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유명한 여배우 아르카지나(트레플레프의 어머니)는 자신의 남자 친구인 작가 트리고린과 함께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숫가 소린가의 영지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데 사변적이면서 현실적인 교사 메드베젠코는 영지 관리인의 딸인 마샤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희망도 없는 트레플레프에 대한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는다.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극작가 트레플레프는 화려한 배우를 동경하는 니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나는 당대 최고 작가이자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트리고린을 사랑한다. 얽히고 설킨 사랑은 소린가의 영지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벚꽃동산
5년 만에 파리에서 빈털털이로 돌아오는 라넵스카야 부인은 아름답고 영화로웠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현재의 그녀는 애인에게는 버림받았고 아름다운 영지는 빚으로 경매에 붙여질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농노의 아들 로파힌은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라넵스카야 부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라넵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와 사변적인 대학생 트로피모프는 새로운 생활을 꿈꾸고, 라넵스카야 집의 살림을 맡고 있는 양딸 바랴는 로파힌과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고, 라스카야 부인의 오빠 가예프는 불필요한 말만 늘어 놓는다.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는데 뜻밖의 인물이 땅의 주인이 된다.
아르카지나 유명 여배우. 트리고린을 사랑하며 이기적이지만 동정심도 있다.
트레플레프 아르카지나의 아들. 작가 지망생으로 니나를 사랑하지만 사랑도 문학도 실패한다.
니나 화려한 배우를 꿈꾸는 처녀. 처음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지만 후에 트리고린을 사랑했다가 버림받는다.
마샤 뜨레플레프를 짝사랑하지만 결국 메드베젠코에게 시집을 가불행한 삶을 산다.
트리고린 당대 최고 작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적다.
소린 트레플레프의 외삼촌
도른 시골 의사. 유일하게 트레플레프를 작가로서 인정해 준다.
폴리나 마샤의 어머니. 도른에 대한 연정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샤므라에프 영지 관리인. 전제적이며 포악하다.
메드베젠코 시골 교사. 현실적이며 사변적인 성격이고 마샤를 사랑한다
1막 "오, 가는곳 마다 사랑이니… 마법의 호수여!"
마드베젠코 : 당신은 왜 언제나 검은 옷만 입고 다니죠?
마샤 : 이건 제 인생의 상복이에요, 전 불행한 여자니까요.
시골 교사 메드베젠코는 마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므로 십오 리나 되는 길을 왔다갔다하며 구애를 하지만 마샤에게 받는 대접은 언제나 무관심이다.
마샤 : 당신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저는 같은 사랑으로 답해 들릴 수가 없네요. 그저 그것뿐이에요.
호숫가에서는 트레플레프가 쓴 각본을 니나가 연기한다. 트레플레프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말한다.
트레플레프 :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죠. 필요한 건 새로운 형식이에요. 예술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나 있어야 할 것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삶을 묘사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뜨레쁠레프를 니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니나 : 당신의 연극은 연기하기가 힘들어요. 그 속엔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나오지 않으니까요.
공연이 중단되자 니나는 “참 이상한 연극이죠? 안 그래요?” 한다. 어머니 아르카지나 역시 그의 예술론을 비난한다.
아르카지나 : 정말이지 이젠 지긋지긋해, 저런 식으로 노상 못살게 굴고…, 저런 데카당식의 넋두리나 들려주며….
결국 어머니의 야유로 연극은 중단된다. 트리고린은 통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의사 도른만이 이 연극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도른 : 내가 연극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혹은 정신이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연극이 마음에 들었어. 그 속엔 뭔가 있었어.
메드베젠꼬의 사랑을 받는 마샤는 젊은 작가 지망생 트레플레프를 사랑한다. 마샤는 의사 도른에게 “너무 힘들어요, 아무도, 아무도 제 고민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요. 전 트레플레프를 사랑해요” 하고 고백한다. 그러나 트레플레프에게 그녀는 단지 ‘지긋지긋한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마샤는 언제나 검은 옷의 상복을 입고 불행해 한다. 트레플레프가 사랑하는 사람은 니나다. 그가 만든 연극에서 그녀가 등장할 때, 그는 소린에게 “전 그녀 없이는 살수 없어요… 전 미칠 듯이 행복해요… 오오, 매혹적인 나의 꿈이여….”하고 말한다.
처음엔 니나도 그런 트레플레프를 사랑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니나는 “전 갈매기처럼 이 호수 곁이 그리워 죽겠는걸요. 제 가슴은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요.” 한다. 이렇게 사랑은 어느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은 출구 없는 미로 속에 있다.
도른 : 왜 이렇게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을까? 게다가 가는 곳마다 사랑이니… 오오, 마법의 호수여!
2막 “나도 곧 이런 식으로 자살하고 말 거요!”
니나는 아버지와 계모의 감시로부터 3일간 자유를 얻어 소린의 영지에 온다. 마샤는 트레플레프의 희곡을 읽어봐 달라고 하지만 니나는 단호하게 “그걸 원하세요? 그렇게 재미없는 것을!”하며 거절한다. 하지만 마샤는 여전히 트레플레프에게 열광한다.
마샤 : 그분이 직접 무언가를 읽으실 때에는 두 눈이 불타오르고 얼굴이 창백해져요. 목소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퍼요. 그리고 몸짓은 시인과도 같구요.
이런 마샤가 안중에도 없는 트레플레프는 자신의 공연이 실패하자 니나의 발 앞에 갈매기를 던진다.
트레플레프 : 난 오늘 바보짓을 해서 이 갈매기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걸 당신 발 밑에 바치는 겁니다. 얼마 안 있어 나도 이런 식으로 자살하고 말 겁니다.
니나 : 당신을 이해할 수 없군요.
트레플레프 : 나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변했어요. 당신의 눈초리는 싸늘합니다. 이것은 모두 나의 각본이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간 그 날 밤부터 시작된 겁니다. 여자들이란 결코 실패를 용납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니나는 트리고린에게 빠져 있다. 트리고린은 자신의 삶과 창작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지만 니나에겐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하다. 트리고린은 트레플레프의 갈매기를 보고 말한다.
