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병원의 원장 라긴은 20년째 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자신의 침잠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대로 살아간다. 그에겐 변화도, 변혁도, 그리고 움직임도 의미가 없다. 그러는 동안 병원, 특히 정신병동인 6호실은 니키타라는 폭력적인 문지기가 지배한다. 그곳 6호실에는 5명의 정신병 환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귀족 출신인 그로모프는 피해 망상증으로 입원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라긴은 그로모프와 대화를 하며 지난 20년간 만나본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자주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의사가 정신병자와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소문나자 시의회에선 그를 해임시키려 한다. 라긴의 자리를 이어받은 보좌의사 호보토프는 라긴을 정신병자로 몰아 6호실에 가두는데…(요약)
라긴 안드레이 에피므이치 자선 병원 원장. 독서광에 철학적이지만 세상에 무관심하다.
그로모프 이반 드미트리치 귀족 출신의 피해 망상증 환자
미하일 아베랴느이치 라긴의 친구로 우체국장
니키타 6호실의 문지기. 전제적이며 구타로 환자들을 관리한다.
호보토프 라긴의 보좌의사로 나중에 라긴을 감금한다.
정신병동 6호실의 다섯 사람
음침하고 기분 나쁜 외관의 건물과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인 병원 쓰레기들이 숨막힐 듯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에 벽은 푸르죽죽한 페인트로 칠해져 있고, 천장은 굴뚝 없는 시골 농가처럼 그을려 있고, 창문에는 쇠창살이 끼워져 있고, 잿빛 마루가 울퉁불퉁한 크고 널찍한 방이 있다. 방안에서는 절인 양배추 냄새, 등불 심지 타는 냄새, 그리고 빈대와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러 마치 짐승의 우리 속에라도 들어온 느낌을 준다.
이 병실의 관리는 니키타라는 퇴역 노병사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무엇보다 질서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주먹으로 정리하는 사람이다. 방안에는 나사못으로 마루에 고착시킨 몇 개의 침대가 있고 그 위엔 푸른 환자복을 입고 있는 5명의 환자들이 있다.
첫 번째 환자는 침대에 앉은 채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는 물끄러미 한 곳을 바라봤다. 그는 밤낮 머리를 흔들거나 한숨을 짓거나 쓴웃음을 지으며 슬픔에 잠겨 있다. 그 옆에는 몸집이 작고 동작이 빠르고 쾌활해 보이는 모이세이카라는 유태인 노인으로 약 20년 전 자신이 운영하던 모자 공장이 모두 불에 타자 정신이상이 된 사람이다. 그는 쉴새없이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그리고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리멍텅한 얼굴의 뚱보 농군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색과 감각을 잊어버린 채 게으르고 처먹을 줄만 아는 불결한 동물이었다. 또 다른 환자는 한때 우체국 분류계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능청스럽고 교활해 보이는 금발의 사내다. 마지막으로 그로모프는 서른 셋 가량의 귀족 출신으로 한때 집달리와 현청의 서기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그의 병명은 피해망상증이다. 그는 언제나 흥분과 걷잡을 수 없는 막연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누군가 나타나기만 해도 그의 얼굴은 극도의 불안과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주 열띤 연설을 했는데, 인간의 비굴에 대해, 진리를 유린하는 폭력에 대해, 지상에 도래할 미래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해, 그리고 압제자의 우둔함과 잔혹성을 연상시키는 쇠창살에 대해 지껄였다. 그럴 때 그의 모습에선 광인과 인간의 이중적 모습이 드러난다.
