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손보겠다고?
우리는 나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가 틀림없이 뭔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주택 거품이 꺼지고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자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항상 자신이 돈을 쓰면 상승효과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즉 정부가 경제활동에 돈을 더 쓸 때마다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창출되고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황 덕분에 정치가들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라는 허가증을 받은 격이 되었다. 예산과 인플레이션은 나중에 걱정할 일이 되었다.
순수한 자유 시장을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일단 사유 재산권이 필요하다.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재산을 사고팔게 된다. 자원의 향방을 지시하고, 이윤을 얻으려면 허가를 받으라는 강압적인 중앙정부가 없어도 자원은 여기저기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종이 집게에서 시작하여 집까지 거래하게 된 어떤 남자의 웹사이트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이것은 시장을 가만 놓아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자원을 결합시켜 부를 창출하며, 그 과정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원래 정부는 자기 자신의 돈이 없다. 민간 부문에서 세금을 거둬들여야 한다. 부족한 자원을 그렇게 움켜쥐는 탓에 현실경제가 숨이 막히는 것이다. 정치학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돈을 민간 부문이 썼다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경제가 튼튼하면 지금 미국 정부가 하는 것처럼 아무 일자리나 급조하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면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건설 대신 각자 다른 일에 종사할 자유가 있었다면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더 풍요로워졌을까? 그들 모두 더 좋은 집, 더 많은 음식, 더 멋진 머리쓰개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같이 똑똑한 사람도 『일반 이론』이란 책에서 “피라미드 건설, 지진, 심지어 전쟁까지도 부를 확대하는 데 공헌했다.”라고 썼다. 그 논리대로면 정부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구멍을 파고 다시 메우는 데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부를 창출하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 오바마 대통령은 풍력 터빈 공사, 도로 보수 공사 등으로 일자리를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이것이 쓸 만한 프로젝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간 부문에 맡겨 두었다면 부족한 자본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시장의 흐름 밖에서는 그 여부를 알 도리가 없다. 정부 서비스는 세금 징수를 통해 자금을 충당하기 때문에 시장 가격이라는 것이 없다. 시장 가격이 없으면 시민들이 그 서비스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매기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정부는 자신들이 돈을 쓰면 우리 시민들이 돈을 쓸 때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돈을 절벽으로 던져버리지는 않는다. 정부보다 훨씬 효율적인 시장에서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공평하게 만들겠다고?
인간과 가까운 침팬지의 경우, 한 침팬지가 제 몫보다 더 가질 경우 흥분한다. 그래서 동물원 사육사는 조심스럽게 사료를 배분한다. 또한 침팬지는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 때 화를 내는 회로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도 그렇다. 영화 제작자 마이클 무어는 부자들의 행운에 대해 인터뷰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건 그들 것이 아니야. 그건 국가의 자원이야.” 정부가 경제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어는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어떤 러브 스토리>에서 부의 분배를 약속한 오바마를 칭송했다. 무어의 영화는 자본주의가 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자본주의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무어처럼 엉성하면서 불만에 가득 찬 좌파의 행동은 조롱에만 그치는 수준이 아니다. 그들은 미국의 시스템을 자유 시장과 작은 정부로 삼고자 하는 데 시비를 걸고 있다.
무어는 무모한 은행과 정부의 긴급구제에 대해 욕을 퍼붓는다. 그러나 정부가 몇십 년 동안 건설산업과 결탁하여 주택 소유자들의 이름을 빌어 자원을 빼돌린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에는 순수한 자유 시장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무어 같은 반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경제 문제는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비롯되며, 구원의 희망은 모두 정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자유 시장은 평등한 성과를 내지는 않지만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 낸다. 밀물 때가 되면 모든 배가 떠오른다는 말이 있다. 자유 시장 체제에서는 패자도 아주 좋은 대우를 받는다. 빈곤층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여 수익을 얻는 것이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선택권을 허용한다. 커피 한 잔을 살 때 벌어지는 일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점원에게 1달러를 준다. 점원은 당신에게 커피를 준다. 그러면서 양쪽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일이 가능할까?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교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상점은 커피보다 당신의 돈을 원하고, 당신은 돈보다 커피를 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교환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부당하게 이용한다고 말한다. 점원이 당신을 이용해 먹었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본능적인 “감사합니다.”에 관계의 진실이 들어있다. 이것이 공평함이다. 양쪽이 평등해서가 아니다. 양쪽 모두 결국은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평하다. 순수한 자본주의에서는 모두가 승자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리고 자발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강제력이다. 정부가 억지로 거래를 막거나 자발적이지 않은 교환을 하게 만들면 모두가 손해를 본다.
