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옴병 걸린 앵무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옴병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 중류층의 외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그는 어머니의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버릇없이 자란다. 아버지는 그를 제대로 교육시키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눈물과 투정 앞에서 굴복하고 만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하기보다는 요령과 술수를 터득하는 데 전념하고, 못된 학생들과 어울려 순진한 애들을 골려주면서 학교 생활을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아버지는 페리키요가 직장을 얻길 바라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집안 체면을 위해서 대학에 진학시킨다.
대학에서도 그는 공부를 하지 않고 거들먹거리면서 소일하거나 여자 애들과 놀면서 보낸다. 대학을 졸업하자, 페리키요는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수도사가 되면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일만 하는 형편이 된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핑계로 그는 수도원을 빠져나와 예전의 방탕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모두 날아가면서 세상의 온갖 문제들과 마주치게 되는데...(요약)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주인공. 자신이 겪었던 부랑배의 생활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찬파이나 서기. 페리키요를 조수로 데리고 있지만, 그의 여자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내쫓는다.
라파멘타스 이발사. 페리기요를 조수로 데리고 있었지만, 이발사 마누라의 흉을 보다가 쫓겨난다.
푸르간테 의사
태어나서 고아가 되기까지
내 이름은 페드로 사르미엔토다. 그런데 이 좋은 이름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페리키요 사르니엔토’(근지러운 앵무새)라는 듣기에 거북스러운 이름을 달게 되었을까? 그 내력은 이렇다.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을 때 눈치 빠른 친구놈들은 내가 옴을 앓은 적이 있고 또 입이 싸다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채고는 페리키요(앵무새, 수다쟁이) 사르니엔토(옴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때로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영악할 때도 있다.
나는 1771년인가 1773년인가 하는 해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중류층 가정에 외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점잖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좀 방정맞고 생각이 없는 여자였다. 내 성질머리가 더럽게 비틀어진 것은 모두 내 어머니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외아들이라 그랬는지, 어머니는 나를 떼쟁이로 키우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나마 하나 있는 자식을 제대로 키워보자고 했지만, 어머니의 앙탈과 눈물과 고집 앞에 두손, 두 발 모두 들고 말았다. 나는 내 유년시절을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보냈다. 나는 고자질로 하인들을 다스렸고, 투정으로 어머니를 조종했고, 어리광으로 아버지의 매를 피했다.
자기 버릇 개 못준다고, 학교에 입학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남 탓할 일은 아니다. 나는 원리원칙을 배우기보다는 요령과 술수를 터득하는 데 바빴고, 배짱만 있는 놈들과 어울리며 순진한 학생들 골려먹기에 분주했다. 내가 보기에 학교라는 곳은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첫째 문제는 선생들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생각도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신세 타령을 일삼는 선생, 무조건 매를 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선생, 필요한 매도 들지 못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선생...... 진짜 나 같은 놈이 다시는 없기 위해서라도 학교 선생 선발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교육을 마치자 아버지는 직업 교육을 시키려 했다. 남겨줄 재산이 없었으니 확실한 밥벌이나마 보장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반대였다. 하찮은 귀족 나부랭이 출신이었던 내 어머니에게는 ‘실사구시(實事求是)’라거나, ‘명실상부’라거나 하는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저 체면만이 중요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실속 없는 허영심으로 나를 대학에 보내려 고집을 피웠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옥신각신. 내 부모님은 내 진학 문제로 평생에 처음으로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했다. 아버지의 판정패. 나는 당당하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것도 밥벌이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문대학에.
