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같은 지하실에 위치한 빈민합숙소에 여러 계층 출신의 부랑자들이 뒤엉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욕을 해대고 싸움을 하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알콜중독에 걸린 배우, 몰락한 귀족, 도박꾼, 도둑, 죽어가는 여인...
그런 어느 날 루카라는 늙은 순례자가 찾아온다. 루카는 죽어가는 안나에게 죽음 뒤에는 편안한 안식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걸린 배우에게는 무료 자선병원에서 알코올 중독을 고칠 수 있으니 노력하면 다시 훌륭한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도둑인 페펠에게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사랑하는 나타샤와 시베리아로 가서 새 삶을 찾으라고 일러준다.
절망과 포기 속에 살아가던 합숙소 사람들은 따뜻하고 온화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루카 노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안나의 앓는 소리는 줄었고, 배우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합숙소에는 뭔지 모를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그러나 루카 노인이 나타나기 전에 합숙소 사람들에 군림했던 사친은 루카의 말이 모두 거짓이며, 연약한 인간을 기만하는 독약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나서는데…(요약)
밑바닥(На дне), 막심 고리키 지음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루카 60세 가량의 순례자.
“진실이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다네. 진실이 병을 항상 치료할수 있는 건 아니지...”
사친 40세 가량.
“그럴 듯해. 하지만 거짓말은 노예의 종교일 뿐이야. 진실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의 신이 지.”
안나 30세.
“그렇지만... 만일 저승에서도... 아, 거기도 역시 괴로움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배우 40세.
“성스러운 진실의 길을 찾지 못하면 황금의 꿈을 불어넣는 어리석은 자만이 번성하리라. 나는 떠나, 떠날 거야... 봄이 오면
이제 난 더 이상 없어...”
페펠 28세. 도둑. 나타샤를 사랑하면서 그의 언니 바실리사와도 관계를 갖는다.
바실리사 26세. 합숙소의 안주인.
나타샤 20세. 바실리사의 동생. 페펠을 사랑한다.
제1막
동굴같은 지하실. 천장은 돌로 만든 둥그런 모양으로 답답하다. 칠이 벗겨지고 그을음 투성이 빈민 합숙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 침대와 페치카 위에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잠들어 있다. 한쪽 구석은 더러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데, 그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이 오고 몇몇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새로운 아침은 언제나 욕설과 고함으로 시작된다.
사친 : (술이 깨지 않은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어제 날 친 놈이 누구였지?
부브노프 : 누구였든 뭐 달라지는 거 있나?
사친 : 그래, 그렇기는 하지만... 하지만 뭣 땜에 날 쳤던 거지?
부브노프 : 노름했지? 그러니까 얻어터지지...
사친 : 저 죽일 놈의 자식이 그저...
배우 : 그러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걸...
사친 : 웬 또 멍텅구리 자식이 끼어 들어?
클레비치 : (배우에게) 잔소리 말고 어서 방이나 치워!
배우 : 내가 왜 치워? 오늘은 남작 차례야!
남작 : (부엌 쪽에서 나오며) 방 치울 새가 어딨어... 난 크바시냐하고 얼른 시장에 가야 돼. 나스차 보고 치우라고 해!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스차에게 다가가서 책을 뺏으며) 이 시든 사랑의 아가씨야. 방이나 치우시구려!
나스차 : 이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 책 이리 줘요. 그래도 제 딴에 귀족이라구, 흥!
안나는 커튼 뒤쪽 침대에서 안타깝게 기침을 계속하며 좀 조용히 하고, 먼지 일으키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죽어가는 안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란은 또 다른 소란과 말다툼으로 번져간다. 배우는 자신이 전에 얼마나 유명한 배우였던가 자랑하며 연극 대사를 읊조리고, 몰락한 남작 출신의 사내는 자신의 출신을 으시대다가 모두에게 비웃음을 산다. 도둑질한 시계를 합숙소 주인에게 팔아 넘긴 페펠은 합숙소 숙박 요금을 받으러 나타난 주인과 시계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 사람들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는 전혀 오가지 않고 서로를 흠잡고 비웃고 트집잡기에 여념이 없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안나가 몸을 일으키고 나오자 배우가 다가가서 부축한다.
배우 : (우울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안나에게 다가간다) 좀 어때요, 괜찮겠소?
안나 : 갑갑해서 여기엔 못 있겠어요.
배우 : 그럼 문 밖으로 데려다 줄 테니 일어나요...(안나를 부축해 문 쪽으로 데려간다.)
코스트일로프(합숙소 주인) :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먼... 대단히 친절하셔... 좋은 일 했으니 저승에 가면 보답이 있겠지.
클레시치(안나의 남편) : 볼 일 보셨으면 어서 가시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코스트일로프 : 자네는 다 죽어가는 아내와 둘이서 요금도 깎으면서 자리는 다 차지하고 무슨 잔소린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간다)
페펠 : 대체 저 자식은 뭐 하러 왔어?
사친 : (웃으면서) 뻔하지... 젊은 마누라 찾으러 온 게지. 자네 저 녀석 빨리 해치우고 말지 그래?
페펠 : 그까짓 놈 때문에 인생을 망치란 말인가?
