보겠다고 허둥대었으나 짐을 실은 기차는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아센바하는 짐을 찾기 전에는 절대로 떠날 수 없으니 짐이 되돌아올 때까지 리도의 호텔로 돌아가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아센바하는 다시 리도로 오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이 우연은 무엇을 뜻하는가! 리도를 떠나올 때 느꼈던 서운함은 사라지고 자신이 맞이한 불운에 대한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는 만사가 잘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벅찼다.

 

호텔로 돌아온 아센바하는 되돌아온 것이 일단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대체 자신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열린 창가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저 아래서 그 아름다운 소년 탓지오가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탓지오, 그래 네가 여기 있었지! 그는 비로소 자신이 떠나려고 했을 때 괴로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탓지오 때문이었다는 것을!

 

 

 

낙원의 나날

극히 적절했던 불운에 의해 리도로 돌아온 아센바하는 비로소 남국의 바닷가가 주는 매력, 베니스라는 도시가 주는 친밀한 기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안일과 향락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베니스라는 도시와 리도의 해안만큼은 그의 의욕을 무디게 하고 마냥 행복하게 했다. 아침나절에는 바닷가에 나가 남국 바다의 푸름을 바라보며 즐기고 밤에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탓지오에게 있었다. 신경 쓸 일도 없이 그는 소년의 우아한 모습을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만족과 희열로 충만했고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다.

 

수영복을 입은 채 모래장난을 하는 탓지오, 물에서 헤엄치는 탓지오,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달려가는 탓지오, 어디 하나 결함이 없는 젊음에 찬 소년의 육체...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조차 아센바하의 귀에는 음악처럼 들렸다. 아센바하는 탓지오에게서 인간의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점점 깊이 도취되었다. 아울러 창작의욕도 활활 불붙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침에는 아름다운 소년을 뒤따라간 적도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에게 가까이 다다랐을 때 아센바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말 거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안일의 나날을 보내면서 아센바하의 마음에는 은근한 걱정도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저 폴란드인 가족이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온지 얼마 안되었다는 호텔 이발사의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아센바하의 일과는 탓지오와 함께 시작하여 탓지오와 함께 끝났다. 오전엔 바닷가에서, 또 오후엔 시내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탓지오를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아센바하와 탓지오 사이에는 일종의 필연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 같기도 했다. 탓지오도 아센바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일까? 아침에 소년이 바닷가에 나오면 특별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꼭 아센바하의 앞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아센바하는 일부러 딴전을 피우며 소년을 보지 않는 척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폴란드인 가족이 저녁식사시간에 식당에서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아센바하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호텔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가로등 불빛 속에 탓지오 남매들과 가정교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것 같았다. 달빛 같은 가로등 불빛에서 아센바하는 탓지오의 깊숙한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우연히 탓지오의 시선과 아센바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탓지오는 아센바하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미소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나르시스의 미소였다. 아센바하는 당황하여 그 자리를 떠나 호텔 뒤쪽 공원의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상스럽게 가슴이 뛰고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애정 어린 충고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 너 그렇게 웃어서는 안돼! 누구에게든 그런 미소를 던져주어서는 안돼!

 

그리고 그는 맥이 빠진 채 벤치에 기대고는 온몸을 떨면서, 그리움에 타는 사람이 내뱉는 바로 그 문구를 내뱉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찾아온 죽음

아센바하가 리도에 머문 지 사 주 째로 접어들었다. 날은 계속 더워지는데 이상하게도 손님 수는 줄어가는 듯했다. 이발소에서 아센바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이대로 계실 건가요? 그 놈의 병을 그다지 겁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병이라고? 아센바하가 되물었지만 이발사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발뺌했다.

 

정오쯤 되어 베니스로 건너간 아센바하는 폴란드인 남매를 뒤쫓다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놓치고 말았다. 광장의 다과점에서 차를 마실 때 그는 약품 냄새 같은 것을 맡았다.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약품 냄새가 더욱 짙었고, 현재 기후에서는 일종의 위장병이 유행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의 벽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관광기념품 가게 주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주인은 날씨가 더워지니까 늘 하던 예방조치지요 라고 건성 대답할 뿐이었다.

