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만드는 연습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고 뜨내기손님을 즐겁게 해주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생각 없이 무수히 상처를 입힌다.
- 엘라 휠러 윌콕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어.” 하지만 화나게 할 수는 있다. 어떤 말과 행동에 그가 화를 낼지 직감으로 알고 있다.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고, 두렵게 할 수 있는데 왜 행복하게 할 수는 없을까? 그건 직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데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연습을 해라. 곧 전문가가 될 것이다.
진정한 이해
누구도 자기가 하는 말이 다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뜻하는 바를 모두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H. 애덤즈
개나 갓난아이를 붙들고 “네 행실에 대해 한마디 해주고 싶어.”라고 말하지 않고도 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바로 문제다. 내가 아는 부부는 듣거나 말할 수 없는 상황에도 자신들의 문제를 슬기롭게 이기고 사랑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의사소통 기술을 발전시켜라. 진정한 이해가 담긴 사랑에 잠겨라.
사랑의 표현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 스탕달
우리 집 강아지는 내가 등을 쓰다듬고 배를 긁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내 아내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 대상이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언어로 사랑을 표시해야 한다.
당신을 알기 위해
야다(YADA)는 창조의 행위다. 이것 없이는 자기완성을 이룰 수 없다. ‘야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섹스라는 뜻으로, 상대를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 『탈무드』 중에서
당연히 두 사람 중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섹스를 더 좋아하거나 다른 유형의 섹스를 선호한다. 그 현상에서 어떤 의미도 읽지 마라. 두 사람 중에서 한쪽이 돼지고기보다 피자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섹스에 대한 불화는 모든 결혼 문제와 같은 이유를 갖는다. 두 사람에게 부부 관계보다 훨씬 중요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질문하라. “우리의 우정을 깊이 쌓을 수 있는, 의사소통법을 다정함과 관용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그러면 마음속에 섹스에 대한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수백 가지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잃지 말아야 할 것
인생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겁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이해되도록 기다리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마리 퀴리
배우자를 돕는 일에 화급을 다퉈라. 그 일에 직관을 발휘하라. 서로가 생각하는 최선의 도움은 확연히 다르다. 먼저 두 사람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배우자의 고통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의 아픔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배우자의 욕구에 부합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된다. 그것이 치료의 정확한 뜻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배우자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불법적인 행위에 연루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물론 당신은 그 관계에서 즉각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배우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순수의 씨앗에 대한 믿음은 절대로 잃지 마라.
인생의 초점
원만한 가정은 상호 간의 희생 없이는 절대 영위하지 못한다. 이 희생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을 위대하게 하며 아름답게 한다.
- 앙드레 지드
인생의 초점이 나의 분리된 자신이 되었을 때 나는 사랑할 수 없다. 나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식과 내적인 아이, 둘 중 누구를 양육할 것인가. 두 아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기에 우리는 두 가지 목적을 한 번에 좇을 수 없다. 내가 자식을 우위에 놓을 때 내적인 아이는 일체감의 따뜻한 빛 속에서 축복을 받는다.
안 돼
문제아동이란 절대 없다. 있는 것도 문제 있는 부모뿐이다.
- 닐
“안 돼.”를 가능한 적게 하라. 하지만 몇 번은 하라. 어린아이는 아주 드물게 잘 선택된 “안 돼.”로 인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모든 어린아이가 종종 인생을 향해 비참한 접근을 시도한다. 우리는 그 시도가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마라. 당신이 지닌 아이에 대한 평온한 지식으로 행동하라. 당신이 개입해서 “안 돼.”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제 그 아이가 더 잘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직관과 차분한 인지력을 통해 그 아이가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웠고, 이제는 엄격한 손으로 아이를 인도할 수 있음을 안다.
잘못된 교훈
자신이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쓸어 모아 쌓인 쓰레기는 버려진다. 거기서는 어떤 분석도 필요 없다.