대학에 가서도 농땡이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먹고 대학생이었다. 대학생 배지를 달아놓으니 아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도 입만은 살아 있었다. 언젠가 하루는 시골 농장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친구놈의 꾐에 빠져 투우놀이를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다가 소에 받혀 죽다 살아났고, 말을 탄다고 깝죽거리다가 떨어져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또 아가씨들 앞에서 잘난 체한다고 혜성에 대해 들먹이다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이 되자 아버지는 다시 직업 얘기를 꺼냈다.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내 삶의 철칙은 먹고 놀기였으니까.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내가 아무리 멋대로 산다고는 해도 아버지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직장을 구하기 싫으면 군대라도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으름장에 나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선 위기는 벗어나야 했으니까. 게다가 가만 보아하니 수도사 생활이야말로 진짜 놀고먹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수도원에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했다. 놀고먹기는커녕 못 먹고 새빠지게 일만 했던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싶어 그럭저럭 견디는 가운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아버지 죽음을 핑계삼아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잔소리꾼이 없어졌으니 완전히 내 세상이었다. 허랑 방탕, 유유자적, 안하무인.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아버지가 남긴 알량한 재산은 어느새 바닥이 나고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제는 혈혈단신, 사고무친, 천애고아가 되었다. 장례를 치를 돈도 없었던지라 나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서 어머니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는 기대만 품고 있었다. 사실 장례 절차라는 것은 문제가 많다. 쓸데없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식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못 먹을 감이라면 나무 채 불이라도 확 싸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몸종으로서 어머니에게 충성을 다해온 할망구가 갖은 애를 써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기어들어가 잔머리를 굴려 나머지 재산을 처분하고 막막한 세상으로 떠밀려나왔다.
감옥 생활
집을 나오니 갈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내 대부(代父)라는 사람도, 내 가까운 피붙이도 나를 외면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셔 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남에게 뒤질 새라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한껏 처먹고 하던 작자들이, 한푼 없는 알거지 대자(代子)나 조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피를 나눠가졌다는 사실을 창피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다. 나는 가슴에 한을 품고 두고보기로 했다.
나는 진짜 거지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다 동창생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시골 농장에서 나를 골려주었던 놈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그는 하늘에서 내려주신 동아줄이었다(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썩을 대로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 동창생도 한때 잘 나갔지만, 친척 어른한테 사기를 치다 쫓겨난 신세였다. 그는 노름판에서 바람잡이로 놀면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그는 내게 동업을 제의했다. 어쩐지 수상쩍어 보이는 짓이었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놈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내 인생은 글자 그대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노름판에서는 별놈의 짓거리가 다 벌어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완전 숙맥으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꼴이었으나, 판을 들락거리다 보니 차츰차츰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손놀림도 부드러워졌고, 눈썰미도 갖추게 되었다. 돈 주인이 한눈 파는 사이 판돈을 슬쩍하는 법도 익혔다. 또 재수없이 걸리는 날에도 파렴치한 표정으로 극구 부인할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단순, 무식, 과감. 노름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철칙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촌놈 하나를 꼬셔 등쳐먹으려다 재수없게 걸리고 말았다. 워낙에 용의주도했던 친구놈은 용케 빠져나갔고,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했던 나는 그 촌놈한테 붙들려 늘씬하게 얻어맞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틀림없이 맞아죽었을 것이다.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하는 자선병원도 가관이었다. 병을 고치기보다는 병을 키워 저 세상으로 보내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천우신조로, 우여곡절 끝에 목숨이 붙은 채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따지고 잔소리하다가 간호사들한테 늘씬하게 얻어터지긴 했지만.
병원을 나오자 다시 그 친구가 달라붙었다. 무슨 악연인지. 친구란 놈이 이번에는 강도질을 하자고 유혹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덕분에 이만큼 고생한 것으로 만족한다고. 나는 노파심에서 친구를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만만했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짰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고사했다. 친구는 나더러 겁쟁이라며 떠들고 다니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놈이 일을 벌이는 동안,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현장으로 가보았다. 드디어 일은 터지고, 친구 놈은 달아나고, 현장에 있던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강도당한 집 하녀가 나를 한패거리로 지목했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모든 정황이 내게 불리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갇히고 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도 어차피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한 곳이었다. 햇병아리 죄수로서 나는 능청맞은 고참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했다. 돈 뺏기고 욕을 먹고 매를 얻어맞았다. 시쳇말로 뭐 대주고 뺨맞는 꼴이었던 것이다. 감옥 서기도 사람 골려먹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무슨 놈의 조서는 그렇게도 많이 작성하는지, 또 뭔놈의 알고 싶은 것은 또 그렇게나 많은지...... 오만 가지 질문에 오십만 가지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안토니오씨라는 내 평생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다. 예쁜 마누라를 둔 덕분에 어처구니없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점잖은 사람이었다. 이 양반 사연도 구구절절했다. 그는 예쁘고 날씬하고 춤 잘 추는 마누라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돈 많은 귀족이 마누라를 어떻게 해보려고 자기를 함정에 빠트렸던 것이었다. 이 양반은 자기 주제가 그러면서도 내 후원자로 나섰다. 안토니오씨는 나의 무죄를 인정해주었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내 뒤를 봐주었고, 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피와 살이 되는 여러가지 영양가가 풍부한 원리원칙도 들려주었다. 반면 ‘새끼 독수리’라는 영악한 놈은 내게 들러붙어 피를 빨아먹기도 했다.