그로모프가 병원에 오게 된 사연
이반 그로모프는 유복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약 15년 전이었던 대학시절 형의 죽음과 연이은 아버지의 불행 후 가세가 쪼들리게 된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발작하기 쉬운 성격과 협심증 때문에 친구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시의 무지몽매하고 동물적인 삶을 비난하면서 그로모프는 병적으로 엄청난 독서를 통해 많은 지식을 섭취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그는 호송돼가는 죄수를 보고 자신도 체포돼 족쇄를 차고 감옥에 보내질지 모른다는 공상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그로모프의 고통스런 삶이 시작됐다. 그는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직장도 그만두고 그는 절망과 공포 속에 온몸을 내맡겼다. 봄이 와서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묘지 근처에서 반쯤 부패된 두 사람의 시체가 발견됐다. 이 살인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되자 그로모프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음을 과시하듯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다녔다. 그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며 자제력을 상실한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집에 찾아온 난로 수선공을 경찰로 착각한 그로모프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가 동네 사람들에 의해 이 병원에 오게 됐다.
6호실에서 새로운 얼굴을 만나긴 어렵다. 그런데 최근 이상한 소식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사가 6호실을 방문하게 될 것 같다는 소문이었다. 이 병원의 의사 안드레이 예피모비치 라긴이 이 병원에 왔을 때 이곳의 질서는 엉망이었고 예산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병원을 살펴보고 가장 현명한 방법은 환자를 해방시키고 병원을 폐쇄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후에 그는 그것이 자기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렇게 한다고 한들 이 불결한 곳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갈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지성과 성실을 무척 사랑했지만 자기 주위를 성실하고 지적 분위기로 만들기엔 신념과 박력이 부족했다. 명령, 금지, 주장하는 것 등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날이 감에 따라 점점 단조롭고 무익한 일에 권태를 느꼈다. 그는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합법적 최후며, 고통 또한 인간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매일 병원에 나가지도 않았고 환자 돌보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환자 보는 일은 원장보다 자신의 의술이 더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그의 조수가 맡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보좌 의사로 호보토프라는 젊은 의사를 초빙했는데, 그는 교활하고 원장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다.
원장 라긴은 보기 드문 독서가로 특히 역사와 철학에 탐닉했다. 그에겐 미하일 아베랴느이치라는 우체국장이 유일한 친구다. 그들은 인생이란 저주받을 함정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으므로 영혼의 불멸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와 헤어지면 라긴은 “나는 해로운 직무에 종사하면서 내가 속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봉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라긴과 그로모프의 만남
그러던 3월의 어느 봄날 라긴은 6호실의 그로모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대체 왜 날 이런 데 가둬두는 겁니까?” “당신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오.” “그래, 난 병자요. 그렇지만 수백, 수천 명의 미친놈들이 세상에서 자유로이 산책을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오? 대체 무엇 때문에 나와 여기 있는 불행한 사람들만 모든 사람을 대신해 마치 속죄양처럼 처박혀 있어야 하느냔 말이오? 당신이나 조수나 이 병원에 있는 악당들이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만 여기 갇혀 있고 당신들은 자유로우냔 말이오? 그런 논리가 어디 있소?” “도덕이나, 논리 같은 건 여기에 아무 상관이 없소. 모든 것은 우연의 문제올시다. 내가 의사고 당신이 정신병자라는 것은 도덕도 논리도 아니고 그저 무의미한 우연이란 말이오.“
그로모프는 다시 라긴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당신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또한 무익한 일일 거요. 또 다시 붙잡혀 오게 될 테니까…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일이오.” “그런 건 아무에게도 소용없어요.”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누군가 그 속에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 아니면 내가, 그도 아니면 제삼자가 말입니다. 하지만 기다리시오. 먼 훗날에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없어질 때가 오면… 물론 그런 시대는 조만간 오고 말 거요.“
