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울프는 사실 예술회로부터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여성”이나 “소설”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그 두 항목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방법을 택하지 않고,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기 자신의 돈과 방이 있어야 한다.”는 아주 조야하게 보이는 주장을 내세우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한다. 이유를 설명하는 방법은 울프가 강연에 오기까지 이틀간 걸어온 방황과 모색의 족적을 기술하는 것인데, 이 기술에 있어서도 그녀는 소설가답게, 메리(성은 베튼, 세튼, 카마이클 등 아무래도 좋다)라는 허구적 화자가 옥스브리지(Oxbridge)라는 가상의 대학도시를 방문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연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여 잔디 위를 걷던 화자는 대학의 수위로부터 대학의 연구원과 학생들만 잔디 위를 걸을 권리가 있고 나머지는 길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를 받는다. 그녀는 물론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던 생각의 실마리를 잃어버린다. 강연을 위한 생각의 실마리를 잡기도 전에 여성에게 금지된 구역들이 여성의 사고와 발전을 방해하는 현실을 체험적으로 그린 예이다. 이러한 현실적 제지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자신이 방문하고 있는 옥스브리지의 특정 칼리지에 속했던 여러 문인들의 업적과 그 칼리지에 대한 그들의 회상, 또한 그 칼리지에 보관되어 있는 그들의 원고 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도서관의 문을 연다.
그때 또다시 점잖은 한 신사가, 여성이 이 도서관에 들어오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저지한다. 점심식사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화자는 칼리지의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장엄한 오르간 소리에 관심을 갖지만, 곧 그곳에 들어가는 일도 저지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냥 건물들의 외형적 아름다움만을 관람하기로 한다. 예배시간이 되었는지, 모자와 가운 차림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중년의 학자들은 스트랜드(런던의 번화한 상점가)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희귀종들 같은 기묘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칼리지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건축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보는 이의 시각에 충족감을 준다. 화자는 이 아름답고 장엄한 건물들이 한때는 목초지였던 땅에 세워지는 과정 중에 흘러 들어왔을 수많은 후원용 재화를 상상한다. 칼리지의 점심시간에 화자가 접하게 되는 혀넙치와 자고새로 시작하여 적포도주, 백포도주를 동반하고, 설탕범벅이 된 디저트로 끝나는 맛나고 풍요한 점심식사는 다시 한번 이 칼리지의 재정적 풍요를 증명해 준다. 이러한 식사를 마친 후라면, 안정된 이성적 사고와 인생에 대한 관대하고 낙천적인 인식이 능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창 밖에서 화자가 우연히 보게 되는 꼬리 잘린 고양이의 모습은 무언가 우주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듯한 모습으로, 포만감을 주는 식사의 경험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고,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있다는 느낌을 암시한다.
그 결핍과 다름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감상적이고, 기대와 희망에 가득 찬, 그리고 낭만적 빛을 잃지 않은 남녀관계와, 1차대전이 드러낸 인간의 어리석고 추한 모습을 목격한 후에 환상과 감상을 잃어버린 건조한 남녀관계의 차이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심 식사 후 여성들의 칼리지인 펀햄 칼리지를 찾은 화자는 그 차이가 결국은 남성들의 풍요로운 칼리지와 여성들의 빈곤한 칼리지의 차이임을 인식하게 된다.
칼리지에서 만나게 된 초라한 여성학자의 늙은 모습, 바닥이 비칠 정도로 멀건 그레이비 수프와 소고기와 감자와 야채, 그리고 포도주 대신 물이 나오는 평범한 싸구려 저녁식사는 화자에게 여성의 상대적 빈곤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한다. 저녁 후에 친지인 여성학자 메리 세튼(메리 베튼, 메리 세튼 등의 평범한 이름의 사용은 우리말 식으로 하면 갑녀, 을녀 등의 인물설정이라 볼 수 있다.)과 이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설파하던 화자는 펀햄 칼리지의 기원에 대한 메리 세튼의 설명을 듣게 된다. 1860년경에 사회의 조롱과 회의 속에서 끈질긴 설득과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여성들은 삼만 파운드의 돈을 모금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것이 펀햄 칼리지의 기금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저녁식사 때 포도주와 자고새, 그리고 쟁반을 머리 위에 들고 나르는 하인들을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성들은 왜 돈을 벌 수가 없었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정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가 없고, 자녀들을 제대로 길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돈을 번다고 해도 1880년까지 여성들은 재산권이 없었으므로, 그 돈은 남편의 소유가 되어 남편이 원하는 대로 처분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돈을 번다는 것이 여성에게는 무의미한 활동이었다.