어느덧 안토니오씨도 무죄가 입증되어 감옥에서 나갔다. 끈 떨어진 연이라고나 할까. 새끼 독수리한테 속절없이 이리저리 뜯기는 와중에, 그래도 왕년에 먹물깨나 먹었다고 나를 그렇게나 골려먹었던 바로 그 감옥 서기의 눈에 띄어 나는 조기 석방과 함께 서기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꽃피는 호시절: 의사와 판사 시절
나는 서기의 조수로 일을 하면서 법조계의 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서기라는 사람들의 술수, 아니 법조계 자체에 깔려 있는 엄청난 부조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진리나 진실에는 눈을 감은 반면, 편법이나 술수라면 눈에 불을 켜고 배우고 익혔다. 이 서기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곤란한 처지에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가방끈이 짧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학력이 서기의 가방끈을 늘여주었다. 나는 서기의 손발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러다 서기의 애인에게 한눈을 파는 바람에,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서기가 어느 죄수일을 빌미로 집에 붙잡아놓고 재미보던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아니었다. 단지 재미삼아 그랬던 것뿐이었다.
서기의 집을 나와 방황하던 나는 예전에 내 아버지가 단골로 다니던 이발사를 만나 그 집에 빌붙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는 틈틈이 그 당시 이발사들처럼 외과 의술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이발 연습을 할 때면 강아지들이 욕을 보았고, 외과 수술을 연습할 때면 시골 할망구들이 치를 떨었다. 이발사 조수로 있던 어린놈은 꼭 나를 빼박아놓은 놈이었다. 그놈의 인생관이 나와 아주 똑같았던 것이다. 놀고 먹기. 나는 놈과 죽이 맞아 입 품팔이로 나날을 보냈다. 내 별명 페리키요가 말해주듯 나는 입이 상당히 헤픈 편이다. 어느날 조수놈과 죽이 맞아 이발사 마누라 흉을 보다가, 이발사 마누라로부터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그 집에서 쫓겨났다.
나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약방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이것도 먹물을 먹은 덕분이었다. 이때 나는 약에 대해 얼치기로 도가 트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안심하는 순간, 조수로서 건방지게 약을 조제한다고 까불다가 잘못 조제하는 바람에 약방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었다. 나는 약방에서 쫓겨난 즉시, 약방 주인과 경쟁 관계에 있던 고집쟁이 돌팔이 의사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틈틈이 의학을 연구(?)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나는 의사의 책과 돈을 훔쳐 시골 마을로 가서 돌팔이 의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예전에 사귄 이발사 조수를 동업자 이발사로 데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조수와 나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사기꾼이었다. 장님 문고리 잡는다는 말처럼, 초반에는 운이 좋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도 확률이 문제 일텐데, 앞에서부터 잘 풀려나가면 갈수록 맞을 확률은 떨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곧 우리 일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내 손에 걸리면 어느 누구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자 마을 신부가 하소연했다. 이렇게 다 죽여버리면 교회는 어떻게 꾸려나가느냐고. 참다못한 신부는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했다. 나와 의학에 대한 간담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엉터리 돌팔이 의사인 나 때문에 수많은 의사들이 싸잡아 욕을 먹었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고, 심기일전하여 환자들을 죽여나갔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치 않았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돌 벼락을 맞으면서. 당연지사였으며, 인과응보였고, 사필귀정이었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방황했다. 싸움도 하고, 사기도 치고 역으로 사기도 당하고, 노름판도 기웃거리고, 따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뜻밖의 복권 당첨. 벼락부자로서의 호기. 결혼. 방랑. 방탕. 다시 패가망신. 다시 떨거지가 된 나는 교회에 취직하여 시체를 파내기까지 했다. 시체 손가락에 끼여 있던 반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또한 거지 패거리에 합류하여 가짜 병신 노릇도 했다. 짭짤한 벌이였다. 그러나 동냥을 얻기 위해 어린 자식을 꼬집어뜯는 엄마 거지를 보고는 삶에 회의를 느꼈다.
