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이 강하고 아름다운 스카렛은 자신이 사랑하는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애슐리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곧바로 스카렛은 애슐리에게 보복하는 마음으로 마음에도 없는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여 애슐리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애슐리를 잊지 못한 스카렛은 찰스와의 잠자리도 거부하며 신혼생활을 보내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찰스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다. 스카렛은 고향 테라로 돌아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장을 복구하고자 이제껏 해보지 못한 온갖 어려운 일을 겪으며 살아간다. 테라의 농장에 부과된 300불의 세금을 마련하지 못한 스카렛은 레드 버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돈을 빌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동생의 애인 케네디가 사업에 성공하여 부유하다는 걸 알고 그를 유혹하고는 그와 결혼하여 테라의 농장을 경매로부터 구한다.
전쟁이 끝나고 애슐리가 생환하자 스카렛은 그에게 멕시코로 도망가 함께 살자고 간청한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애슐리의 거절로 절망에 빠지고, 남편 케네디도 죽자 레드 버틀러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와 세 번째 결혼을 감행한다. 아이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스카렛은 또 다시 애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고, 이웃에게 둘의 키스 장면이 목격되면서 남편 레드와 파경을 맞게 된다. 스카렛은 레드에게 이혼 당하고 아이마저 죽자 절망에 빠지지만 애슐리를 기다리며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멜라니가 죽자 애슐리는 스카렛에게 그의 사랑은 아내 멜라니 뿐이라며 그녀를 떠난다. 그러자 스카렛은 다시 레드를 찾지만 레드마저도 그녀를 떠난다. 마침내 자신이 레드를 진정 사랑했다는 자각을 하게 된 스카렛은 떠난 레드를 기다리며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 것”이라며 의지를 다진다...(요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 지음
제1부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1년 4월의 어느 눈부신 오후였다. 평소부터 남자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의 스카렛은 부친의 대농장 테라 포치에 깃든 시원한 그늘에서 돌턴 가의 쌍둥이 형제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칠 만큼이나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쌍둥이는 바로 개구쟁이 스튜어트와 브렌트였다. 그러나 스카렛에게 있어 그 멋진 형제들은 아무리 보아도 사랑하는 애슐리에게 견주어 평가할 수 없었다. 뭇 남성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이지적인 스카렛 오하라가 사랑하는 사람은 성격상으로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매우 내성적인 애슐리였다. 애슐리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항상 성격 차이로 고민하는 형편이었다.
쌍둥이 형제는 내일 밤에 있을 월크스 가문의 댄스 파티에서 애슐리와 찰스의 누이동생인 멜라니와의 약혼소식이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간 스카렛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두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독점의식이 강한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미 60세가 넘었지만 아직도 로맨틱하고 게다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제랄드 오하라는 전부터 스카렛이 애슐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스카렛으로 하여금 애슐리를 단념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애슐리와 멜라니가 결혼을 한다는구나.”라고 말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던 스카렛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괴로움이 야수의 이빨처럼 그녀의 마음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나의 사랑하는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하다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애슐리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 그럴 거야. 나는 항상 숙녀답고 온순하며, 얌전하게만 행동했으니까, 내가 자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로 알았음이 분명해. 결국 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으로 단념해 버렸는지도 몰라. 그렇다! 내가 브렌트나 스튜어트 따위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거야! 오!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한 난 얼마나 바보일까! 그렇다, 그에게 내 마음을 알려줄 방법을 찾아야 돼. 그가 내 마음을 알게 되면 멜라니 따위와 결혼할 리 없지. 물론이야!”
스카렛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 결혼의 제단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일이 이 지방에서는 얼마든지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애슐리의 약혼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그렇다! 아직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다! 멜라니를 떼어놓고 사랑하는 애슐리를 독점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에서 곧 심장이라도 멎을 것 같은 벅찬 감동에 사로잡힌 스카렛의 표정은 이상하리 만큼 만족스럽게 변해갔다.
일단 마음속으로 애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소란을 피우며 가장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의상을 준비해 입었다. 그 이유는 물론 애슐리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여 파티장인 존 월크스 산장에 도착한 스카렛은 가족들과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주인인 존 월크스가 직접 스카렛이 자기의 팔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도록 하기 위하여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올 정도였다. 그때 동생 스웰렌의 애인인 프랭크 케네디가 다가와 스웰렌의 팔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고 스카렛은 질투를 느꼈다. 단순한 질투였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좋아하는 감정을 보이고 있으면 무조건 질투의 불길을 태우는 게 바로 그녀의 성격이었다. 이윽고 스카렛은 인근에서 어깨를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지주이며 40이나 된 케네디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생각해보고는 그에게 매력 있는 미소를 살짝 지어 보여 주었다.
주인인 존 월크스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스카렛은 사람들 가운데서 애슐리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현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시선을 집안으로 정원으로 재빨리 보내고 있던 스카렛은 문득 낯선 사나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나이는 홀 안의 구석진 곳에 홀로 서서 냉정하고도 거만한 태도로 스카렛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어느덧 파티는 무르익어 갔고 애슐리와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한 스카렛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여자들은 모두 밤에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낮잠을 잤고, 남자들은 전쟁 이야기로 열을 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스카렛의 아버지는 물론 스튜어트와 돌턴, 애슐리 등이 있었으며, 특별한 사나이로 보이는 레드 버틀러만 입을 다물고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멸시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은 허무맹랑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듯이 레드 버틀러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여러분이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과 싼 임금을 지불하며 기꺼이 북부를 위하여 싸울 수천의 사람들과 공장과 제철소, 조선소와 탄광, 철광까지도 보고 왔습니다. 그 모든 게 남부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남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목화와 노예, 그리고 교만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달도 채 가지 못해서 우리들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 청년이 나섰다. “버틀러, 너무 뽐내지 말아! 사관학교에서 퇴교 당한 주제에 무얼 안다고.” 그 순간 레드 버틀러의 눈빛에 혐오와 분노가 끓었고 앞에 나선 청년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만큼이나 당당한 기세였다. 다음 순간 마음을 안정시킨 레드 버틀러는 애슐리에게 도서관을 보여 달라며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기세가 등등해진 젊은이가 당장 버틀러를 쫓아가 결투라도 신청할 기세를 보이며 흥분하자 애슐리가 조용히 타일렀다. “이것 봐, 자네 오늘 운이 좋았네. 그는 사격의 명수야. 자네 따윈 어림도 없을 걸세.” 숨어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온갖 생각을 하던 스카렛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어렸다. 애슐리와 말을 할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스카렛은 조금 전에 있었던, 아니 느꼈던 레드 버틀러의 시선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두 개의 탐스러운 젖가슴은 물론 그 훨씬 아래의 가장 은밀하고 수줍은 삼각지대까지도 온통 드러내놓고 있는 상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던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스카렛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계단에 멈추어 섰다. 온순한 눈을 한 풍채 좋은 청년 찰스였다. 그는 여자에게 수줍음을 타기 때문에 스카렛이 돌아보자 얼굴을 붉혔다. 스카렛은 평소 쾌활하고 남자답지 못한 청년인 찰스와는 인사 정도만 나누며 지내왔으나 오늘은 자신이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끌고 싶다는 속셈으로 다른 날과 달리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머, 찰스 해밀턴! 역시 언제나 훌륭하시군요. 분명히 고의적으로 애틀랜타에서 가엾은 내 가슴에 상처를 주려고 오신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찰스는 흥분으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생각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가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스카렛의 마음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저. 스카렛? 오늘은 꼭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내가 2층에 갔다가 돌아올 동안 기다려 주세요. 찰스, 만일 다른 여자와 놀러 가면 안돼요. 난 아주 굉장한 샘쟁이니까요. 아시겠어요?” 찰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이 전쟁에 나가는 동안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이어서 자신은 스카렛을 사랑하고 있으며 결혼해달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결혼? 스카렛은 주저앉고 말았다.