트리고린 : 어떤 주제가 떠오르는군요. 짧은 단편의 소재감이죠. 어느 호숫가에 당신처럼 젊은 처녀가 살고 있습니다. 그 처녀는 갈매기처럼 호수를 좋아하고 갈매기처럼 행복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한 사내가 찾아와서 그 처녀를 발견하고는 이 갈매기처럼 심심풀이로 처녀를 파멸시키고 마는 겁니다.
여기에 또 한 쌍의 사랑이 있다. 영지 관리인 샤므라에프의 아내이자 마샤의 어머니인 폴리나는 오래 전부터 의사 도른을 사랑해 왔다.
폴리나 : 전 더 이상 남편의 횡포를 참을 수가 없어요. 저를 맡아주세요. 세월은 자꾸 흐르고 우리도 이젠 젊지 않으니 비록 인생의 마지막만이라도 서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도른 : 내 나이 쉰 다섯이오. 인생을 바꾸긴 이미 늦었소.
3막: “제 생명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셔서 가져가세요!”
3막이 시작되자 2막과 3막 사이에 트레플레프가 한바탕 자살 소동을 벌였음이 드러난다. 마샤는 곧 떠날 트리고린에게 말한다.
마샤 : 이건 모두 선생님을 작가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만약 그이의 상처가 심각한 거라면 전 단 1분도 이렇게 살아있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전 드디어 결심했어요. 그이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서 뽑아 버리기로요. 뿌리째….
트리고린 : 대체 어떤 식으로?
마샤 : 시집을 가겠어요, 메드베젠꼬에게. 희망 없는 사랑을 몇 해씩이나 기다리고 있을 순 없지 않아요? 결혼을 하고 나면 어느새 사랑 같은 건 생각할 틈도 없어지고 새로운 근심들이 옛 상처를 죄다 지워 버리고 말테니까요.
한편 니나는 떠나는 트리고린에게 선물을 전한다.
니나 : 드디어 작별이군요. 아마 우린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 조그만 메달을 기념으로 받아 주세요. 전 여기에 선생님 이름을 새겼어요. 그리고 이 쪽에는 『낮과 밤』이라는 선생님의 책 이름을 새겼구요.
트리고린 : 정말 아름답군요. 아주 멋진 선물이에요.
니나 : 가끔 제 생각도 해 주세요.
트리고린 : 생각하고 말구요. 난 맑게 갠 그 날의 당신을 생각할 겁니다. 기억하시죠? 일주일 전쯤 당신이 밝은 색깔의 옷을 입고 나왔을 때 말입니다. 우린 서로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리고 그 벤치 위에는 하얀 갈매기가 놓여 있었고요.
니나 : (생각에 잠겨서) 그래요. 갈매기….
트리고린은 니나와 헤어진 후 메달에 새겨진 글을 읽는다. 『낮과 밤』 121페이지, 제11, 12행 “제 생명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좋으니 와서 가져가세요!”, 그것을 찾은 그의 마음은 흔들린다. 자살소동을 벌인 트레플노프가 트리고린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떠나려 했던 트리고린은 아르카지나에게 하루만 더 머물자고 제안한다.
트리고린 : 하루만 더!
아르카지나 : 당신이 왜 머물려는지 난 다 알아요.
트리고린 : 제발 친구의 입장이 돼서 날 놓아주시오.
아르카지나 : 시골 계집애의 사랑?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도 자신을 모르실까? 당신은 지금 당신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예요. 당신은 제 것이에요. 모두 제 거예요. 당신은 현대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현명하고 재능 있는 분이에요. 당신은 우리 러시아가 가진 단 하나의 유일한 희망이에요. 당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저 혼자 뿐이에요.
트리고린 : 내겐 의지라는 게 없어. 나를 붙잡아 데려가 주오.
니나는 트리고린을 만나 말한다.
니나 : 전 결심했어요.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전 무대에 서겠어요. 내일이면 이미 여기에 없을 거예요. 아버지 곁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할 거예요. 저도 선생님처럼 여길 떠나 모스크바로 가겠어요. 거기서 뵐께요.
트리고린 : 모스크바로 오거든 내게 꼭 연락을 주시오.
니나 : 1분만 더.
트리고린 :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요. 다시 곧 만날 생각을 하니 정말 행복하오.
4막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이 안나!”
막이 바뀌고 어느새 2년 후다. 무대는 1막이 진행됐던 무대다. 소린의 와병으로 아르카지나와 트리고린이 곧 도착할 예정이다. 마샤는 메드베젠코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지만 아직도 트레플레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다.
마샤 : 희망 없는 짝사랑이란 소설에나 있는 거예요. 다 부질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슴 속에서 사랑이 움트면 당장 그것을 뽑아버려야 해요. 이제 남편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가게 되면, 그리로 가면 깨끗이 잊겠어요. 가슴 속에서 뿌리째 뽑아버리고 말 테니까요.”
마샤의 엄마인 폴리나의 대사에서 “코스챠, 당신이 정말 작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방의 잡지사에서 송금을 해 오게 됐으니.”하는 말로 미뤄 트레플레프는 그 사이 작가가 됐다. 지난 2년 동안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온 도른의 입을 통해 모든 문제는 다시 환기된다.
도른 : 참, 언젠가 니나양이 당신의 희곡을 연기한 적 있지요? 바로 그와 비슷한 하나의 우주혼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어지더군요. 그런데 니나양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트레플레프 : 그녀는 집을 뛰쳐나가 트리고린과 동거를 했지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트리고린은 니나에게 싫증이 나자 옛 여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죠. 본래, 우유부단한 사람인지라 양쪽으로 일을 저지른 거죠. 니나의 개인 생활은 완전히 파탄이 났죠. 무대 쪽은 더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데뷔를 하고는 지방으로 떠돌았죠. 연기는 거칠고 무미건조해서 그저 큰소리로 외쳐대거나 과장된 동작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난 그녀가 몹시 절망적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한 줄 한 줄 병적으로 긴장된 심경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생각도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죠. 편지 서명을 ‘갈매기’라고 했으니까요. 그녀는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다.
