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관계의 질에 따라 남은 인생이 달라진다(자립한 남편과 아내의 결혼 60년을 위해)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립은 성인의 필수
근래 주부 미식가들이 늘고 있다. 요즘 레스토랑에서는 점심시간 즉 런치타임 때는 풀코스 요리를 저렴한 값에 제공한다. 런치에 풀코스를 이용하는 다수는 누구일까? 대부분 40~50대의 전업주부로 보이는 여자들이다. 화장을 곱게 한 그녀들의 생기발랄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테이블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평온하게 즐기는 여자들을 보는 것은 좋지만, 문득 그녀들 뒤로 남편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쯤 남편들은 분식집에서 허겁지겁 메밀국수 따위를 먹고 있지는 않을까. 오늘밤도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집을 향하고 있지는 않을까. 심보 사나운 상사에게 고개 숙이고 있는 남편,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편……. 그런 남편들의 모습을 그녀들은 잠시라도 떠올릴 때가 있을까.
1975년은 국제 여성의 해였다. 이를 계기로 지구상의 수많은 여성이 가사와 육아에 있어서의 남녀 협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페미니즘 입장의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에 있어서의 남녀 협력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여성의 노동권 확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직업, 여자는 가정, 여자는 남자가 버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오랜 세월에 걸친 성별 분업이 자리하고 있는 한 여자의 일은 설사 맞벌이를 한다 해도 가정경제에 있어 보조 역할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가정경제의 기둥인 남자와 달리 여자는 승진이나 승급이 필요 없다.
여자는 파트타임이면 되지 않느냐. 정년도 남자보다 빨라야 된다’는 식의 사고로는, 백날이 가도 여자는 남자에게 부양받으며 살아가는 반몫의 인간으로 간주될 것이다.
남녀 협력을 주장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남자들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까.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며, 해마다 과로사를 하는 남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선사하고 싶은 것이다. 여자가 일하면 남자도 좀 더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 아내나 아이, 주변 이웃과 사귈 수도 있고, 인생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남녀 협력을 외치는 여자들의 주장 뒤에는 남성의 인간 해방에 대한 바람도 담긴 것이다.
가사와 육아에 있어서의 남성 참여를 호소하는 건 무엇보다도 여성의 노동권 확립이 주축이 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축을 이루는 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사와 육아의 남편 참여’라는 부분만이 부각되고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앞세우는 것이다.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밖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그 모습조차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 정신의 자립이란 말인가.
진정한 자립은 자신을 생각하고, 남도 배려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정신적 자립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면서 사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평생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다.
결혼에 상관없이 남녀 모두 독립적 감각을 기르다(인생을 온전히 사는 짝이기위해)
지금이 바로 부부 시대의 출발선
부부 관계에 있어 자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실제 연구에서는 자녀를 가지지 않은 부부일수록 서로에게 보다 에너지를 쏟고, 긴장감을 지속시켜 나간다고 한다. ‘자식이 부부 관계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는 발상은 아이를 많이 낳던 시대의 유물일 수 있다. 현시대에 있어 자식이 부부간의 정을 잇는 역할을 하는 기간은 무척 짧다. 그 기간이 지나면 부부는 다시 둘만 사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혼 1년 뒤, 임신을 했는데 4개월쯤 됐을 때 유산이 되었어요. 그 뒤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고요. 그때 남편이 제게 그러더군요. ‘평생 아이만 보고 살아갈 거 아니잖아. 어차피 부부가 서로 돕고 사는 시대니까 아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그러고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약사자격증이 있어서 종합병원에 다녔거든요. 일하다 보면 부부가 손잡고 병원을 오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대개 정년퇴직한 남편들이 우울증에 걸려서 오는 경우였어요. 정년퇴직 후 우울증에 빠지는 남자들은 보통 아내에게 가정을 전부 맡기고 일에만 빠진 사람들이었어요. 한 부인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정년 후의 인생이 이렇게 길 줄 미리 알았다면 남편과의 관계를 바꿔보려고 노력했을 텐데……. 남자들도 참 안됐어요. 정년퇴직하고 나면 가정이든 동네든 어디 갈 곳조차 없으니…….’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이렇게 툭 한마디 던지더군요. ‘인생을 온전히 살지 않으면 살아온 보람이 없겠지.’”
그날 이후 이 부부에게는 ‘인생을 온전히 산다는 게 무엇일까’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 남편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토대가 갖춰졌다고 한다. 얼마 뒤, 남편은 ‘인생을 온전히 산다는 것’에 대해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후 남편은 조금씩 자기 일을 직접 해나가기 시작했다. “살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손놀림이나 몸동작이 불안하고 서툴렀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남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저 구경꾼의 입장에서 성원과 박수를 보냈죠. 한 2년 지나니까 익숙해졌는지 점점 좋아지더라고요. ”
두 사람은 함께 인생의 즐거움에 탐욕스럽게 파고들었다.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처음 접하는 분야가 많았지만 제각기 독특한 매력이 있어 한번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부지런히 즐기러 다녔다. 아무리 그래도 부부는 타인이다. 남편이 좋아해도 아내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 또는 아내는 마음에 들지만 남편에게는 지루한 것도 있다. 그런 때는 서로 강요하지 않고 부부가 따로 즐기는 개별 행동을 했다. 홈파티도 해마다 대여섯 번 연다. 파티라고 해서 특별난 것이 아니라 양쪽 친구 7~8명을 집에 초대하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남의 시선을 통해 서로 긴장한다. 타인의 존재가 없이는 부부 사이에 긴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그들 부부의 주장이다.
“부부 사이가 좋다고 하면 곧바로 착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폐쇄적인 관계는 아무래도 숨이 막히고 왠지 서로가 지겨워지기 십상이죠. 오히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을 자꾸 들어오게 해야 긴장이나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봐요. 적어도 우리 경우는 그래요. 홈파티를 열 때는 부부가 모두 주인이니 전날 밤에 다소 언쟁을 했어도 손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잖아요. 초대한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부부가 서로 자제하는 만큼 긴장을 하게 돼요.
또 하나,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면 남편이 새롭게 느껴져요.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말솜씨가 좋았나’ 하고 말이죠. 남편도 그런 식으로 저를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은 타인에게 좋은 면을 보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전혀 색다른 면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부부간에도 그런 색다른 순간이 없으면 서로 결점만 눈에 띄게 되겠죠.”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인생을 온전히 살고, 짝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면 인생 80년 시대의 하루하루의 색채는 더없이 풍요로워질 것이다.<“아내 꽃피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요시타케 데루코 지음,역자 유인경, 큰나무>
저자 요시타케 데루코
일본 효고 현 출생. 게이오 대학 불문과 졸업 후 도에이 광고부 입사, 일본 최초의 광고 프로듀서로 활약한 바 있다. 도에이 퇴사 후, 문필 활동에 전념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주요 저서로 『여인 요시야 노부코』, 『사랑하지만 고독하다』, 『사랑의 뒷모습』, 『자유롭게 아이 키우기 12장』,『딸의 변명·부모의 변명』, 『사랑과 긍지와 위기의 가정』, 『멋지게 늙는 여자』,『나의 할머니 준비』,『남편과 아내의 정년 인생학』, 『여자 나이 60부터 현역 인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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