진보주의자들은 공평함이란 “공공의 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공평한 사회에 살고 싶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추진하면서 한 이 말은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을 되풀이한 것이다. 공평함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아이들에게 “모두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나눔을 요구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정직한 기업을 보호한다고?
기업의 행태를 탐욕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러한 탐욕을 저지르는 정부기관과 노조의 활동은 이타적인 행동이라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정부의 규제는 소비자를 보호한다. 노조는 노동자를 보호한다. 이들 모두가 기업을 정직하게 유지하는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케이블 TV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국의 지자체들은 케이블 TV 업체들과 독점 계약을 맺기에 바빴다. 케이블 TV가 독점 업종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러 회사가 저마다 케이블을 깔게 하는 대신 한 회사에 독점 운영권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였다. 물론 독점 계약을 따내려는 회사들이 저마다 로비와 뇌물 공세로 정치인들을 즐겁게 해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화색이 돌 만한 일이다. 이러한 영업 인허가 절차 탓에 TV 채널 세 자리 수 시대는 당초 예상보다 수 년 늦춰지게 되었다. 케이블 TV 제공사마다 정치적 곡예를 벌여 인가를 받아야 했고, 일단 운영권을 따내고 나면 돈과 수고를 들여 다양한 채널을 확보할 만한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지역을 두고 다툴 만한 경쟁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인들은 소비자를 보호하고 부담을 덜어 준다는 미명하에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부담을 되레 늘려 왔다.
유명 브랜드 상품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브랜드는 사실 대단히 좋은 것이다. 소비자에게 잘 알려진 로고는 품질 등에 대한 기대치를 수반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혁신과 가격 관리에 지속적으로 힘을 쓸 수밖에 없다.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같은 대형 체인점은 위장 손님을 고용해 자기 회사 지점들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시험한다. 이들 기업이 식품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데 들이는 정성 또한 지극하다. 정부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소위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국민의 안전을 우려한다. 그러나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등 공신은 정부가 아니라 자기들 브랜드 가치를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식품업자들이다. 이들 기업을 고객으로 둔 책임보험회사들도 보험금 조정을 통해 정부 규제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식품 안전을 유지한다. 타이슨 식품이나 맥도널드를 비롯한 회사들에게 있어 브랜드 가치는 수천만의 고객들이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때문에 이들은 수박 겉핥기식 위생 단속만을 하는 융통성 없는 농림부 소속 공무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품질 검사 방법을 동원한다. 이처럼 브랜드의 힘은 위생단속과 법적 규제보다 효과적으로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우리의 직관에 따르면 시장의 부도덕한 경쟁은 저임금으로 이어질 것이다. 비용절감에 필사적인 고용주는 임금을 깎고 또 깎고,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고, 안전대책은 나 몰라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진보주의자들은 노동자를 보호하라고 정부에 촉구한다. 그 결과 현재 미국에서는 시간당 최저임금 규정, 무보수 인턴십 제한, 고용주의 반노조행위 금지 등 수천 개의 법규가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규는 사실 노동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노동법은 특정 직종의 노동조합에게 강력한 독점권을 인정한다. CBS에서 일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AFTRA(미국 TV 라디오 연예인 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연예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 조합에 회비를 내기도 싫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CBS에서 일을 하려면 노조에 가입해야만 했다. 법률이 노동조합에 강제 가입을 규정한다는 것은, 원하는 바가 다른 수백만의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집단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이다. CBS에서는 아무도 천천히 일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지만, 노조 문화가 우리 모두를 천천히 일하게 만들었다. 카메라 기사가 차에서 내리는 데만 5분씩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카메라맨은 인터뷰 중 잠을 자기도 했다. 민간 부문에서는 경쟁을 통해 그런 태만함을 조절한다. 만일 스티브 잡스가 엄격한 조업 규칙과 고액 계약 등 노조의 요구에 굴복했다면, 연구개발에 투자할 돈이 줄었거나 제품 원가가 높아졌을 것이다.