이때 아르카지나와 트리고린이 도착했다. 그들은 일상적 이야기를 하며 카드놀이를 한다. 여기서 트레플레프가 작가로서의 삶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샤므라예프 : 신문에서 그에 대해 악평을 하고 있어요.
트리고린 : 뭔가 좀 이상하면서도 애매하고 어떤 때는 마치 잠꼬대 같은 데도 있고 살아있는 인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도른 : 뭔가 있어요. 그는 이미지를 통해 사색을 하고 있어요. 다만 한 가지 애석한 것은 뚜렷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입니다. 부인, 작가를 아드님으로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아르카지나 : 그런데 어떤지 아세요? 전 아직 그 애 작품을 읽어보지도 못했다니까요. 어디 시간이 있어야지요.
트레플레프 : 난 입버릇처럼 그렇게 새로운 형식, 새로운 형식하고 떠들어댔지만 지금은 갈수록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기분이야. 문제는 형식이 낡고 새롭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쓴다는 거야.
이때 예기치 않게 니나가 찾아온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니나 : 여긴 좋군요, 따뜻하고 아늑해서… 전 갈매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전 벌써 2년 동안이나 울어 보질 못했어요. 어젯밤 이곳에 왔다가 2년 만에 처음 울었어요. 당신은 작가, 저는 배우… 우린 모두 소용돌이 속으로 빠진 셈이군요. 비참한 삶이죠, 전 떠나야 해요.
트레플레프 : 니나, 그대로 있어줘요. 아니면 나도 함께 데려가줘요.“
니나 : 전, 갈매기예요, 아니, 배우죠. (트리고린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이도 여기 계시군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이는 연극이란 걸 믿지 않아서 언제나 제 꿈을 비웃기만 했어요. 그래서 저도 점점 신념이 없어지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연기를 했어요. 당신은 배우 스스로 형편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니나는 자신이 언젠가 트리고린이 말했던 심심풀이로 파멸되는 짧은 단편의 소재감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삶에 대한 믿음이 있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니나는 자신이 예전에 연기했던 트레플레프의 희곡을 암송하고 떠난다. 거실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샤므라예프는 트리고린을 찬장 쪽으로 데려간다.
샤므라예프 : 이게 아까 말씀드렸던 바로 그 물건입니다. (찬장에서 박제된 갈매기를 꺼낸다) 당신이 주문하셨던 거죠.
트리고린 : (갈매기를 보면서)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없어요!“
그 순간 무대 뒤에서 총성이 들린다. 모두들 놀라 있는데 도른이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트리고린에게 조용히 말한다.
도른 : 트레플레프가 자살했습니다.
벚꽃 동산
라넵스카야 여지주. 파리의 애인에게 버림받고, 영지는 경매에 붙여질 상황이지만 언제나 과 거에 젖어 있다.
아냐 그녀의 딸로 트로피모프에 의해 인생관이 바뀐다.
바랴 집안 살림을 맡은 양녀. 로파힌을 사랑하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가예프 라넵스카야의 오빠. 유약한 귀족
로파힌 신흥 부호로 영지를 손에 넣는다.
트로피모프 만년대학생. 항상 사변적이다.
피시치그 지방 지주. 언제나 빚을 얻으러 다닌다.
샤를로타 출신을 알지 못하는 독일어 가정교사. 마술을 보여준다.
에피호도프 스물 둘의 불행이라 불리는 집사원
피르스 87살의 충직한 하인. 모든 이들의 잊혀짐 속에서 죽는다.
제1막 “8월22일이 경매일입니다.”
벚꽃이 핀 오월의 어느 새벽, 멀리 파리에서 영지의 여지주 라넵스카야 부인이 5년 만에 돌아온다. 기차가 두 시간이나 연착한 후 도착한 라넵스카야 부인은 꿈을 꾸듯 옛 일을 회상한다. 하지만 딸 아냐와 살림을 맡고 있는 양녀 바랴의 말을 통해 라넵스카야 부인은 이제 자신의 재산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8월이면 이 영지도 경매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넵스카야 부인은 6년 전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돼 7살짜리 아냐의 동생 그리샤가 물에 빠져 죽자 집을 나가 파리로 떠났다. 그런데 지금 이 집에는 당시 그리샤의 가정교사였던 트로피모프가 와 있었다. 그런데 딸 아냐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라넵스카야 부인을 맞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라넵스카야의 오빠인 가예프도 있었는데 그는 노상 당구 이야기만 했다. 87살의 충직한 하인 피르스는 이제 귀가 먹어 잘 알아듣지도 못한다. 이때 라젭스카야 부인 영지의 농노였던 로파힌이 말을 던진다.
로파힌 : 전 떠나야 하기 때문에 간단히 몇 말씀드리죠. 아시다시피 이 벚꽃 동산은 빚 때문에 팔리게 돼오는 8월 22일이 경매일로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입니다만 이 동산과 강가의 토지를 별장지로 구획해서 임대한다면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러려면 낡은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낡은 벚나무들도 말끔히 벌목해야지요.
라넵스카야 : 만일 이 현에서 훌륭한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 집 벚꽃동산이에요!
로파힌의 유일한 복안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들은 “약속어음으로 돈을 빌려 은행의 이자를 갚는다.”든가 “할머니에게 돈을 빌린다.”는 식으로 공허한 공상만을 한다.
2막 “러시아 전체가 우리의 동산입니다.”
영지와 통하는 들판에서 로파힌은 이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로파힌 : 자,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별장지로 내놓으시겠습니까, 안 내놓으시겠습니까?”
라넵스카야 : 누가 여기서 이런 지독한 시가를 피웠을까?”