 

 

호텔에 돌아온 아센바하는 곧바로 신문들을 살펴보았다. 병에 대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고 독일어 신문에만 여러 가지 소문들이 실려 있었다. 아센바하는 그제야 독일 사람과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철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센바하는 탓지오가 떠날까봐 걱정됐다. 탓지오가 훌쩍 떠나고 나면 그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방도도 없을 것 같았다.

 

탓지오를 뒤쫓는 일은 이제 더욱 적극적으로 되었다. 탓지오 일행이 산 마르코 성당으로 들어가면 아센바하도 따라 들어가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탓지오 일행이 곤돌라를 대절해 타고 가면 몸을 숨기고 있던 아센바하는 얼른 뛰어나와 곤돌라를 불러 앞서간 곤돌라를 따라가기도 했다. 밤늦게 베니스에서 리도로 돌아 온 어느 밤에는 소년이 묵고 있는 방문 앞에서 이마를 문에 기대고 서 있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을 추적하는 동안 스스로 반성한 순간도 없지 않았다. 조상들이 현재의 자신을 보고 뭐라고 말할까? 그는 엄격하고 예절 바르고 사나이다웠던 조상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쓸쓸히 웃기도 했다.

 

아센바하는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폐된 위험에 대해 끈질기게 탐색했다. 호텔 가판대에서 독일어 신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시내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독일어 신문을 찾아 읽었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전염병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어느 저녁 호텔 앞뜰에 초라한 거리의 노래패가 나타나 공연을 벌였다. 아센바하는 테라스에 모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탓지오를 발견했다. 하지만 테라스 뒤쪽에는 탓지오를 지키는 부인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탓지오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바야흐로 사랑에 빠진 노인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받게된 것이다.

 

가수는 기타를 켜면서 익살맞은 몸짓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가 사람들 사이를 오갈 때 강한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노래를 마친 가수가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가까이 왔을 때 아센바하가 조용히 물었다. 베니스는 소독약으로 뒤덮여 있군.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둘러대며 멀어져 갔다.

 

 

노래패가 쇼를 끝내고 가버린 후 구경꾼들도 모두 자리를 떠났지만 아센바하는 오랫동안 홀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앞에는 부모 집에 있던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곱게 빨간 녹이 슨 모래가 작은 유리관을 타고 소리도 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다음날 아센바하는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영국 여행 안내소에서 돈을 바꾸면서 사무원에게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탐문했다. 젊은 영국인은 처음에는 의례적인 예방조치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이내 정직하게 진상을 들려주었다.

 

수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확대될 징조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유럽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 전염병은 갠지스 강 무더운 습지대에서 발생하여 - 그곳 대나무 밭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다고들 한다 - 놀라울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그리고 얼마 전 베니스에서 까맣게 죽어간 시체 속에서 그 콜레라균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베니스 보건 당국은 관광수익에 피해가 날 것을 고려하여 이 사실을 은폐해 버렸다.

 

영국인 사무원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라도 떠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통이 차단되는 것도 며칠 안 남은 듯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진상을 알고 난 충격에 현기증을 느끼며 아센바하의 머리에 맨 먼저 스친 것은 탓지오와 그 가족의 안전이었다. 탓지오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떠나라고 충고할까? 그러나 그는 결국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실을 알리는 것이 물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다,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그날 밤 그는 광란과 음탕함, 도취로 뒤범벅이 된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이방의 신을 향한 난잡한 제의가 펼쳐지고, 열광한 무리들은 -, 우-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휴양객들은 계속 달아났다. 바닷가는 점점 쓸쓸해지고 시내에서도 외국인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탓지오 가족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아센바하는 차라리 이 섬에 소년과 단둘이 남겨지기를 바랐다.

 

 

아센바하는 외모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젊어 보일 수 있을까, 이런 필사적인 기분으로 그는 몸에 장신구를 달고 향수를 뿌리고 화장을 하느라 몇 시간씩 보냈다. 그러나 탓지오를 마주치게 되면 자신의 늙어가는 육체에 구역질이 났다. 백발과 날카로운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절망과 수치심에 빠졌다.

