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뢰거 가의 아들인 14세의 토니오는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몽상적 소년이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활달한 미소년 한스 한젠을 이상형인 것처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술과는 인연이 멀고 전형적인 시민 기질을 지닌 한스는 토니오를 경멸하기만 한다. 16세가 된 토니오는 댄스 강습장에서 쾌활한 미소녀 잉에보르크 홀름 (Ingeborg Holm)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마음을 두지만, 그녀도 한스와 같은 세계에 사는 인간으로 무기력하고 애정 표시도 제대로 못하는 토니오를 경멸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일가는 몰락하고 어머니는 재혼한다. 토니오는 작가가 되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고뇌와 고독의 연속이다. 그는 늘 평범하고 건강한 시민 기질의 소유자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는 가장 인간적이고 건전한 것을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면서 예술가의 고독과 고뇌를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의 자각 같은 것이 뒤얽혀 삶과 정신, 시민성과 예술성이라는 대립 명제에 대해 고뇌한다. 토니오는 뮌헨에서 알게 된 여류 화가 리자베타에게 자기의 고뇌를 털어놓았으나, 그녀는 그를 가리켜 길을 잘못 든 시민이라고 간단히 넘겨 버린다. 이처럼 현실 생활과 예술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던 토니오는 모처럼 이름을 감추고 고향으로 찾아가는데…….(요약)
토니오 크뢰거(Tonio Kr ger), 토마스 만 지음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 자신의 운명적 예술성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민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
한스 한젠 토니오가 어린시절부터 동경하던 인물. 강하고 활기차며 당당한 전형적인 시민의 모습
잉에보르크 홀름 토니오가 어린 시절 사랑하던 여인. 아름다운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전형적인 시민의 모습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화가이며, 토니오의 애인. 토니오의 정신적 방황을 이해하며 격려해준다.
동경
겨울비가 오는 오후, 토니오 크뢰거와 한스 한젠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토니오는 한스가 자신과 한 약속을 잊어버린 것에 화가 나 있었지만 한스가 그의 팔짱을 끼며 사과하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스의 사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한스를 사랑하고 있었고, 한스가 그에게 주는 고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선 한스가 미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스는 모든 면에서 그와는 달랐다. 한스는 우등생이었으며 운동실력도 탁월해서, 승마와 체조, 수영도 잘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한테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토니오는 그런 한스를 보면서 동경했다. 그는 한스를 보며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했다.
“난 요즘 놀라운 것을 읽었어, 아주 굉장한 거야.” 토니오가 말했다. “실러의 『돈카를로스』인데 한스 너도 읽어봐. 내가 빌려줄게, 네가 원한다면.” “아니야 그만둬, 토니오. 그런 책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난 계속 승마에 관한 책이나 읽을래. 거기엔 근사한 사진들이 정말 많거든.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온갖 자세들을 다 볼 수 있어.” “그것도 좋긴 한데… 그러나 『돈카를로스』는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그 작품은 아주 아름다운 대목에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쾅 하고 소리나게 친단 말야.” “쾅이라구? 왜?” “거기에는 후작에게 속은 왕이 우는 대목이 나와. 그러나 후작은 왕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속인거거든. 그런데 그때 밀실에서 왕이 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거야.” “폐하께서 우셨다고?” “궁중의 신하들이 아주 당황해해. 왜냐하면 왕은 평소에 굉장히 완고하고 엄격했거든. 그러나 나는 왕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있어. 왕은 항상 외롭고 아무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마침내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마저 그를 배반하니…….“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왕을 배반하지?” 한스의 질문에 토니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말에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응, 그건…….” “저기 에르빈 이머탈이 온다!” 갑자기 한스가 말했다.
토니오는 다시 굳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머탈이 그들의 대화를 방해한 것을 물론, 분명 한스는 이머탈과,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승마에 대해 이야기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스와 이머탈은 승마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머탈이 토니오에게 말했다. “크뢰거, 넌 승마 교습을 안 받니?” “응…….” “크뢰거, 너도 네 아버지한테 부탁드려서 교습을 받지 그래?” 한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토니오는 한스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성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 크뢰거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네 이름이 정말 이상하기 때문이야. 미안하지만 네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한스는 토니오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금방 변명을 했다.