민간기업 고용주는 종업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다. 종업원이 언제든지 회사를 그만두고 경쟁사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 부문과 달리 정부는 경쟁을 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몇 년 만에 한 번 오는 선거철에만 경쟁에 직면한다. 그러나 민간 부문의 사장들은 매분, 매시간 경쟁을 해야 한다. 아예 경쟁조차 없는 공무원도 있다. 관료는 철밥통이고 정치가들은 게리맨더링(선거구를 왜곡하는 행위)을 동원해 일의 성과와 관련 없이 매번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곳에서는 공공부문 노조가 직접 정치가에게 선거에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 정치가들은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치가는 노동자의 요구대로 임금을 인상해주고, 다음번에 노동자들은 그 정치가를 지지한다. 이건 완전히 돈 펌프(money pump)이다. 납세자로부터 공무원의 봉급으로, 노조의 회비로, 그다음엔 노조에 우호적인 후보자에게로 펌프질한 돈이 흘러가는 것이다.
고용의 안전성은 노조가 아니라 기업의 번영을 통해 이루어진다. CEO의 결정에 따라 회사가 이익을 낼지 그렇지 않을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노동자의 95% 이상이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다. 이것은 회사가 후해서도 아니고, 법률이나 노조 때문도 아니다. 바로 시장의 경쟁 때문이다. 회사는 양질의 노동자를 끌어오기 위해 높은 임금과 좋은 근무조건을 제시한다. 한때는 노조가 근무조건 향상에 도움을 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노조의 취업규칙은 회사의 유연성을 떨어뜨려 성장을 둔화시킨다. 결국 노동자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민간 부문 노조 가입률은 8%까지 떨어졌다. 노조가 있는 회사가 위축되고 있으니 가입률이 감소할 수 밖에 없다. 무노조인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미국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지만 노조가 있었던 TWA와 팬암은 사라져버렸다. 노동자를 실직으로 몰아가는 온갖 길을 보호하는 것이 노조규칙이란 말인가!
의료보장제도를 손보겠다고?
영국과 캐나다의 의료보장은 무료다. 물론 여기서의 ‘무료’가 세금으로 비용을 충당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료 의료보장이 개인의 의료비 지출을 줄이거나 평등한 치료가 목적이라면 이론적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사람이거나 기다려도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부가 주도하는 의료보장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여기까지다. 지속적인 두통에 시달리거나 무릎 수술을 받아야 한다거나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치료를 받기 위해 당신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정부의 비용절감 방식이다. 정부가 의료보험을 운영하는 나라에서는 비용을 줄이는 경우 모든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의료보장이 무료로 이루어지면 수요가 늘어날 것이 뻔한 일이다. 활용가능한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는 할당제로 시스템을 운영하게 된다. 문제는 할당을 하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당신? 아니면 정부 관료? 정부의 강제력에 의해 결정될 것인지, 아니면 개인들이 제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고 자발적으로 결정할 것인지. 물론 후자가 더 바람직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캐나다인은 할당제라도 상관없으니 캐나다의 무료 의료보험제도가 좋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 응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전화를 받을 때 아프지 않은 상태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150만 명 이상의 캐나다 사람들이 주치의를 두지 못하고 있다. 의료 수요가 공급을 항상 초과하다 보니 도시에서는 치료받을 사람을 추첨하는 이벤트도 벌어진다. 한 TV 쇼에서 시청 서기가 큰 상자에서 네 명의 이름을 꺼내더니 행운 당첨자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 연출된 적이 있다. “축하합니다! 선생께서는 이번 달에 의사의 진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응급실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 기분 나쁘다고? 캐나다에서는 평균 대기 시간이 23시간이다. 캐나다 의사들 말로는 중환자실이 꽉 차서 심장발작 환자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돈 많은 캐나다인들에게는 다행히 안전밸브가 있다. 국경 바로 남쪽에 거대하고 낭비적이며 이기적인 나라(미국)가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쟁은 우리에게 더 좋은 차, 더 좋은 전화기, 더 좋은 신발을 안겨주었다.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서는 어디로 가야 가장 좋은 치료를 받을지, 치료비가 가장 저렴한 곳은 어디인지, 금방 소문이 퍼진다. 병원은 치료비를 미리 공고해 놓을 것이고, 신용평가기관은 병원의 질적 수준을 평가해 놓을 것이다. X 병원은 바가지를 씌우는 반면, Y나 Z는 값이 싼데도 치료는 훨씬 잘해준다는 식이다. 환자가 선택권을 행사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보험회사가 환자를 대신하여 흥정을 해놓는다.