그로모프는 발작적으로 “이 철창 속으로부터 너희들을 축복한다. 진리만세! 오, 기쁨이여!”라고 외쳤다. 의사 라긴과 그로모프의 첫 만남은 두 사람의 관심사를 묶어줬다. 즉, 신의 문제, 불멸의 문제, 그리고 행복과 인생 등…. 그리고 라긴은 자기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내가 여기 살기 시작한 이래 말 상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저 청년이 처음이군!” 그는 계속해서 그로모프의 일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현명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고무돼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와 의사의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
다음날 라긴은 그로모프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로모프는 그를 스파이로 생각해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딴 데 가서 스파이질을 하거나 고문을 하거나 마음대로 하시오. 내겐 아무 소용이 없을 게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왜 내게 접근했는지 알고 있었어요.” “기괴한 공상을 다하고 있군! 당신은 날 스파이로 생각한단 말이오?” “물론… 스파이거나 아니면 날 고문하러온 의사거나… 아무튼 어느 쪽이든 마찬가질 테니까….” “그래, 당신 말이 옳다고 가정합시다. 가령 내가 배신을 해서 당신을 경찰에 넘기려고 말꼬리를 잡았다고 합시다. 당신은 체포돼 재판을 받겠지요? 하지만 재판소건 감옥이건 이곳보다 더 나쁜 곳이 또 있겠소?…대체 당신은 뭘 겁내는 거죠?“
의사의 말에 그로모프는 누그러졌다. 그리고는, “난 너무 오랫동안 인간다운 생활을 해보지 못했어요. 여긴 정말 지독해요! 참을 수 없어요.” “따스하고 아늑한 서재와 이 병실 사이엔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인간의 안정과 만족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속에 있으니까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 ‘고통이란 것은 고통에 대한 산 관념이니 그 관념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지의 힘을 기르고 그 관념을 버린 후 불평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소멸하리라.’는 말은 옳습니다. 흔히 현인이나 사색자라는 사람은 고통을 경멸하는 자들입니다.” “외부니 내부니 하는 것은 난 모릅니다. 내가 아는 건 신께서 따스한 피와 신경으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온갖 자극에 반응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거죠. 고통에 대해서는 외침과 눈물로, 비열에 대해서는 분노로, 추악에 대해서는 혐오로 답하는 겁니다. 내 생각엔 이것이 참된 생활입니다.“
라긴과 그로모프의 대화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됐다. 라긴은 그로모프와의 대화에 아주 만족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이 병실을 드나들었다. 그는 아침마다 그리고 점심 후에도, 또 어떤 때는 어둠이 깃들 때까지 그로모프와 함께 있는 날도 있었다. 그로모프도 처음엔 그를 경원시하고 어떤 음모라도 있지 않나 의심했지만 나중엔 익숙해져서 날카로운 자신의 태도를 겸손하고 풍자적으로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에서는 의사 라긴이 6호실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번지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보좌 의사 호보토프는 실내모자를 쓴 환자 그로모프와 의사 라긴이 나란히 침대에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다. 환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경련을 일으키며 환자복을 여미고 있고, 의사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아서 얼굴이 붉게 상기됐는데 그 얼굴이 실망에 찬 듯 우울해 보였다. 호보토프는 어깨를 흠칫하고 빙긋 미소를 짓더니 니키타와 의미 있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음날 호보토프는 니키타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영감이 완전히 돌아버렸군! “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예측했습니다.“
이상한 변화
그 후 라긴은 자기 주위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면 수군거리고 직원들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친구인 우체국장도 그저 사념에 잠긴 듯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8월에는 시장으로부터 중대한 용무로 만날 것을 바라는 편지를 받았다. 시장이 주재하는 자치회 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사 라긴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1년이 며칠인지 그리고 6호실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등의 질문을 받았다. 라긴은 그날 모임이 자신의 정신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소집된 모임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곤 생전 처음 모욕과 분노를 느꼈다.
그날 밤 우체국장이 찾아왔다. “친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해주게. 자넨 건강하지 않아. 건강을 위해 휴식과 여행이 필요하네. 나와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세.” “난 아주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라긴은 20여 년 동안 길든 생활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을 거부하지만 그러면서도 멍청한 녀석들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곳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1주일 후 라긴은 휴양하라는, 다시 말해 사표를 쓰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또 1주일 후 그는 우체국장과 함께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그, 그리고 바르샤바로 여행을 했다.