사친: 그러니까 감쪽같이 잘 해야지... 머지않아 바실리사를 얻어 이 집 주인 양반이 되시겠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데 나타샤가 한 노인을 데리고 들어온다. 지팡이를 짚고 바랑을 메고 허리춤에는 조그만 냄비와 주전자를 차고 있었다.
루카 : 정직한 분들이시여! 안녕하시옵니까?
나타샤 : 새 손님이 왔어요.
부브노프 : 정직했었지, 재작년 봄에는 말씀이야...
루카 : 아무렴 어떻소. 난 어떤 협잡꾼이라도 존경하오. 한 마리 벼룩이라도 말이오. 모두 다 거무스름하고 톡톡 튀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소.
나타샤 : (부엌 쪽을 가리키며) 저기로 가서 자리를 잡으세요, 할아버지...
루카 : 고맙소, 아가씨! 저리로, 저쪽으로... 그저 늙은이에겐 따뜻하면 그만이요, 그곳이 고향이 지...
페펠 : 아주 재미있는 노인네를 모셔 왔구만!
루카 노인은 사람들의 농지거리에도 화를 내는 법 없이 친절하게 응수한다. 그렇다고 아주 성인군자연하지 않고 그저 툭툭 던지는 말이 합숙소 사람들과는 어딘지 다르다. 남의 말을 트집잡고 욕할 기회만 찾던 사람들은 루카 노인의 그런 말솜씨가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페펠 : 어이, 남작 나으리! 술 한 잔 살터이니 내 앞에서 기면서 개처럼 한 번 짖어 보게.
남작 : 에이, 망할 자식! 내가 옛날엔 너 같은 놈들 네 발로 기게 하는 게 취미였다.
부브노프 : 또 옛날 타령이시구먼. 여긴 귀족도 쌍놈도 없는 세상인 거 몰라? 너나할 것 없이 다 알 거지들이야.
루카 : 모두가 평등하다 이 말씀이시군.
남작 : 뭐라고? 당신은 어디서 굴러 와서...
루카 : (웃으면서) 난 백작도 보고 공작도 보았지만 남작은 처음이라우. 알거지가 된 남작 말이우.
페펠 : 한 방 먹었구나, 남작 나으리!
루카 : 허허. 아까부터 당신들을 보고 있으려니 참 당신들 생활은 아무래도 그래서야...
부브노프 : 눈만 뜨면 싸우고 욕하고... 이게 우리들의 삶 아니겠소.
남작 : 난 이래봬도 남부럽지 않았던 때가 있었지. 아침에 일어나면 하녀가 아침을 침대 머리에 척하고 대령하고 커피에...
루카 : 그래봤자 사람이란 다 똑 같아요. 아무리 어쩌구 해도 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죽을 뿐이지... 그런데 귀족이란 천연두 같아서 병이 나아도 그 자국은 한평생 남는 법이라오.
남작 : 자, 한 잔 하러 가자고. 또 봅시다, 영감. 이 늙은이 보통이 아니야...
제2막
초저녁. 페치카 옆 침대 위에서 사친과 남작, 그리고 몇 사람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클레시치와 배우는 구경하고 있다. 루카는 안나 옆에 앉아 있다.
안나 : 평생 맞기만 하고 욕만 얻어먹고... 그 외에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런데 이제...
루카 : 아, 안나, 너무 상심 말아요.
안나 : 난 한번도 배불리 먹어 보지 못했어요. 빵 한 조각에도 벌벌 떨고... 평생 그렇게 가슴 죄고 걱정만 하고... 누더기 옷만 입고서 이렇게... 나는 왜 이리 비참한 일생을 살아야 하나요... 할아버지 저 세상에서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겠지요, 네?
루카 : 저런, 저런, 가엽기도 해라. 그럴 리가 없어! 저 세상에 가면 편히 쉴 수 있어. 조금만 더 참아. 모두들 참고 사는 거야. 죽음은 아주 부드러운 것이야... 이제 저 세상에 가면 당신을 하느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주여, 여기 주님의 종 안나가 왔습니다’ 그럴 게야. 그럼 주님께서 ‘오, 우리 안나야, 고생이 많았다. 여봐라, 이 안나를 천당으로 보내거라. 그리고 편히 쉬게 하거라. 이 여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갖은 고생을 겪고 몹시 피곤하니 편안히 쉬게 하라’ 하시거든...
안나 :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하고는) 영감님... 정말 그렇게 될까요?
루카 : 그럼, 그렇고 말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어... 그러니 이제 조금 참고 편안히 눈을 감고... 조금도 걱정할 게 없어...
안나 : 그래도 전 조금만... 조금만 더 살고 싶어요. 만일 저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조금 더...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해도... 참을 수 있는데...(카드를 하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말싸움을 벌인다. 루카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부탁한다)
루카 : 쉬... 이보게들, 너무 큰 소리 지르지 말게나. 여기 한 사람이 숨을 거두는 중이야... 벌써 입술이 흙빛이 되었네...
페펠 : 그래, 영감 말이니 듣지... 영감 제법 그럴 듯해. 거짓말도 괜찮게 하고 말야.
안나가 잠이 들고 다시 조용히 카드놀이가 시작됐다. 구경하던 배우가 루카에게 말을 건다.
배우 : 영감. 내가, 이 오르가니즘이 술독에 빠지기 전에는 아주 뛰어난 배우였는데... 이젠 다 틀려먹었다오. 영감은 박수갈채가 뭔지 몰라! 그건 말하자면 보드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내가 무대에 척하고 나서면... 이렇게 (자세를 갖추고), 이렇게 말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그런데 아무런 대사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대로 서서 우물거린다) 아, 이젠 다 틀렸어,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으니...