하룻동안의 상념을 정리하며, 화자는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온다. 인적이 끊어진 숙소 앞에서 그녀는 문밖에 쫓겨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생각하고, 그러나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더 비참할 것이라고 여성의 위치를 상징하는 두 상태의 우열을 가려본다. 남성의 풍요와 안전함, 그리고 여성의 빈곤과 불안정성, 그리고 작가의 형성에 있어서 풍요로운 전통이 가지는 힘, 또한 전통의 결여가 가지는 힘에 대한 생각들로 그녀는 하루의 일과를 결산한다.
제2장
런던으로 돌아온 화자는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 대영박물관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서 화자가 발견하는 것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쓴 책은 너무나 많아서 그녀가 가진 시간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다 섭렵할 수 없는 반면, 여성이 남성에 대하여 쓴 책은 것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화자의 앞에 앉아서 자료를 찾고 있는 남자는 때로 소중한 자료를 발견하였다는 듯이 만족의 신음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자료연구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화자가 추적하고 있는 한 가지 질문, “왜 여성은 가난한가?”에 대한 의문은 “중세시대 여성의 상황”이라든가 “피지 섬의 여성풍습”이라든가 하는 수십 갈래의 주제 앞에서 그녀의 손길에 잡히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또한 남성은 여성에 대해 무수한 언급을 해왔지만, 그들의 의견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포우프(Pope)는 여성들이 특징이 없다고 말한 반면, 라 브뤼예르(La Bruyere)는 여성들은 극단적이어서 남성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전 내내 자료를 찾은 후에 이런 엇갈린 의견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결론 - 예를 들면 여성은 남성보다 체모가 적다는 식의 - 을 써 가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자는 결론 대신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분노한 모습으로 『여성의 지적, 도덕적, 육체적 열등성(The Mental, Moral, and Physical Inferiority of the Female Se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는 흉한 모습의 남자교수였다. 남성들이 여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이 진리의 백색광 속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고, 감정과 분노의 붉은 광채 속에서 쓰여졌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서 신문을 펼쳐든 화자는 지구를 모르는 외계인이 와서 신문의 제목만 보아도 영국이 가부장적인 사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을 운영하고, 권력을 지니고, 운동선수 노릇을 하고, 재판을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자가 그려놓은 이미지 속의 남자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이 부를 원한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분노하는 것일까?
남성들은 남성의 약점을 사실에 가깝게 지적하는 여성에 대하여 “지독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짖는다. 그것은 남성들이 항상 자기 자신들의 부풀려진 이미지를 여성들의 눈 속에서 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이렇게 과장된 거울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세계는 아직도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성에 대한 이런 위험한 생각들을 좇고 있을 때, 점심값을 지불할 때가 되었다. 화자는 몇 장의 종이를 주면 사회가 자신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는 신기한 제도에 잠시 생각이 미친다.
그녀가 돈의 힘을 갖게 된 것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던 친척 아주머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산상속 통지를 받은 것은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날과 같은 날이었는데, 화자는 두 가지 권리 중에 재산이 그녀에게는 더 소중했다고 말한다. 이제 그녀는 당시 여성에게 허락되었던 허드렛일 - 당나귀 쇼나 결혼식을 취재한다든지, 조화를 만든다든지, 유치원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 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생계를 위해서 남성에게 평생 종처럼 아첨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정복욕과 소유욕에 시달리는 남성들에게 동정심까지 지니게 되었고, 남성들에 대한 공포나 씁쓸함이 사라졌으며, 사물을 그 자체로 평정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자신의 거처가 있는 거리로 돌아온 화자는 탄부와 유모와 식료품가게 주인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앞으로의 세계에서 여성이 보호해야 할 성이라는 관념이 없어지면 여성 탄부나 군인, 선원, 기관사 등도 등장하고 그런 일이 가지는 긴장감과 위험부담 때문에 여성의 수명도 남성의 수명만큼 짧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의 삶이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고를 급진적으로 확대시켜 가고 있는 부분이다.