이래저래 지내다가 시골 마을 판사의 조수로 취직한 나는 다시 한번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왕년에 배우고 익힌 것들이 훌륭한 재산이었다. 판사라는 작자들의 속임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판사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탄핵받아 쫓겨나자, 나는 판사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내 세상이었다. 때린 데 골라 또 때리듯, 한 번 법에 걸린 놈들은 영원한 밥줄이었다. 나는 바람잡이까지 고용했다. 바람잡이로 하여금 노름판을 벌이게 하고는 급습했다. “돈을 줄래, 감옥에 갈래?” 이렇게 위협하면서 돈을 받아 챙겼다. 공갈, 협박, 공금 유용으로 나는 배를 채웠다. 말 그대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순대를 채웠던 것이다. 이때 주머니도 채워놨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막급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나는 다시 감옥살이 신세를 졌고, 결국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군 입대와 외국 나들이
군대에 들어간 나는 그 동안 갈고 닦은 잔머리를 굴려 직속 상관인 대령의 부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내가 대령을 이용해서 그렇지, 이 대령은 내 평생의 은인이었다. 대령은 지혜롭고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대령은 틈만 나면 나를 일깨워주었다. 군대는 요령이라는 말이 있다. 요령이라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말이 군대지, 대령의 직속 부하로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내 위치를 최대한 이용해 돈벌이에 열을 올렸다. 대령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까. 대령이 죽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대령이 죽고 나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대령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선 사업가였다. 나는 내 사업으로 한 재산 마련하기도 하였거니와, 대령의 유산까지 상속하게 되어 상당한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제대하여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임기가 끝나고 우리 부대는 다시 고국으로 향했다. 내가 탄 배는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난파하고 말았다. 다시 알거지 신세가 된 나는 표류하다가 중국의 어느 섬에 도착했다. 나는 그 섬 영주의 동생을 만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나는 멕시코의 백작이라고 속였다. 이것도 일을 하기 싫어 엉겁결에 나온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생활 신조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였다. 나는 중국의 사회 제도, 형벌 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영주의 동생은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중국인과 동행하여 멕시코로 돌아왔다.