“네.” 온통 신경이 애슐리에게만 쏠려있는 스카렛은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여전히 애슐리와 멜라니가 이야기하고 있는 곳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일이, 그런 일들이 지금 애슐리를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끌어들이는 스카렛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밖으로 나가던 도중 갑작스레 스카렛에게 이끌린 애슐리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빈 방에 들어섰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몸까지 떨며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잠시 동안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든 남자들에게서 자신을 인정받고 싶단 말이오? 그렇다면 말하지. 스카렛 당신은 이미 옛날부터 내 마음을 빼앗고 있었어. 그건 당신도 잘 알 거야.” “애슐리.
말해 줘요. 말해야 돼요! 아,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정말로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나요?”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스카렛! 그건 본심이 아냐!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은 후에 당신을 미워하게 될 거야. 또한 그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나도 미워질 거구.” “애슐리,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어요. 좋아하고 있지요? 분명히 그렇지요?” “스카렛, 밖으로 나가지 않겠소? 나는 멜라니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그렇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요?” “그녀는 나와 닮은 점이 아주 많아. 내 피의 일부분이며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있어.”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애슐리가 말했다. “난 해선 안 될 말을 그만 하고 말았어.” “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증오하게 될 거예요. 비열한….” 그 순간, 부드럽게 손을 내민 애슐리의 뺨으로 스카렛의 손바닥이 매섭게 올려졌다. 애슐리는 조용히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갑작스러운 공허에 멍하니 서 있는 스카렛을 뒤로 하고 조용히 방을 나가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마치 애슐리에게 배반당한 것처럼 느낀 스카렛은 꽃병을 벽난로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병이 산산 조각나는 순간 아무도 없어야 할 방의 벽난로 뒤의 긴 의자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전쟁인가요? 이건 너무하시는군요.” 다름 아닌 레드 버틀러였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그녀가 차갑게 쏘아주었다. “그렇지만 엿듣는다는 건 가끔씩 매우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더군요.” “당신은 신사가 아녜요!” “지당한 말씀. 아가씨도 역시 숙녀는 아니시고.” 레드 버틀러의 말은 스카렛에게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만일 이 남자를 죽여 버릴 수 있다면. 그렇지 않아도 애슐리에게 그토록 무참하게 당했는데…. 그녀는 버틀러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을 탁 닫았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모두들 아우성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오직 두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애슐리와 그 옆에 안타깝게 올려다보며 서 있는 멜라니의 온화한 눈빛을 스카렛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자신을 거절했던 애슐리가 멜라니와 격렬하게 포옹하며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스카렛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때 실로 엄청난 생각이 스카렛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찰스 해밀턴을 이용할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찰스와 결혼한다면 애슐리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 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될 것이며 멜라니 역시 오빠인 찰스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찰스와 결혼한다면 괴로워할 것이다. 그것으로 내 애인을 빼앗긴 복수는 물론 스튜어트나 브렌트에게도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질투와 원한이, 그리고 짙은 시샘에 얽힌 스카렛은 찰스 해밀턴과 가급적 빨리 결혼해서 모두에게 복수해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스카렛 오하라는 찰스 해밀턴의 아내가 되었다.
제2부
레드 버틀러의 생각과 판단이 정확했음을 증명하듯 바야흐로 남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고 북군에게 연일 패퇴하고 있었다. 많은 전사자들의 명단이 호외를 통하여 거리에 물결쳤고, 그 소식을 접하고 비통해하는 가족들의 슬픔이 어디에서고 그칠 줄 몰랐다. 그 가운데 스카렛 오하라에게도 한 통의 전사통보서가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스카렛 오하라는 마음을 결정지은 지 2주일 만에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다시 2개월도 못되어 그의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녀의 짧은 신혼 생활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첫날밤부터 남편 찰스에게 “내 옆엘 오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정말이에요! 저리가세요. 날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대했던 그녀였다.
미망인이 된 스카렛은 주위의 모든 가족들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스카렛은 남들을 의식해서 검은 상복을 입고 슬픈 표정을 지어야 된다는 것에 그야말로 질식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당장에 모두 벗어버리고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사교계에 나가 뭇 남자들과 사귀고 싶었다. 자신이 어찌 미망인이란 말인가. 어느 날 스카렛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권유로 슬픈 마음을 위로 받기 위해 사반나나 애틀랜타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 가면 다른 사람이 아닌 멜라니가 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 멜라니가 거기에 있다면 그리운 애슐리가 그곳으로 오지 않겠는가.
스카렛이 여행 겸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고모님 댁으로 온 그 해 한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전쟁 중인 장병들을 돕기 위한 바자회에 참석한 스카렛은 낯선 사나이를 발견하였다. 그는 검정색 고급 양복을 입었고 키가 컸으며, 가까이에 서 있는 사관들에 비해서 눈에 뛸 만큼 잘 생긴 사내였다. 태도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만큼 상대를 무시해 버리는 데가 있었으며, 스카렛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대담한 시선에서는 어떤 악의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그 사내가 다가오자 스카렛은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그 사나이가 바로 레드 버틀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이렇게 기억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오하라 양.” 깨끗하고 투명한 목소리로, 묘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느릿한 그 말은 짙은 찰스턴 사투리였다. 지난날의 부끄러움 때문에 당황하고 있던 스카렛은 그때 마침 멜라니가 다가오자 고마운 마음을 느낄 정도였다. “어머, 레드 버틀러 씨 아니세요? 찰스턴에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멜라니가 버틀러를 반갑게 맞이했다.“월크스 부인. 물건을 좀 들여왔습니다.” “어머, 그럼 선생께서 저 소문의 주인공 버틀러 선장이셨군요. 저 적군의 봉쇄를 뚫은.” 그때 스카렛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자 멜라니가 스카렛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때 레드 버틀러가 말했다. “여기는 정말 덥군요. 미스 오하라가 정신을 잃을 정도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창가로 모실까요?”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스카렛의 음성이 너무도 거칠었기 때문에 멜라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이 사람은 이제 미스 오하라가 아니에요. 해밀턴 부인입니다. 저의 언니예요.” 하고 말했다.
