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상인 게오르크 벤데만은 3년 전에 러시아로 이주한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유복한 집안의 딸인 프리다 브란덴펠트 양과 약혼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는 자신의 약혼 사실을 친구에게 알리려고 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게오르크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갑자기 아버지는 벌떡 일어서며 불같이 화를 낸다. 아버지는 그런 친구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게오르크가 자신을 계속 속이고 있다고 소리치는데...(요약)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게오르크 벤데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세계(아버지, 약혼녀, 친구)에 함몰되는 인물. 주인공
아버지 마치 신처럼 아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인물
친구 게오르크의 친구로 러시아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프리다 브란덴펠트 게오르크의 약혼녀
러시아로 간 게오르크의 친구
“화창한 봄날 일요일 오전이었다. 젊은 상인 게오르크 벤데만은 (...) 날림으로 지은 나지막한 주택 중 한 채의 2층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외국에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장난하듯이 느릿 느릿 편지를 봉한 다음, 팔꿈치를 책상에 괸 채 창너머로 강과 다리와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건너편 둑 언덕을 바라보았다.”
게오르크의 친구는 조국의 현실에 불만을 품고 오래 전 러시아로 도망치듯 떠나가 버렸다. 그는 지금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고향을 방문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업이 오래 전부터 부진한 듯하다. 그의 얼굴은 이상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고, 안색은 누렇게 떠서 무슨 병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그곳의 교민들과 사교적 모이도 갖지 않을 뿐더러, 고향의 친지들과도 이렇다할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혼자서 살아가는 삶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이다.
게오르크는 역경에 빠져 있는 이 친구에게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할지 생각한다. 그는 친구에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옛 친구들과 우정을 새롭게 다지며, 그들의 도움을 기대해보라고 조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게오르크가 그 친구를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그가 오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애정어린 충고가 “자네 노력이 실패했으니, 이제 손을 떼고 돌아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도 고향 사정을 이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괜시리 섣부른 조언으로, 페테르부르크에 계속 머물 친구의 자존심만 상하게 해서 친구관계만 소원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친구가 정작 조언을 받아 들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해도, 기가 꺾여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 수도 있다. 부끄러워하면서, 결국은 고향도 친구도 다 잃어버리는 신세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러시아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는 편이 그에게 훨씬 나을 것이다.
친구는 삼 년이 넘도록 고향에 오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상황 때문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세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친구는 러시아의 정치상황 때문에 소상인조차도 그 나라를 쉽게 뜰 수가 없다고 말한다.
친구가 고향을 떠나 있던 세월 동안, 게오르크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 게오르크는 나이 드신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친구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애도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 내용은 딱딱했다. 오랜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어머니를 여읜슬픔이 어떤 것인지 잊은 듯한 편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게오르크가 사업을 도맡아 처리해 나가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는 억척스런 면이 있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사업을 아들에게 맡겨놓고 뒷전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함께 했든지, 지난 이 년 동안 그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직원은 두 배로 늘었고, 매출도 다섯 배나 늘었다. 그야말로 사업은 창창대로다.
친구는 게오르크의 사업이 이처럼 번창하고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애도 편지의 말미에 게오르크에게 러시아로 건너와 함께 사업을 하자는 권유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예상한 이익금은 게오르크가 지금 벌어들이고 있는 이익금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게오르크는 친구가 품고 있을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다만, 지난 세 번의 편지에서 누가 누구와 약혼했다는 소식 정도만을 알렸다.
게오르크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델펠트
게오르크는 자신이 유복한 가정의 딸인 프리다 브란델펠트와 한 달 전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친구에게 알리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전했을 따름이다. 그는 가끔 약혼녀와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특별한 감흥에 젖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도 당신 친구들에 대해 잘 알고 싶어요.” “오해할 것 없어요. 그 친구는 틀림없이 올 거요. 물론 강요당한 기분이겠지. 내 소식을 알면, 날 부러워하면서도 불만을 삭이지 못할 거야. 그 불만을 깔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쓸쓸히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겠죠. 혼자서 말이요. 무슨 뜻인 줄 알겠소?” “알겠어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우리 결혼소식을 알릴 수는 없을까요?” “그의 사고방식으로 보아 불가능한 일이요.” “게오르크, 당신에게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차라리 약혼하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어요.” “그렇다고 약혼을 무르고 싶지는 않아요.”