“그래, 어리석은 이름이지. 나도 하인리히나, 빌헬름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러나 내게 세례명을 주신 외삼촌 이름이 안토니오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내 어머니는 저 아래 남미에서 오셨거든.” 이렇게 말하고는 그들이 승마에 대해 계속 얘기 할 수 있도록 토니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스는 이머탈의 말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예 『돈카를로스』 따위는 전혀 그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없어 보였다. 토니오는 울고 싶은 충동이 코끝으로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또한 그는 자꾸만 떨리는 턱을 억지로 고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됐다.
이머탈이 시내로 가야 한다며 그들을 떠났고, 그들도 한젠 가의 저택에 다다랐다. 토니오는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한스가 말했다. “참, 다음번에는 나도 『돈카를로스』를 읽어볼게! 밀실에서 우는 왕자 얘기는 틀림없이 재밌을 거야.” 이내 토니오의 마음이 밝아졌다. 한스가 『돈카를로스』를 읽는다면, 그들 둘은 이머탈이나 다른 누구도 감히 끼여들 수 없는 어떤 공동의 화제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한스도 토니오처럼 시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토니오는 고개를 저었다. ‘한스는 지금 그대로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사랑하고, 토니오가 사랑하는 바로 그 밝고 씩씩한 한스 그대로야 한다.’ 토니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열 여섯 살이 된 토니오 크뢰거가 명랑한 잉에보르크 홀름에게 반한 것은 후스테데 영사 부인의 널찍하게 치워놓은 응접실에서였다. 그날 저녁 그 응접실에서는 일류 가정의 자제들만을 위한 무용 교습이 있었다. 그들의 선생은 크나크였는데 토니오는 그의 동작을 보면서 이상한 원숭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잉에는 무아지경의 미소를 흘리며 크나크 선생의 동작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자주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시 따위나 쓰는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멸할 것이다.’ 알 수 없는 질투와 그리움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자신은 그녀로부터 소외되고 그녀에게 영원히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아프고도 절박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보며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여자들만이 추는 춤에 그가 얼떨결에 끼여들었던 것이다. 주위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나크 선생이 ‘크뢰거 양’ 하며 비난하자 모두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모두 춤동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휴식시간, 토니오는 남몰래 복도를 나와 창 앞에 섰다.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토니오는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엔 잉에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와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등뒤에서 날지도 모르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녀가 올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그를 비웃지 않았던가. 그가 유명해져서 그가 쓰는 모든 작품들이 인쇄되는 날이 올지라도 잉에는 아무런 감명도 받지 않을 것이다.’ 토니오는 가슴이 고통스럽게 죄어옴을 느꼈다.
길 잃은 시민
그가 작은 고향 도시를 떠나기 전에 이미 그 도시가 그를 붙잡고 있던 끈들은 소리 없이 풀려 있었다. 크뢰거 가의 어른인 그의 할머니가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 사색적이고 키가 큰 그 신사도 죽었다. 크뢰거 가의 큰 저택은 그 근엄한 역사와 함께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되었으며,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지 일 년 만에 음악가와 결혼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이 있는 먼 나라로 떠났다. 토니오는 이런 어머니의 처신을 약간 방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에게 그것을 못하게 말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가? 시 따위이나 쓰면서 장차 뭐가 될 거냐는 질문에 대답조차 변변히 못하는 주제에.
그는 고향을 떠났다. 햇볕을 받아 자기 예술이 보다 더 풍요롭고 성숙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남국으로 갔다. 아마도 그를 그쪽으로 끌어당긴 것은 어머니의 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리곤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아마도 아버지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 등단하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많은 박수갈채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한때는 선생님들이 꾸짖으면서 부르던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탁월한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다. 그는 생활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단지 창조자로서만 간주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토니오는 어느날 그의 여자친구인 화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방문했다. 그녀는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앉아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잠시 후 그녀는 손을 씻고 찻잔을 들고 그에게 왔다. 토니오가 말했다. “이따금 나는 독자들한테서 칭찬과 감사가 담긴 편지를 받는 답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나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나는 그들을 동정합니다. 만약 그 독자들이 여기 무대 뒤를 한번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실망할까요. 그 순간 독자들은 올바르고 건전하고 착실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거나 연극을 하거나 작곡을 하는 일 같은 것은 절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물론 나는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감탄을 내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런 감탄을 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데에 활용하면서 인간의 역을 연기해 내는 원숭이 같은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나는 가끔 죽도록 피곤합니다.”