바자회에서는 상이군인에게 기부할 물건을 모으고 있었다. 버틀러가 순금 담배 케이스를 바구니 안에 넣는 것을 보며 스카렛은 자신이 상복을 입고 왔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기껏해야 손에는 찰스에게서 받은 결혼반지 하나밖에는 없었으니까. 스카렛 앞으로 패물들이 담긴 바구니가 다가오자 스카렛은 갖은 게 없다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멜라니는 결심한 듯 자신의 결혼반지를 빼어 바구니에 넣었다. 그러자 버틀러가 허리를 굽혀 존경의 찬사를 보내는 광경을 바라보던 스카렛은 찰스와의 결혼반지를 얼른 빼어 바구니에 넣었다. “아, 역시 훌륭한 부인이십니다.” 레드의 찬사를 듣고 있던 스카렛의 마음은 끓어올랐다. 솔직히 그와 한번쯤 교제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짐짓 모든 감정을 숨긴 채 그를 의식적으로 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드 버틀러에 대한 소문이 점차로 나빠지고 있었으나, 스카렛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면서도 그를 물리치기 싫은 게 바로 그녀의 심정이었다. 레드는 최근에 와서 이상할 만큼 스카렛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런가 하면 가끔씩 커다란 선물까지도 그녀에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레드는 몇 겹이나 되는 엷은 종이로 포장된 최신형의 보닛을 선물했다. 스카렛은 새로운 의상이나 모자 같은 걸 손으로 만져 보기는커녕 구경하는 것조차 구속을 받아 오던 터여서 아름다운 보닛을 보자 거의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스카렛은 그 모자를 사겠다고 레드에게 제안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에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담록색이 어울리는 사람은 부인뿐이니까요. 부인의 눈빛을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은 줄 아십니까?” “어머!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이 모자를 맞추셨나요!” 스카렛의 놀라움은 그야말로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만큼이나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이죠. 아, 너무도 귀엽군, 견딜 수 없을 만큼이나, 스카렛.” 그렇게 말한 레드는 재빨리 몸을 굽혔다. 그러면서 그의 콧수염이 가볍게 그녀의 볼을 스쳤다. 그런 일이 있는 가운데 어느덧 스카렛의 마음에서는 이상스러울 만치 레드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멋지고 건방진, 그리고 조롱하는 것 같은 사나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점차 치열해지고 있었다. 사태가 몹시 위험하게 된 남군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전사자를 냈다. 아울러 이 사실은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고 초조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카렛과 멜라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들은 신문사 앞 광장에서 명단이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두 여인은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한 남자의 신변이나 안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멜라니가 인쇄물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빨리, 멜라니!” 스카렛의 외침이었다. 그녀는 지금 조바심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애슐리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언니, 이렇게까지 애슐리 걱정을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멜라니의 말이었다. 자신과는 분명히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토록이나 애슐리 걱정을 해주는 스카렛의 마음이 멜라니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고마웠던 것이다. 멜라니로부터 그런 감사의 말을 듣는 스카렛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듯하더니 곧 아주 굳은 표정으로 바뀌며 그 시선을 목적 없이 다른 곳에 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령으로 진급한 애슐리가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이번 크리스마스에 특별히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집으로 온다는 소식을 받고 멜라니와 스카렛은 기차역으로 나갔다. 멜라니의 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스카렛은 오히려 그보다 몇 배나 더 행복한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이윽고 애슐리가 기차역에 내리자 멜라니는 남편 품에 안겨서 주위를 잊은 듯이 뜨겁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난 뒤, “참, 스카렛도 같이 나왔어요.”라고 말하며 뒤에 서 있는 스카렛을 가까이 끌었다. “애슐리! 오, 애슐리.” 스카렛은 어느 틈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처로울 만큼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힘껏 안기고 싶었다. 그리고 목놓아 울며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이 그녀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녀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여러 감정들을 절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버틸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은 애슐리가 다시 버지니아의 전선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스카렛은 이번 휴가를 통하여 애슐리가 과연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으며, 애슐리와 영원히 작별할지도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아래층에서 2층 침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오는 애슐리의 모습이 보였다. 스카렛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혼자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 나는 마침내 몇 분 동안만이라도 그를 독점할 수가 있다.’ “애슐리.” 그녀는 선뜻 애슐리에게 다가섰다. 애슐리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해서라도 그가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기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애슐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는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겠어. 나를 대신해서 멜라니를 좀 돌봐 줘. 부탁이야.” 그 순간 스카렛의 마음속에서는 강한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애타게 기다리며 고대했던 작별을 앞두고 멜라니 얘기를 꺼내다니! “네, 약속하겠어요. 그런데 애슐리, 애슐리! 난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난 당신을 이렇게 보낼 용기가 없어요.” 애슐리는 몸을 굽혀 스카렛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이마에다 가볍게 입술을 대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스카렛! 당신은 매우 강하고 아름다워! 그리고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아름다워!” 스카렛은 마치 꿈결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키스와 두근거리는 환희로 얼굴이 상기되어 속삭였다. 그 순간 스카렛의 마음에는 애슐리에게서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사랑한다’라는 마술적인 고백을 기대하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애슐리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카렛은 얘슐리에게 매달려 애타게 그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싶었다. “안 돼, 스카렛, 이러면 안돼요.” 목을 휘감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스카렛의 손목을 아플 만큼이나 꽉 쥐며 달래는 애슐리의 말이었다.
여자란 그런 것일까. 갑자기 스카렛이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열정적으로, 흥분에 가득 찬 어조로, 그의 품에 안겨 애절한 표정으로 흐느끼듯 말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저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어서 찰스와 결혼했던 거예요. 애슐리.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먼 버지니아까지도 한걸음에 가겠어요. 당신을 위하여 요리를 만들고 장화를 닦겠어요. 말도 보살피구요. 애슐리. 그러니 저를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저는 모든 생애를 그 한마디에 걸고 살아가겠어요.” 애슐리는 결국 그 말을 스카렛에게 해주지 않았다. 다만, “안녕.”이라고 작게 말했을 뿐이었다.