게오르크는 그녀에게 키스한다. 그는 친구에게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을 써보내리라 생각한다.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지금의 내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어!” 일요일 오전, 그는 친구에게 약혼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정말 좋은 소식은 맨 나중에 알려지는 법이지. 나는 프리다 브란델펠트라는 아가씨와 약혼했다네. 유복한 가정의 아가씨야. 그 집안은 자네가 떠나고 한참 후에 이곳으로 왔으니 자네는 알 수 없을 걸세. 기회가 되면 나중에 약혼녀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함세. 자네는 내 약혼녀와 허물없는 친구가 될 걸세. 그녀가 자네에게 안부를 전하네. 다음 번에는 그녀가 자네에게 직접 편지를 쓸 것이네. 자네가 여러 이유로 이곳을 방문하기를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내 결혼이야말로 자네가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지. 하여튼 자네하고 싶은 대로 하게.” 편지를 손에 들고 게오르크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앉아 있다.
게오르크의 아버지
마침내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자기 방을 나와 작은 복도를 가로질러 몇 달째 들어간 본 적이 없는 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실은 아버지 방을 일부러 그렇게 찾아갈 필요는 없다. 상점에서 아버지와 늘 마주치니까 말이다. 또한 두 사람은 같은 시각에 같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저녁시간은 각자의 계획에 따라 보내지만, 게오르크의 약혼녀나 친구가 방문하지 않을 경우 대개 두 사람은 잠시 거실에 나란히 앉아 신문을 읽곤 한다.
좁은 마당 건너편의 높다란 담이 그늘을 길게 던지고 있는 탓인지 맑은 날인데도 아버지의 방은 너무 어둡다. 방 한쪽 구석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유품들로 꾸며져 있다. 아버지는 그 창가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책상에는 아침식사 때 남긴 음식이 그대로 있다. “여긴 지독하게 어둡군요” “그래 어둡기는 하지.” “창문을 닫으셨나 보죠?” “난 닫는 게 더 좋단다.” “밖은 아주 따뜻해요.” 아버지는 아침식사 그릇을 치운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구에게 제 약혼소식을 알리려고 합니다.” “페테르부르크에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아버지는 상점에서와는 달리 이 방에서는 몸을 쭉 펴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저도 처음에는 약혼소식을 그 친구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어요. 꽤 까다로운 친구니까요.” “그런데 왜 생각을 바꿨니?” “그가 제 절친한 친구라면 제 행복한 약혼도 그에게 큰 기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편지를 우체통에 넣기 전에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거예요.” “게오르크, 그 일로 나에게 상의하러 왔다는 말이냐. 착하구나. 하지만 네가 속마음을 숨김없이 터놓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아니, 불쾌할 뿐이야. 네 착한 에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좋지 않은 일만 이어졌지. 상점에서도 내가 모르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일들을 숨기지 말았어야지. 난 이제 힘도 없고 기억력도 많은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잖니. 나이 탓도 있고, 네 어미의 죽음에 따른 충격 탓도 있겠지. 하기사 네 어미의 죽음은 나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게오르크, 제발 부탁인데, 나를 속이지 말아라. 페테르부르크에 그런 친구가 있기나 한 거니?”
게오르크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선다. “제게 수천 명의 친구가 있다해도 아버지 한 분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잘 아시겠지만, 아버지 없이는 상점을 운영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상점이 아버지 건강에 위협이 된다면 내일이라도 상점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리겠어요. 아버지, 아버지 자신을 위해서도 생활습관을 바꾸셔야 돼요. 이렇게 캄캄한 곳에 앉아 계시는데, 거실에서는 햇빛을 쬘 수 있잖아요. 아침식사도 드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닫힌 창가에 앉아 계시는데, 제발 그러지 마세요. 맑은 공기가 건강에 이롭습니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방도 바꾸고요. 어쨌든 지금은 누워 계세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게오르크는 아버지 곁에 바짝 다가간다. 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다. 아버지는 머리를 숙인 채 아들을 부른다. “게오르크” 나지막한 목소리다. 게오르크는 아버지 곁에 무릎을 끊고 앉는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게오르크는 아버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넌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없어. 늘 농담을 잘 하더니.” “아버지 잘 생각해보세요.” 게오르크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의자에서 일으킨다. 아버지는 힘겹게 서 있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잠옷을 벗긴다.
“제 친구가 우리 집에 다녀간지 곧 삼 년이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그 친구를 싫어하시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워낙에 개성이 강한 친구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도 그 친구와 곧잘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기억이 나실 거예요. 그때 그 친구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게다가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시기도 하셨어요.”