로파힌은 여러 번 별장지로 결정을 내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별장이니 별장객이니 하는 말은 어쩐지 속된 생각이 들어요.”라는 것이다. 당장 급한 얘기를 나누다가도 라넵스카야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한숨 지었다. 라넵스카야 부인은 파리에서 어떤 남자와 함께 살았는데 그가 자신을 알거지로 만들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자신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녀에게 용서를 빌며 전보를 보내고 있었다. 영지 판매에 대한 절박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넵스카야 부인은 파티를 열거나 바랴를 시집 보낼 일 등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때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와 로파힌의 논쟁이 시작됐다.
로파힌 : 우리 만년 대학생은 날 어떻게 생각하시나?
트로피모프 : 당신은 부자고 이제 머잖아 백만장자가 될 거요. 마치 신진대사를 위해 눈앞에 보이는 대로 먹어치우는 맹수가 필요하듯 당신이라는 존재도 역시 필요하다구요.
로파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8월22일의 경매를 환기시켰지만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들판에 남겨진 아냐와 트로피모프의 대화는 이들의 현실인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아냐 : 베챠, 어째서 전 그 전처럼 이 벚꽃동산을 사랑하지 않게 됐을까요?
트로피모프 : 러시아 전체가 우리의 동산입니다. 이 지구는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위에 얼마든지 훌륭한 곳이 있어요.
아냐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이미 우리의 집이 아니에요. 전 여기서 나가겠어요.
트로피모프 : 만일 당신이 이 집의 살림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그걸 모두 우물 속에 내동댕이치고 나가서 바람처럼 자유로와지는 거예요.
3막 “내가 샀습니다!”
마침내 경매 당일, 라넵스카야 부인의 응접실에는 유대인 악단이 와서 파티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여 춤을 추고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라넵스카야 부인은 경매장으로 간 가예프와 로파힌을 기다리고 있다.
트로피모프 : 오늘 영지가 팔리건 안 팔리건 그건 어차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건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난 겁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어요.
라넵스카야 :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요. 나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여기서 사셨구요. 나는 이 집을 사랑해요. 이 벚꽃동산 없이는 나의 생활을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 이 집을 꼭 팔아야 한다면 이 동산과 함께 나도 팔아줘요.
파티를 즐기는 중에 술에 취한 로파힌이 들어온다.
로파힌 : 경매는 4시 반에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우린 기차를 놓쳐 9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죠.
라넵스카야 : 벚꽃동산은 팔렸나요?
로파힌 : 팔렸습니다.
라넵스카야 : 누가 샀나요?
로파힌 : 내가 샀습니다. 내가 샀습니다! 대체 왜, 왜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습니다. 아, 빨리 이 모든 게 지나가 줬으면 이 번거롭고 불행한 시간이 빨리 끝나줬으면….
라넵스카야 부인은 울고 아냐가 엄마를 위로한다.
아냐 : 엄마, 엄마 울고 계시는군요. 난 엄마를 사랑해요. 벚꽃동산은 팔렸어요. 이제 없어지고 말았어요. 하지만 울지 마세요. 엄마에겐 아직도 앞으로의 생활이 남아 있어요. 엄마의 그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도 그대로 남아있어요. 여기서 떠나요. 더 훌륭한 새로운 동산을 만들도록 해요.
4막 “한평생이 지나갔어. 그런데도 산 것 같지가 않아! 에이, 등신 같으니라고…”
1막과 같은 무대로 모두들 떠날 준비로 부산하다.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시월의 맑은 날.
로파힌 : 대체 자넨 대학에서 공부한 지 몇 해나 되는가?
트로피모프 : 우린 아마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내가 한마디 충고를 하지. 너무 잘난 척하지 말게. 그러나 어쨌든 자넨 마치 배우처럼 가늘고 고운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 마음도 역시 섬세하고….
돈을 주겠다는 로파힌의 제안을 트로피모프는 거절했다.
트로피모프 : 나는 강자야, 내겐 긍지가 있어. 인류는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최고의 진리와 최고의 행복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 맨 첫 대열에 서 있다구.
이미 벚꽃동산은 도끼로 찍어내는 소리로 뒤덮였다. 가예프와 라넵스카야 남매가 마지막으로 떠난다.
가예프 : 우리도 떠날 때가 됐군.
아냐 : 십분만 더 있다가 가도록 해요. 잘 있거라, 그리운 집, 늙은 할아범!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오면 너도 그땐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 부서져 버리고 말 테니.“
라넵스가야 부인은 파리의 애인에게로 가고 가예프는 은행에 취직을 했다. 바랴는 다른 집 식모로 가고 아냐는 트로피모프를 따라 모스크바로 갔다.
가예프 : 모두 우리들을 버리는군. 우린 갑자기 필요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
라넵스카야 : 자, 이젠 떠나야 되겠다. 난 지금 두 가지 근심을 가지고 여길 떠나는 구나. 하나는 병든 피르스, 또 하나의 근심은 바랴야.
라넵스카야 부인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로파힌과 바랴를 엮어주고자 한다.
라넵스카야 : 그 애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도 그 애가 싫지는 않은가 본데 대체 왜 서로들 피하기만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로파힌 :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문제는 없습니다만, 만일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도저히 구혼을 하게 될 것 같지 않군요.
라넵스카야 : 그럼 좋아요. 그런 건 단 1분이면 되니까. 내가 그 애를 불러드리죠.
그러나 청혼을 위해 마셔야 할 샴페인은 아냐가 다 마셔버리고 바랴와 로파힌은 아무 결론 없이 헤어진다. 그렇게 모두들 각자의 길로 떠났다. 무대는 텅 비고 문마다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린다. 정적 속에 나무를 찍어내는 도끼 소리가 슬프게 들린다. 그때 오른쪽에서 피르스가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양복에 흰 조끼를 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피르스 :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려본다) 문이 잠겼군. 모두 가버렸어.(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었군 그래. 아무려면 어때. 난 여기 앉아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주인님은 분명 털외투도 입지 않고 얇은 것만 입고 가셨겠지.(근심스러운 듯 한숨을 쉰다) 내가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젊은 양반이시라 속을 썩이시는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아, 드디어 한 평생이 지나갔네. 그런데도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옆으로 눕는다) 조금 누워 있을까. 기운이 하나도 없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 것도…. 에이, 이런, 등신같으니라구! (꼼짝 않고 누워 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픈 음향이 멀리 아련하게 들려오며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먼 동산에서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만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갈매기·벚꽃동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글쓴이 함영준교수>
▣ 저 자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모파상·O.헨리와 더불어 세계 3대 단편작가로 꼽힌다. 간결성을 특징으로 한 인간심리 묘사에 뛰어났다.