“토니오,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당신의 천직에 헌신하고 있는지 제가 모르고 있다면 몰라도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천직이니 소명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입니다. 언제부터 이 저주가 느껴지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일찍부터, 아주 일찍부터 입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낙인 같은 것이 찍혀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반어, 불신, 반항, 인식, 그리고 감정의 심연이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해서, 당신은 고독해지고 그때부터 더 이상 서로 간에 이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당신이 수천 명 가운데 섞여 있어도 당신의 이마에 찍혀 있는 그 낙인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고, 그 낙인을 금방 알아본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술이 시민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미리 운명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직업일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 그런 진정한 예술가를 많은 군중 속에서 판별해 내는 데에는 그다지 날카로운 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건 당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인가요? 그렇지만 꼭 그런 식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은 내가 너무 세심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리자베타! 내가 한 사람의 인간적인 친구,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들 속에서 친구 하나를 간절히 갖고 싶어한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가끔 강단에 나가 어느 홀 안에서 내 말을 들으러 온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한테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구의 찬사와 감사가 내게로 밀려들고 있는가, 나의 예술이 이 자리에서 누구와 이상적인 결합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서 남몰래 강당 안을 살펴보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사람들은 그 속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술의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보려고 애쓰는 삶의 모습보다 더 초라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고 예술이란 월계수에서 한 잎, 단 하나의 이파리쯤은 따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안 될 말입니다. 이 점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제 말씀이 다 끝났나요?” 리자베타가 말했다.
“대답해주실 말이 있습니까?” “있을 것 같군요. 토니오, 전 당신이 오늘 말씀하신 모든 것에 어울리는 대답을 해드리지요. 이것은 당신을 그렇게도 불안하게 하고 있는 그 문제의 해답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해답은 이렇습니다. 거기 그렇게 앉아있는 당신은 그대로 한 시민입니다.” “내가요?” 토니오는 주저하며 말했다. “예, 당신은 잘못된 길에 접어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길 잃은 시민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단호히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제 안심하고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가을 무렵,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덴마크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어떤 코스로 가실 거죠?” “보통 가는 코스입니다.” 토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눈에 띄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요, 리자베타. 나는 내 고향, 내 인생의 출발점을 경유해서 갈 겁니다. 13년 만이지요.” 리자베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그게 바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 토니오, 내게 편지 쓰는 거 잊지 마세요.”
이상한 귀향
기차가 좁고 어두운 반원형의 터널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우중충하던 오후가 벌써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토니오는 자기 짐을 찾아 그것을 호텔로 옮겨주도록 부탁해 놓고는 역사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고향 도시를 둘러보았다. 13년 전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다만 그저 왜소하고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걸어서 호텔로 들어갔다. 검은 예복을 입은 세련된 신사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토니오를 측정하는 듯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면서, 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어림잡아 그 나름대로 적당한 자리를 매겨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는지, 그를 중간쯤으로 대접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고풍스런 서민적 가구가 비치된 깨끗한 방을 배정받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그가 떠났던 그때와 변함없이 회색빛을 띠고 진지하게 거기 있었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사무복을 입고, 귀에 펜을 꽂은 그의 아버지가 문득 걸어나와 그를 불러 세우고는 그의 무절제한 생활을 엄하게 꾸짖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진 현관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의 모습을 한 일 층을 둘러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는 멈춰서고 말았다. 문에는 흰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검은 글자로 ‘민중 도서관’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민중 도서관이라고?’