게오르크는 아버지를 다시 앉히고 바지와 양말을 조심조심 벗긴다. 아버지의 내의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 게오르크는 아버지를 소홀히 했다는 자책감을 느낀다. 게오르크는 아버지를 장차 어떻게 모실지 약혼녀와 별로 말한 것이 없다. 그들은 아버지가 이 집에 그대로 남아 계실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게오르크는 생각이 바뀐다. 아버지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는 아버지를 안아 침대로 옮긴다. 몇 발자국을 침대로 옮기는 동안 아버지는 게오르크의 가슴에 달린 시계줄을 만지작거린다. 그때 게오르크는 전율감이 느껴진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다. 아버지는 침대에 눕자 손수 이불을 덮는다.
게오르크의 아버지와 페테르부르크의 친구
“그 친구가 기억나시겠죠?” “이불은 잘 덮었느냐?” “침대에 누우시니 기분이 좋으시죠.” “잘 덮었느냐?” “걱정마세요. 잘 덮었으니까.” “아니야!” 그리고 아버지는 이불이 박차고 일어나 침대 위에 똑바로 선다. “이놈아, 네가 이불을 덮어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이불이 잘 덮어지지 않았지. 너 정도 해치울 정도의 힘은 아직 남아 있다. 난 네 친구를 잘 알아. 그는 내 마음의 아들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너는 오랫동안 그를 속여온 거야. 내가 네 친구를 위해 울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넌 사무실에 처박혀 업무가 바쁘니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러시아로 거짓 편지를 쓰는 수작을 부렸지. 네 궁둥이로 그 친구를 깔고 앉았다고, 그가 잊혀진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래, 그 친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아들이 결혼할 결심을 했는데도 말이야.”
게오르크는 끔찍스레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다. 아버지가 그 친구를 잘 안다고 뜬금 없이 말하는 바람에, 친구의 존재가 그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가 황량한 러시아 땅에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소리친다. “날 좀 보자꾸나” 게오르크는 모든 것을 알아내려고 얼빠진 사람처럼 침대로 달려가다가 멈춰선다. “그 년이 치마를 들어 올렸다고 ...” 그리고 아버지는 셔츠를 들어올리며 그런 흉내를 내본다. 넙적다리가 드러나고, 그 위로 전쟁 때 입은 흉터가 보인다. “그 년이 치마를 이렇게 치켜올렸겠지. 그래서 네 놈이 그 년에게 달라붙은 거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 년과 재미를 보려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더럽히고 친구를 배반하고 이 애비를 꼼짝 못하게 가두려는 거지.”
그는 모든 비밀을 알았다는 듯이 희색이 만연하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려고 방구석에 서 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배신당하지 않았어. 내가 이곳에서 대리인 역할을 확실히 해내고 있으니까.” “코미디 같군요!” “그래, 코미디다! 제대로 봤다. 늙은 홀아비인 이 애비에게 무슨 다른 위안거리가 있겠니. 말해봐라. 이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이나마, 진실된 아들이 되어다오.”
아버지는 고꾸라진다. 게오르크가 다가가자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거기 그대로 있어. 난 네 도움이 필요 없어. 하지만 내 곁에 오고 싶지가 않겠지. 그래서 멈칫거리는 것이 아니냐! 착각하지 마라. 내가 훨씬 강하니까. 나 혼자라면 몰라도 네 어머니가 힘을 주고 있고, 또 네 친구하고도 힘을 더해주니까. 게다가 네 고객의 명단도 여기 내 주머니에 있다.”
게오르크는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면서 세상에서 그를 매장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잊어버린다. “네 신부를 달고 나한테 나타나기만 해봐라. 쫓아버릴 테니.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면 알 거다.” 게오르크는 믿어지지 않는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오늘 네 놈이 와서, ‘친구에게 약혼 소식을 알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를게다. 이 바보같은 놈아, 그는 다 알고 있어. 다 알고 있단 말이다. 내가 편지를 했으니까. 그는 몇 년 째 오지 않고 있지만, 모든 일을 너보다 수백 배는 더 잘 알고 있어.” 아버지는 신이 나서 한쪽 팔을 머리 위로 흔든다.