제3장
대영박물관에서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화자는 자기 방의 커튼을 내리고, 트레베일란(Treveylan) 교수의 영국사 책에 나오는 사실의 기록들 속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 시대의 여성들은 왜 시를 쓸 수 없었는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한다. 여성의 지위에 관한 페이지에서 화자는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당시 남성들의 권리로 여겨졌다는 항목을 발견한다. 여자의 부모는 또한 부모들이 정해준 혼처를 거절하는 딸을 감금하거나 구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는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 안티고네(Antigone), 클레오파트라(Cleopatra),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페드르(Phedre), 크레시다(Cressida) 등 강렬한 성격을 가진 여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역사책과 문학이 그리는 여성상은 괴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지렁이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찾아보면 실질적으로는 문학이 그려내는 강인한 여성상은 볼 수 없다. 가끔 여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긴 했지만, 지적 능력과 성품의 장점으로만 무장한 중산층의 여성이 역사의 흐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문헌도 없다.
그러므로 뉸햄과 거튼의 여학생들은 앞으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인 오스틴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18세기 이후에는 문학적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아마도 아동실에서 나오자마자 열 다섯 혹은 열 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주교는 여성이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성을 갖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태어난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셰익스피어가 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셰익스피어에게 쥬디스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여성이므로 셰익스피어처럼 문법학교에 가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집안 일을 거드는 틈틈이 책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글을 쓴다는 것은 숨어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십대를 채 벗어나기 전에,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옆집의 양털 중매상인의 아들과 약혼시키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결혼이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를 가두고 아버지는 구타와 회유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을 것이다. 오빠와 같은 공상력과 언어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그녀는 어느 여름날 견디다 못해 보따리를 챙겨 런던의 극장가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배우로 성공한 오빠와는 달리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극장의 지배인은 푸들이 춤추는 거나 여자가 연기를 하는 거나 비슷할 거라고 하며 폭소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닉 그린(Nick Greene)이라는 배우감독이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져 그녀를 정부로 삼았고,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하고 목매어 자살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는 노동을 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혹 여성들 가운데 어떤 천재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면, 그녀들은 마녀로 오인 받아 익사당했거나, 훌륭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거나, 광녀가 되었거나 혹은 익명의 민요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18세기 루소의 예 이후에 성행하기 시작한 고백문학의 예를 보면, 하나의 저술이 나온다는 것은 남성의 경우에도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탄생하는 기적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에 그 장애라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방을 가진다는 것은 부모가 아주 부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9세기 초까지도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키츠(Keats)나 카알라일(Carlyle), 플로베르(Flaubert) 등 가난한 남성작가들에게 허용되었던, 도보여행을 즐긴다거나 자기만의 거처를 따로 가진다거나 하는 일도 물론 여성에게는 허용될 수가 없었다. 키츠나 플로베르나 다른 천재들은 세상의 무관심을 그렇게도 못 견뎌 했다. 그러나 글을 쓰려는 여성에게는 무관심이 아니라 세상의 적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양이 좋은 우유를 먹은 쥐의 발육과 그렇지 못한 쥐의 발육에는 완연한 차이가 보인다. 예술가의 성장에도 사회가 그에게 어떤 영양가를 공급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여성 예술가에게 사회는 어떤 양분을 공급했는가, 그녀는 멸시당하고, 구타당하고, 설교당하고, 타이름을 당했다. 여성의 지적 열등성에 대하여, 닉 그린이 여성은 연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여성은 작곡을 못 한다든지, 여성은 이것을 못한다, 저것을 못한다는 의견들이 너무도 분분하여서 그것을 읽는 여성들은 자기실현의 활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사실,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경우처럼, 그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과 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마음은 반항과 피해의식과 복수심 등을 모두 다 태워 연소시켜 버리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백열하고 있는 것이다.