체호프의 매력, 담담함!
아일랜드의 저명한 극작가 숀 오케이시는 체호프에 관한 글에서 “체호프는 휘트먼과 견줄 수 있는 시인이며, 셰익스피어에 비길 수 있는 극작가요, 또한 위대한 인간의 모든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의 친구라는 점”이라며 체호프가 이 지구상에 많지 않은 거장들 중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체호프가 서거한 지 벌써 한 세기가 도래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와 연구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오케이시의 평가처럼 그가 우리의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일까? 실제로 러시아의 여러 작가들 중에 체호프만큼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체호프는 푸쉬킨처럼 화려한 기교도, 고골리처럼 번쩍이는 기지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전율을 느끼게 하지도, 톨스토이처럼 설교하지도 않으며, 고리키처럼 외치지도, 불가코프처럼 신랄하지도 않다. 그는 그저 담담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은 독특한 맛과 향기가 있다.
그러나 이 담담함 속에 깃든 독특한 맛과 향기를 찾는 작업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실제로 고(故) 투르빈 교수는 러시아 작가 중에 가장 어려운 작가를 꼽으라면 자신은 주저없이 체호프를 지목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의 많은 문학 연구가들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어쩌면 이런 단순함 속의 난해함이 체호프의 신비와 매력이 아닐까?
극작가 체호프, 지루함?
체호프의 희곡을 처음 읽는 사람은 작품의 산만함과 무료함에 당연히 권태를 느낀다. 단편작가로서 그토록 흥미 있고 유머러스한 작가가 어떻게 이리도 지루한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려 하는지, 누굴 중심 인물로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체호프를 그저 연극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가 정도로만 생각한다. 정말 체호프는 재능 없는 극작가일까? 체호프의 희곡은 정말 지루함 그 자체일까? 죽은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은 그는 단순히 과거 속에 박제돼 남은 작가일까?
답은 아니다. 체호프는 연극을 다르게 봤다. 그는 당시 기존 연극이 보여주던 인위성과 잘 짜여진 틀을 거부했다. 인물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던 연극을 거부했다. 화려하고 비장한 극적 갈등과 극적 음모 역시 거부했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연극 문법을 만들었다. 그 문법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말을 빌자면 “분위기 극”이 되고, 자신의 말로는 “인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극”인 것이다.
인생을 주연과 조연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을 조연급의 인생 혹은 에피소드적 인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누가 뭐래도 각자 인생의 주연들이다. 체호프의 인물을 주연과 조연으로 나눌 수 없음은 그런 이유에서다. 단지 누가 좀더 많이 가졌는가, 누가 좀더 재능이 있는가, 누가 좀더 배웠는가하는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고리키가 자신의 희곡에서 등장인물을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과 미워하는 인물로 나눴다면 체호프는 자신의 모든 인물을 사랑한다. 『바냐 외삼촌』에서 바냐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도 체호프는 그를 사랑스럽게 그린다. 우린 체호프 희곡의 어느 인물도 미워할 수가 없다.
체호프의 희곡에 갈등과 음모가 없다는 지적은 수없이 되풀이 됐다. 하지만 갈등과 음모 없이 어떻게 드라마가 되겠는가? 다만 체호프에게서는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뿐이다. 체호프에게서 이 갈등은 인물들 간의 충돌에서가 아니라 삶의 복잡함에서 온다. 인생(혹은 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 인간은 그들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 죄인이 될 뿐이다.
'인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극'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지적한 ‘분위기 극’이다. 그렇다면 분위기 극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 희곡의 원칙과 다른 분위기로서 ‘물밑의 흐름’, ‘Sub-text’라는 말로 요약된다. 작품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화내고, 우는 행위 밑으로는 ‘인생’ 그 자체가 흐른다. 일상적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속에는 인생의 내적 아이러니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물들이 있다. 체호프의 극은 “인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극”인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체호프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드라마와 소설의 시학을 탐험해 보자.
감춤의 시학
체호프의 희곡을 다른 극처럼 발단, 전개, 절정 등으로 나눠가며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희곡의 플롯은 어떤 갈등도 사건도 등장하지 않고 ‘물밑의 흐름’을 따라가는 식이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극’, ‘서정적 드라마’(고리키)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추상적인 용어들이 갖는 비밀은 무엇인가? ‘분위기’라는 말로 우리는 너무 쉽게 체호프 드라마의 특징을 뭉뚱거리는 것은 아닌가? 분위기의 실체는 무엇이며, 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체호프 희곡을 ‘사건’과 ‘갈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예술적 기법의 본질은 ‘감춤’의 시학이다. 실제로 그의 희곡에서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무대에서는 사건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사건이 있더라도 무대 밖에서 벌어지는 식이다. 이는 체호프가 내부 세계를 묘사하는 ‘감춤’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런 감춤의 시학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장치 중 하나가 ‘휴지(pause)’다. 이 휴지는 극적 리듬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데 리듬의 움직임은 통상 휴지의 시스템으로 이뤄진다. 특히 대사 사이 리듬의 긴장감을 말로서가 아니라 ‘휴지’ 시스템을 이용해 ‘침묵’으로 말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첫 번째 희곡 『후레자식』에서 ‘휴지’는 무려 120회에 달하고, 『갈매기』 32회, 『바냐 아저씨』 43회, 『세 자매』 60회, 『벚꽃 동산』 32회 등으로 이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이같은 휴지의 시스템으로부터 체호프의 ‘숨겨진 텍스트’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휴지와 함께 언어 사용의 함축성은 체호프 창작과정의 또 다른 특징이다. “체호프 예술 세계의 발전은 절제의 과정이며 압축의 과정이다.”라고 적절하게 개진한 파페르느이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체호프는 거북이처럼 머리와 발과 꼬리를 모두 몸 속으로 감춤으로써 내적 플롯을 유지한다.