멕시코로 돌아오자 귀족이라는 내 거짓말은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중국인은 멕시코에 올 때 많은 돈을 마련해왔기 때문에 나는 그 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멕시코 신부 한 사람을 가정 신부(神父)로 소개시켜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순진한 중국인은 여자를 그리워했고, 나는 수작을 부려 중국인에게 여자를 대주려고 했다. 그런데 중간에 신부가 나서는 바람에 나는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내가 직장을 알선해준 사람이 내 밥줄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중국인 집에서 쫓겨난 나는 더 이상 삶에 연연해할 수 없었다. 사는 게 지겨웠다. 나는 죽기로 작정하고 한적한 공원에서 목을 맸다. 아니 목을 매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용기를 내기 위해 이별주라고 마신 것이 도가 지나친 나머지 정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자살에 실패한 나는, 그러니까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나는 옷가지마저 몽땅 털리고 말았다. 그때 나는 진정한 인간의 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할머니의 도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생은 살 만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 다시 살아보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전에 감옥에서 만난 새끼 독수리가 끼여 있던 강도 패거리에 들게 되었고, 섣부른 강도짓을 하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나는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강도 두목으로 잡혀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다시 살되 좀 제대로, 진짜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개과천선
정신을 차린 나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다. 나는 고해성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교회를 찾아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그 교회에서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한때 나와 어울려 다니던 동창생이 어엿한 신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설교에, 그 친구를 통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친구 신부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잡화점과 여관과 농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정직하게 굴었다. 생활이 안정되어가자, 과거에 내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내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에게는 보상을 했고, 내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에게는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모두 찾을 수는 없었다. 행방이 묘연한 사람도 있었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번민과 회오의 연속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내가 가장 비참했을 때 나를 걷어찬 친구 가족을 만나 도와주었다. 나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만나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며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제는 형편없는 처지에 빠진 내 평생의 은인 안토니오씨를 만나, 그 가족을 살리고 안토니오씨의 딸과 결혼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사들은 내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 삶을 책으로 남기자고. 그건 명예욕이 아니라 내 자식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자식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다. 내 자식들에게 나와 같은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썼다. 보탠 것도 없고 뺀 것도 없다. 사실 그대로 썼다.
나는 내 글이 남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내 공책을 친구에게 넘겼다. 이 친구가 내 마누라를 꼬셔 내 글을 책으로 출판한 것 같았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이라도 이미 죽은 몸이니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왕 책으로 나온 바에야 많이나 읽혔으면 좋겠다. 독자들이여, 내 꼴 본받지 말고 날 위해 기도나 해주시구려.
아마도 내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여기 잠들다
페드로 사르미엔토
널리 알려지기로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살아서는
죄인일 뿐이었고
죽어서도 남긴 게 없다.
나그네여,
그 누구일지라도,
영원한 안식을
주님께 빌어주소서.
<“페리키요 사르니엔토(El Periquillo Sarniento)”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지음, 글쓴이송병선교수>
▣ 저 자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Jos Joaqu n Fern ndez de Lizardi(1776∼1827)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소설가이자 멕시코 사상가.
식민 사회의 위선에 염증을 느낀 유머리스트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소설인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를 쓴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점잖고 근사하며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흔히 현자나 귀족 혹은 정직한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실제로 이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형편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면, 가난하고 천하며 무식하고 악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비록 성품이 고귀하며 지혜롭고 자비로워 이런 옷차림을 할지라도 그런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겉모습이나 돈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겉모습이 훌륭하다고 그 사람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식민 사회의 겉모습에 숨어 있는 위선을 유머를 통해 폭로한다. 즉, 그가 살았던 식민지 사회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봉건 귀족이 사실은 무위도식하며 지혜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들춰낸다. 그리고 천한 사람들 역시 그런 귀족들의 태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서 식민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가는 허위와 가식이 사라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카레스크 양식과 유머를 빌어 당시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실제로 그는 평생을 식민 사회의 반항아로 인생을 살았으며, 그런 세계관은 결국 그의 조국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문학의 자양분이 된 저널리즘: 라틴아메리카 최초 소설의 원동력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의 작가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1776년 11월 15일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가족은 테포소틀란이란 마을로 이사를 가고,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그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페르난데스 디 리사르디를 마누엘 엔리케스 선생님의 집으로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한다. 그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우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792년 고등학교를 마치자 이듬해 신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가정 경제 사정으로 인해 이내 그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1805년 마리아 돌로레스 오렌다인과 결혼하고, 그 즈음에 처음으로 글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립 이전의 관습에 따라 그 글들은 익명으로 출간된다. 1808년에는 『우리의 카톨릭 군주 페르난도 셉티모를 기리는 폴란드 여인』을 쓰는데, 이때부터 독립군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그는 후에 세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811년에 그는 첫번째 감옥 생활을 맛본다. 타스코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중 모렐로스 신부가 이끄는 독립군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수감되는 것이다.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뜻과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진술하고, 그 진술이 인정되어 석방된다. 1812년 그는 신문 『멕시코 사상가』를 창간한다. 후에 ‘멕시코 사상가’라는 이름은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의 가명으로 사용된다. 그해 식민지에서의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는 ‘카디스 헌법’이 발표되자, 그는 식민체제의 모순을 우아한 필체로 풍자한다.