루카 : 아니, 그럼 고치면 될 거 아닌가. 요즘은 알코올 중독자도 다 고친다네, 그것도 무료로 말이 야! 그런 병원이 생겼다는 말도 못 들었나? 술주정뱅이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자네도 빨리 가보는 게 좋아!
배우 : (우울하게) 어디 말이야, 어디에 있다는데?
루카 : 아, 그건 말이야... 어떤 거리라고 하던데... 하여간 낯선 이름이야. 그래, 그건 곧 가르쳐 줄 테니 염려 말고... 자네는 그 준비를 해야 해. 우선 술을 삼가고, 자신을 꾹 놀러 참는 것을 배워야 해, 그리고 치료를 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우선 꾹 참고 말일세.
배우 : 새로운 생활, 새 생활이라! 참 좋은 말이야... 음 새로운 생활... 그래, 나도 할 수 있겠지...
루카 : 할 수 있고 말고... 뭐든지 할 수 있어... 마음막 먹는다면...
배우 : (갑자기 꿈을 깨듯이) 영감, 보통이 아닌 걸...
바실리사가 페펠에 대한 질투 때문에 동생 나타샤를 마구 때렸다는 소식을 들은 페펠은 어쩔 줄 모른다. 페펠은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언니 바실리사에게 매여 있다. 바실리사는 나타샤와 페펠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눈치채고 페펠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나타샤와 바실리사 사이에서 어찌해야 좋은지 고민하는 페펠에게 루카가 충고한다.
루카 : 자네는 어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구먼.
페펠 : 어디로 가겠소, 내 처지에...
루카 : 시베리아로 가지! 시베리아는 황금의 나라야! 힘있고 머리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단 말일세.
페펠 : 아, 이 영감쟁이가 거짓말만 자꾸 늘어놓으시는구먼! 여기도 좋다... 저기도 좋다... 말짱 거짓말을 말야!
루카 : 아닐세, 내 말을 믿게. 자넨 뭐가 좋다고 진실을 따지고 있나? 진실이란 자네에게 함정일지도 모르는 게야.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없는 법이라네. 뭐든지 믿기만 하면 반드시 그대로 되는 걸세. (페펠이 놀란 듯이 루카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낮부터 페펠을 찾아다니던 바실리사가 조용히 들어와 페펠을 데리고 나갔다.
바실리사 : 내게 싫증이 난 거지. 그래, 나라고 제발 사랑해 주십시오 하고 매달리지는 않겠어.
페펠 : 바실리사, 당신은 참 미인이야. 하지만 난 당신과 관계는 해 왔지만 사실 말하자면... 당신을 그리워한 적은 없소.
바실리사 : 오호, 그래요. 어디 딴 계집년이라도 꼬드긴 모양이군. 하지만... 그렇게 조급히 굴 건 없잖아요? 난 당신과 이런 사이가 되고 난 후 당신이 언제든 나를 이런 바닥에서 구해줄 거 라고 생각했어요. 저 남편이나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자유롭게 해줄 날이 있겠지 하고... 페펠, 나는 어쩌면 당신한테 반했다기 보다 당신 때문에 생긴 이런 막연한 꿈에 혹했는지도 몰라...
페펠 : 이제 알았으니 깨끗이 헤어지자... 지저분하지 않게...
바실리사 : 아니, 아니, 이제부터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좋지 않아요.(낮은 목소리로 힘있게) 내 동생을... 당신, 나타샤 좋아하지? 다 알아.
페펠 : 그래? 그래서 그 애를 그렇게 마구 때렸구나. 조심해! 앞으로 그 애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 면 너도 무사치 못할 거야!
바실리사 : 왜 이래, 화낼 일이 아냐. 좋아, 당신 그 애하고 살아도 좋아! 게다가 내가 부조도 좀 하지. 300루블쯤... 아니 더 줄 수도 있지...
페펠 : (펄쩍 뛰며) 뭐라고? 아니 잠깐만, 당신이 왜... 무엇 때문에?
바실리사 : 그대신 나를 그 놈 손아귀에서 좀 빼내 줘. 내 쇠줄을 끊어달란 말야... 자유롭게...
페펠 : (조용히) 오, 이제야 알겠어... 그랬구나. 그래 아주 기막힌 방법이구먼. 남편은 관 속에 처 넣고 정부는 감옥에 처넣고, 그리고 너만...
바실리사 : 감옥엘 왜 가? 당신이 손을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잖아. 설사 당신이라 해도 누가 알겠어? 나타샤는 당신 것이 되고 수중에 돈도 들어오고,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아. 나도 자유로운 몸이 되고... 나타샤도 홀가분해지는 거야.
페펠 : 에이, 이 악독한...
바실리사 : 아니야. 당신도 생각 좀 해봐. 그 놈이 얼마나 악독한지... 나타샤한테는 또 어떻게 하는지... 정말 지긋지긋해. 그 자식은 내 피를 다 빨아먹고 있단 말야. (이때 루카가 큰 기침을 하면서 나온다. 페펠과 바실리사는 말을 멈춘다)
루카는 페펠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페펠에게 바실리사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어서 나타샤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고 충고한다. 이들이 합숙소로 돌아왔을 때 안나의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안나에게 가까이 다가간 루카는 누워 있는 안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나를 흔들어본다. 그러나 안나는 괴로운 숨을 몇 번 몰아 쉬더니 숨을 거두고 만다.