우연의 시학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소위 ‘우연의 시학’이다. 이것은 체호프의 대화 체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다. 우리는 체호프의 희곡에서 우연의 대사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갈매기』에서 메드베젠코와 마샤의 첫 대사, 그리고 2막에서 전개되는 마샤의 대사 중에도 “아마 식사시간일 거예요. 아이구, 발 저려라.”같은 예기치 않은 말과 행동이 있다. 『세 자매』 처음과 올가의 독백, 2막에서 체부트이킨이 신문을 읽으며 하는 말 “발자크, 베르디체프에서 결혼… 치치하르 지역에 천연두 만연!”, 또 『바냐 외삼촌』 1막에서 마리나는 앞 뒤 상황과 무관하게 집 근처를 거닐며 “꼬꼬 꼬꼬…” 하고 닭을 불러모은다. 『벚꽃 동산』의 로파힌과 두냐샤의 대화에서, 그리고 곧 꽃을 들고 등장하는 에피호도프는 “꽃을 떨어뜨린다.”는 지문에 따라 꽃을 떨어뜨린다.
이런 것들은 무엇일까? 연구가들은 “체호프에게는 ‘우연적’ 대사가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어디서나 불필요한 허드렛 것들과 섞여 있다. 체호프의 컨텍스트 안에서 대화와 대사들은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삶의 자기 느낌을 표현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마샤의 “아이구, 발 저려라.”에서 관객들은 그녀의 습관적인 삶의 지루함과 무거움을 느낄 수 있고, 체부트이킨이 읽는 신문 기사 내용을 통해 지루한 적막과 산만함, 무력함 등이 공존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닭 부르는 소리 역시 인물의 성격이 아닌 삶의 지루함을 드러내며, 에피호도프가 떨어뜨리는 꽃은 부유한 상인 로파힌과 함께 있는 여자를 보면서 지루한 삶에서의 한 점 에로틱한 상상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등장하는 이 ‘지루함’은 우연적 대사뿐 아니라 우연적 상황으로 ‘반복’되면서 체호프를 모르는 연출가들과 배우들을 어렵게 한다. 이렇듯 인물들이 ‘삶의 자기 느낌’을 주로 표현하는 것을 수히흐 교수는 ‘결론 없는’ 표현의 ‘제로 상태의 정보’를 준다고 설명한다.
갈등의 시학
다음으로 체호프의 시학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극적 갈등에 관한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극에서 ‘갈등’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돼 왔다. 체호프 이전 드라마의 원칙 중 하나인 갈등은 인물들의 모순과 충돌을 표면화시키고 이로 인해 극적 행동이 야기되고, 음모가 꾸며지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에서는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의 갈등은 분위기, 반복, 우연성(단절), 휴지의 시스템 등에 밀려 드러나지도, 부각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체호프에게서 사건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중심 토대는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삶의 편린들로 채워진다. “체호프에게서 극적 갈등 상황은 다양한 측면의 인물들의 의지적 모순 속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도출된 상황적 모순 속에서 나타난다. 이 모순 앞에 개별적 의지는 무력하다.” 이는 주인공의 행동이 끝까지 모티브화되지 않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중립화’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것이 체호프 이전의 작가들과의 변별성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감춤과 반복적인 우연 그리고 내재적 갈등 이런 것을 보여주는 체호프 드라마는 이전 극작 원칙과 다른 ‘분위기 극’, ‘물밑의 흐름’, ‘Sub-text’라는 말로 일컬어졌다. 작품에서 인물들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화내고, 울면 그 밑으로 '인생' 그 자체가 흐른다. 모든 인물들은 일상적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내적 아이러니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이는 인생이라는 주어진 틀 안에서 그 자체로 잘못된 삶 또는 스트레오타입화된 왜곡된 세계를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한 체호프의 부드러운 질책이다. 그래서 체호프를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삶 그 자체가 돼야 한다. 삶의 연극을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대에서 체호프를 '연기'하려 하기보다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갈매기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영어 Seagull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갈매기는 바다 갈매기가 아닌 호수에 사는 일상적인 Gull이다. 이 작품은 체호프의 이름과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명성을 러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실제로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 희곡 공연을 준비하면서 단첸코에게 보낸 편지에 “현 시점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희곡이 아주 재능 있는 것이며 흥미롭다는 점이오. 그러나 어떤 결말을 내야 할지 모르겠소.”하고 고백했다. 다시 몇 달 후 이 작품의 독일어 번역자인 추미코프는 체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번 『갈매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곤 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거의 비교할 수 없는 걸작임을 느끼겠지만 무슨 의미인지, 어떤 사건인지, 또 뭐가 뛰어난 것인지는 결코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체호프의 뛰어난 작품 가운데서도 『갈매기』는 걸작에 속한다. 하지만 작품만으로는 어떤 규격화된 종결도, 단일한 컨셉도 끄집어낼 수 없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체호프 자신의 편지 속에 다음의 진술을 살펴보자. “코미디, 세 여자와 여섯 남자, 4막, 호수가 보이는 풍경, 문학에 대한 많은 대화, 극적 행동은 적게, 5뿌드(러시아의 중량 단위)의 사랑”, 그리고 “기존 모든 연극 문법과 달리 포르테로 시작해 피아노시모로 끝이 남”. 체호프가 스스로 작품성격을 규정한 말이다.