 

더 자주 이발소를 찾게 된 아센바하는 이발사의 권유에 따라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짙은 화장으로 피부를 덮어보았다. 빨간 넥타이를 메고 리본이 달린 펠트 모자를 쓰니 더 한층 젊게 보였다. 아센바하는 자신의 변한 모습에 행복한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어느날 오후 아센바하는 소년의 뒤를 따라 시내로 들어갔다가 얼기설기 얽힌 도시의 미로에서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극심한 피로와 쇠약함에 추적을 단념한 아센바하는 심한 갈증을 견딜 수 없어서 약간의 과일과 딸기를 사서 걸으면서 먹었다. 그리고는 인기척 없는 작은 광장에 와서 계단에 주저앉아 쉬었다. 아센바하는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았다. 품위 있는 예술가,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던 예술가가 이렇게 초라한 꼴로 더러운 광장 한구석에 앉아 있다니...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아센바하는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음을 느끼며 바닷가로 나왔다. 호텔로비에 쌓인 짐짝들을 보고 그는 마침내 탓지오네 가족이 오후에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양객들이 모두 떠나 텅 빈 바닷가에는 탓지오와 아이들 몇 명만이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탓지오와 야슈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우악스런 소년은 탓지오의 몸을 누르고 앉아서 허둥대는 탓지오의 머리를 모래에 처박았다. 깜짝 놀란 아센바하가 탓지오를 구하려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야슈는 탓지오를 풀어주었다. 탓지오는 헝클어진 머리로 일어나 몹시 기분이 상한 듯 홀로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먼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센바하는 소년이 멀리서 자신을 향해 미소지으며, 바다 저편을 가리키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아센바하는 버릇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뒤따르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고꾸라진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토마스 만 지음>

 

 

 

어느날 갑자기

 

구스타프 아센바하, 쉰 번째 생일에 국가로부터 귀족칭호까지 받은 존경받는 작가.

 

어느 봄날 오후 뮌헨 교외로 산책을 나갔던 아센바하는 북부 묘지 근방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전차를 기다리다가 문득 건너편 시체안치소 건물의 계단 입구에 서 있는 밀짚모자의 사내를 보게 되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이 지방 사람은 아니었다. 무심코 사내를 관찰하던 아센바하는 상대의 매서운 눈초리와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아센바하는 뭔가 불안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머나먼 나라에 대한 동경, 방랑에의 그리움이었다. 그는 아득한 이국을 머릿속에 그렸다. 짙은 안개에 뒤덮인 하늘과 초목이 우거진 열대의 늪지대, 무성한 양치 식물의 덤불, 마치 뒤엉킨 어두운 욕망과도 같은 원시의 풍경, 그리고 대나무 우거진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의 눈빛을...

 

아센바하는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시계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작품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사명감에 늘 부대꼈다. 여름이면 산골에 있는 별장에서 보냈지만 그 역시 의무에서 해방된 시간은 아니었다. 뮌헨과 산골 별장에서의 생활, 끝없는 작업에의 몰두, 이것이 그의 삶 전부였다. 그런 아센바하의 마음에 지금 도피의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머나먼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충동, 부담을 벗고 모든 것을 망각하고 싶은 충동이.

 

문필가로서 감정의 나태함 같은 것을 엄격히 자제해 온 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불꽃과 같은 감정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겐 어떤 분기점이 필요했다. 먼 나라의 공기를 쐬고 새로운 피를 주입 받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까지 갈 것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휴양지에서 삼 사 주일 낮잠이나 자고 빈둥거리면 될 것 같았다.

 

전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센바하는 여행을 떠나기로 단단히 다짐했다. 차에 오르면서 돌아다보니 그에게 여행의 동경을 일깨워주었던 밀짚모자의 이방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 온 오 월 초순의 일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는 지체 있는 가문에서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대개 장교와 법관, 행정관 등으로 엄격한 규율에 제약받은 삶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보헤미아 지방 어느 악장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로 인해 이 가문에 새로운 피가 섞여들었다. 아센바하는 어머니의 피를 받아 외모에서 이국적인 색채를 띄었다.