제4장
그런데 16세기의 여성의 마음이 이런 상태에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17세기에는 레이디 윈첼시(Lady Winchelsea)라는 귀족부인이 시작(詩作)을 시도하였다. 상당히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의 시는 남성들의 편견과 부당성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녀의 사생활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찰스 램이 사랑하였던 뉴 캐슬 공작 부인(Duchess of New Castle) 마가렛 카벤디쉬(Margaret Cavendish) 역시 “여성은 박쥐나 부엉이처럼 살며, 짐승처럼 노동하고, 벌레처럼 죽어간다.”고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가르침 받고 길들여진 일이 없는 그녀의 상상력은 유용하게 쓰여질 수가 없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녀에게 교육적 제언을 하지 않았고, 아첨할 뿐이었으며, 외부인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당대의 편지작가인 도로시 오스본(Dorothy Osborne)은 그 자신이 상당한 문필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렛 카벤디쉬가 시집을 출판한 것을 거의 광기 어린 행동으로 취급했다.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 그것도 가정사의 틈틈이 편지를 쓰는 정도가 아니라, 시를 써서 출판한다는 것에 대하여 당대 사회가 가졌던 편견을 대변해 주는 예이다.
여성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아프라 벤(Aphra Behn)이었다. 고립된 환경에서 저택의 정원이나, 책 속에 묻혀 있던 귀족부인들과는 달리 남편이 죽어 생계를 마련해야 했던 그녀는 열심히 글을 써서 먹고 살 만큼 벌었다. 애정문제에 있어서 다소 당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그녀는 그러나 여성이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여류작가였다. 17세기 말에는 많은 여성들이 번역을 하거나 싸구려 소설을 써서 용돈을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그리고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중산계급의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이 탄생하게 된 것은 이런 많은 선배 여류작가들의 활동 덕분이다. 문학에서 전통의 역할이란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상당수의 여류작가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여류작가들은 소설만 썼을까? 여성이 시적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서양문학사에서 최초의 서정시인이 여성인 사포였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경우, 그녀의 작품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거실에서 집필되었다. 그녀의 생활반경은 집안이었고,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과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였다. 그러니 그녀의 저술이 소설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그녀의 기질에 잘 맞았다. 그러나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의 작품을 보면, 그녀의 재능은 시극을 쓰는데 더 적합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조지 엘리엇의 재능은 소설보다는 역사나 전기저술에 더 적합하였다.
또한 제인 오스틴이 자기가 알고 있는 좁은 세계에 만족한 작가라면, 샬롯트 브론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인 에어』에는 제인이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여성인 자신이 경험할 기회가 전혀 없는 먼 세계를 꿈꾸고 동경하면서, 여성의 답답한 처지를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갑자기 플롯의 진행을 위하여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에 제인이 그레이스 풀(사실은 버사)의 웃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언급으로 어색하게 전환된다. 울프는 이러한 작품의 틈새가 생기는 것은 브론테가 자신의 개인적 불만을 미처 연소해 버리지 못하여 그 장애가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라고 지적한다. 불연속성을 오히려 해석의 단서로 삼는 오늘날의 징후 독법과는 달리, 울프는 이러한 불연속성은 작품의 왜곡이며, 기형화라고 판정한다.
집안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살면서 여성작가들이 『에마』라든가 『워더링하이츠』라든가 『미들마치』같은 작품들을 써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지 엘리엇의 경우 경험의 폭이 보다 넓다고 할 수 있으나, 유부남이었던 루이스(Henry Lewes)와의 동거사실 때문에 그녀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 톨스토이가 만약 불륜의 관계 때문에 수도원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면 과연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이 나올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소설에는 여러 가지 상반되는 요소들이 들어 있지만, 잘 쓰여진 소설의 경이로움은 이러한 상반된 요소들이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을 주는 완결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브론테의 경우처럼 자신의 소설세계에 완전히 몰두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불만이 소설 속에 돌출하게 되면, 그 완결성이 깨지게 된다. 이것은 여성 소설가의 악조건이 작품을 해치고 있는 예이다. 그 외에도 그녀의 소설에서는 무지라든가 공포, 분노 등의 감정이 작품을 경련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재의 선택이나 문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가부장적 사회의 압력은 종종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멍들게 하였다. 남성의 잣대로 여성적 취향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여성작가들은 종종 그러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목소리를 변형시켰다. 이러한 세상의 목소리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 작가들은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이다. 그들은 남성을 닮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글을 썼다.