그의 글 중에는 독립군과 관련 있는 성직자의 특권을 박탈하는 포고령을 철회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글을 읽은 부왕(副王, 스페인에 왕이 있고, 그 식민지에는 부왕제도가 있었다. 부왕이 있는 나라를 부왕국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아르헨티나에 부왕국이 설치되어 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베네가스는 즉시 그를 구속하라고 지시했고, 식민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독립의 명분을 외치는 것과 같다면서 다시 출판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1813년, 7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자,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다시 글을 쓴다. 이 당시는 주로 멕시코를 피폐하게 만든 전염병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해에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를 쓰기 시작하고, 이 작품은 1816년에 출판된다.
이 소설의 1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출간됐다. 1819년에 발표된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를 찬양함』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서적상들은 이 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평가를 받자 더욱 많이 팔렸습니다. 이 책은 스페인, 아바나, 포르투갈에서도 출판됐으며, 영국인들은 영어로 번역해서 출간했습니다.”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2부는 1832년이 되어서야 빛을 본다. 이 작품은 1816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지만, 당국의 출판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검열관이었던 마르티네스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1장에 밑줄 친 부분은 모두 흑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반복이 심하고 부적절하며, 너무 그런 상황을 과대평가한 것이며, 왕이 허락한 무역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한다. 마찬가지로 제3장에 밑줄 친 부분도 삭제되어야 마땅하고......” 1816년 10월 19일 그는 “이 작품의 출판은 필요하지 않음. 원본을 보관하고, 작가에게는 출판의 여지가 없음을 통보할 것”이라고 최종 판단을 내린다.
이런 역경에도 그는 『슬픈 밤과 기쁜 날』(1818), 『키호티타와 조카』(1819)를 출판한다. 1821년에는 『차모로와 도미니킨의 대화』로 인해 며칠간 다시 감옥 생활을 맛본다. 그리고 1822년에는 『프리메이슨을 변호하며』라는 흥미로운 책자를 출판한다. 그러자 교회는 그를 파문하고, 그는 즉시 자기 말을 취소한다. 그러자 교회는 다음해 파문을 취소한다.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 「유언과 이별」이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827년 6월 21일 폐결핵에 걸려 멕시코시티에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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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16세기에 신대륙은 스페인인들에게 거의 정복되고, 라틴아메리카는 19세기초에 독립을 하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아 있게 된다. 식민시기 동안 문학, 특히 시와 연극은 식민지 지식인의 전유물이 된다. 그러나 소설이란 장르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시도하던 19세기 초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왜 라틴아메리카 식민시대에는 소설이란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스페인 왕실은 기사소설과 피카레스크 소설이 대중성을 얻게 되자, 이와 동일한 현상이 식민지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현상이 신세계에서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페인 왕실은 신대륙에서의 소설 출판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리고 신대륙 식민지 당국은 소설을 수입금지 품목으로 규정한다. 가령 1531년 4월 2일,화나 왕비는 펠리페 왕의 이름으로 칙령을 발표하는데, 이 칙령에는 “아마디스 Amadis를 위시하여 이와 유사한 성격의 헛되고 속된 이야기를 다룬 소설책은 신대륙 원주민을 나쁜 관습에 물들게 하며, 그들이 이런 책에 관심을 두고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지적하면서, 식민지로의 소설 수출을 금한다.
이런 칙령은 1536년과 1543년에도 반복된다. 이것들은 모두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소설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것은 소설들이 식민지인들의 ‘처녀적’ 정신상태를 왜곡하며, 그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원주민들이 이런 책들을 읽게 되면 건전하고 훌륭한 교리서를 읽지 않게 될 것이고, 단지 허황되고 거짓된 이야기만을 읽으면서 나쁜 습관과 악만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입장을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런 스페인 왕실의 입장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던 19세기초에 와서야 변한다. 흔히 『페리키요 사르니엔토』의 작가인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카디스 헌법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이 헌법은 1812년 10월 5일에 공포된 것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출판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바로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에 힘입어 4년 뒤인 1816년에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소설인 『페리키요 사르니엔토』가 탄생한다.