제3부
전쟁은 남군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스카렛은 지원병 틈에 섞인 고향의 하인들로부터 테라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 제랄드 오하라가 군대에 지원했으나 받아 주지 않아 대단히 화가 났으며 결국은 하인들이 대신 나왔다는 것이다. 하인들과 헤어진 그녀는 더욱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에서 복잡한 피난민들 사이를 헤치며 무작정 걷다가, 마침 말끔한 차림으로 마차를 몰고 그곳을 지나가는 레드 버틀러를 만났다. 스카렛을 마차에 태우고 레드가 말했다. “그러니까 모자를 가지고 갔던 날, 내가 그것도 잠깐 키스했을 뿐, 그 후 다시는 하지 않은 까닭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뇨, 난 조금도….” “그렇다면 스카렛, 당신은 정말이지 귀여운 아가씨라고 할 수 없군요. 정말 귀여운 아가씨라면 남자가 자기에게 키스해 주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머지않아 당신에게 키스할 테니까요. 당신은 그것을 원하게 될 테고,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오.” 레드의 말에 화가 난 스카렛은 마차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레드는 태연하게 말을 몰았다. “내가 그 후로 당신에게 한 발짝도 접근하지 않은 이유는 스카렛이 좀더 여자다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키스를 해 봐도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나라는 사람은 자신의 쾌락에 대해서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죠. 즉, 난 어린애하고는 키스하고 싶지 않다 그겁니다.” “…!” “또 한 가지 이유는 당신의 마음에서 존경할 만한 애슐리 월크스의 모습이 지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이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잠시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또다시 먼저 말문을 연 건 레드였다. “나도 당신과 애슐리의 일을 잘 알고 있소. 우선 당신은 지금도 그 사람에 대해서 사춘기 소녀 같은 로맨틱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소. 그 사람은 그걸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거요. 더구나 월크스 부인은 지금 아무런 사실도 모르고 있소. 결국 당신네들 둘이 숨기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한 가지 솔직하게 모를 일이 있소. 그건 다름 아닌 저 존경하는 애슐리 선생께서 자신의 순결한 영혼이 파멸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당신에게 키스를 했을까 하는 점이오.” “…!” 그녀는 대답 대신 돌처럼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돌렸다. “흐음. 그러고 보니 키스를 했군요. 하지만 언젠가는 잊게 될 겁니다. 그때쯤 나는 당신에게….” 그 순간 스카렛의 얼굴은 붉게 변하고 말았다.
모두가 피난을 가기 위하여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곧 애틀랜타에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스카렛은 고향 테라로 가고 싶었으나 출산을 앞둔 멜라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곧바로 테라로 갈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고 집에 남은 것은 멜라니와 스카렛 그리고 하녀뿐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떠나고 텅 빈 집으로 들어가는 스카렛의 마음속에서 다시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미웠다. 멜라니가 미웠고 태어날 아기도 미웠다. 스카렛은 멜라니 방에 가서 문을 열고 햇살이 환희 비쳐든 방 안을 살펴보았다. 멜라니는 스카렛의 손을 힘 있게 잡으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내 아이를 맡아 주시지 않겠어요?” 당황스러울 만큼 간절히 애원하는 멜라니에게 스카렛은 어쩔 수 없이 “약속할게요.” 하고 대답해 주었다.
멜라니는 자그마한 사내아이를 낳았고, 스카렛은 두려움 속에서도 분명히 아기를 받아 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일이 남았다. 빨리 이곳 애틀랜타를 떠나지 않으면 자칫 북군의 발에 짓밟히고 말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 문제로 고민하던 스카렛은 결국 레드 버틀러를 생각해냈다. 스카렛의 연락을 받은 레드 버틀러가 완전무장을 한 채 마차를 몰고 집 앞에 나타났다. 테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고 스카렛을 만류하던 레드는 그녀가 완강히 고집을 꺾지 않자 스카렛을 부둥켜안고는 다정스럽고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아, 울지 말아요.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애틀랜타를 벗어난 마차가 테라로 가는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레드는 남부를 위하여 자신은 군에 자원할 예정이라며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저 혼자 가다가 북군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아니오. 당신은 무사히 갈 수 있을 거요. 만일 당신이 잡히면 하늘이 무너질 테니까.” “어리석어요, 레드. 이 위험한 시기에 군대에 들어가다니!” “글쎄요, 총에라도 맞으면 그 어리석음이 깨달아질지 모르겠소.” 과연 레드의 표정은 지금까지 전혀 스카렛이 볼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다. 그는 진지했다. 그가 잠시 동안 스카렛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스카렛, 며칠 전 밤에는 못할 소릴 했는데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소.” 스카렛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레드의 팔이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둘렀다. 따뜻한 감정의 조수가 온몸에 흐르며 시간도, 공간도, 그 어떤 상황도 지금의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완전한 키스를 그녀에게 하고 있었다. 온 밤을 지새울 수 있을 만큼 차분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뜨거운 키스였다. 정열적인 키스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그녀의 마음에 불현듯 서늘한 의식이 되돌아왔다. 그는 수치스럽게도 길가에서 애정을 구하며 자신을 모욕한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스카렛의 마음은 또다시 분노와 증오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쳤다. “무정한 사람! 당신은 졸렬해요.” “사랑스런 새침데기 아가씨.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나요?” 스카렛은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던 자신의 여자로서의 욕망을 깨닫게 만들어 놓고선….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서 스카렛에게 주었다. “이걸 받아요. 그리고 말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며 쏘아요. 그래야 테라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후 레드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곧 떠나야 된다는 생각에서 레드가 주고 간 권총을 힘 있게 잡아 보았다. 그건 곧 각오이며 결심이었다.
사방은 이미 짙은 어둠에 깔려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빈 집인가. 모두가 떠나고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스카렛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현관 문 뒤의 그늘 속에서 사람이 나타나더니 층계 맨 위에 유령처럼 서 있는 것이다. “저예요, 스카렛이 돌아왔어요!” 하고 소리쳤다. 그 사람은 아버지 제랄드 오하라였다. 제랄드는 “딸아!” 하고 간신히 그 한마디만 했다. 스카렛은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 들며 ‘몹시도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 스카렛은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그렇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스카렛은 유모에게 다그쳤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유모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님께서는 병을 간호하다가 전염이 되어 어제 밤에 그만….” 스카렛은 그만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누가, 그 누가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은 돌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헌신하기만 나의 어머니가 왜 이런 죽음을 맞아야 하는가.
북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취는 너무도 비참했다. 집 안에 양식은 남아 있지 않았고 밭의 곡식도 말발굽에 짓밟혀 버려지고 말았다. 너무도 참담한 스카렛은 밭을 향해 뛰었다. 무밭을 발견한 그녀는 갑자기 시장기를 느끼며 무 한 개를 뽑아 스커트 자락에 흙을 닦았다. 그러고는 입으로 가져갔고, 동시에 눈물이 날 만큼 매운 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무가 위 속에 들어가자 지금까지 텅텅 비어있던 속에서 무서운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땅에 쓰러져 먹은 무를 모두 토해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마룻바닥에서 양말을 집기 위해 제 손을 움직인 일이 없었고, 덧신 끈을 매어 본 일도 없는 스카렛 오하라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젊음이나 아름다움, 다정한 마음 같은 게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없었다. 이젠 뒤로 물러날 길도 없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길뿐이었다. 시장기가 또다시 그녀의 텅 빈 위를 자극하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향하여 외쳤다. “하느님이 증인이야. 난 굴복하지 않아. 끝까지 살아가 보일 테다! 설사 그러기 위해서는 도둑질과 살인을 해야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다!”