또한 전통이 없다는 것은 여성작가들에게 보다 큰 문제였다. 19세기 초반에 일반화되어 있던 현학적이고 딱딱한 문체는 여성들에게 부적합한 매체였다. 살롯트 브론테는 이 둔탁한 문체와 씨름하다가 실패했으며, 조지 엘리엇 역시 이 문체를 본보기로 흉측한 문체를 생산해냈다. 제인 오스틴만이 이 문체를 웃어넘겨 버리고 자연스럽고도 모양새 있는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소설 이외의 다른 문학 형태들은 역사가 오래되어 남성 본위의 틀로 굳어져 있었다. 소설만이 신생 장르로서 아직 유연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여성들이 자신들의 감수성과 취향에 맞는 형태로 이것을 변형시켜 나갔고, 자신들의 시적 충동을 이 새로운 형태에 담아냈다.
미래에는 사실 책의 형태도 여성의 생활조건, 신체적 조건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방해를 많이 받는 여성의 생활조건에 맞게 책은 짧아져야 하고, 보다 응축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작업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내려면, 여성에게 적절한 작업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의 교육기관에서 사용되고 있는 강의시간만 해도 그렇다. 강의시간은 수백 년 전에 수도사들의 생활에 맞게 고안된 것이다. 여성들을 위해서는 어떤 작업과 휴식의 배합이 적합한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여성과 소설의 문제의 일부이다.
제5장
현존하는 여성작가들은 더 이상 소설만을 쓰지는 않는다. 고고학, 미학 분야의 저술이 있는가 하면, 시, 희곡, 비평이 있고, 역사, 전기 등도 있다. 소설을 쓴다고 해도 여성작가들은 더 이상 소설을 자기 표현의 도구가 아니고 예술로 다루고 있을 것이다.
화자는 최근 여성작가의 소설을 한 권 서가에서 꺼낸다. 그것은 메리 카마이클(Mary Carmichael)의 『인생의 모험 Life's Adventure』이라는 소설이다. 그녀의 문체와 구성은 무엇인가 숨가쁘고, 너무 많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 같고, 의도적으로 독자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 같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일이 이 소설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클로에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문학사상 여성은 종종 남성과의 관계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서로 질투하는 관계라든가, 마음을 서로 털어놓는 사이라든가, 혹은 남성의 눈으로 바라본 여성이라든가... 이런 식의 여성 재현은 여성의 극히 일부를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여성들끼리의 우정이 다루어질 뿐 아니라, 그들은 같은 실험실에서 의학실험을 하는 동료로서, 그들의 우정의 내용은 일을 매개로 더욱 풍부해질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만약 문학 속의 남성들이 여성의 연인으로의 기능만 한다면 얼마나 단조로울 것인가. 그들은 아마 대개 오셀로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메리 카마이클이 그린 여자 친구의 눈으로 본 일하는 여성의 모습은 유사 이래로 그려진 적이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다른 세계를 향하여 손을 뻗는 여성들은 지금까지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도로 발달한 능력들을 여성 전체의 섬세한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끌어들이는 데 사용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여성의 가능성에 근거해서만 여성을 칭찬하기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일이 너무나 없다. 그러나 여성들은 역사상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남성들에게 안식처를 주었으며, 여성 나름의 창조성과 차별성으로 그들에게 생기와 자극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유사 이래 여성들이 거주하던 실내의 공간에서는 여성의 개성에서 우러나오는 뚜렷한 특징들이 배어 있다. 이런 여성들의 독특한 특징들이 발휘되지 못하고, 여성의 해방이라는 것이 남녀를 똑같이 만드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이것은 인류의 손실이 될 것이다.