제3막
이른 봄날, 아직 다 녹지 않은 눈이 응달에 쌓여 있고 따스한 햇살이 합숙소 뒷뜰에 비친다. 긴 의자에 나스차와 남작이 나란히 앉아 있고 부브노프와 나타샤, 루카와 클레시치가 목재더미에 걸터앉아 있다.
나스차 : (눈을 감고 노래하듯이) 그 사람은 약속대로 그날 밤 공원 벤치로 나왔어요.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지요. 그 사람은 부들부들 떨면서 나타났는데, 보니까 손에 권총을 들고있지 않겠어요! 정말 대학생은 철부지라는 말이 맞아요. 그이는 나를 보더니 ‘아, 그리운 내 사랑이여! 우리 부모는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헤어지지 않으면 부자의 연을 끊겠답니다. 당신과 헤어지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아주 큰 권총이었어요, 총알도 열 개나 들어있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아 사랑하는 라울...“
부브노프: (깜짝 놀라며) 아니 라울이라고? 크라울이 아니고?
남작 : (껄껄 웃으며) 나스차! 언제는 또 가스통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스차 : (벌떡 일어나며) 듣기 싫어요! 부랑자, 망나니들... 당신들이 사랑을 알기나 해요, 진정한 사랑을!
루카 : 다 잠자코 있게! 남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말고. 문제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거야. 자, 나스차, 계속해요...
부브노프 : 그래, 맘대로 꾸며 봐.
나스차 :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려다가 다시 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게 무엇에 빠진 듯이) 당신은 나의 일생의 행복이랍니다. 당신은 깨끗한 달빛입니다. 나도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내 심장이 멈출 때까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하지만 날 버리세요. 당신을 젊고 귀한 몸입니다. 차라리 내가... 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여자예요, 저 같은 것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한다)
나타샤 : (나스차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달래듯이) 울지 마, 울 것까지야 없잖아...
나스차는 매일 소설책에서 읽은 주인공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해서 이렇게 저렇게 꾸며대고 눈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부브노프와 남작이 나스차의 몽상적인 꾸며낸 이야기를 비웃으며 놀린다. 자꾸 나스차를 놀려대는 부브노프와 남작을 나무라면서 루카가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해준다.
루카 : 우리는 누구에게나 선량한 사람이 돼야 해. 사랑하지 않으면 안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동정하고 사랑하라 하셨지. 내가 언젠가 별장지기 노릇을 한 적이 있어. 외딴 숲 속에 있는 쓸쓸한 별장이었는데, 겨울이 와서 나 혼자 남아 있었지. 참, 좋았었지!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도둑놈이 찾아왔어. 나는 총을 쥐고 가만히 숨어 기다렸지. 창문을 열고 두 놈이 들어왔지. 나는 총을 앞세우고 “이 도둑놈들, 꼼짝마라!”하고 소리쳤지. 아, 그랬더니 두 놈이 도끼를 휘두르며 덤비려 하지 않겠나. 내가 총부리를 가슴에 겨누며 움직이면 쏘겠다고 소리치니까, 두 놈이 도끼를 내려놓고는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쇼”하고 빌었어... 그러더니 “영감님, 제발 빵 한 조각만 적선해 주십시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하지 않겠어(웃는다). 아, 도끼를 휘두르며 덤비던 도둑놈들이 빵 한 조각이라니... 그래서 결국 난 이 놈들하고 한 겨울을 같이 보내고 말았어. 아, 알고 보니 선량한 농부였었는데 배가 고파서 도둑질에 나서고, 그러다가 감옥에도 들락거리고 그랬던 거야. 같이 겨울을 나고 나니, 두 놈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영감님. 정말 고마웠습니다”하고는 고향으로 가더군. 감옥이나 시베리아는 아무 것도 가르쳐 줄 수가 없어. 사람만이 좋은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가 있는 법이지.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해줘야 사람이 되는 거라오...
루카 : (잠시 멈추었다가 페펠을 바라보며) 여보게, 자네는 줄곧 진실, 진실하지만 진실이란 것이 사 람을 치료하는 것은 아닐세. 내 아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하지.
진실의 나라를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이네. 그 사람은 이 세상 어 딘가에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실의 나라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 거기서는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고 사이좋게 도와주며 살아가고 무엇이든 다 좋고 아름다운 그런 곳이 라는 게지. 그래서 그 사람은 밤낮 진실의 나라 생각만 했어. 하지만 어찌나 가난하던지 늘 쪼들리며 살아갔지. 그러나 이 사람은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살았어. “괜찮아! 조금만 더 참자! 이제 진실의 나라에 가게 되면 이따위 생활은 다 벗어날 수 있어.” 하고 말일세. 그것이 이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었지.
그런데 마침 그때 그곳으로 어떤 학자 한 사람이 추방을 당했지, 그곳이 시베리아였거든, 학자니까 책이니 지도니 잔뜩 짊어지고 왔지. 그래 그 사람은 학자를 붙들고 애걸을 했어. “제발 부탁입니다. 진실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제 발 가르쳐 주세요” 하고 말야. 학자는 곧 책과 지도를 펴놓고 진실의 나라를 찾기 시작했 어.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런 나라는 나오지 않았어. 다른 나라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진 실의 나라라는 곳은 없었던 게야.