- 라마나 마하리쉬
우리는 자녀에게 우리 자신에게 친절함으로써 친절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전쟁 장난감’을 없애는 것과 스포츠 경쟁이 그 대답은 아니다. 아이들이 “빵빵! 넌 죽었어!”라고 하는 말이 정말 그런 뜻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들은 영적으로 더욱 엄밀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풍요로움이 부적당하고, 야망이 허위이며, 모든 놀이가 약간의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확신시킬 때마다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무한한 약속이라고 믿는 때가 있다. 최고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때가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성공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충족시키려는 때가 있다. 그때가 되기 전에 앞서서 그런 생각을 소개할 때, 당신은 저항을 만들고 자식의 내적인 성장을 지연시킨다.
감정 보호막
감정을 통제하고 억제하려는 데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이라고 본다. 감정에 지배받는 인간은 자기의 주체적 권리가 아니라 운명의 권리하에 놓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보다 언짢은 것에 따르도록 종종 감정의 횡포에 끌려가는 정도로 운명의 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통계학적으로 소심한 운전자는 태평스런 운전자보다 사고율이 적다. 그럼에도 수많은 소심한 운전자가 사고를 당한다. 어떤 육체적인 감정도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 심지어 고적함과 평화마저 어떤 특전을 줄 수 없다. 임시방편으로 호혜적인 두려움이 당신에게 그 어떤 제의를 한다 해도 그것은 모든 것을 대신할 가치가 없다.
진실 집착증
대체로 진실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 전, 먼저 그 양면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 이솝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진실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표피적인 방법을 제외하고 아무도 어떤 상황의 ‘현실’이 무엇인지, 혹은 거기에 어떤 의미와 중요성이 함축되어 있는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유권자는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진실을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유권자에게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어떤 도시나 국가에게 명백한 진실이 다른 도시와 국가에서는 전혀 진실이 아니다.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고,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를 놓고 깊은 불화가 야기될 수 있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운동경기 중에 팬과 해설자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놓고 일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카메라앵글이 각기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판 중에 한 명의 목격자는 다른 목격자와 상이한 뭔가를 봤노라고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런 진실이 부재하는 듯한 현상이 전 세계를 진실 집착증으로 몰아가는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 말이나 다른 사람도 들은 말에 대해서 심란한 의문을 가진다.
비교가 가져다준 의미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이다.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모두 장님이라면 나는 굳이 고래 등 같은 번쩍이는 가구도 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충족 또는 ‘종결’이 어떤 비교를 통해 경험될 수 없는 이유는 비교에는 종결의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끝났다고 느낄 때도 거기에는 여전히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다. 키 큰 사람이 득실거리는 방 안에서 우리는 난쟁이가 된 기분을 맛본다. 젊은이들이 웅성거리는 방 안에서 우리는 늙은이의 기분을 맛본다. 우리가 오늘 어떤 성장을 쥐고 있든 간에 비교는 내일 그것을 우리의 손에서 빼앗아간다.
우리는 세상을 차지하고 완성시키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차이와 비교 없이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차이와 비교 없이는 어떤 주말이 ‘화창한’ 날씨일 수 없고, 어떤 사업이 ‘이윤’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육체가 ‘건강’할 수 없고, 어떤 마음이 ‘현명’할 수 없고, 한 국가가 ‘부유’할 수 없다.
만일 모든 것이 등급으로 측정된다면, 그 모든 것 속에 어떻게 완벽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미인의 등급은 있지만 추함의 등급이 없을 수 있나? 부유함의 등급은 있으면서 가난의 등급이 없을 수 있나? 사랑의 등급이 있으면서 증오의 등급이 없을 수 있나?
순간을 살아가기
시간이란 없다. 있는 것은 일순간뿐이다. 그리고 그곳, 즉 일순간에 우리의 전 생활이 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해야 한다.