라긴은 우체국장과의 여행에서 완전히 녹초가 돼버렸다. 노상 큰소리로 혼자서만 지껄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우체국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정신병자일까? 어떤 일에도 남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일까? 아니면 자기보다 현명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안정을 주지 않는 저 에고이스트일까?”
결국 라긴은 함께 여행을 하되 병을 핑계로 혼자서 호텔방에 누워 쉬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뿐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유쾌한 것이며, 참된 행복은 고독 없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타락한 천사가 신을 배반한 것도 아마 그 동안 몰랐던 고독을 천사들이 알고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예전처럼 되겠지!”라고 기대했다.
보좌 의사 호보토프의 음모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원장의 자리는 의사 호보토프가 차지하고 있었다. 관사를 내주고 라긴은 다른 집에 세를 들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8시에 일어나 차를 마신 다음 자리에 앉아 낡은 책과 잡지를 읽었다. 그런데 책이 낡아선지, 환경이 변해선지 독서도 이젠 예전처럼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다만 그를 지치게 할 뿐이었다. 그로모프와 만나 이야기할 요량으로 두 번 그를 찾아갔으나 그로모프가 몹시 흥분해서 화가 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그로모프는 자신을 내버려둘 것을 요구하고 쓸데없는 넋두리는 오래 전에 싫증났으니 차라리 이젠 독방에 감금해달라고 말했다.
어느 날 라긴이 점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있는데 우체국장과 호보토프가 약을 들고 찾아왔다. 두 사람은 라긴의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것과 다시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 그리고 말년에 결혼이라도 해야 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해 라긴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날 내버려둬! 저리 꺼져! 두 사람 다 꺼져, 둘 다! 나쁜 놈들, 머저리 같은 놈들, 내겐 너희들의 우정이나 약 같은 건 필요없어. 속된 놈들, 더러운 놈들! 뒈져버려!” 두 사람이 나간 후에도 라긴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음이 가라앉자 그는 인생에서 한번도 없었던 그날 일을 생각하고 수치심과 울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지력과 분별은 어디로 갔는가? 사물의 이해며 철학적인 무관심은 어디로 갔느냐?” 라고 회한을 내뱉었다.
다음날 라긴은 우체국장에게 사과를 하러 갔다. 우체국장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해주려 했다. “병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걸세. 어제 발작은 정말 놀랐어. 충고를 받아들여 병원에 입원하게.” “아니, 그들의 말을 믿지 말게. 내 병이라는 건 단지 20년간 여기서 살면서 단 한사람의 현명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 게다가 그 사람이 정신병자였다는 것일세.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단지 빠져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 뿐야. 이젠 무슨 일이든 각오가 돼 있네.“
우체국장은 친구로서 그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의사 호보토프가 예고도 없이 라긴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저, 잠시 용무가 있어서 왔는데요. 저와 함께 입회 진찰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환자는 어디 있지?” “병원에 있습니다. 전부터 선생님께 보여주고 싶었는데요. 아주 재미있는 증상입니다.“ 두 사람은 병실로 들어갔다. “이곳에 어떤 환자가 폐에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청진기를 두고 와서요.” 그리고는 호보토프는 나가버렸다.
예기치 않은 감금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로모프는 얼굴을 베개 속에 묻고 자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중풍환자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고 있었다. 방안은 고요했다. 라긴은 그로모프의 침대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반시간이 지나서 호보토프 대신 니키타가 환자 옷과 내의와 슬리퍼를 한아름 안고 병실로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으시오. 여기가 당신 침대… 이리로…”
니키타가 나가고, 라긴은 그가 가리킨 빈 침대로 가서 앉았다. 라긴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중얼거렸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야! 연미복이나 죄수복이나 이 환자복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떨리고 발은 얼어 들어왔다. 환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는 벌써 한 시간을 앉아 있자니 싫증이 났다. 과연 이렇게 하루, 일주일, 아니 몇 년을 견딜 수 있을까? 라긴은 생각에 잠겨 방안을 거닐었다. “이건 무슨 오해일 거야. 잘 납득을 시켜야겠군. 여기엔 오해가 있어.”