선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네가 이 문제를 언제나 들고 올지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내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그냥 신문이나 읽고 있는 줄 알았겠지.” 그는 침대 속에서 신문 하나를 꺼내 게오르크에게 내던진다. 아주 오래된 신문이다. “네가 철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저를 염탐하신 거군요.” 불쌍하다는 듯이 아버지는 말했다. “진작부터 그런 말을 하고 싶었겠지. 넌 지금까지 너 밖에는 몰랐어. 정확히 말하면, 아주 순진한 아이였다. 더 정확히 말해볼까? 너는 악마같은 인간이었어.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익사형을 선고하는 바다.”
게오르크는 쫓기듯이 방에서 나온다. 그는 아침 청소를 하려고 올라가던 하녀와 부딪힌다. 그녀는 “맙소사”라고 외치며 앞치마로 얼굴을 가려보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는 문을 뛰쳐나와 차도를 건너 강으로 달려간다. 그는 다리 난간을 움켜쥔다. 어린 시절 그는 뛰어난 체조선수로 부모의 자랑이었다. 그는 그때 같은 체조솜씨로 난간을 훌쩍 뛰어 넘는다.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간다. “부모님, 저는 언제나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나지막히 외치며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강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순간에도 다리 위로는 차량의 통행이 끊이지 않는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카프카의 작품은 불안하다. 카프카의 작품은 불가해하다. 그만큼 해석의 가능성도 다양하다는 말이다. 단편이건 장편이건간에 카프카의 작품은 한번의 독서로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카프카는 재독을 요구한다. 다중의 해석 가능성, 어쩌면 카프카는 독자에게 이런 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죄와 절망의 세계, 노이로제에 가까운 아버지와의 관계, 사회비판, 권력자와 그 대리인의 비인간성, 일상 속에 움트고 있는 폭력과 야만성 등.
카프카의 작중 인물들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정상적인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는 기괴하다. 등장인물들은 헛되이 세상에 이해를 구한다. 카프카의 많은 작품들은 정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종잡을 수 없이 불가해하게 뒤섞여 있다.
단편 「선고」도 역시 쉽지 않다. 카프카는 「선고」의 생성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선고」 이야기를 나는 22일 밤10시부터23일 새벽6시까지단숨에써내려갔다. 앉아 있다보니 뻣뻣해진 다리를 책상 아래에서 거의 빼낼 수가 없었다. 무서운 긴장과 희열... 간밤에 나는 수차례 어깨가 무거웠다. ... 마차가 한 대 달렸다. 두 남자가 다리 위를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새벽2시였다. ... 하녀가 처음으로 곁방을 가로질러 갈 때, 나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램프의 꺼짐과 여명. 가벼운 심장의 고통, 한밤중의 피곤함.”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카프카의 작품
카프카의 글쓰기에서는 고통이 느껴진다. 덩달아 우리 글읽기에서도 고통이 따른다. 화창한 봄날 일요일로 시작된 소설은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물에 뛰어드는 주인공의 황당한 죽음과 그 죽음을 묻어버리는 도심의 무심한 차량행렬로 끝이 난다. 그리고 게오르크가 빠져 죽은 물에는 파문이 일어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여운. “부모님 저는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문다. 죽는 순간에도 부모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주인공에게 왜 아버지는 익사형을 선고해야했을까? 게오르크는 죽음을 선고받을 정도로 죄를 지었는가?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는지, 게오르크의 아버지는 죽음을 선고할 수 있을 정도로, 마치 신과 같은 존재인가? 러시아의 친구는 그리고 약혼녀는?
게오르크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업에서 뒤로 물러나 있다. 게오르크는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의 방을 찾아간다. 아버지의 방은 어둡다. 강이 내다보이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의 방과는 사뭇 대조된다.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창이 없는 방,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아버지는 그가 가게에서는 느끼지 못한 당당한 모습이다. 아버지는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게오르크는 갑자기 아버지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한다. 게오르크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아버지와 거의 대화가 없다. 게오르크에게 아버지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다. 아버지도 자신의 방에서 현실이 아닌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게오르크와 아버지의 관계는 보살펴 주는 자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의 관계였다. 그러나 러시아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관계는 역전된다.
그러면 여기서 친구의 존재는 무슨 의미인지 한번 살펴볼 만하다. 친구는 익명의 존재이다. 그는 게오르크에게 과거를 회상시키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친구는 과거의 아버지와 현실의 게오르크를 시간적으로 연결해 주는 다리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친구는 내면의 아들이다.