자유 시장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비꼰다. “세탁기나 컴퓨터처럼 신경 없는 아둔한 소비재의 경우에는 시장이 적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의료 서비스는 너무 복잡 미묘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의료 서비스는 분명 복잡하다. 그러나 자동차는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도 자동차 구매자들은 전문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차를 산다. 시장을 안내하는 일부 자동차 애호가들만 있으면 그만이다. 우리는 자동차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속속들이 자동차를 파헤친 그들의 노력에 무임승차를 한다. 정부가 참견하지만 않으면, 가격에 민감한 구매자들과 시장의 경쟁만 있다면, 무엇이 정말 좋은 자동차인지 모두 알아낼 수 있다.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의료 서비스를 위해 지갑을 좀 더 연다면 의료계는 훨씬 현대화될 수 있다. 시장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지갑을 열어 자기 돈을 쓰는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왜 식품에 폭탄을 퍼붓나?
우리 조상들이 자기 입에 무엇을 집어넣을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누군가 식품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이 위험하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쓸 만한 증거가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 결국 정부는 이를 빌미로 감독자 역할을 하게 된다. 뉴욕시가 레스토랑에서 트랜스 지방의 사용을 금하는 법령을 시행하자 미국의 주요 도시들이 똑같은 조치를 계획한 적이 있다. 트랜스 지방이 다른 지방보다 특별히 더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유익한 콜레스테롤을 약간 감소시키는 특이한 특성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뉴욕시는 트랜스 지방을 금지하면서 금지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어린이들이 심장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던지기도 했다. 식품과 관련한 과장은 일단 시작하면 끝이 날 줄을 모른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당신의 자유가 미친 듯한 속도로 억압된다.
뉴욕시가 트랜스 지방을 금지한 후 FDA(미국 식약청)는 식료품에 넣는 소금의 법정 허용치를 제시하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당신이 고혈압 환자이든 저혈압 환자이든 간에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적합한 소금의 양을 정부가 정해줄 수는 없다. 3억 명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올바른 소금 소비량이란 있을 수가 없다. 미국 고혈압학회 회장 마이클 앨더만은 “나트륨 섭취와 관련해 보편적 처방을 한 가지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미국은 지구상에서 소금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며, 우리의 소금 반대주의자 관료들은 전 세계에 걱정스러운 소금 반대 연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구의 나머지 나라들은 더 중요한 일을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다. 탄산음료도 타깃이 되었다. 2009년 뉴욕주는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청량음료의 단맛을 내는 시럽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나중에 뉴욕주 정부는 그 세금의 목적이 세수 확대였음을 시인했다.
나는 기업이 사랑과 선의를 가지고 운영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기업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더 많은 미국인이 건강한 옵션을 요구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버거킹은 두부버거를 내놓았다. 물론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성공적인 프랜차이즈들이 꾸준히 해왔던 것처럼 그들은 새로운 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그중에서 건강에 좋은 일부 아이템은 성공을 거둘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맥도널드에서 샐러드를 사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비만 위기를 떠들어댄다. 소비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정부가 나서서 세금을 새로 도입하고 우리의 선택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을 뚱뚱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스트푸드 식당에 소송을 제기한 경우도 있다. LA는 시의 가난한 구역에서 패스트푸드 식당을 새로 개업하는 행위를 불법화했다. 도대체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음식에 인공 화학물질이 많이 들어간다고 걱정을 한다. 과학자들은 점점 더 작은 화학 물질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고, 환경 활동가들은 ‘소비재에 숨어 있는 알려지지 않은 화학물질들’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써댄다. 그래,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치명적인 물질은 투여량이 너무 작아서, 해를 끼치기는커녕 생물학적 영향력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이다. 오히려 이런 공포심의 근원지는 규제 자체인 경우가 많다. 어떤 화학물질이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발견되면 식품에 사용되는 것이 금지된다. 발암물질의 정의는 무엇인가? 정부는 발암물질이란 투여량에 상관없이 실험용 쥐에게 종양을 일으키는 모든 화학물질이라고 정의한다. 법을 만들 때 이러한 물질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적은 양으로는 전혀 해롭지 않다는 생각을 못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많은 화학물질에 대해 정부의 금지 및 규제 조치가 내려졌다. 그 결과 제조업자들은 규제 법규를 빨리 따라잡아야만 한다. 끊임없이 생쥐 실험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새로운 화학물질로 제품을 바꿔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정부의 규제로 인해 물건 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냐, 불쾌감이냐?