토니오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는 민중과도, 문학과도 전혀 무관한 곳이 아니었던가.’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네 벽면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제본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는 사서에게 양해를 구하고 책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곤 창가로 가서 그곳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침식사를 하던 방,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방,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절실하고도 안타까운 시를 썼던 자신의 방도 모두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찡한 그리움이 그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책을 꽂고 도서관을 나왔다. 더 이상 집을 둘러볼 마음이 들지 않아 곧바로 호텔로 돌아갔다.
토니오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더 이상 여기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가방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검은 예복을 입은 신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실례합니다만, 잠깐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이 호텔 주인인 제하 씨께서 손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형식적인 것입니다.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는 신사를 따라 현관 뒤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토니오가 알고 있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제하 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경찰관이 서 있었다. “뮌헨에서 왔지요?” 경찰관이 물었다. 토니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코펜하겐으로 가시지요?” “그렇습니다. 덴마크의 어느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신분증명서를 제시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증명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관리들을 상대하기 싫어서 지금까지 한번도 여권을 발급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 증명서도 없단 말이요? 이름이 뭡니까?” 토니오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밝혔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수배중인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하고 있는 거군요. 그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신분도 불확실한 인물이지요. 그는 여러 곳에서 사기행각뿐 아니라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질러서 뮌헨 경찰에서 수배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덴마크로 도주 중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과 동일인이 아니오.” 토니오는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다. “그러나 당신을 아무 증명서도 제시할 수 없지 않습니까?”
토니오는 잠시 생각했다. 제하 씨에게 자신이 크뢰거 영사의 아들임을 밝히고 이 사건의 결말을 내릴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기 가방에 가지고 계신 것은 대체 뭡니까?” “지금 쓰고 있는 단편소설 교정쇄입니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의 작품을 건네주었다. 경찰은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제하 씨도 경찰의 옆에서 함께 읽었다. “보십시오. 거기에 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쓴 것이고, 이제 그것은 출판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토니오가 말했다.
“자, 이것으로 충분해요. 손님을 더 이상 붙잡아 놓아선 안 됩니다.” 제하 씨는 경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토니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곤 그의 마차까지 따라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곤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토니오는 마차를 타고 가파른 좁을 길을 굴러 내려 항구로 향했다.
누군가 와야 한다
토니오는 덴마크 해변의 한 호텔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한적한 그곳에서 세상의 일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그날따라 식당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음을 발견했다. 토니오는 식탁에 앉아 한 상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헬싱키에서 무도회에 온 손님들입니다. 큰일났습니다. 우린 오늘밤 잠을 다 잤습니다. 빌어먹을!” “괜찮은 기분전환이 되겠군요.”
토니오가 말했다. 그리곤 식당에 앉은 사람들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그때 그는 한스 한젠과 잉에보르크 홀름이 식당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금발의 잉에는 예전의 무용교습시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밝은 옷차림이었지만, 전보다는 성숙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한스는 예전의 당당함 그대로였다. 둘은 손을 잡고 지나갔는데, 잉에는 그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곁눈질했지만, 한스는 주위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다. 그리곤 강렬한 파란 눈으로 약간 경멸이 담긴 시선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졌다. 그들은 토니오의 바로 앞을 스쳐 피아노가 있는 옆방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라는 거군요?” 토니오가 상인에게 말했다. 상인을 투덜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토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그는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는 눈부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안하고도 달콤한 그리움으로 무도회를 기다렸다.
그날 저녁 토니오는 음악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방에서 나와 무도회가 열리는 방으로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열려진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안의 밝은 불빛과는 대조적으로 그곳은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거기 있었다. 오늘 낮에 햇빛 아래서 토니오 곁을 스쳐갔던 두 사람이 바로 거기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자 고통스런 그리움이 그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내가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없었다. 내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난 남몰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속에 너희들이 있나하고. 한스,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마라! 난 너한테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한테 무슨 상관이 있겠니? 너처럼 되고 싶다.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춰서, 착하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한스 같은 아들을 갖고 싶다. 창작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싶다.’
문득 음악이 그쳤다. 휴식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드디어 밝은 홀 안의 사람들도 유리문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상기된 얼굴로 의아해하며 살피는 눈길들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고 서 있었다. 한스와 잉에도 그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들의 시선은 경멸로까지 보여지는 완전한 무관심 그 자체였다.