5뿌드의 사랑
전통적으로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주로 삼각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체호프의 『갈매기』는 5가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교사 메드베젠코는 마샤를 사랑하고,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트레플레프는 니나를, 그리고 니나는 작가 트리고린을 사랑한다. 여기에 마샤의 엄마 폴리나는 의사 도른을 사랑한다. 사랑은 서로 얽혀 있고, 어느 하나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각자 서로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사랑의 미로는 결국 ‘출구 없는 인생’의 모델처럼 보인다.
문학(예술)에 대한 많은 이야기
마치 사랑의 전염병을 앓듯 희곡의 모든 인물(메드베젠코는 제외)은 예술의 굴레에 관여한다. 사랑처럼 예술도 인물의 운명을 끌고 간다. 트레플레프의 공연 실패로 니나는 트리고린에게 가고, 니나의 예술적 꿈은 트리고린에 의해 파멸되고, 트리고린은 예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아르카지나와 그 아들의 예술에 대한 신념 차이는 마치 인생의 단절처럼 느껴진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
희곡에서 호수는 풍경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호수는 희곡의 전편을 통해 때론 화려하고, 때론 격랑이 치고, 때론 메말라 보인다. 그리고 이 호수에는 많은 갈매기들이 산다. 니나의 갈매기는 먼 비상을 꿈꾸고, 트레플레프의 갈매기는 총을 맞아 파멸되고, 아르카지나의 갈매기는 먼 기억 속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트리고린의 갈매기는 기억에 없는 박제된 갈매기다. 마법의 호수를 통해 그 주변을 맴도는 갈매기들의 상징에서 우리는 트레플레프의 마지막 자살을 예감하고, 니나의 괴로운 삶을 느낄 수 있으며, 트리고린의 무심함을 알 수 있다.
적은 행동
희곡의 모든 주요 사건은 모두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트레플레프의 자살기도와 마지막 자살, 니나가 트리고린과 동거하며 낳은 아이의 죽음, 그리고 배우가 되는 것, 애정 없이 메드베젠코와 결혼해 아이를 낳은 마샤, 작가가 된 트레플레프, 어느 것 하나 무대에서 보여지지 않는다. 희곡은 모두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2·3막은 하나의 발단이고, 3막에서 4막 사이에 ‘2년 경과’는 모든 극적 사건을 함축하고, 2년이 지난 후의 4막은 하나의 결말이다. 사건이 벌어진 2년은 ‘경과됐음’이라는 지문 하나로 끝나버린다. 결국 그런 지문 같은 시간의 두께와 진행 속에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포르테에서 피아노시모로
체호프의 희곡을 우리 나라에서 자주 공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체호프 작품이 지닌 음악적 리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호프 희곡의 대사, 지문, 효과 등의 시적 리듬이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다. 결국 희곡 『갈매기』 공연의 관건은 삶의 리듬에 대한 우리의 구상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달렸다.
1막과 4막은 마치 거울구조로 돼 있는 듯하다. 1막의 가설무대는 4막에선 흉물스런 모습으로, 1막의 트레플레프가 니나에게 건넸던 “당신의 창문을 바라보겠소.”라는 대사는 4막에서 거지처럼 서 있는 모습으로, 1막에서 니나가 무의미하게 했던 극중 극의 대사는 마지막에 그녀의 삶에 대한 독백으로 다시 반복되고, 여기서 트레블레프는 “외롭고”, “춥고”, “음울”한 절망을 맞이한다. 마치 현실의 거울처럼 이런 리듬은 삶의 내면적 아이러니와 인생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트레플레프의 자살을 보는 관객들은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운명을 돌이켜보게 되고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된다.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갈매기』는 수없이 많은 의문점들을 지닌다. 이것이 코미디냐, 비극이냐 하는 고전적 질문에서, 트레플레프가 진실로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트레플레프 자살의 당위성과 니나가 떠난 후 그가 자살 직전 마지막으로 읊는 대사 “엄마가 아시면 괴로워하실 거야”의 의미 등. 그러나 이것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보다 우리가 앞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체호프 작품의 주인공은 ‘인생’ 자체라는 것, 그 인생의 무거움 아래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공감,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다. 체호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달리 말하면 출구 없는 인생에서 마치 무심한 듯 살아가는 우리, 평온해 보이는 우리 삶 밑으로 요동치는 숱한 파도, 남 앞에선 비굴해도 혼자 있을 땐 세상의 주인공인 듯 살아가는 우리들의 서글픈 초상인 것이다.
· 벚꽃 동산
시간의 흐름
『벚꽃동산』은 오월 아침의 추위에서 시작해 8월 22일의 경매를 정점으로 해서 10월의 따뜻한 날씨로 끝난다. 역설적이다. 오월의 따뜻함이 아니고, 시월의 추위가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시간적 흐름이다. 시간의 진행은 일과 사건,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과 서로 충돌하며 하나의 선으로 합쳐지지 않는다. 5년 만에 파리에서 돌아오는 라넵스카야 부인의 기차는 2시간 연착한다. 또한 그녀를 마중하러 왔던 로파힌은 그만 잠이 들어 마중에 나가지 못하고 만다. 3막에서도 경매는 4시에 끝났으나 기차를 놓쳐서 9시 30분까지 기다린다. 4막에서 사람들이 떠나는데 다시 한번 기차에 늦을 뻔 한다.
로파힌 : 여러분 기차 시간이 46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서두르세요.
가예프 : 가야지, 우리도 떠날 때가 되었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라넵스카야 : 떠나야 해요.
트로피모프 : 여러분, 마차에 탑시다. 시간이 다 됐어요. 곧 기차가 올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이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뭔가 움직일 수 없는 힘이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뒤로 주저앉히는 것 같다.
『벚꽃동산』은 아름다운 영지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것 뿐 아니라 현실적인 시간관념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늦는 것을 걱정하며 서두른다. 그리고 이 모티브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 모티브가 가장 강하게 표현된 것은 영지 판매라는 중심 사건에서다. 그렇다면 8월 22일 영지 경매가 있는 3막에서 모든 것은 끝이 나야 할텐데, 4막은 왜 필요한가? 그런데 4막에도 “시간을 쫓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다. 로파힌은 마치 기차처럼 바랴라는 간이역에 멈춰서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잊혀진 늙은 하인 피르스는 공동의 시간 흐름에 뒤처진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이런 다양한 예들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 아마 그 핵심지점은 1막 처음의 로파힌과 가예프의 대사 속에 표현된다.