그때 그로모프가 짓궂고 조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하, 당신도 이곳 신세를 지게 되셨군! 지금까지는 남의 피를 빨아먹었지만 이젠 당신의 피가 빨리게 되었으니 거, 참! 멋지게 됐군!” “여긴 무슨 오해가 있을 거요.” “저주받을 인생 같으니! 무엇보다 원통한 건 이 인생이 고통에 대한 보상도 없거니와 오페라에서와 같은 화려한 종말이란 것도 없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는 거지. 그러나 괜찮아! 그 대신 저 세상에 우리들의 축제가 있을 테니. 난 저 세상에서 이리로 귀신이 되어 나타나 이 똥 벌레 같은 놈들을 혼내줄 테야!“ 그로모프가 계속 지껄여댔다.
라긴은 창가에 가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게 인생이라는 거야!” 그러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그로모프 곁으로 가서 앉았다. “난 여기서 나가겠소. 그리고 여기에 등불을 달라고 해야겠소. 이 상태론 견딜 수가 없어!”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그때 니키타가 뛰어나와 제지했다. “무질서한 행동을 삼가주세요. 좋지 않습니다.”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린가? 무슨 권리로 우릴 내보내지 않는 거야? 왜 우릴 여기에 가두는 거냐구! 법에도 분명 재판 없이 사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고 돼 있단 말이야! 이건 폭력이야. 열어!“ 그러자 니키타는 사정없이 주먹과 무릎으로 라긴을 구타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라긴은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그는 아픔을 못 이겨 베개를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20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몰랐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뻐근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누운 채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아무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지 않겠어. 아무래도 마찬가지야.” 저녁녘에 라긴은 뇌일혈로 죽었다. 농군들이 와서 그의 수족을 끌고 교회로 데려갔다. 다음날 그는 땅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우체국장과 하녀 다류슈카 둘뿐이었다.
<“6호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글쓴이 함영준교수>
▣ 저 자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모파상·O.헨리와 더불어 세계 3대 단편작가로 꼽힌다. 간결성을 특징으로 한 인간심리 묘사에 뛰어났다.
간결성과 정확성
어느 날 체호프는 작가 코롤렌코를 만났다. 코롤렌코가 체호프의 창작과정을 궁금해하자 “제가 단편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다고요? 보여드리죠!” 그리고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에 눈에 들어온 첫 번째 물건은 재떨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만일 원하신다면 내일 단편을 하나 써드리죠. 제목은 『재떨이』가 되겠죠.“ 이런 것을 후대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체호프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이 간결성은 ‘긴 대상을 간결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불리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체호프의 디테일은 장황한 묘사가 아니라 ‘암시’에 의한 방법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암시가 의미하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 자연을 묘사하는 것은 아주 간결해야 하고 특징만을 표현해야 한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보편적인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달밤을 묘사한다면 ‘방죽 위에 깨진 병 조각이 반짝이고, 개와 늑대의 검은 그림자가 공처럼 구르고 있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체호프의 간결성과 정확성은 특히 인간 심리묘사에 탁월하다. 소비에트 시대의 작가 유리 트리포노프는 “체호프는 형식을 바꿨다. 그는 다 이야기하지 않는 것의 위대한 힘을 알고 있다. 그 힘은 간결성과 단순성에서 나온다.”고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체호프가 자신의 작가수첩에 인용해 놓은 알퐁스 도데의 말은 간결하고 단순한 그의 작품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번은 어느 새에게 물었다. “네 노래는 왜 그렇게 짧으니? 숨이 모자란 거니?” “내겐 부를 노래가 너무 많아. 난 그걸 다 불러보고 싶거든…“ 새가 대답했다.