토니오는 음악이 다시 시작되자, 그들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동참하지도 않은 무도회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질투 때문에 피곤했다. ‘옛날과 똑같다. 수줍은 얼굴로 나는 어두운 곳에 서서 너희들, 행복한 생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괴로워했지, 그러다가 외로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 누군가 와야 한다. 이제 잉에보르크가 와야 한다. 그녀는 내가 가버린 걸 알아채고는 살며시 내 뒤를 따라와서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사랑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토니오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불을 껐다. 그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두 이름을 속삭였다. 그 이름들은 그의 삶을 의미했고, 소박하고 진실한 내면의 감정, 즉 고향을 의미했다. 그는 그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창조의 열정과 한기에 반쯤은 소모되어 버린 자신을 보았다. 성스러움과 욕정 사이에서 의지할 곳 없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내던져진 자신을 보았으며, 그렇게 기진맥진한 채 길을 잃고 황폐화된 병든 자신을 보았다. 그는 후회와 향수에 젖어 흐느껴 울었다.
그의 주위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아래층으로부터 삶의 달콤하고도 저속한 삼박자가 둔탁하면서도 물결치듯 그에게 울려오고 있었다.
리자베타에게
이제야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읽고 아마도 당신은 실망하실 겁니다. 이야기할 것이 너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만나서 얘기하겠습니다.
리자베타, 어느 땐가 당신은 나를 가리켜 시민이라고, 길 잃은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당신은 당신의 그 말이 얼마나 진실에 적중했는지를 알았을까, 그리고 나의 시민성이 삶에 대한 나의 사랑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하고 나는 자문해 봅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의 아버지는 북쪽의 기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청교도 정신에서 나온 명상적이고 철저하며 정확한 성품이셨습니다. 불확실한 이국적 혈통을 물려받으신 나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소박한 동시에 태만하고 정열적이며 충동적이었습니다. 이 혼혈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에서 길 잃은 시민, 훌륭한 가정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술가입니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당신들 예술가들은 나를 시민이라고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리켜 냉정하다거나 동경이 없다고 말하는 당신들, 예술가들이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애초부터, 운명적으로 타고난 예술가 기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위대한 예술성으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정한 자들에게 경탄을 보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일 것입니다. 모든 온정, 모든 선의, 그리고 모든 유머는 이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리자베타,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활기차고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하고 생산적인 사랑입니다. 동경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한 질투와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의 행복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토니오 크뢰거(Tonio Kr ger)”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토마스 만 지음>
▣ 저 자 토마스 만 Thomas Mann(1875∼1955)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이며 문명 비평가.
토마스 만의 정치관
20세기 전환기의 시대적 갈등이 토마스 만의 내면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초기의 그의 정치적 견해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의해 비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가 작가로는 위대함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독일에서 토마스 만만큼 이중적 평가를 받는 작가도 드물다. 이러한 경향은 벌써 192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는 그를 침묵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토마스 만은 경악과 희망이 섞인 감정으로 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8월 7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전쟁을 예견했다. “이 전쟁으로 내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 완전히 변화될 것 같아요. 전혀 예기치 않게 아주 엄청난 일을 체험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요?" 이때부터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 강한 형과 불화를 빚게 됐다. 그는 정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형이 독일문화를 매도하는 데 대해 독일문화의 정신적 아들로서 독일의 명예를 위해 정신적인 격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필 중이던 『마의 산』을 중단하고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독일과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하고자 2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에세이를 쓴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만의 에세이집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이다.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은 국가와 정치에 대한 정신적 자율성의 주장이고 예술과 대중간의 경계를 짓는 것이며 정치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심미주의에의 자기고백이었다. 시민계층을 보호하고 그것의 순수성, 위엄 및 휴머니즘을 보존하고자 했지만, 그는 독일 시민이 부르주아로 발전한 사실을 놓쳐버렸다고 고백한다. 독일 시민과 교양 개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너무 늦었음을 그는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일을 시도한다. 그는 민주적인 문학이 밀어닥침으로써 휴머니즘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여겼다.