겨울이 지나고 9월이 다시 찾아왔다. 목화를 딸 시기였다. 전쟁은 끝났고 애슐리가 돌아왔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남군과 북군의 군복을 위아래로 하나씩 입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삼나무 길을 힘 하나 없이 걸어서 돌아왔다. 멜라니의 창백한 피부 속의 혈관이 맹렬히 뛰고 있는 모습을 스카렛은 분명히 보았다. 멜라니는 치마를 흩날리며 자갈길을 달려가 애슐리에게 몸을 던졌다. 이어서 애슐리의 머리가 멜라니에게 기울어졌으며 한 차례의 뜨거운 포옹이, 불 같은 키스가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맺어 주고 있었다. 미칠 듯한 기쁨이 스카렛으로 하여금 정신없이 두어 걸음쯤 뛰어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유모의 억센 손이 그녀의 몸을 부여잡고 말았다. “내 손을 놔. 애슐리, 애슐리가 돌아왔단 말이야.” “애슐리는 누구의 남편인가요. 스카렛 아씨.” 그 말을 듣자 스카렛은 그만 온 몸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다 애슐리는 분명히 멜라니의 남편이 아닌가. 이제는 아들까지 둔 가장이 아닌가.
제4부
1866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오후, 윌은 테라에 대한 세금 산정액이 삼백 달러라고 조심스럽게 알려왔다. 가지고 있는 돈은 금화로 십 달러밖에 없었고 그것으로는 테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테라는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었다. 누구와 의논해야 하나? 애슐리. 애슐리에게 말해 보는 것이다. 스카렛은 애슐리가 일하고 있는 과수원으로 향했다. 일단 밖으로 나오자 그녀의 마음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모처럼 그것도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애슐리와 단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데 대한 기쁨이 그녀로 하여금 걸음을 재촉하도록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윌에게서 들은 세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야겠죠. 그런데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입니까?” “저도 지금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글쎄요, 내 생각에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버틀러뿐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애슐리.” “내가 어떻게든 당신의 힘이 돼줄 것을 기대하고 찾아왔나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스카렛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뚜렷하게 의식하며 급히 말했다.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는 정말이지 완전히 지치고 말았어요. 피로가 뼈 속 깊이 사무쳐 더 이상 참고 견디질 못하겠어요.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싸웠고 김도 맸으며, 괭이질을 하고 목화도 땄어요. 그러나 애슐리, 우리 여기서 도망치기로 해요. 이젠 가족들을 위해서 일하기에도 지치고 말았어요. 그 사람들의 시중은 누군가 들어줄 거예요. 그러니 이봐요. 애슐리, 도망치도록 해요. 당신과 나, 둘이서 멕시코라면 갈 수 있어요. 전 당신을 위해서라면 힘껏 일할 수 있어요. 애슐리,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그렇지요? 당신이 멜라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은 멜라니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자, 그러니 어서 도망가요. 애슐리, 저는 당신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어요. 폰테인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멜라니는 이제 아기를 더 낳을 수 없다구요. 하지만 전 당신을 위해서 아기를 몇 명이라도 낳아드릴 수 있어요.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애슐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결심한 듯 대답했다. “할 수 있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내가 멜라니와 아기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스카렛, 당신은 미쳤소.”
그때 문득 애슐리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스카렛은 그가 자신을 안아주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애슐리는 괴로운 마음으로 스카렛을 안았으며 둘은 뜨거운 키스를 하고야 말았다. 스카렛은 애절하게 애슐리의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그러나 애슐리는 단호했다. “안 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여기서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지도 모르겠소.” 아, 얼마나 듣고 싶던 말인가. 그가 원한다면, 사랑하는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주리라. 지금 당장이라도 좋다. 즉시 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될 수도 있다. 그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애슐리는 곧 자신의 말을 뉘우치며 말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절대로 안 되지. 모두가 내 잘못이오. 당신 잘못이 아니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멜라니와 아기를 데리고 이곳을 떠날 테니까요.” “떠나실 순 없어요. 왜 저를 사랑하고 계시면서도….” 그러나 애슐리는 그녀에게 테라의 흙 한줌을 쥐어 주며 용서와 더불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결국 애슐리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예전에 작업감독으로 일하다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해고된 적이 있는 웰크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매우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왔다. 그는 세금을 내지 못하면 테라가 경매에 넘어갈 것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은근히 독촉했다. 그가 테라를 탐내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스카렛은 손에 쥐고 있던 흙을 힘껏 그의 얼굴에다 집어 던졌다. 그러자 웰크슨은 자신이 경매에서 테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호언하며 돌아갔다. 그때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랄드 오하라가 분노하며 말을 몰아 웰크슨을 쫓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승마의 명수답게 질풍같이 달렸다. “테라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테다!”라고 외치며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던 순간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스카렛이 외치며 달려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스카렛은 울 수도 없었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모두가 달려올 때까지 아버지의 시신 옆에 앉아 있었다.
1865년 11월 제랄드 오하라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스카렛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세금 3백 달러를 물고 테라를 구해야 했다. 마침내 그녀는 레드 버틀러를 찾아가 돈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하다면 그와 결혼이라도 하자.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에겐 돈이 필요하고 지금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이제 전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구걸하는 입장으로 그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도하게, 마치 은혜를 베푸는 여왕처럼 그를 대하리라. 스카렛은 어머니가 아끼던 커튼을 벗겨내어 옷을 짓고, 동생 스웰렌이 준 좀 낡긴 했으나 아직 충분히 아름다운 아일랜드 레이스의 장식으로 치장했다. 의복이 어지간하게 갖추어지자 스카렛은 지체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유모와 함께 애틀랜타로 레드 버틀러를 찾아 나섰다.
레트 버틀러는 검둥이를 죽인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스카렛은 버틀러를 면회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갔다. “부탁이 있어요. 저에게 3백 달러쯤 빌려주시지 않겠어요?” 스카렛은 주저하다 자존심을 버리고 말했다. 버틀러는 담보를 제공해야 빌려주겠다고 빈정댔다. 스카렛이 자신을 담보로 제공하겠다고 말하자, 레드는 지금의 자신에게 있어 그녀는 3백 달러의 가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귀 밑까지 새빨개졌다. 이제는 굴욕이 극한 상태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절실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욱 그에게 매달렸다. “저를 모욕하시는 건 얼마든지 좋아요. 저에게 돈만 주신다면.” 그러나 버틀러는 거절했다. 결국, 좌절한 스카렛은 레드에게 사형이나 당하라고 매섭게 퍼부어 주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유모와 함께 길을 걷다 우연히 스카렛은 동생 스웰렌의 애인인 케네디를 만났다.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죠. 스웰렌이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아뇨.” 케네디 프랭크는 자신이 그곳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카렛은 그가 금년에 약 천 달러쯤 벌었다는 말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랐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만 해도 한 푼 없다던 그가 제재소를 경영할 만큼 돈을 벌다니! 스카렛은 강하게 비치는 희망으로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한 가지 계획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잠시 동안 깊은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케네디를 쏘아봄으로써 그를 당황하게 만든 스카렛은 더욱 자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만일 좋으시다면 당신 윗도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싶어요. 너무 추워서요.” 케네디는 당황했다. 스카렛은 자신의 손을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그의 윗도리 주머니에 넣었다.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와 상체가 케네디에게 안겼다. 그녀는 일부러 흐느끼면서 동생 스웰렌이 내달에 토니 폰테인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는 동생이 케네디를 속인 것에 대신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스카렛의 유혹에 빠진 케네디는 스웰렌의 배반에 분개하는 한편 스카렛의 애정에 감사했다. 케네디는 스카렛에게
3백 달러를 주었으며, 아울러 그들은 결혼을 하기로 그것도 갑작스럽게 결정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스웰렌은 울면서 미친 듯이 언니에게 대들었다. 처음에는 엄연히 멜라니와 결혼한 애슐리를 죽도록 사랑하며 따라다니다가, 그 일이 뜻대로 안 되자 이제는 자기 애인까지 빼앗아 결혼을 하는 언니를 어떻게 같은 핏줄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스카렛은 케네디와 결혼했다.