인위성을 거부한 ‘인생 그 자체’
체호프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담담함이다. 아일랜드의 저명한 극작가 숀 오케이시는 체호프에 관한 글에서 “체호프는 휘트먼과 견줄 수 있는 시인이며, 셰익스피어에 비길 수 있는 극작가요, 또한 위대한 인간의 모든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의 친구라는 점”이라며 체호프가 이 지구상에 많지 않은 거장들 중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체호프가 서거한 지 벌써 한 세기가 도래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와 연구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오케이시의 평가처럼 그가 우리의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일까? 실제로 러시아의 여러 작가들 중에 체호프만큼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체호프는 푸쉬킨처럼 화려한 기교도, 고골리처럼 번쩍이는 기지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전율을 느끼게 하지도, 톨스토이처럼 설교하지도 않으며, 고리키처럼 외치지도, 불가코프처럼 신랄하지도 않다. 그는 그저 담담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은 독특한 맛과 향기가 있다.
그러나 이 담담함 속에 깃든 독특한 맛과 향기를 찾는 작업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실제로 고(故) 투르빈 교수는 러시아 작가 중에 가장 어려운 작가를 꼽으라면 자신은 주저 없이 체호프를 지목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의 많은 문학 연구가들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어쩌면 이런 단순함 속의 난해함이 체호프의 신비와 매력이 아닐까?
체호프의 작품은 과거의 문학이 보여주던 인위성과 잘 짜여진 틀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만의 문학 문법을 만들었다. 그 문법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말을 빌자면 ‘분위기 극’이고, 그 자신의 말로는 ‘인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묻는다. 인생을 주연과 조연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을 조연급의 인생 혹은 에피소드적 인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누가 뭐래도 각자 인생의 주연들이다. 체호프 작품 속의 인물을 주연과 조연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단지 누가 좀더 많이 가졌는가, 누가 좀더 재능이 있는가, 누가 좀더 배웠는가하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고리키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사랑하는 인물과 미워하는 인물로 나눴다면 체호프는 자신의 모든 인물을 사랑한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바냐 외삼촌』의 바냐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도 체호프의 손을 통해 사랑스런 인물이 된다. 우리도 체호프가 만들어낸 어떤 인물도 미워할 수가 없다. 체호프 작품에 갈등과 음모가 없다는 지적은 수없이 되풀이돼왔다. 그러나 갈등과 음모 없이 어찌 작품이 살 수 있는가? 체호프에게서 갈등과 음모는 다른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이 갈등은 인물들 사이의 충돌에서가 아니라 삶의 복잡함에서 온다. 인간이 인생 혹은 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힘 앞에 한없이 약하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간결함과 단순함. 이는 19세기 말 유럽과 러시아에 팽배했던 인상주의와도 연결된다. 체호프의 ‘서정적 분위기’에는 다채로운 색이 포함돼 있다. 때론 인상주의적 서정성이, 때론 비극적 풍자가, 때론 해학적 웃음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주된 색조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삶의 진실에 대한 위안이며 평화다.
감춤과 우연의 시학
체호프의 희곡을 다른 극처럼 발단, 전개, 절정 등으로 나눠가며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면 그의 희곡의 플롯은 어떤 갈등도 사건도 등장하지 않고 ‘물 밑의 흐름’을 따라가는 식이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극’, ‘서정적 드라마’(고리키)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추상적 용어들이 갖는 비밀은 무엇인가? ‘분위기’라는 말로 우리는 너무 쉽게 체호프 드라마의 특징을 뭉뚱거리는 것은 아닌가? 분위기의 실체는 무엇이며 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체호프 희곡을 ‘사건’과 ‘갈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예술적 기법의 본질은 ‘감춤’의 시학이다. 실제로 그의 희곡에서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무대에서는 사건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사건이 있더라도 무대 밖에서 벌어지는 식이다. 이는 체호프가 내부 세계를 묘사하는 ‘감춤’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와 함께 언어 사용의 함축성은 체호프 창작과정의 또 다른 특징이다. “체호프 예술 세계의 발전은 절제의 과정이며 압축의 과정이다.”라고 적절하게 개진한 파페르느이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체호프는 거북이처럼 머리와 발과 꼬리를 모두 몸 속으로 감춤으로써 내적 플롯을 유지한다.