세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토마스 만
그는 뤼벡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 참사위원을 지내다가 부시장이 된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남미 출신의 미인으로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는 시민적 기질을, 어머니에게서는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백 년 동안 이어왔던 만(Mann)상회(商會)가 파산하고 어머니와 같이 뮌헨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화재보험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후 로마에 체재하던 형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일 년 동안 살게 됐다. 그동안 뮌헨 시절 이후의 단편을 모아 『작은 프리데만 씨 Der kleine Herr Friedemann』라는 표제로 출판했다. 이 시절의 단편들은 병자, 불구자 혹은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들이 시민적인 행복을 혹은 정신적인 세계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파멸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많다.
1899년 뮌헨으로 돌아와 잠시 동안 주간지 『짐플리치스무스 Simplicissimus』 편집을 담당했고, 1900년에는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Buddenbrooks』을 완성했다. 일가 4대에 걸친 몰락의 역사를 그린 이 작품으로 만(Mann)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1905년 만은 대학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명성을 얻자 자유문필가로 생활했다. 이 무렵 명작 『토니오 크뢰거 Tonio Kr ger』, 『대공전하(大公殿下)』,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등이 발표됐다.
1912년 부인이 폐결핵으로 스위스 다보스 요양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동반자로 따라가 거기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그때의 체험을 삽화로 모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방대해서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문학적 정점을 이루는 『마(魔)의 산 Der Zauberberg』이다.
1929년에 토마스 만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로 나치의 위협을 느끼자 먼저 나치를 희화한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를 발표했고, 이어 강연을 통해 나치의 위협성을 경고했다.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로서 강연 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류의 적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파우스투스 박사 Docktor Faustus』 등을 발표했고, 1944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세계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인 그는 전후 점진하는 동서의 대립을 유화시키기 위해 동구의 동서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미국이 반공 정책을 취하자 1952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동서로 분리된 조국으로는 돌아오지 않고 스위스에 살면서 세계 평화와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강연활동을 하면서 지내다가 1955년에 80세를 일기로 숨졌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토니오 크뢰거 Tonio Kr ger』는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으로, 시민적 정신과 예술가적 정신의 대립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보여준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적인 삶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그런 삶에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는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독과 고뇌를 그린 것이다. 즉 시민은 삶이란 공간과 시간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지만, 예술가는 그렇지 못하고 그것을 창조의 대상으로 삼아 이해하고 관찰하고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과 시간 밖에 서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음악을 좋아했던 토마스 만은 의식적으로 음악적 기법을 소설 구성에 응용하여 마치 멜로디가 반복되듯이 몇 개의 같은 어구, 같은 표현을 되풀이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방황
‘토니오 Tonio'라는 이름은 독일적인 이름이 아니다. ‘크뢰거 Kr ger’라는 성(性)은 독일의 전형적인 성인데 반하여, 이름은 남국 어딘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이름에서, 주인공의 중간적 존재와도 같은 운명을 예견할 수 있다. 그는 완전히 독일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의 이름처럼, 또 그의 어머니처럼 남국적이지도 못하다. 그는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해있지 못하다.
한스와 잉에의 모습은 토니오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다. 금발 머리,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들은 토니오에게는 단순한 대조의 차원을 넘어 각별한 애정으로 다가온다. 그런 사랑의 근원은 ‘다르다’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토니오는 그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세계로 와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한스나 잉에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실체 그대로 한스와 잉에에게서 사랑 받고 싶어할 뿐이다.
예술가로서의 방황
가문이 몰락하자, 토니오는 시민적 삶을 떠나 예술가로의 세계에 전념하기로 한다. 삶과의 융합력을 상실한 예술가 토니오는 언어를 비롯한 형식적인 모든 것에서 예술적 문제를 찾아 나선다. 그가 고향을 떠나, 그의 예술적 기질과 상통하는 남국에서 체험을 바탕으로 예술에 전념할 때도 그의 내면에서는 아버지가 물려 준 시민적 가치와 어머니가 물려 준 예술적 가치의 충돌에 고뇌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중적 시각’을 이때에도 보여준다.