 

어린 나이에도 성숙하고 기품 있는 몸가짐을 보였던 아센바하는 작가로서 사회에서 성공하고 명성을 얻고 싶었다. 재능을 타고난 작가는 아니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오늘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센바하는 청년 시절에도 자신에게 안일과 나태함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했던 것은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소년 아센바하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생활의 모토를 끝까지 해보자로 정하고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을 규율로 다스렸으며, 냉수마찰로 아침을 시작해서 규칙적으로 글쓰기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뚫고 나가는 영웅적인 의지의 인간상이 그려졌다.

 

아센바하는 일찍이 작가로서 명성과 품위를 얻었고 사회적으로도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작품에는 어딘가 관료적이고 교훈적인 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국정 교과서에도 실리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아센바하는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의 행복은 몇 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하나 있던 딸마저 출가해서 지금 그는 뮌헨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아들 같은 것은 얻어보지 못했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사회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고 명성을 누리던 노대가 아센바하는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만나고, 감각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떠나지 못한 채 객사하고 만다.

 

? 어째서 끈질긴 자제와 극기로 평생을 유지해 온 의지의 인간이 자신의 감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고 몰락하고 마는가? 또, 소년에 대한 사랑이라니? 그것은 예술가에게 허용되는 미에 대한 애착일까, 아니면 노쇠를 두려워하는 늙은이의 비정상적인 욕구일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러한 욕망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생을 부정하게 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매혹적인 남국의 도시 베니스에서 펼쳐지는 아센바하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는 이런 질문들을 계속 부추기면서 독자의 관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근원을 꿈꿨던 작가의 죽음

정신과 감성의 조화,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근대가 시작된 이후 서구인들은 예술이 인간을 그렇게 완전한 상태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자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허물어지면서 정신과 감성의 조화라는 이상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세기말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문학과 예술은 시민적 삶과 유리된 채 감각적이고 퇴폐적 경향을 추구하는 탐미적 데카당스로 빠지거나 아니면 형식과 도덕을 강조하면서 건전한 시민 생활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작가 아센바하는 분명히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문학 전체를 부정하며, 도취적인 미의 향락에 함락되어 이전 생활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히 허물어지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센바하의 죽음은 자신이 사명으로 인식했던 건강하고 도덕적인 삶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이기에 부정적인 결말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센바하의 죽음은 몰락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삶의 완성을 뜻한다. 삶을 완전히 뒤바꾸고 마침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운명적인 여행은 잠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우연한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충동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아센바하는 이미 자신의 문학에서 뭔가 부족한 면을 감지하고 있었다. 2장에서 소개되는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아센바하에게는 이미 이성적인 모럴리스트의 기질과 자유분방한 예술가 기질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자제력과 불굴의 의지로 작가로서 성공하고 명예도 획득했지만, 이는 자신의 기질 가운데 한 부분, 즉 자유분방한 감성적 성향을 억압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센바하가 자신의 문학에서 결핍으로 감지한 것은 곧 일면적으로 발전해 온 자신의 삶의 결핍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아센바하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형식을 일탈했을 때, 평생 억눌리고 부정되었던 내부의 또 다른 본능은 이국의 낯선 공간에서 해방되어 아센바하를 걷잡을 수 없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아센바하의 베니스 행은 결국 잃고 있었던 또 다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먼 곳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순간 아센바하는 불현듯 원시의 자연 풍경을 상상하는데, 이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 곧 근원으로의 회귀와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아센바하는 베니스에 와서 새로운 자신의 삶을 누리게 되고, 마침내 원시 공간으로부터 찾아온 병을 맞아들이며 죽는다. 그는 곧 자기가 동경했던 여행의 최종 목적지, 근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린 소년의 향한 나르시스의 미소

이제 아센바하가 우연히 맞게 되는 사람들, 사건들은 모두 운명에 의해 예정된 것이 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베니스에 가기로 결정하게 된 것부터가 그렇고, 배 위에서 목격한 가짜 청년의 역겨운 모습은 훗날의 아센바하 자신의 모습을 예고하는 것 아닌가! 이상한 곤돌라 사공은 마치 강제로 아센바하를 탓지오가 있는 리도로 데려다 주는 듯하고, 또 짐이 잘못 발송되는 바람에 아센바하는 베니스에 영원히 묶이게 된다.