다음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소위 ‘우연의 시학’에 관한 문제다. 이는 체호프의 대화 체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연구가들은 “체호프에게는 ‘우연적’ 대사가 많다. 이런 것들은 어디서나 불필요한 허드렛 것들과 뒤섞여 있다. 체호프의 컨텍스트 안에서 대화와 대사들은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삶의 자기 느낌을 표현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체호프의 작품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우연적 대사 때문이기도 한데, 이 우연적 상황이 ‘반복’되면서 체호프를 모르는 이들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물들이 주로 ‘삶의 자기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수히흐 교수는 ‘결론 없는’ 표현의 ‘제로 상태의 정보’를 준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체호프를 알고자 하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인생 자체를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체호프를 ‘연기’하려 하지 말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체호프는 『6호실』에서 두 개의 다른 성격과 성정, 두 개의 인생 철학과 삶에 대한 양식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두개의 관계를 보여준다. 의사 라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아우렐리우스, 쇼펜하우어, 메레쥐콥스키 등의 철학에 의지해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 수동적인 사람이다.
반면에 정신병 환자 그로모프는 그와는 달리 악에 대한 불인정, 그리고 투철한 저항정신으로 죽더라도 보복하겠다는 강렬한 능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 긍정성 때문에 라긴의 논리보다 그로모프의 저항적 언어는 더 정당하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작가는 처음에 이 두 인물을 대비시켜놓고 마치 라긴 철학의 붕괴 이야기로 작품을 끌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긴과 그로모프의 대비는 일정 부분까지만 이어지고 앞으로 진행될수록 점차 유사해지며 공통된 운명을 예시해 준다.
그로모프
그는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는 그의 병적인 습관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묵은 신문이건 잡지건 탐욕스럽게 읽어댔기 때문이다.
라긴
항상 큰 만족감을 느끼면서 그는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6개의 방 가운 데 3개의 방이 책과 헌 잡지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반 드미트리이치(그로모프)가 옛날에 읽던 것처럼 빨리 발작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뜻을 생각하며 읽었다.
그로모프
외부 세계, 다시 말해 독서에 대한 흥미는 눈에 띨 정도로 줄어 들고…
라긴
독서는 더 이상 깊은 흥미를 끌지 못하고 그를 지치게 했다.
그로모프
이반 드미트리이치(그로모프)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절망과 공포에 사로 잡혔다.
라긴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거야” 안드레이 에피모비치는 이렇게 생각하자 무서워졌다.
그로모프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독방감금이었다.
라긴
진실한 행복은 고독없이는불가능하죠.
그로모프
이반 드미트리이치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를 때렸다.
라긴
니키타는 두 번씩이나 그의 등짝을 때렸다.
강제와 불공정, 조잡함이 지배하는 삶
6호실에 갇히기 직전 라긴은 자신을 몰아낸 “막다른 골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또한 그로모프가 6호실에 오게 된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둘다 강제와 불공정, 그리고 조잡함이 지배하는 거친 삶에 찢기고 파멸된 것이다. 두 사람 다 이 세계에서 무기력하다. 라긴은 소설의 끝에서 결국 자신과 그로모프를 동일시한다. “우린 약해, 우린 졸장부들이야. 당신이나 나나….”두 사람은 단지 말로는, 또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 따라서는 서로 적대적일 수 있다.