프랭크 케네디와 결혼한 다음부터 스카렛의 성격은 말할 수 없이 변했다. 아니, 그것은 본래부터 그녀가 지니고 태어났던 기질인지도 몰랐다. 애슐리가 뉴욕으로 떠나겠다고 하자 스카렛의 마음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안 된다. 비록 그와의 사랑이 영원히 빗나가긴 했어도 그를 보낼 수는 없다. 함께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와 함께 애틀랜타에 가서 살아야만 한다. 그녀는 애슐리를 잡아두기 위하여 그를 케네디의 목재소에서 일하도록 주선했다. 애슐리가 거절하자 그녀는 거짓으로 기절하는 체 쓰러지며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스카렛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애슐리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스카렛이 결혼한 지 2주일 만에 케네디가 유행성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스카렛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가 온 셈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본격적으로 목재업의 표면에 나서서 그 즉시 여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혹하게 인부들을 다루며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보냈고 고심했다. 어느 날 케네디가 작업현장에 나와 그 모습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자, 스카렛이 말했다. “글쎄, 참견하지 마세요. 그리고 말끝마다 당신, 당신하지 마시구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스카렛의 태도에 당황한 케네디는 어쩔 줄 몰라 “당신이 다 알아서 하구려.”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내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카렛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마저 거절하고 말았다. 스카렛에 비해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케네디는 그 자리를 매우 어색한 모습으로 떠나 집으로 갔다.
지독하게 북부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번다고 남부 부인들이 비난했지만 스카렛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그녀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매우 화려한 옷차림으로 혼자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준비를 끝내고 있을 때, 감옥에서 나온 레드 버틀러가 그녀를 찾아왔다. “진실로 친애하는 케네디 부인.” 레드의 첫마디였다. “뻔뻔스럽게 나를 다시 볼 수 있나요? 당신이 교수형이 안 돼서 유감이군요!” “스카렛, 친한 친구의 입장에서 털어놓으시오. 내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는게 현명한 판단 아니었을까요?” “필요 없어요. 이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당신은 역시 사형이나 당했어야 좋았을 거예요!”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권총까지 챙기며 외출했다. 그렇게 남편이 비장한 표정으로 권총까지 바지춤에 찌르고 나간 다음 스카렛은 집 안의 이상한 분위기에 그만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 때 레드 버틀러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황급히 애슐리와 케네디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북군에게 의심받고 있으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렸다. “내가 오늘 밤 술에 취한 양키 대위 두 사람과 포커를 하다가 무심코 들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겁니다. 양키는 오늘 밤 사건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전부터 준비하고 대기하던 중입니다.” 스카렛은 지금까지 그토록 진지한 레드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북군이 들이닥쳐 케네디와 애슐리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고, 레드가 그들을 따돌렸다. 급히 레드의 연락을 받은 애슐리는 집으로 돌아와 무사했으나 케네디는 추격대를 피하지 못하고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여 죽고 말았다.
제5부
두 번째 남편은 그렇게 죽고 말았다. 더구나 이번 케네디의 죽음은 스카렛 때문이었다는 주위 소문이 있었다. 2층 자기 방에서 혼자 브랜디를 마시던 스카렛은 버틀러가 찾아왔다는 전갈에,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고 급히 거울 앞으로 다가가 매무새를 만지며 당황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나면 어쩌나!’ 그녀는 급히 향수병을 집어 입 안에 가득 물고 정성껏 세면기에다 뱉어내는 일을 두 번이나 했다. 그러나 레드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당신은 사람들이 말하는 술주정뱅이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화제를 바꾸어서 당신이 좋아할 뉴스를 전해 드리지. 실은 오늘 출발하기 전에 이 얘기를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온 겁니다.” “어디 가세요?” “영국이죠. 아마 몇 달 동안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뉴스를 가지고 오셨는데요?”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느 여자보다도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구혼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릎을 꿇으면 진심으로 생각하시겠습니까?” “….” 농담이 아니었다. 그토록 도도하고 자신에 넘쳐 있던 레드는 정말로 무릎을 꿇었고, 스카렛은 그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할 말도 잊은 채 얼빠진 사람처럼 그를 쳐다봤다. 몸을 일으킨 레드의 팔은 어느덧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만, 제발, 전 정신을 잃을 것 같아요!” 그러나 레드는 더욱 격렬하게 그녀를 포옹했다. “나는 당신을 기절시키고 말겠어. 질식시켜 주겠어. 당신은 몇 년 동안이나 이걸 기다리고 있었지. 당신이 알고 있던 바보 녀석들은 누구 하나 이런 키스를 하지 않았어. 그렇지? 당신의 그 착한 찰스도, 프랭크도, 아니 저 바보 같은 애슐리도!” “레드, 제발 부탁이에요! 네?” 레드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는 몸부림도 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결혼한다고 말해요. 자, 어서 네, 라고 대답해요.” 스카렛은 “네.”라고 속삭였다. 스카렛의 결혼은 또 다시 주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카렛은 결혼했고 그들은 약속대로 듀오린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스카렛은 행복하기만 했다. 전쟁 전의 봄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완전한 행복이었다. “레드, 좀 안아줘요.” 레드는 즉시 그녀의 몸을 힘껏 포옹해주었다. “아, 레드, 굶주림은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여보, 레드? 나는 기를 쓰고 뛰어다니며 찾았어요.