 

이렇게 우연히 도착한 베니스에서 아센바하는 인생에서 마지막 시련이자 최고의 행복이 될 탓지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탓지오에 대한 사랑,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감정의 측면이 분출되는 계기가 왜 하필 동성에 대한, 그것도 어린 소년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처음에 탓지오를 바라보는 아센바하의 시선은 그리스 조각을 바라보는 듯한 미적 관조였다. 그러나 이 시선은 이내 열정으로 변하고 이 열정은 사랑의 대상과 결합하고자 하는 에로스적 충동으로 발전하며, 이 사랑이 성취될 수 없다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아센바하는 탓지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사회 모럴에 위배되는 동성애, 바로 이 점이야말로 도덕가 아센바하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센바하는 탓지오에게 빠져들었을까? 물론 탓지오의 외모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발단이었지만, 아센바하에게 더 중요한 탓지오의 의미는 탓지오가 아센바하의 반대상인 동시에 아센바하 자신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노쇠한 아센바하의 경직된 외모, 젊은 탓지오의 분방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대립되지만, 탓지오에게 깃들여 있는 기품과 병약한 면에서 아센바하는 자신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센바하의 동성애는 곧 자기애(나르시시즘)의 표출이었다. 아센바하는 탓지오의 미소를 보고 나르시스의 미소라고 했지만 정작 나르시스인 사람은 아센바하 자신이다.

 

자아를 새로이 확인한 아센바하가 사랑에 안타까워하며 죽어간 곳 베니스. 북유럽 문명이 동경하는 남국 도시 베니스의 바다와 바람과 뜨거운 태양은 북구인의 냉철한 정신성을 해방시켜 감각적 세계를 향유토록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곳은 대륙의 문명과 원시적 자연인 바다가 맞닿는 곳이기도 하다.

 

아센바하의 직접적인 사인은 소설에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탓지오를 마지막 추적할 때 사먹은 과일로 인해 콜레라에 전염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전염병이 곧 인간을 능가하는 자연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외부적 세력인 전염병과 인간 내면에 도사린 자연적 충동이 함께 한 인간을 지배하고 죽음으로 이끈 것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럴리스트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던 아센바하의 형상에서 시민적 정신문화의 대표자를 볼 수 있다면, 자연력의 외적 내적 공세에 허약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을 통해 도덕과 규율, 건강한 정신성이라는 일면만을 강조하던 당시 시민사회조류의 허약함을 간파한 작가의 시선까지 감지할 수 있다.

 

 

 

행복한 미소로 맞이한 근원의 세계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항상 마주하는 문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정신의 면이 날카로운 이성과 도덕성으로 첨예화되는 동시에 반대급부로 감성적인 면 역시 관능의 도취적 추구라는 형태로 극단화되는 인간도 존재한다. 그런 인간은 냉철한 정신성과 관능적 욕구가 결코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베니스에서 확인된 구스타프 아센바하가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도한다. 아센바하는 죽었지만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품위를 상실하고 비참하게 몰락한 도덕가가 아니라 사랑스런 자신의 분신 탓지오를 눈앞에 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삶을 조용히 마무리하는 인간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대가는 죽음이었지만, 아센바하는 베니스에서의 몇 주 동안 자신의 삶에서 잊혀졌던 가능성들을 바닥까지 확인했고, 가슴 설레는 사랑의 환희와 고통의 여분을 모조리 체험하고 나서 홀가분하게 근원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하지만, 책을 덮는 독자의 가슴속에는 이런 한마디 경고가 조용히 울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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