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사랑을 하고, 고백을 하고, 퇴짜를 맞고, 실연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은 대체로 젊은 날의 치기와 농담거리가 되지만 아직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이제 막 남자로 성장한 은철씨에게 연정을 품었던 여자로부터 딱지를 맞은 사건의 파장은 짐작이상인 듯했다.
그녀에게 거절당해서 수치스러웠고 그 일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시속 140킬로미터를 넘겨 국도를 운전했다. 아차. 사고가 나는 그 순간. 그깟 계집애 하나 때문에 사고를 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면서 그런 자신이 너무 못나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은철씨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에게 거절당한 경험이죠.” 누구나 그를 좋아했고 온실처럼 잘 조성된 환경에서 사랑받는 화초로 자랐다. 누구도 그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이기적인 아이도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랑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그는 면연력이 약한 어린 소년이었다. 최적의 조건 속에서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 귀한 난초같은 소년이었다. 정확히 보자면 비극의 원인은 그의 나약한 심리적 항체였다. 타인에게 거절당하는 좌절의 경험을 몇 번만 했더라면 심리적 면역력이 생겼을 것이다.~
집은 아직도 전흔으로 어수선했다. 큰언니는 울며 치웠고, 작은 언니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엄마는 어디갔을까. 아버지는 억망으로 취해 잠들어 있다. ~ 가족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단 하루라도 빨리 빠져 나올 수만 있다면...그녀에겐“남편”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혼은 그녀의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할 말이 점점 사라져 갔다. 가슴이 어느 쪽부터 서서히 응고되는 듯, 바람이 새는 듯, 어두어지는 듯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남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감성적인 언어들을 외국어 대하듯 했고, 정서와 느낌을 표현하면 경멸과 무관심으로 응답했다.
~ 가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거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었다. 착하기만 한 큰 언니는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났다. 또 다른 참담한 삶이었다. 오빠는 ...그는 또 다른 아버지였다. 엄마는 자신이 당한 피해의 역사에 짓눌려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정서적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다.
~ 무엇보다 채영씨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남편의 천박함이다. 남편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인색했고 스크루지만큼이나 베풀 줄 몰랐다. 임대수입만으로도 고급외제차를 몰고, 원할 때마다 골프를 치고 ~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남편이 주차비 천원을 아끼려고 젊은 친구와 언성을 높여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상당히 곤혼스러 울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하룻밤에 수백만원의 술값을 쓸 때도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천원, 이천원 앞에서는 눈꼽 만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문제는 아무리 말을 해도 이런 인색한 태도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채영씨는 남편의 천박함과 이기심에도 진저리를 치지만 그것보다 더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남편의 무덤덤함이었다. 이런 남편들을 나쁘게 말하면 정서와 감정기능의 저능아라 할 만하다. 공감이 불가능한 사람들. 그러나 공감이 없는 관계란 끔찍하지 않은가. 내 몸으로 나은 자식이나 형제라고 해도 서로 공감하지 못하면 남보다 못한 관계로 전락한다.. 결혼이 오직 정서적 연대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부부관계에서 공감이란 일상의 관계를 풍성하게 이어주는 일용할 양식이다.~남편이 아내를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감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내들은 정작 자신은 주지 않으면서 남편에게 달라고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 자기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결혼은 누구와 하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갖춘 사람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남자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를 만족시켜줄 “어떤”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 채영 씨의 고통은 잘못된 욕망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결혼 상대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 두가지 조건을 염두에 두었다. 첫째, 부유해야한다. 둘째, 이성적이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가족부양의 책임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아버지 때문에 남편이 될 사람은 무조건 돈이 있어야 했다. 이 두가지 조건만 갖춘다면 다른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남자가 감정적이고 예민하며 심지어 예술적 재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가수가 될까 생각을 했을 정도로 끼가 있었다. 그러니 남편은 이성적이고 냉철해야 했다.~“남편만큼 저 역시 천박하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런 남편을 선택한 것이 저 자신이잖아요”~
남편과의 관계를 보상받기 위함인지 채영씨는 애인이 있다고 고백했고,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느낀다고, 그것이 참 낯설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이제 그 관계도 파국의 징후가 드러나면서 불안해졌고, 또다시 절망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분노를 느꼈다.