그 사람은 학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럴 리가 없다, 다시 한번 자세히 찾아봐 달라, 만일 진실의 나라가 없다면 당신의 책과 지도는 아무 쓸모도 없다, 당신이 무슨 학자냐 하고 대들었지. 이러는 데야 학자도 화가 날 수밖에... 화가 난 학자는 내 지도나 책은 절대 정확한 것이고 당신이 말하는 진실의 나라라는 것은 원래 있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했어.
그 사람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뭐야? 내가 오늘날까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오직 진 실의 나라만 찾고 있었는데 그게 원래 있지도 않은 것이라고? 이 사기꾼아, 네가 무슨 학자 란 말이야!” 하고는 학자의 뺨을 철썩 철썩 때리고는 눈물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왔지. 그리 고...(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목을 매고 죽어 버렸어.
루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들 침묵했다. 페펠과 부브노프는 루카의 이야기를 비웃으면서도 전처럼 맞대놓고 대들지는 않았다. 모두들 나름대로 루카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페펠은 루카에게 정말 더 좋은 것을 생각하고 찾으면 찾을 수 있는 것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타샤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페펠은 결심한 듯 나타샤에게 청혼했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 도둑질이지만 이제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 언니 바실리사와의 관계도 청산했다, 그러니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다. 나타샤는 망설였다. 자신이 진정 페펠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러나 페펠이 거듭 진심으로 애원하고 루카가 거들어주자 나타샤의 마음이 움직였다. 나타샤는 페펠에게 평생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고 함부로 굴지 않으며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 것을 맹세하라고 했다. 페펠이 맹세를 하고 나타샤를 껴안았다. 그 순간 바실리사가 들어왔다.
바실리사는 나타샤가 심부름을 제대로 안했다고 욕하면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가려 했다. 페펠이 말리려고 덤비자 바실리사는 페펠과 맞붙어 싸움을 벌였다. 뒤이어 들어온 바실리사의 남편 코스트일로프는 페펠을 마구 욕하면서 나타샤와 바실리사를 데리고 나갔다. 끌려나간 나타샤는 언니 바실리사와 코스트일로프에게 길거리에서 짓밟히고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참다 못한 페펠은 나타샤를 구하려 하지만 코스트일로프는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 거친 욕설과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펠은 거의 피투성이가 된 나타샤를 합숙소로 데려 왔다. 그런데 부브노프가 뛰어들어오며 소리쳤다. 코스트일로프가 집에서 나와 골목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맞고 뻗었다는 것이다. 사친과 몇몇 사람들이 허둥대며 뛰어나갔다. 길거리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바실리사는 남편을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바실리사 : (땅바닥을 치면서) 아이고, 내 남편이 죽었어! 저기 저놈이, 페펠이란 놈이 죽였어요. 내 가 똑똑히 봤어! 페펠이란 놈이 내 남편을 때려 죽였어요!
경찰이 오고 페펠은 체포됐다. 나타샤는 공포에 떨면서 바실리사와 페펠이 공모해 코스트일로프를 죽인 것이라고 소리쳤다.
제4막
페펠과 바실리사는 감옥으로 끌려갔다. 한바탕 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조용함. 그러나 합숙소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클레시치 : 아니 글쎄... 그 영감은 난리통에 사라져 버렸어.
남작 : 경찰이 오고 그러니까 달아난 게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
나스차 : 참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사친 : 그래, 재미있는 늙은이였지. 나스차가 홀딱 빠졌었는데 말이야. 그 늙은이는 귀에 걸면 귀걸 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지.
클레시치 : 인자한 노인네였어. 인정도 많고.
어떤 사람 : (구석에서) 좋은 영감이었지. 마음에 도덕을 가지고 있어, 선인이지. 우리네야...
남작 : 도덕은 무슨 도덕!
남은 사람들이 루카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느새 말싸움이 돼 또다시 서로 욕질을 해대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루카가 사기꾼이었다는 사람, 진실을 싫어한 거짓말쟁이였다는 사람, 아니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람 등 제각각 주장으로 시끌벅적해졌다. 한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사친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사친 : 네 놈들은 다 돼지 새끼나 마찬가지야! 영감은 사기꾼이 아니야! 진실이 어떻다구? 인간, 그 것이 바로 진실이야! 영감이 거짓말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다 우릴 불쌍히 여겨서 그 런 거야. 난 영감을 잘 알아. 거짓말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사람을 위로해 주는 거짓말 도 있고, 마음을 너그럽게 해주는 거짓말도 있어... 노동자 손을 잘라 먹으면서 하는 거짓 말도 있고,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을 속여먹는 거짓말도 있고... 거짓말이야 내가 훤하잖아! 하지만 거짓말은 마음 약한 놈이나 남의 피로 살아가는 놈에게나 필요해.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인 사람이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힘으로 사는 사람에겐 거짓말은 필요없어! 진실이 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의 신이지!
사친은 루카를 이해하지만 루카의 논리가 노예와 군주의 종교일 뿐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사친은 말한다.