하지만 내가 찾고 있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찾아 헤매도 안개 속에 숨어 있어요.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나는 영원히 안전하게 다신 추위에 떨거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당신이 찾는 건 사람이요, 아니면 물건이요?” “그걸 모르겠어요, 여보.” “음. 여보! 이젠 내가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의 불안을 없애 주도록 노력하겠소.” “고마워요, 여보!” 레드에게는 돈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더구나 스카렛의 그런 불안은 어떻게 보면 돈으로 해결 지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흘렀으며, 급기야는 10개월이 되자 스카렛은 아기를 낳게 되었다. 아들이 아니고 딸을 낳았기 때문에 공연히 불안해하고 있던 그녀에게 유모는 레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방금 내가 아기를 목욕시킬 때 레드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아들은 재미없어요. 고생만 시킬 뿐이지. 딸이 더 재미있고 즐거운 거야. 나는 사내애를 열이나 준다 해도 계집애와 바꾸진 않을 거요.’라고 말했어요.”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일어나 행동하게 된 스카렛은 남편도 모르게 외출해 애슐리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녀의 기분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레드와 모든 면이 너무 다른 애슐리는 그녀에게 레드의 성격이 거칠다고 말했고, 스카렛은 그 말에 공감했다. 그렇다. 레드가 나를 망쳐 놓은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겠다. 그러자면 침실을 따로 써야 할 것이다. 오늘은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하리라. 스카렛은 유모에게 “오늘 난 방에서 식사하겠어요. 밖에는 이제부터 나가지 않을 테니까. 그이가 돌아오면 내 뜻을 전해 줘요.” 하고 말한 후 방문을 안으로 꼭 닫았다. 그렇게 말한 후 화장대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애슐리의 말이 옳다. 애슐리는 분명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애슐리. 그는 역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에 이른 스카렛은 소중히 간직했던 분첩을 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레드의 아내로서 아기까지 낳은 그녀의 분첩 속에는 거울 대신 애슐리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은밀히 그 사진을 보는 습관이 있었으며, 언제나처럼 지금도 그 사진에 거의 넋을 잃을 정도로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레드가 돌연 들어오자, 스카렛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들고 있던 분첩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로 밟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난 이제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순간적으로 놀란 레드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말했다. “남편으로서 내 권리를 거절하면 내가 당신과 이혼할 수 있다는 건 알겠지?” 그 순간 스카렛은 주춤했으나, 이내 태연하게 애슐리를 생각하며 창가로 걸어가며 말했다. 발 밑에는 그 분첩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만일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여자를 아껴줄 줄 아는 신사다운 점이 있다면…. 애슐리를 보세요. 멜라니는 아이를 낳을 수도 없어요. 하지만 난….” 그 순간 스카렛은 자신이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데 대해 크게 놀랐다. 그러나 레드는 태연했다. “애슐리는 정말로 어린애 같은 신사지. 자, 어쨌든 얘기나 어서 계속하시지.” 스카렛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울러 레드의 시선이 야릇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오후에 제재소 사무실에 가 있었지 않소?” 섬뜩한 놀라움에 스카렛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했다. “당신은 매우 불쌍한 여자야. 언제나 환상 속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만일 당신이 애슐리와 결혼해도 당신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당신이 내게 싫증이 났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쉽게 싫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맘대로 해 봐. 고맙게도 이 세상에는 잠자리가 얼마든지 있지. 더구나 어디에서건 여자는 많으니까. 결코 당신이 없어도 쓸쓸하지는 않아!” 레드는 말을 마치자 몸을 홱 돌려 나가며 문이 부서지도록 거칠게 걷어찼다. 그 뿐 아니었다. 스카렛의 침실에서 나온 레드는 술병을 집어 들어 유리컵에 따랐고, 그 술을 마신 후 스카렛의 전신을 그려놓은 그림에다 유리컵을 힘껏 던졌다. 유리컵이 부서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방 안에 있던 스카렛은 후회했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스카렛과 레드 사이에는 이해하기 힘든 갈등이 묘한 장막을 치게 되었다. 그들 사이를 유지시켜주는 게 있다면 오직 아기뿐이었다. 시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지 않고 흘러갔다.
애슐리의 생일이었다. 파티를 준비하던 스카렛은 레드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차리고 제재소로 애슐리를 찾아갔다. “스카렛, 당신은 언제 보아도 더욱 아름다워지기만 하는 것 같군!” 애슐리는 다정하게 스카렛의 두 손을 잡고는 말을 이었다. “정말 당신은 아름다워! 당신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생각도 없을 만큼이나….” 그들은 새삼스럽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 시절부터 무척이나 오랜 길을 더듬어 왔군요. 스카렛….” 스카렛은 눈물을 흘리며 애슐리의 품에 안겨 머리를 묻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큰 문제가 생길 줄은 두 사람 다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뜨거운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을 이웃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사무실을 뛰어 나왔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곧 소문이 날 텐데….
얼마나 지루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저녁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레드는 파티에 갈 준비가 되었는지 물었다. 스카렛은 머리가 아파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비겁하군.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소. 난 행실이 나쁜 여자는 아내로 둘 수 있지만, 비겁한 여잔 안 돼! 그 아름다운 엉덩이를 구둣발로 차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만들기 전에 어서 옷이나 입어.” 레드는 그녀를 강제로 일으킨 다음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의 코르셋을 집어 던졌다. “오늘은 점잖은 부인다운 러브그레이나 라일색은 안 돼. 당신 깃발을 마스트에 꽂아 둬야겠어. 그리고 볼 연지도 발라요. 아마 바리니사 사람에게 간통죄로 걸린 여자라도 지금의 당신처럼 창백하진 않았을 거요.” 피할 수 없었다. 레드는 스카렛이 코르셋을 입자 그 끈을 힘껏 잡아 죄었다. “아파요!” 얼떨결에 스카렛이 말하자 “아파? 목이 아니길 다행이지!”라고 레드가 말했다. 무서웠다.
다행히 파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멜라니가 스카렛을 최대한으로 감싸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피할 길이 없던 스카렛은 레드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 내일쯤 되면 또 그럴 듯한 변명을 생각해 낼 수 있겠지. 오히려 레드를 공격하여 그가 나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자정이지났다. 그때 레드가 문을 확 열어젖히며 “한 잔 같이 합시다. 버틀러 부인.” 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봐, 이리 와!” 술 취한 음성으로 그가 고함쳤다. “재미있는 희극이었어. 배우는 충분히 갖춰져 있었고, 잘못을 저지른 여자에게 돌을 던지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 부정한 아내의 남편은 신사적으로 아내를 감싸줬고, 부정한 남편을 가진 아내는 기독교 정신으로 사이에 끼어들어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이 일을 처리했어. 그리고 놈팡이는….” “제발 부탁예요, 레드.” 레드의 음성이 더욱 격해졌다. “깨끗하지 못한 나의 욕구가 너무 격렬해서 점잖은 당신으로서는 도저히 응할 수 없다거나, 이젠 더 아기를 낳고 싶지 않다는 구실로 당신은 나를 침실에서 몰아냈어. 난 정말 불쾌했지! 그건 당신도 모를 거야! 때문에 나는 밖으로 나가 쾌락의 위안을 찾고 점잖은 당신의 순결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었지. 그런데 당신은 그 시간을 오랫동안 번민하고 있는 애슐리를 쫓아다니는 일에 소비했어. 그 사낸 왜 고민하고 있을까? 그는 아내에 대해 정신적으로 충실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도 배신을 못하고 있지.
왜 그는 결심을 하지 못할까. 당신은 그의 자식이라면 얼마든지 더 낳고 싶을 거야. 그리고 그걸 내 자식이라고 끝까지 고집하려 들 테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드는 애무하듯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털 속으로 손을 넣어 힘껏 얼굴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나는 이 손으로 아주 간단하게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소. 그렇게 해서 애슐리를 당신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지.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당신 두개골을 호두처럼 부숴버리려고 하는 거요! 그러면 그 사내는 깨끗하게 없어져 버릴 테지.” 스카렛은 겉옷의 깃을 잡아당겨 여미었다.