메리 카마이클(현재와 미래의 여성작가)이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다. 소설가의 관찰대상은 중상류 계급의 여성만은 아니다. 고급 매춘부와 창녀들의 삶도 여성의 눈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런 일이 제대로 수행되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른지도 모른다. 메리 카마이클은 성적 야만성의 유산인 “죄” 앞에서 자의식에 의한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의, 지금까지 기록된 적이 없는 삶을 기록하는 것도 여성작가가 할 일이다.
여성작가 자신의 영혼의 깊이와 부박함, 그 관대함과 허영을 성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상품들이 쌓여있는 가게의 이야기도 안데스 산맥의 눈 덮인 봉우리나 바위투성이 골짜기만큼이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또한 가게의 카운터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여점원에 관한 진실된 이야기도 나폴레옹의 150번째 전기나 키이츠에 대한 70번째 연구보다 훨씬 흥미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여성작가는 남성들의 허영심에 대하여 씁쓸함 없이 웃을 수 있어야 하고, 남성들에 대한 풍자적 시각으로 희극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미래의 메리 카마이클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공상을 떠나 다시 현재의 메리 카마이클이 써놓은 소설을 보면, 그녀가 천재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녀는 10년 안에 폐기 처분될 소설을 쓰고 있는 영리한 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을 더 이상 자신의 반대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들에 대한 분노를 토로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감성의 영역은 광범위하고도, 적극적이고 자유롭다. 그녀는 지금까지 기록된 일이 없는 영역들을 찾아내어 기록한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쓰고 있지만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은 잊은 채로 쓸 수 있는 여성작가의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작가로서의 완성도에는 향상의 여지가 많이 있다. 그녀는 마치 장애물을 넘고 있는 경주마와 같다. 경마장 옆에 도열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너는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어. 잔디밭에 들어올 수 없고, 소개장이 없으면 도서관도 이용할 수 없어!”라고 외쳐댄다. 만약 그녀가 도약에 집중하지 않고, 군중들의 야유에 대해 욕을 해 주려고 멈춘다면, 그녀의 노력은 끝장이다. 그녀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앞으로도 수없이 남아 있다. 그녀가 아직도 감당해야 하는 이 많은 한계를 고려한다면, 그녀가 이룩한 성과는 상당한 것이다.
앞으로 그녀에게 백년간의 세월을 주고, 그녀 자신의 방과 일년에 500 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해 준다면, 그리고 그녀가 작품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을 빼버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면, 그녀는 보다 나은 책을 쓸 수 있을 것이고, 아마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6장
다음날 런던의 아침은 소설의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듯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자는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젊은 남녀 한 쌍을 보고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남녀의 결합이듯이 모든 인간 안에는 남녀의 양성이 있으며, 그 두 가지 성이 한 개인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최상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코울리지(Coleridge)가 위대한 마음은 자웅동체의 성격(androgyny)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자웅동체적 마음은 특별히 여성에게 동정적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성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도 성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가 없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있는 무수히 많은 남성들이 쓴 여성에 관한 책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아마도 이것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결과이리라. 지금껏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남성의 권위가 도전을 받자 남성들은 과잉반응을 하며 남성의 자아를 주장하려 드는 것이다.