토니오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예술의 불모성에 대하여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다. 토니오는 예전에 한스와 잉에가 자신의 세계로 다가와 주기를 바랐던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그는 평범한 삶을 동경하지만 그들과 자신은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절망한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 굳게 믿지만, 그의 마음은 시민적 삶을 누렸기에 행복해하던 어린 날의 토니오하고 많이 달라져 있다. 그의 마음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언어와 정신의 힘에 전력을 다했지만, 그는 그 생활에서 점점 쇠약해져 간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삶에 동참하지 않고 예술가인 자신에 머물고자 안간힘을 다한다.
하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두 세상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왔다. 혼혈아인 그의 출생부터 서로 상극되는 부모의 기질을 물려받았기에, 그는 떼어낼 수 없는 운명처럼 두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적인 분위기에 눌려 있던 뤼벡에서 그는 예술가적인 삶을 영위하고 싶었고, 고향을 떠나 남국에서의 예술가적인 체험은 오히려 평범한 삶으로의 동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서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술가로 인정을 받으며 그의 시선은 나날이 예리해져 갔지만 그의 정신과 몸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 토마스만의생애와작품
1875 뤼벡의 부유한 상가에서 세습적인 곡물 상인의 차남으로, 그리고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1893 실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뮌헨으로 옮겨 화재 보험회사의 견습사원으로 입사
1894 견습사원을 그만두고 뮌헨에 있는 두 대학의 청강생으로 들어가, 처녀작 『전락』을 발표하여 데메르의 인정을 받는다.
1897 장편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 Buddenbrooks』집필
1898 뮌헨으로 귀환하여 『작은 프리데만 씨』 출판
1901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을 출판하게 되는데 이 작품으로 인해 점차 부유해지기 시작한 다.
1903 단편집『토니오 크뢰거 Tonio Kr ger』, 『트리스탄』집필
1904 『피오렌짜』완성
1905 뮌헨 대학의 수학 교수 프링크스하임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
1909 장편 『대공전하』집필
1912 죽음에 매혹되어 몰락하는 예술가의 비극을 묘사한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집필
1913 여름부터 『마의 산 Der Zauberberg』쓰기 시작
1914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정치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없던 그는 창작을 거의 하지 못하고 독일 낭만주의적인 보수주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전쟁 중 서유럽의 데모크라시를 독일에 도입하려고 한 진보적인 형 하인리히에 반대하여 정신 예술의 정치화에 항의
1918 반데모크라시 논집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2년 반쯤 써 나간다. 그러나 결국엔 데모크라시에 대한 반항이 잘못임을 깨닫게 된다.
1919 단편 「주인과 개」집필
1923 『괴테와 톨스토이』집필. 1924년에는 『마의 산 Der Zauberberg』 탈고. 이 작품은 독일의 낭만주의적인 '죽음과의 공감'을 민주주의적인 '삶에 대한 봉사'로 전환
함으로써 중년의 만(Mann)이 갖는 세계관의 전환을 나타낸 교양 소설
1926 『무질서와 어린 고뇌』를 쓰기도 하고 문화 사절로서 외국을 여행한 상세한 보고서인 『파리 방문기』집필. 4부작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und seine Bruder』 착수
1929 노벨문학상 수상
1930 단편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를 써서 파시즘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 최후까지 예언
1933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자 그는 2월 국외로 강연 여행을 떠난 채 망명
1936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한다.
1939 장편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 집필. 괴테를 주인공으로 하여 천재의 내면을 그리면서 히틀러 독재와는 다른 괴테적인 독일을 그린다.
1940 단편 「바뀌어 붙여진 머리」 집필
1943 단편 「계율」 집필
1944 미국 시민권을 획득
1947 『파우스투스 박사 Doktor Faustus』(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의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집필
1949 17년 만에 독일을 방문
1951 장편 『선택된 인간 Der Erwahlte』 집필
1952 스위스로 이주
1954 마지막 장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Die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leix Krul l』,『회고록의 제 1부』 집필
1955 심장병으로 사망
<김유빈님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