사친 : 그 영감 똑똑한 분이야. 녹슨 동전에 유산을 붓듯이 내 마음을 움직였어. 그 늙은이에게 내가 물어본 적이 있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고 말이지. 그랬더니 그러더군. 사람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낳으려고 산다고 말일세. 그래서 모두 남을 존경해야 한다는 거야. 특히 어린애들을 말일세.
모두들 루카를 회상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나타샤는 퇴원한 후에 어딘가로 사라졌고 바실리사와 페펠은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주와 보드카가 탁자 위에 놓이고 모두들 한잔씩 마시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어간다. 사친은 다시 자신의 주장을 폈다.
사친 : 난 술만 먹으면 세상이 참 좋아진단 말씀이야. 그래 인간은 자유야! 인간은 진실이지! 인간이 란 너나 나나, 루카 영감이나 나폴레옹이나 모하메트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이야, 이렇게 말야(공중에 사람 형체의 윤곽을 그린다). 모든 것은 시작과 모든 것의 끝이 다 여기에 있어. 그래 모든 것이 인간 속에 있지.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 인 간! 참으로 당당하게 울리는 말이야! 그래서 인간은 존경해야만 해, 동정이 아니라 존경을 해야 된단 말씀이야.
남작 : 제법이야. 괜찮은 말이야. 그래서 맘이 풀린다면 좋아. 하지만 난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겁이 나네.
사친 : 못난 자식, 인간에게 무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계속 술잔이 돌며 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든다.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합류했다. 누군가 선창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잠시 나갔던 남작이 뛰어들어오며 소리쳤다.
남작 : 여보게들... 이리 와, 이리들 좀 와 봐! 저기 공터에... 공터에 배우가 목을 매달았어. (일동 침묵.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작을 바라본다.)
사친 : (조그맣게) 에이... 노래를 망쳤어. 바보 같은 자식...
(막이 내린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밑바닥』은 고리키의 대표적 희곡으로 1902년에 발표됐다. 이 희곡의 공연은 러시아와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고리키의 명성을 한층 높여줬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한동안 공연이 금지됐고 공연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수없이 공연됐고, 영화화 됐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공연된 바 있다.
이 작품이 처음 공연된 이후부터 많은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루카와 사친이라는 두 중심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가장 핵심적이었다. 루카는 ‘위로하는 거짓말’을 통해 사람은 사랑과 동정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전한다. 그러나 사친은 루카를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루카의 논리는 단지 ‘노예와 주인의 종교’일 뿐,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오직 진실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구원할 뿐이라고 설파한다. 이 두 인물 가운데 누구에게 작가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가,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진정한 이념은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늘날에도 진지한 논쟁 거리다.
루카의 거짓말과 사친의 진실
‘동굴 같은 지하실’인 빈민 합숙소에 다양한 계층 출신의 부랑자들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욕을 해대고 싸움을 하며 아무런 희망 없이 또 하루를 맞는다. 여기에 순례자 루카 노인이 등장한다. 루카는 죽어 가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안나를 따뜻이 위로하며 죽음 이후에는 영혼의 휴식이 존재한다고 일러주면서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라고 말한다. 또한 알코올 중독에 빠진 배우에게 자선병원이 생겼으니 병을 고치고 새 생활을 시작하라고 권고한다. 배우는 새로운 기대로 새 삶을 준비한다. 또한 주인집 여자 바실리사의 여동생 나타샤를 사랑하는 페펠에게는 여자와 함께 ‘황금의 시베리아’로 도망 가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꾸며대는 나스차를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놀려대자, 루카는 만일 나스차가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진실이라고 옹호하며 나스차를 위로한다. 그러나 루카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고, 페펠은 나타샤의 언니 바실리사의 모함으로 살인죄를 쓰고 감옥으로 간다. 그리고 새 삶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던 배우는 작품의 종결부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루카는 자신의 말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거짓말이라는, 즉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니라는 반론을 거듭 받게 되자 두 가지 일화를 들려준다. 하나는 굶주림에 지쳐 도둑이 된 두 농부를 자신이 잡았지만, 그들을 동정해 먹을 것을 주고 겨울 내내 보살펴 주었더니 착한 사람이 되어 아무도 해치지 않고 고마워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실의 나라’에 대한 우화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특별한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고 도와 가며 모든 것이 영예롭기만 한 그런 ‘진실의 나라’가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진실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견뎠다. 그것이 그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그가 살던 시베리아로 어떤 학자가 추방당해 왔는데, 그는 아무리 찾아도 ‘진실의 나라’는 없다고 말해 준다.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화를 내고 집에 돌아와서 자살한다. 진실이 사람을 치료하기는커녕 때로 함정일 수 있다는 루카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친은 루카가 ‘지혜롭고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며 ‘녹슨 동전에 유산을 붇듯이’ 자신을 고무시켰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결국 거짓말이란 노예나 주인의 논리일 뿐이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에게는 진실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 우주 속에 당당하게 울려 퍼지는 인간, 모든 것이 그 속에 있는 위대하고 자유로운 인간은 위로의 거짓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고리키가 이념적으로 사친에 가깝다고 믿었다. 작가의 정치활동에서도 사친의 논리를 담고 있는 정치평론이 많이 있고, 개인적인 기록에서도 사친을 주인공으로 생각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나 연출자는 고리키의 개인적 성격, 혹은 감춰진 내면에는 루카와 같은 동정과 사랑의 인물이 자리잡고 있다고 봤다. 결국 이 작품의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짓된 진실, 진실한 거짓?