남자 작가 A씨의 소설에서 화자가 발견한 특징이 아마도 이런 현상의 일례일 것이다. 여성들의 글을 읽은 후에 A씨의 글을 보니, 그것은 너무도 직선적이고 자유로웠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읽어내려가자, 곧은 막대의 그림자가 페이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I"(나)라는 글자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여성 피비(Phoebe)는 남자주인공 앨런(Alan)의 그림자가 닿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앨런은 피비에게 열정을 가진다. 그리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앨런의 강한 자아 때문에 마치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너도밤나무 아래서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듯이, 그 관계는 지루하게 되었다. 여성의 자발적이고 즐거운 반응이 없으므로 관계는 반복되지만 지루할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쾌락을 위하여 사랑을 나누지만, 앨런은 항의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만약에 여권운동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시작되었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 남성성은 자의식이 지나치게 됨으로써 남성작가들이 자신의 두뇌의 남성반구만을 사용하여 글을 쓰고 있다. 이러한 글은 암시성이 없고, 폭발적으로 다른 생각들을 생산해 내는 풍요로움이 없다. 골즈워디(Galsworthy)나 키플링(Kipling)의 글은 여성성이 전혀 없는 글로써 여성의 상상력에 전혀 호소하지 못한다. 요즘 이태리에서 나오는 문학에서도 타협을 모르는 남성성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반면에 셰익스피어, 키이츠, 쿠퍼(Cowper), 램(Lamb), 코울리지 등은 양성적 마음을 가졌었다. 밀튼(Milton)이나 벤 존슨(Ben Jonson)은 지나치게 남성적이었다. 워즈워드(Wordsworth)나 톨스토이(Tolstoy)도 그렇다.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여성성이 다소 많은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쓸 때에 작가는 자신의 성을 인식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만을 강조하거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정의감에 호소해서도 안 된다. 단지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혼인을 고요히 축하해야 한다.
이제 강연을 마치면서 화자는 청중들의 두 가지 비판을 예견하여 그에 답한다. 첫째로 어느 성이 작가로서 더 우수하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우열을 가리는 것은 학교시절 운동시합에 이겨서 상을 받는 의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성품의 재능의 가치를 설탕이나 버터의 무게를 재듯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청중들은 화자가 작가가 되는 데 있어서 물질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 시인들의 경우에도 경제력이 없는 시인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지 않다. 19세기의 저명한 시인들 중 키이츠, 브라우닝, 로제티만이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중 키이츠만이 재정적 기반이 없었다. 그가 젊어서 불운하게 죽게 된 것은 그의 가난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청중들은 또한 도대체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나도 교육받지 못한 대부분의 영국 여자들처럼 책을 엄청나게 읽는데, 역사책에는 전쟁에 관한 얘기가 너무 많고, 전기는 위대한 남성에 대한 것이 너무 많고, 시는 불모성이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쓴다는 것은 삶의 사실성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사실 여성들은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이 너무 없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은 달라졌다. 1866년 이후에 두 개의 여자대학이 존재해 왔다. 1880년 이후에는 기혼녀가 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참정권이 주어졌다.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상당수가 되었고, 앞으로는 아이들을 가진다고 해도 10명~12명이 아니고 2~3명씩 가지면 시간적 여유가 생길 것이다.
현재의 조건에서 당장 여성시인이 태어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모두가 역경 속에서라도 부지런히 글을 쓴다면, 그 전통이 쌓여 언젠가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여성시인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여성과 소설”이라는 강연주제를 받고서, 울프는 이것을 평범한 여성소설의 사례기술에 국한시키기를 거부한다. “여성과 소설”의 관계를 설정하는 토대들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울프는 인식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울프는 사실주의 소설의 지나친 유물론적 경향을 비판하였던 작가이다. 사실주의자들이 마치 한 인물의 방에 늘어놓은 물건, 그의 집, 그의 외모, 사회와의 관계로 그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반발하고, 한 인물의 실체는 그의 심리와 연상작용의 추적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음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 증명해 보인 작가가 바로 울프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성과 소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제안으로 일년에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으면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이 갖추어진다는 너무나도 유물론적 논의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의 칼리지와 여성의 칼리지에서 나오는 식사 메뉴의 차이로 두 영역의 상대적 부와 빈곤을 판단하고, 그것이 남녀의 정신생활에 가져오는 차이를 기술하는 또 하나의 충격요법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문학을 생산해내는 다른 모든 조건들을 차치하고 너무나도 근본적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여성의 문학환경을 역설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의 궁극적 목표는 시적 도약이지만,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질적 신체적 토대임에 대한 울프의 현실인식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의 영국에서도 노동자 가운데 문인이 나온다는 것은 아테네의 노예가 지적인 자유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울프의 논의가 이러한 인식의 토대를 확인해 준다.