로파힌: 그래요, 시간은 흐른다는 거죠.
가예프: 누구라고?
로파힌: 시간이 흐른다고 말했어요.
가예프: 헌데 여기서 인도산 향수 냄새가 나는군.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완벽한 불일치다. 거의 부조리하다. 가예프의 “누구라고?”는 자신의 문법적 황당 무계함과 불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로파힌의 시간에 대한 말이 가예프에겐 다가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영지 주인 라넵스카야는 시간 앞에서 저항할 수 없고 능동적이지도 못한 어린애 같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레 서둘러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을 때 라넵스카야는 무의미한 기도로 시간으로 보낸다.
“난 1분만 더 앉아 있겠어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라넵스카야의 모든 관계는 집과 동산에 매여있음을 알 수 있다. 『벚꽃동산』의 인물들을 생각할 때, 그들은 시간과의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 속의 동산
일반적으로 명사에는 시간이 없지만 동사에는 다양한 시간이 있다. 이것이 문법의 세계다. 그러나 시적 표상의 세계에서는 명사에도 시간이 있을 수 있다. 바로 『벚꽃동산』이 시간을 보여주는 명사다. 그 시간은 ‘과거’다. 1막의 지문에서 보이듯 “방의 창문은 닫혀있다”. 이것은 집이 여명 속에 잠들어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4막의 지문은 “1막의 무대 장치. 창에 커튼도 없고 그림도 없다. 몇몇 가구들은 팔기 위한 것처럼 구석에 있다. 공허함이 느껴진다.” 이제 이 집은 잠자지 않고 삶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 희곡 안에 담겨 있다. 1막의 라넵스카야 대사, “돌아가신 어머니가 정원을 걷고 있어요. 아무 것도 아니네. 흰 나무가 누워 있는 거야.”는 특징적이다. 밝은 빛 아래서 과연 엄마와 나무를 혼동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죽은 봄의 5월의 이상한 빛 아래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4막에서 하인 피르스가 “움직이지 않고 눕는다.”고 한 것은 단순히 죽어 쓰러지는 것이 아니다.
체호프는 라넵스카야에 대해 “이 희곡의 중심적 인물이며 여성스럽고 늙은 여인, 현재에는 아무것도 없는 과거의 인물”이라고 편지에 쓴 적이 있다. 2막에 그녀의 독백은 따라서 모두 과거시제다. ”난 돈을 탕진했고, 남편은 술주정뱅이였고, 난 다른 삶을 사랑했고, 내 아인 물에 빠져 죽었고, 별장을 샀고, 그는 거기서 병들었죠. 그리고 내 영혼은 고갈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라넵스카야가 과거의 인물이라면 현재의 인물은 로파힌이다. 체호프는 이 인물에 대해 “과거 상인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희곡의 중심이다. 그가 실패하면 희곡 전체가 실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래의 인물은 트로피모프로 대표된다. “아냐, 난 행복을 예감합니다. 난 이미 그걸 보고 있어요” 그에게 동산은 희망과 미래 속의 동산인 것이다. 만일 라넵스카야에게 동산이 인간적(“어머니”)라면 로파힌에겐 찍어내야 할 대상이고 트로피모프에겐 뭔가 시적인 울림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벚꽃동산』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교차되고, 이 시간은 곧 우리 인생의 단면인 것이다.
▣ 체호프의생애와작품
1860 러시아 남부 타간로그에서 소상인의 셋째 아들로 출생
1868 타간로그의 김나지움에 입학
1876 부친의 파산으로 가족 모두 모스크바로 이사. 체호프만 남아 학업을 계속했다.
1879 최초의 작품 「후레자식」 집필. 모스크바 의과 대학 입학
1880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여러 유머 잡지에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기고
1882 「관리의 죽음」, 「뚱뚱이와 홀쭉이」, 「외과 의사」, 「카멜레온」, 「아뉴타」 등 발표
1884 모스크바 의과 대학 졸업 후 의사로 근무. 단편집 『멜파메나 이야기』 출간
1885 당시 문단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인 수보린과 그리고로비치를 만났다.
1886 단편집 『화려한 이야기』 출간.
단편 「마법사」, 「좋은 사람들」, 「누렁이」, 「결투」,「공작부인」 발표
1887 단편집 『해질 녘』, 『악의 없는 이야기들』 출간
1888 단편 「지루한 이야기」, 「초원」, 「아내」 발표.
희곡 「이바노프」 발표 후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공연
1890 단편집 『우울한 사람들』 출간. 죄수들과 유형자들의 생활을 관찰하기 위해 사할린 여행
1892 단편 「검은 옷의 승려」, 「속물」 발표.
소설 「6호실」, 「사할린섬」 제1장 발표. 희곡 「갈매기」 집필
모스크바 근교에 정착. 창작과 더불어 의료활동.
단편 「3년」, 「농부들」, 「나의 인 생」, 「다락이 있는 집」 등을 집필
1895 『사할린 섬』 출간. 「갈매기」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했으나 실패
1896 첫 희곡집 출간
1898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갈매기」 상연해서 대성공. 건강을 이유로 얄타로 이주.
여기서 톨스토이, 고리키, 부닌 등과 자주 만났다.
「상자 속에 든 사내」, 「사랑에 관하여」 집필
1899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골짜기」 집필. 「바냐 외삼촌」 초연
1900 코롤렌코 등과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 건강 악화. 「세 자매」 집필
1901 「세 자매」 공연.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결혼
1902 최후의 단편 「약혼녀」 집필
1903 최후의 희곡 「벚꽃동산」 집필
1904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벚꽃동산」 공연.
남독일 바덴바덴에 요양 중 7월2일 지병으로 사망.
모스크바로 유해가 운구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