고리키 희곡의 유명 연출자 톱스토노고프는 1987년 볼리쇼이 드라마 극장에서 『밑바닥』을 무대에 올리고 나서, “고리키 연구자들은 루카를 이 희곡에서 없애 버리려고만 하면서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사친은 루카에 대해 무조건 나쁘게만 말한다고 여기면서 사친의 논리만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친은 결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통해 해결되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극 속에서 사친과 루카는 적이 아니며, 루카의 자비와 친절함과 동정은 선택의 여지없이 인류에게 유일한 대안으로 해석됐다. 루카 역을 맡았던 레베제프라는 배우는, “루카의 행동들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을 선으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세상에 악은 많고 선은 적다. 선을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은 하려고만 한다면 그럴 수 있다. 내 생각에 고리키는 루카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밑바닥』 공연사를 연구한 두브노바라는 “합숙소의 생활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함께 서서히 시작된 행위는 종결부로 가면서 진부함을 넘어서 정신적 갈등으로 집중되고 있다. 사친의 결론적 독백은 관객석을 향해 이뤄진다. ‘제 4의 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정치평론가이자 예언가로서 고리키는 자기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조명은 어둠을 뚫고 관객들에게 쏟아지고, 이 작품은 그 누구도 무관심하게 남아 있을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하면서 이 작품의 결론은 독자를 향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공연과 해석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루카에 대한 다양한 재조명이고, 이러한 재조명은 문학적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루카에 대한 조명이 사친을 무대에서 몰아내거나 사친 이념에 대한 승리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오류로 나아갈 뿐이다. 사친의 이데올로기를 과장하거나, 루카의 이념을 숭배하는 것은 모두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를 비켜가는 것이다.
『밑바닥』을 루카적 이념, 혹은 사친적 이념 중 어느 하나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어떤 완결된 도식적 이념에 기초해 구성돼 있지 않으며, 앞에서 자먀친이 제기한 질문처럼 매우 곤혹스러우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자먀친의 질문에 대한 고리키의 대답처럼, 언뜻 작가의 뚜렷한 이념적 주장이 드러나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와 반대되는 생각에 작가의 깊은 시선이 머물러 있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먀친의 재미있는 표현을 들어보자.
“고리키와 페쉬코프, 그들은 함께 살았다. 운명은 혈연적으로, 불가분하게 그들을 묶어 주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 싸우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그리고 나서 다시 화해하고 나란히 함께 살아갔다. 그들의 길은 바로 얼마 전에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1936년 6월에 알렉세이 페쉬코프는 죽었고 막심 고리키는 살아남았다. 러시아 장인의 가장 평범한 얼굴을 가진 인간, ‘페쉬코프’라는 소박한 이름을 가진 인간, 그는 자신을 위해 필명으로 ‘고리키’를 선택했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밑바닥』에서도 자먀친이 말한 바와 같이 ‘함께 살고 있는 페쉬코프와 고리키’가 싸우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카냐, 사친이냐 라는 단순한 대립적 문제틀이 아니라 루카로부터 사친이, 사친으로부터 루카가 생겨날 수 있다는 복합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 작품은 그 어느 확정된 해답이 아니라, 그 문제 자체에 복잡함과 미해결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하나의 목소리, 명료한 이념적 체계를 보여준다기보다 미해결의 문제의식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밑바닥(На дне)”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막심 고리키 지음,글쓴이이강은교수>
▣ 저 자 막심 고리키 Максим Горький(1968∼1936)
차르체제가 무너진 혁명적 시기에 인간의 대한 강한 믿음을 작품 속에 구현했다. 러시아 하층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프롤레타리아 작가.
버릴 수 없는 신념, 떠나지 않는 문제...
고리키는 편집실에서 젊은 작가 자먀친이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고리키였지만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문턱에만 겨우 가 봤고 오직 독학으로 글을 깨쳤으니, 공학도 출신의 이 젊은 작가가 가진 뛰어난 과학 지식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고 부럽기만 했다. 풋내기 작가인 자신에게 이렇게 사심 없이 매혹된 대작가를 바라보다가 자먀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선생님. 제가 새로운 소설 하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환상소설이죠. 먼 미래에 일어나는 일인데요. 행성 사이를 비행하던 우주비행선이 갑자기 고장이 나서 추락하게 됐습니다. 우주선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죠. 그런데 그 추락이라는 것이 2년이나 걸리는 겁니다. 선생님, 2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죽게 되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리키의 얼굴이 짐짓 못마땅하게 굳었다. 자먀친이 재차 답을 요구하자 고리키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꼭 대답해야 하겠나? 어떻게 대답하길 바라나? 좋아, 처음에는 모두 공포에 떨고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러나 일주일 뒤에 그들은 아주 조용하게 면도를 하기 시작할 것이고, 책을 쓰고, 그래, 심지어는 이십 년은 더 살 것처럼 행동하겠지. 그래야만 하지, 반드시, 그래야만 해. 우리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지 않는다고 믿어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우리네 인간사란 어떤 가망도 없을 것이네.”