게오르크는 결혼을 결정한다. 결혼이란 일상적인 생활에의 편입이고, 현실세계에의 생존이다. 그에 반해 성격이 까다롭고 병약한, 사업도 성공하지 못한 친구는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이 친구를 마음속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익사형을 선고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선고를 받아들인다. 이런 작품의 내용만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복잡하고 이상한 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개인사가 작품의 이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선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주인공
1913년 8월 14일자 일기에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고」의 결론은 내 경우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녀 덕택이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약혼녀 때문에 파멸한다.” 나의 경우라니? 그러니까 카프카의 경우라는 말인데, 카프카의 당시 여자관계를 보자. 카프카는 「선고」를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헌정했다.(카프카는 그녀와 두 번 약혼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파혼하고 만다. 그는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창작을 방해받을까봐 두려워했다. 또한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위압적인 아버지에게 벗어나, 결혼하여 자신 또한 한 아버지가 되는 평범한 삶에 실패했기 때문에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고백했다.) 게오르크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덴펠트 Frieda Brandenfeld라는 이름에서 카프카의 약혼녀 F. B= Felice Bauer를 유추할 수 있다. 「선고」의 아버지가 내린 익사형의 주된 이유는 게오르크의 약혼녀 때문이다. 사실 카프카의 아버지도 펠리체 바우어양과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게오르크와 친구는 카프카의 이중적인 모습의 반영이다. 시민적인 삶과 예술가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프카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내린 사형선고는 곧 시민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사형선고다. 게오르크는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의 이 단편에서 카프카의 고뇌를 느낀다. 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주인공 게오르크,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의 작품의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인생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실존문제까지.
▣ 프란츠카프카의생애와작품
1883 7월 3일 유대인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그의 아내 율리 뢰비 카프카의 아들로 프라하에서 태 어났다. 엘리, 발리, 오틀라 등 세 여동생이 있다.
1889-93 독일계 플라이쉬마르크트 초등학교에 다님
1893-1901 독일계 왕립 인문고등학교에 다님
1901-06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 전공
1902 프라하에 있는 “독일 대학생들의 독서 및 연설 모임체”에서 막스 브로트와 처음 만난다.
1904-05 「어느 투쟁의 기록을 집필」
1906 법학박사 학위 취득. 10월부터 1년 간 “사법연수”
1907 「시골의 결혼 준비」 집필. 프라하에 있는 보험회사 입사
1912 막스 브로트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를 알게 됨. 펠리체와 서신 교환 시작
「선고」, 장편 『실종자』를 대부분 집필. 「변신」 집필
1913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화부」 출간. 연간 『아르카디아』에 「선고」가 실림
1914 6월 베를린에서 펠리체와 약혼. 7월 베를린의 호텔 “아스카니셔 호프”에서 파혼
7~8월 「소송」 집필시작
10월 「유형지에서」, 「실종자」의 마지막 장
12월 「법 앞에서」 집필
1915 칼 슈테른하임이 폰타네 상 상금 전액을 카프카에게 줌
12월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법 앞에서」 출간
1916 11월 뮌헨에서 「유형지에서」 두 번째 공개낭독. 「시골의사」 집필
1917 7월 프라하로 온 펠리체와 두 번째 정식 약혼.
8월 첫 각혈, 폐결핵 진단
성탄절에 프라하에서 펠리체와 만나서 다시 파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가장의 근심」, 「만리장성의 축조」 집필
1918 병세가 악화되어 11월부터 슐레지엔에 있는 슈튀들 요양소에서 지냄
1919 율리 보이첵과 사귀고, 여름에 약혼
「유형지에서」, 작품집 「시골의사」 출판
슐레지엔에서 자서전적인 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씀
1920 빈에 있는 밀레나 예젠스카와 서신교환시작. 율리 보리첵과 파혼
「포세이돈」, 「밤에」, 「법에 대한 의문」, 「팽이」 등 많은 단편소설 집필
1922 6월말부터 9월 중순까지 플라나에 있는 누이동생 오틀라 집에 거주
프라하에서 「단식광대」, 「변호사」, 「어느 개의 연구」 집필. 「성」 집필시작
1923 도라 디아만트와 사귐. 9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 집을 베를린의 슈테글리츠에서 구함
「작은 여인」, 「굴」
1924 결핵이 후두까지 악화되어 프라하로 돌아가, 부모 집에 거주
「여가수 요제피네」 집필. 작품집 「단식광대」 출판
6월 3일 마흔 한 번째 생일을 앞두고 사망
프라하 유대인 묘지에 묻힘. 자신의 일기와 서신을 포함해 모든 유고를 소각해 줄 것을 막 스 브로트에게 유언
<“선고(Das Urteil)”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란츠 카프카 지음, 글쓴이 이민수박사 >
▣ 저 자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1883∼1924)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만남.