이 작품은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소설이라는 역사적 중요성 이외에도 ‘악자’의 눈을 통해 의식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부도덕한 사회를 역동적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사건을 중심으로 읽게 되면,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다양한 사회계층을 경험하는 화자의 모험이야기로 읽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인문학도이며, 후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보헤미안처럼 생활하며, 노름과 도둑을 일삼고, 약사와 의사, 서기와 대령의 부관으로 사회를 경험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인생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나쁜 예’를 아무도 본받지 못하도록 자기가 살아왔던 경험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도덕적인 자세로 자신의 비도덕적인 삶을 이야기하며, 자기의 악행을 본받지 말라면서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서술한다.
바로 여기서 이 작품의 모호성이 있다. 즉, 도덕적 의식이 당시 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도덕적인 양심을 갖고 서술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볼 때는 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 작품은 사회의 악을 고발하고 가식 없이 드러내면서, 당시 사회에 대해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를 보다 잘 살펴보면, 단순한 흥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정치적 변혁의 순간을 살고 있던 이 작가는 식민지의 과거가 무엇인지 깨닫고 점검하며, 앞으로 이런 과거를 청산하고 변화해야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귀족의 종말과 부르주아와 중산 계급의 탄생은 당시 사회의 생생한 역사적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계몽주의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한 새로운 사회 사상과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허위와 가식은 교육을 통해 바로잡아야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페리키요의 부침(浮沈)을 통해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끝없이 속임수만을 되풀이하는 타락한 사회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에게서 우리가 가야 할 길로써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겉모습은 이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화자의 모험이 바로 속임수에 바탕을 두고 자기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이름도 바로 이런 겉모습에서 나온다. 붉고 푸른 그의 옷은 그의 본래 이름인 페드로를 페리키요(앵무새의 깃털)로 바뀌게 만들며, 그의 피부에 나타난 옴은 그의 성을 사르니엔토를 바꾸게 만든다. 이런 겉모습과 본질의 차이는 그가 평생을 추구하던 것 중의 하나였다. 가령 죽음에 임박해 쓴 유언에서 그는 신앙과 예배, 종교와 미신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자기는 정통 가톨릭 신자이며 교회가 말하는 모든 것을 믿지만, 주술적인 예배나 미신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죽을 때까지 겉모습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고 비난한다.
▣ 페르난데스데리사르디의생애와작품
1776 멕시코시티에서 출생하다.
1782 테포소틀란에서 공부를 시작하지만, 곧 멕시코시티로 옮겨와 마누엘 엔리케스를 사사했다.
1792 고등학교 졸업
1793 산 일데폰소 대학에서 신학 공부
1805 마리아 돌로레스 오렌다인과 결혼하다.
1811 타스코에서 대위로 근무하다 독립군인 모렐로스 신부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아 투옥.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내 석방된다.
1812 『멕시코 사상가 Pensador Mexicano』에 글을 발표. 이 잡지는 이내 그의 가명이 된다.
식민체제를 비판하여 감옥에 갇힌다.
1813 7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옥한다.
1816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El Periquillo Sarniento』 1부 출간
1817 『우화집 F bulas』 출간
1818 『슬픈 밤과 기쁜 날 Noches triste y d a alegre』 출간
1819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를 찬양함 Apolog a de El Periquillo Sarniento』이란 글을 발표 한다.
1822 『프리메이슨을 변호하며 Defensa de los francmasones』를 출판, 이 책 때문에 파문을 당 한다.
1823 파문의 원인이 된 책을 모두 회수하고, 파문 철회를 요청. 12월 29일 칙령에 의해 파문이 철회된다.
1927 6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고집 『유언과 이별 Testamento y despedida』 출간
1832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El Periquillo Sarniento』 2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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