나는 어떤 흐름을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로 힘들어 했지만, 사실은 삶의 중요한 대목마다 분노로 힘들어 했다. 자기인생을 참혹하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 그렇다.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된다. 우울한 사람은 사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잇는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한다면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녀의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선 분노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연해졌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사실은 누구에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평생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교활”하게 행위해왔는지 통렬하게 깨닫고 그것을 멈추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서질 듯한 감성과 파란 동맥같이 팔딱거리는 신경질이 싫어서 칼로 벤 듯하고 이성적인 남성을 남편으로 골랐다. 그것이 또 다른 지옥임을 알게 되면서 남편과는 다른 성정의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 남자는 또 다른 아이였고, 좀 더 근사해 보였지만 아버지같이 성마르고 쉽게 시무룩해지고 갑자기 표변해서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감성이 부드럽고 배려가 세심하고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서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서로의 성정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채영 씨는 그 남자에게서 아버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 선택마저 잘 못된 것임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억지로 구겨 넣어 마음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눌러 두었다. 또 다른 구렁텅이었다. 참혹했다.
오래전부터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앉은뱅이로 누가 일으켜주기를 바라며 살았다. 아니 어쩌면 업고 가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온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고 허구한 날“내가 너희들 때문에 너희 아비랑 살고 있다.”는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대문을 박차고 나갈 의사도 용기도 없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자식이 없었으면 왕후장상처럼 살 것같이 말하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채영 씨의 허위와 가식 보였다. 철퍼덕 주저앉아 “난 너무 힘드니까
누가 와서 날 좀 업고 가주세요. 이제 분석가, 당신차례에요.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요“하는 그녀의 욕망이 확연히 보였다.
“근데...여기서 그만두면 정말 지옥일 것 같아요. 이젠 어떻게든 끝내고 싶어요.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어 못 볼 걸 봐버린 느낌이에요”
“저라면 모르고 당하는 고통보다 알고 겪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모르는 게 약, 아는 게 병”이라는 우리 속담을 나는 싫어한다. 누리고 있는 행복을 모른 채 불평하며 사는 인생이나 당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도 모른 채 겪어내는 인생이나 그게 그거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다 알고 죽자”라는 말을 가끔 한다.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참 허망하네요” ‘제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죠?“ ”뭘 뺏겼는데요“ ”누가 빼앗았습니까?“
“엄마, 아버지, 오빠, 남편...그 사람들이 아닐까요?”
“ 그 분들은 채영 씨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지 인생을 빼앗은 사람은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인생은 낭비할 수는 있지만, 인생은 뺏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요.” “낭비...낭비...그럼, 저는 인생을 허비한건 가요” “삶이 너무 힘이 들어서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었던 거죠.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요.”
“어머니를 보세요 저주와 비난 외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눌러앉아 계셨잖아요. 어머니와 다르게 살고 싶다고 해놓고, 뭐가 다른가요? 죄송합니다. 불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더 나은 아버지를 찾아 헤매지 맙시다. 이제 채영 씨의 삶을 삽시다.” “뭐부터 해야 할까요?” “분노하게 한 것을 먼저 해결해야죠. 처음으로 돌아 가 봅시다. 어릴 적 노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내게는 왜 따뜻한 가정이 없나, 왜 그런 엄마 아빠가 없나. 그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어요. 이제 생각나요. 그때는 왜 열몸살이 난 것처럼 몸이 부들거리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화였어요. 내게는 따뜻한 가정이 없다는, 그거예요.”
“그것이 불씨였다면, 그 이후 채영 씨가 선택한 것들은 그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아니었을까요?” 계속 분노하게 하는 기름이요.“~
<“상처 떠나보내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정신분석가 이승욱박사, 예담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