레드는 계속해서 애슐리와 그녀 사이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그녀를 끌고 어두운 복도로 달려 나갔다. '아아, 빨리 내 방으로 갔으면!' 그의 뜨거운 입김이 머리에 와 닿았다. 그와 동시에 레드는 겉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몸을 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애슐리를 쫓아다니면서도 나를 거리로 몰아냈어. 하지만 오늘 밤만은 내 침대에서 자야 돼!” 레드가 거칠게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더 큰 변화가 스카렛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레드가 지금까지 그녀가 못 느꼈던 뜨거운 키스를 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격렬한 전율을 느꼈다. 기쁨, 공포, 착란, 흥분, 너무나 억센 힘과 집요하게 쫓아오는 입술 등이 그러했다. 어느 틈엔가 그녀의 입술은 레드의 입술 밑에서 떨고 있었으며, 그녀의 팔은 그의 목 뒤로 힘껏 둘려져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강한 정복자 앞에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스카렛은 간밤의 그 뜨거웠던 사랑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들뜬 마음으로 레드를 대했다. 그러나 레드의 말은 차가왔다. “스카렛,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고 싶소. 그리고 떠나기 전에 내 결심을 밝히려고 이렇게 왔소. 나는 당신과 이혼하기로 결심했소. 돈은 충분히 주겠소.” “설마 당신이 그런….” 그녀는 지난밤의 그 격렬했던 감정이 어느 틈엔가 기억 속에서 아련히 멀어짐을 느꼈다. “애슐리가 독신이라면 좋겠지만 유감이구려. 하지만 난 오늘 런던으로 떠나겠소.” 그 순간, 스카렛의 마음속에서는 야릇하게도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니는 내가 데리고 가겠소. 그 애를 소문이 나쁜 엄마에게 맡겨 둘 수는 없소. 그 애의 장래에 지장이 있을 테니까.”그녀는 울며 발버둥쳤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짐을 챙겨 어린 포니와 함께 집을 떠났다.
스카렛은 노여움과 분노가 가시고 나니 레드의 존재를 새삼 인식하며 쓸쓸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와 포니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아왔다. “안색이 창백한 것 같구려. 부인.” “내 안색이 나쁜 건 아기가 또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레드는 더 없이 쌀쌀하게 말했다. “그래? 그 행복한 아버지는 누구요, 애슐리요?” “지독한 말을 하는군요! 당신 아기가 뻔하잖아요! 나는 당신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요. 어떤 여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차라리 당신의 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레드는 침착하게 층계를 오르며 말했다. “그렇게 낙심할 건 없지. 떼어버리면 될 테니까!” 그녀는 돌연 고양이처럼 레드에게 덤벼들었다. 레드가 몸을 피하자 그녀는 층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렸다. 스카렛이 입원한 병원의 복도에서 그녀가 혹시 자기를 불러주지 않을까 초조하게 기다리던 레드는 스카렛이 그를 부르지 않자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레드를 찾아온 멜라니가 스카렛은 다행히 회복하고 있다고 전해주며, 자신도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다. 레드는 깜짝 놀랐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멜라니가 임신을 하다니. 그것은 멜라니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 아닌가?’
불행한 일은 또 생겼다. 며칠 후 레드가 그토록이나 아끼고 사랑하던 포니 버틀러가 고집을 피우며 망아지를 타고 높은 장애물을 뛰어넘다가 그만 목뼈가 부러져 죽고 말았건 것이다. 그 충격은 레드를 완전히 정신병자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는 매일 죽은 딸 곁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며칠 후 멜라니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중태였다. 멜라니가 스카렛을 찾는다는 의사의 전갈에 스카렛이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의사는 스카렛에게 “공연한 양심의 가책을 털어놓아 멜라니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말은, 마음 편히 죽도록 만들자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하고 당부했다. 스카렛은 이미 커다란 죄책감에 잔뜩 눌리고 있었다. “스카렛, 부탁이 있어요.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를 돌보아주세요. 들어주시겠지요? 그 아이를 낳을 때도 그토록 신세를 졌는데 또 부탁을 하다니. 그리고 스카렛, 우리 남편을, 애슐리를 부탁하겠으니 아이와 함께 잘 보살펴 주세요. 레드가 모르도록. 그리고 레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스카렛은 혈관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병실에서 나온 스카렛이 레드도 의식하지 못하고 애슐리의 품으로 파고들며 안겼을 때 애슐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음을 분명히 말했다. 멜라니가 죽음으로서 자신의 모든 꿈도 함께 깨지고 말았다는 애슐리의 이야기에 비로소 스카렛은 모든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오, 애슐리! 당신은 지금까지 멜라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군요. 그럼, 왜 진작 나를 단념시키지 않고 지금까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스카렛은 비로소 애슐리와의 사랑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렛은 애슐리와의 깨어진 사랑에 대해서 절망하다가 문득 그렇지, 나도 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레드, 그렇다! 레드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자! 그리고 용서를 빌자! 그와 동시에 레드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드!, 레드! 그녀는 정신없이 레드를 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모습은커녕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레드를 꼭 만나야한다. 그것도 지금 즉시. 스카렛은 집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모든 걸 말하자. 그는 이해해 줄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가를 그리고 지금은 내가 얼마나 레드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고백하자. 그렇게 해서 그 사람 레드의 마음을 다시 찾도록 하자. 그가 다시 나를 사랑하도록 하자!
집으로 돌아오자 레드가 있었다. 스카렛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여보, 모든 걸 다 얘기하겠어요.” “스카렛, 내 앞에서 비굴해질 필요 없어요. 당신에겐 애슐리가 있으니까. 나는 더 견디지 못하겠소.” 레드는 계속해서 지난날의 모든 이야기를 했다. 결혼하기 전부터 애슐리와 그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스카렛, 당신은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오랫동안의 잘못이나 괴로움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시는 줄로 알고 있어. 자, 스카렛. 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요. 당신은 아무리 난처한 때에도 손수건을 쥐어 본 일이 없었지.” 레드는 계속해서 굽힐 수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이곳을 떠날 작정이오.” “날 버리고요?”
목이 죄어드는 듯한 괴로움에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으로 그녀는 자신의 곁을 떠나는 레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소중한 것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평상시 주문처럼 외우던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중얼거리다 돌연 소리쳤다. “저 사람을 놓칠 순 없어! 분명히 어떤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생각지 말자!” 아울러 그녀는 더욱 자신 있게 자신을 향하여 말했다. ‘그래, 모든 일은 내일 테라에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되찾을 방법을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가렛 미첼 지음>
▣ 저 자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949)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출생했다. 의학을 지망하여 메사추세츠 주의 스미스 칼리지에 다녔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향한 후 한때 「애틀랜타저널」 지에서 일했다. 1925년 결혼 후부터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집필을 시작하여 10년 후인 1936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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