“먼 훗날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없어질 때가 오면 그땐 창문의 창살도 환자의 환자복도 없어지고 말 테니까요.” 이반 드미트리이치는 비웃듯 빙긋 웃었다. “농담을 하시는군요.” 그는 실눈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나 당신 조수 니키타 같은 사람에겐 미래라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을 텐데, 그래도 당신은 좋은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단 말입니까?“ 두 사람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하지만 무기력한 사람들의 자기 위안이다. “그러나, 괜찮아! 대신 저 세상에는 우리들의 축제가 있을 테니. 난 저 세상에서 이리로 귀신이 돼 나타나 이 똥벌레 같은 놈들을 혼내줄 테야!” 그로모프가 말한다. 이런 희망에 대해 라긴은 “믿음이 있으니 좋으시겠소. 그런 신념이 있다면 기름 바른 벽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게요!”라고 응수한다.
동일한 결론에 이른 두 사람
그러나 두 주인공은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그로모프가 자신에 대해 예언한 것처럼, “농부들이 와선 시체의 손발을 잡고 지하실로 끌고 가겠지”하는 말은 그대로 라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농부들이 와서 그의 손발을 잡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토록 서로 다르고자 한 두 주인공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아이러니가 이렇듯 집요하다. 이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는 두 인물의 객관적 결론이 하나의 결과로 수렴됨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철학적 원칙이 어찌됐든 결과는 하나라는 체호프적 우울함과 비관주의가 드러난다. 이런 의도는 철학자 셰스토프가 이야기한 것처럼 체호프가 “인간 희망의 살인자”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망정 제발 꿈이길 바라게 된다.
▣ 체호프의 생애와 작품
1860 러시아 남부 타칸로크에서 소상인의 셋째 아들로 출생
1868 타간로그의 김나지움에 입학
1876 부친의 파산으로 가족 모두 모스크바로 이사. 체호프만 남아 학업을 계속했다.
1879 최초의 작품 「후레자식」 집필. 모스크바 의과 대학 입학
1880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여러 유머 잡지에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기고
1882 「관리의 죽음」 「뚱뚱이와 홀쭉이」 「외과 의사」 「카멜레온」 「아뉴타」 등 발표
1884 모스크바 의과 대학 졸업 후 의사로 근무. 단편집 『멜파메나 이야기』 출간
1885 당시 문단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인 수보린과 그리고로비치를 만났다.
1886 단편집 『화려한 이야기』 출간.
단편 「마법사」 「좋은 사람들」 「누렁이」 「결투」「공작부인」 발표
1887 단편집 『해질 녘』 『악의 없는 이야기들』 출간
1888 단편 「지루한 이야기」 「초원」 「아내」 발표.
희곡 「이바노프」 발표 후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공연
1890 단편집 『우울한 사람들』 출간. 죄수들과 유형자들의 생활을 관찰하기 위해 사할린 여행
1892 단편 「검은 옷의 승려」 「속물」 발표. 소설 「6호실」 「사할린섬」 제1장 발
표. 희곡 「갈매기」 집필 모스크바 근교에 정착. 창작과 더불어 의료활동.
단편 「3년」 「농부들」 「나의 인생」「다락이 있는 집」 등을 집필
1895 『사할린 섬』 출간. 「갈매기」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했으나 실패
1896 첫 희곡집 출간
1898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갈매기」 상연해서 대성공. 건강을 이유로 얄타로 이주.
여기서 톨스토이, 고리키, 부닌 등과 자주 만났다. 「상자 속에 든 사내」, 「사랑
에 관하여」 집필
1899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골짜기」 집필. 「바냐 외삼촌」 초연
1900 코롤렌코 등과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 건강 악화. 「세 자매」 집필
1901 「세 자매」 공연.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결혼
1902 최후의 단편 「약혼녀」 집필
1903 최후의 희곡 「벚꽃동산」 집필
1904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벚꽃동산」 공연.
남독일 바덴바덴에 요양 중 7월2일 지병으로 사망.
모스크바로 유해가 운구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