아, 아버지 당신은! - 미움보다 더한 사랑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병약했던 카프카에 비해 아버지는 강인했고, 카프카는 소극적이었으나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너무나 억센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대고 불만을 터뜨리지도 못했고, 아버지 가슴에 기대고 마음껏 푸념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카프카를 강한 남자로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거칠고 위압적인 아버지의 지나친 질책은 카프카를 심한 자괴감에 빠뜨리곤 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기 정당화가 심한 다혈질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는 규칙을 아들에게 강요하곤 했다.
아버지는 식사시간에도 너무나 권위적이어서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다. 가령 “차려 놓은 것은 모두 먹어라, 음식투정은 말아라. 컵을 입으로 빨지 말아라. 빵은 이렇게 썰어라,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먹어라. 빨리 먹어라. 더 빨리” 등.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음식이 형편없다고 투정했고, 음식부스러기는 그의 자리에 가장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식탁에서는 먹는 데만 전념해야 한다고 가족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아버지 자신은 손톱이나 연필을 깎고 있었고, 귀를 후비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카프카는 너무도 권위적이던 아버지가 그에게 강요했던 계율을 당신 자신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 괴로워했다.
역시 어린시절의 기억인데, 카프카는 어느날 밤 물이 먹고 싶다고 계속 울어댔다. 특별히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고, 단지 누군가를 화나게 하고 싶었고 자신의 기분을 달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한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떼쓰기를 그치지 않았고,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마루로 끌어내 문을 닫고 속옷 차림으로 세워두었다. 그로 인해 카프카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나도록 그는 거인 같은 남자, 즉 아버지가 밤중에 나타나 그를 침대에서 마루로 끌어낼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는 애증이었다. 극심한 자신 불신에 시달린 카프카였지만, 그는 종종 아버지를 ‘자기편’이라고 말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따뜻한 속마음’만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식을 혼동하는’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도 그런 애착에서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방식이 카프카에게는 맞지 않았다.
인류의 속죄양, 고뇌하는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이다)는 1883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유대인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하고 아집이 세며, 이해심이 부족한 남자였다. 반면 학식이 높은 집안의 딸인 어머니는 다정다감하고, 선량한 여성이었다.
성공한 유대인 상인 집안인 카프카의 가족은 독일어를 사용했다. 카프카는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살았다. 그는 독일어로 초, 중 교육을 마친 다음 프라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지만, 법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 시절 그는 평생지기인 막스 브로트를 알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근무했다. 막스 브로트의 권유로 단편 「관찰 Betrachtung」, 「화부 Heizer」, 「선고 Das Urteil」 등을 발표하고, 이어 「변신 Die Verwandlung」을 발표했다.
1917년 그는 폐결핵 진단을 받고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생활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많은 단편을 썼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 두 번 약혼하지만 결국은 헤어졌고, 율리 보리체크와도 약혼했지만 다시 파혼한다. 카프카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갈 때 밀레나 예젠스카 폴라크를 만났지만, 그 사랑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1923년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 그곳에서 젊은 유대인 여성 도라 디아만트를 만나 삶의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건강이 악화되어 짧은 베를린 생활을 정리하고 프라하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도라 디아만트와 프라하에서 잠시 머물다가, 빈 교외의 요양원에서 1924년 죽었다.
평생의 친구, 막스 브로트
카프카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평생의 친구이던 막스 브로트 덕분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를 프라하에 있는 독일 대학생들의 독서 및 연설모임에서 만나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창작 의욕을 볻돋워 주었고, 출판의 기회를 주선해 주었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출판되지 않은 원고는 전부 없애고 이미 출판된 작품은 재판을 찍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브로트는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브로트는 나치의 학정을 피해 탈출할 때 카프카의 유고를 손가방에 넣어 국경너머로 안전하게 옮겼다. 만약에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대로 했다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막스 브로트는 소설 「소송」, 「성」, 「아메리카」를 각각 1925, 1926, 1927년에 출판했다. 단편집 「만리장성을 쌓을 때」는 1931년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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