- 톨스토이
현재 육체가 있기에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서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정신적으로 너무 멀리 서 있어 마치 그림자 영상이 사건을 만들고 있는 꼴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하겠다고 내린 우리의 결정이나 그 외에 할 수 있는 듯한 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 뭔가를 좋아할 때 그것이 너무 빨리 끝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대부분 접시에 놓은 음식을 골고루 충분히 혹은 너무 많이 먹지 않았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주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행위에 전념한다. 심지어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싫어할 때도, 그들은 사람을 분류하는 나름대로의 미숙한 생각으로 타인과 친구, 혹은 예전의 ‘적’과 상호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이와 유사한 과거의 행동을 비교하지 않고, 그래서 이 일이 언제 끝날지 걱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은 그만 가자고 부모의 팔을 잡아당길 때조차 전적으로 잡아당기는 행위에 전념한다.
즐거움에 향하기
더는 희망 속에서 혹은 두려움 속에서 앞을 내다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말아야지. 하지만 고맙게 좋은 일도 있으니, 더없이 행복한 지금 여기를 발견한 것이다.
- 휘티어
옹졸한 마음은 나름대로 현재에 대한 견해를 지니고 ‘현재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 대한 환상을 이용한다. 심지어 단단히 고정된 상황에서도 옹졸한 마음은 미래에 의무를 부여할 계획을 세운다. 만일 다음 날 모든 사람이 평소와 똑같이 산다면 명예를 얻는 것에 어떤 중요함이 있을까? 그것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심지어 우리 최고의 순간에조차 그 의미를 준다. 그래서 옹졸한 마음, 모든 것을 그전에 일어났던 것과 그 후에 일어날 것을 연결시켜야 하는 옹졸한 마음은 결코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그 마음이 항상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의 관심을 현재로 되돌리고 지금의 임무에 전력을 쏟는 것이 유익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을 현재에 열중시키려면 평화와 즐거움을 향해 눈을 떠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사랑스런 현재의 다정한 전망으로부터 보기 시작한다.
시도할 가치 있는 위험
어떤 사람은 자기는 늘 불행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행복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행복해지는 것은 친절과 평화 속에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게 아주 어려운 교훈임을 발견한다. 그들은 말한다. “만일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라면 마약과 정사와 파괴 행위 등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럼, 당신이 행복하게 마약 중독자를 추구하지 않으면 된다. 당신이 행복하게 배우자나 자식을 패지 않으면 된다. 심지어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한다는 공인된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불행의 친근한 양식을 반복함으로써 파생되고 있는 편안함을 거는 도박을 원치 않는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절대적인 위력을 느낄 수 있고 복수하는 짓은 충족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성인이 되기를 실천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도할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당신은 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저 성인다움의 그림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행복의 근원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잘못 알고 있다. 행복은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 헬렌 켈러
세상에는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도 할 수 없는 불구 아이들이 있고 이들과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욕구는 행복의 근원이 아니다. 홀로 자신을 즐길 장소와 방법에 제한을 두지 마라. 자아를 텅 비우도록 노력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나를 알았더라면”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휴 프레이더 지음, 역자 오현수님,큰나무 >
▣ 저자 휴 프레이더
뉴욕 타임즈는 저자를 미국의 ‘칼릴 지브란’이라고 격찬했다. 목사이자 강연가, 상담가인 그는 무엇보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대지를 만지고 대지는 나를 만지고』, 『사랑과 용기의 편지』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저자와 그 아내인 게일 프레이더는 지난 20년을 관계와 부모 노릇에 대한 상담 수업에 헌신하는 틈틈이 『부부를 위한 한 권의 책』,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난 죽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으리』, 『영적인 부모 노릇』과 같은 다수의 공저를 발표했다. 현재 애리조나 주의 투손에 거주하고 풋힐연합장로교회의 세인트 프랜시스에서 교구목사로 재직 중이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을 공평하게 만들겠다고? (0) | 2012.10.17 |
---|---|
화! 기대를 낮추자! (0) | 2012.10.14 |
평화로운 우선권! (0) | 2012.10.09 |
‘시간 도둑’으로부터 시간을 지켜내라 (0) | 2012.10.09 |
소크라테스적 접근과 행복! (0) | 2012.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