아무런 해결책 없이 추락하는 비행선.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2년 후에 일어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리키는 이에 대해 마지못해하면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그리고 고리키는 평생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인간에 대한 이같은 낙관적인 믿음을 지키려는 신념은 고리키 문학의 큰 줄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현실에 대한 어두운 직시, 비행선 속의 사람들이 공포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완전히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변해버리고 비행선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냉엄한 현실 인식이 고리키의 내면에서 두렵게 자라나고 있었다. 고리키는 그런 염려와 불안을 떨치기라도 하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그래야만 해, 반드시. 그렇게 믿어야만 해”라고 강하게 말했다.
페쉬코프와 고리키, 두 영혼의 역사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는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외할머니 손에 양육된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2년을 구경했을 따름이다. 어려서부터 넝마주이나 신발가게 점원, 제도사 견습공, 식당 접시닦이, 성상화가의 견습공 등 스스로 생계를 꾸리며 ‘세상 속으로’ 나왔다.
어린 페쉬코프가 세상에 나와 지방 소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볼가강 연안의 도시와 농촌에서 체험한 러시아는 출구 없는 암울한 세계였다.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페쉬코프가 보고 느낀 것은 19세기 말 봉건적 차르 체제가 해체돼면서 새로 등장한 자본주의하의 러시아였다. 봉건적 신분의 질곡에서 풀려났으나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돈’이라는 더욱 가혹한 족쇄를 차게 된 빈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황폐해 가는 인간성과 무의미한 일상을 체험하면서 페쉬코프는 무기력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인간애를 확신하면서 왜 그들의 삶이 그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졌고, 점차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해 갔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고리키가 탄생한다. 기존 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중의 생활상을 애정을 담아 사실적으로 그린 고리키의 단편들은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학을 기다리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와 세계 문학에 신선한 목소리였다. 여러 단편에서 자신이 체험한 러시아 현실과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일약 러시아 대표작가가 된 고리키는 중편 「첼카쉬」, 희곡 『밑바닥』을 통해 대가 반열에 올랐고, 장편 『어머니』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고리키는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레닌을 비롯해 혁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 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지켜보면서 그것은 자신이 꿈꿨던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러시아의 전제주의에 맞서 싸웠던 고리키는 이번에는 혁명 과정에 나타난 볼셰비키의 잔혹함을 가차없이 비판했고 이 때문에 소비에트 정권과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이탈리아로 망명했지만 사회주의 정권과 서유럽 파시즘 정권의 갈등 속에서 불가피하게 다시 소련으로 귀국했다. 스탈린의 초청으로 귀국한 고리키는 ‘소련 작가 동맹’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됐고 소련 문학의 아버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시기 고리키의 복잡한 내면과 문학세계, 정치적 태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고리키가 후기에 보여준 복잡한 내면의 풍경은 이미 희곡 『밑바닥』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밑바닥』은 단순히 사회 하층민의 생활을 고발한 것이라기보다 ‘고리키’의 철학과 자연인 ‘페쉬코프’의 성품을 모순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이미 고리키의 창작과 정치 활동에서 드러나는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여러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고리키 문학을 현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고리키의생애와작품
1868 러시아의 공업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탄생.
목수인 아버지와 염색공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장남.
1871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 외할아버지 집에서 성장. 외할머니의 종교적이고 민중적이며 자연친 화적인 성품에 큰 영향을 받음.
1878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면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온갖 생업에 종사.
1879 어머니 사망. 러시아 문학과 세계문학 등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
1884 카잔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거부됨. 대학생, 지식인과 어울리며 인민주의 운동에 가담.
1887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껴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폐를 다치고 살아남.
1888-91 인민주의 활동, 노동자 조직과 연관된 혐의로 체포 후 석방. 코롤렌코의 지도로 문학 수업.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여행.
1892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통해 작가로 등단.
1895 「첼카쉬」로 큰 성공을 거두고 필명을 고리키로 사용. 낭만적이며 현실적인 수많은 단편 집필.
1998 단편집이 큰 성공을 거두어 러시아 전역에 필명을 떨침.
1899-1901 톨스토이, 체홉과의 만남.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 『세사람』 발표. 강력한 정부비판으로 감시와 체포의 위험 속에 생활.
1902 러시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임되나 황제에 의해 취소됨. 이에 대한 항의로 꼬롤렌꼬와 체홉이 명예회원직 사임. 희곡 「소시민」, 「밑바닥」 발표와 공연. 큰 반응을 얻음. 이후 공 연금지 처분됨.
1905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정부 비판과 혁명적 활동 혐의로 체포됨.
1906 망명.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미국 방문 후 이탈리아 카 프리 섬에 정착.
1906-13 이탈리아 머물며 활발한 창작생활, 러시아 사민당과 교류. 『어머니』, 『고백』, 『이탈리 아 이야기』, 『오쿠로프 도시』 연작, 자전적 삼부작 「어린 시절」, 「세상 속으로」 등 안정 적인 작품활동으로 많은 작품 발표.
1917-18 볼셰비키와의 갈등. 『러시아 순례』 등 발표. 러시아 문화와 문학 진흥 활동에 큰 기여.
1922 출국하여 유럽 여행 뒤에 이탈리아 소렌토에 정착. 『1922-1924년 단편들』, 『아르타모노 프가의 사람들』, 『나의 대학』(1924), 최후의 장편 『클림 삼킨의 생애』 등 집필.
1928 소비에트 여행.
1932 영구 귀국, 소비에트 작가동맹 의장으로 피선.
1936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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