울프는 여성을 억압하고 지적활동의 의욕을 상실케 하는 사회적, 문화적, 지적 편견들도 물적 결핍 못지 않게, 여성의 문학적 성취를 저지해 온 요소임을 지적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에 서서, 울프는 과거의 여성들에 비하여 훨씬 많은 정치적, 재정적, 지적 권한을 갖게 된 여성들의 자기개발과 자기증명의 의무를 역설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여성적 특징의 장점을 잃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울프가 생각하는 남녀평등이란 여성의 남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울프는 여성적 흥미를 하잘 것 없다고 폄하하는 남성 위주의 가치판단 체계의 수정을 요구한다. 여성의 신경, 여성의 심리, 여성의 신체도 남녀가 같이 사는 사회 안에서는 제도화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누구도 구사한 적이 없는 독특한 연상의 연쇄로 구성된 이 에세이는 여성의 신경구조와 여성의 체질에 맞는 글쓰기를 울프 스스로가 개발하고 있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울프는 남성의 문체를 모방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여성작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거리낌없이 낼 수 있었던 제인 오스틴의 인식의 자유로움을 높이 평가한다.
울프의 궁극적 목표는 그러나 여성적 자아에 대한 인식을 극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성적 해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성을 인식하지 않고, 한 인간 안에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울프가 생각하는 이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울프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문학은 결코 여성의 성차별을 고발하는 문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울프는 성차별로 인하여 생긴 작가의 불만, 상처, 좌절 따위가 작품에 스며드는 것조차도 그것이 문학의 완결성을 손상한다는 이유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몰개성의 미학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 울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에서 승화라든가 백열과 같이 작가의 인식이 어떤 정련 과정을 통하여 배출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조야한 교훈적 문학이라든가 사회문제 소설 등이 우리에게 미학적 저항감을 주어 우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는 예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작품의 깨어진 틈 사이로 울려나오는 시대적 모순이나, 작가의 개인적 갈등을 특히 흥미롭게 주시하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매끄럽게 갈등의 흔적이 봉합된 작품이란 오히려 흥미를 잃게 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요구는 문학 창작에서 물적, 사회적 토대의 근본적 중요성을 역설한 울프 자신의 입장에 대한 모순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이것이 여성들의 문학이 지금까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변명이라면, 수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정규교육의 결핍이라는 역경을 상상력의 기발한 자유로움으로 대치하고, 신경증의 증세를 문학적 천재성으로 바꾸는 울프식 연금술을 그녀가 다른 여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충고는 귀기울여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저 자 버지니아 울프(1882∼1941)
1907년 화가 던컨 그란트, 소설가 E.M.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와 블룸스베리 클럽 결성. 작품으로 『제이콥의 방』 『자기만의 방』 『세월』 『출항』 등.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이 글은 1928년 울프가 뉸햄(Newnham)과 거튼의 오타(Odtaa at Girton) 등 두 여자 칼리지의 예술회(Arts Society)에서 행한 두 차례의 강연문을 편집, 증보한 것이다. 1928년이란 해는 울프가 이미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등대로 To the Lighthouse』(1927)라든지 『댈로웨이 부인 Mrs Dalloway』(1925) 등의 소설을 출간한 후였고, 『올란도 Orlando』가 출판된 해다. 펭귄판으로 112페이지밖에 안 되는 이 저술이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용되는 빈도는 울프의 다른 모든 저술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만큼 이 저술은 영미문학 페미니즘의 고전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물론적 페미니즘이나, 여성적 글쓰기, 성적 정체성의 형성, 인격적 이상으로서의 양성성 등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개념들이 이 얇은 책 속에서 싹트고 있다.
울프는 여자이기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에서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거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Leslie Stephen)의 장서를 접하면서 지적 성장을 했는데, 자신의 날뛰는 상상력을 따라가며 자유자재로 펼쳐나가는 울프의 논의를 보면, 그녀가 자신의 교육적 핸디캡을 오히려 자유로운 창의력으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을 펼쳐나가는 정도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것이 오히려 신선한 직관과 민감한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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