내가 맨해튼 도심에 서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다. “컵케이크 팝니다.” 내 앞에는 다음과 같은 메뉴판이 있었다. <아시아인은 $1.50, 백인은 $1.00, 흑인은 50센트> 물론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 버크넬 대학에서 학생들이 시도한 행동을 흉내 낸 것이다. 학생들은 사람들이 차별철폐 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길 원했던 것 같다. 내가 인종차별주의 표지판을 들고 컵케이크를 팔자 사람들이 빤히 쳐다봤다. 한 백인 남자는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흑인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말했다. “매우 불쾌하군. 정말 모욕적이야.” 나는 사람들이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다. 인종적 차이를 강조하면 우리는 불편해진다. 하지만 버크넬 학생들도 나도, 소수자를 화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생색을 내는 차별철폐 정책의 본질에 대해 토론을 시작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버크넬 대학의 관리자들은 학생들에게 차별철폐 토론은 인가해 줄 수 있지만 빵 바자회는 안 된다고 했다. 다행히 교육인권재단이 캠퍼스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바로 권리다. 아무리 편향된 표현이라 할지라도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나의 차별철폐를 위한 컵케이크 이벤트는 유익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나의 인종주의 가격 목록을 보고 차별철폐 정책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현재 대학, 기업, 정부 등에는 성차별, 인종차별, 그 밖에 여러 가지 형태로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금하는 온갖 법규가 있다. 이런 법규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쉽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검열이라는 강력한 권력을 쥐어준다.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권력이 되면, 사람들은 더 쉽게 불쾌감을 갖는다.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케이트 샘 존슨이라는 사람이 『성모마리아와 K.K.K』라는 책을 공공장소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책은 결코 KKK(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 편향적인 책은 아니지만, 책 표지에 KKK 단원이 묘사되어 있었다. 표지를 본 한 소수자 학생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책을 읽는 샘슨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대학은 샘슨을 인종차별적 괴롭힘의 명목으로 고소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가진 나라이다. 에콰도르에서는 조세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불법이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경찰관이 불경스런 대화를 하는 사람을 찾으러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중국 공산당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까지 금지했다. 공산당 당국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기이한 플롯을 가지고 있으며 터무니없는 전술을 구사합니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표현에 대한 합법적 공격이 흔치 않지만, 상업적 표현에 대한 폭행은 많은 편이다. 워싱턴주의 한 베이글 가게 주인은 사람을 채용해 ‘신선한 베이글’이라고 쓴 홍보 샌드위치 보드를 입히려고 하다가 벌금을 물었다. 시 당국 얘기로는, 그 간판이 미적으로 매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당국은 검열에 맞선 권리 주장이 아니라 용도지역 이용을 문제 삼아 그를 고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현에 대한 공격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검열을 하는 사람들은 더 문명화된 관용적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표현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권력을 이용해 침묵시키는 것보다는, 표현으로 표현에 반응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교육엔 경쟁이 없다고?
오바마 정부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의무교육 체계와 거기에 종사하는 대량의 교사들에게 약 1조 달러를 투입했다. 오바마는 이것이 교사들의 대량해고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고 말한다. 여러 해 동안 들어오던 친숙한 이야기다. 공교육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 미국인들은 교육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것, 교사 봉급이 너무 적다는 것 등등. 하지만 예산 증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성적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이 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대다수의 서비스 분야가 품질, 효율, 가격에서 놀라운 혁신을 이루어냈지만, 교육에서만큼은 1970년대 이래 달라진 것이 없다. 이유는 무엇일까? 유치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교육이 정부 주도의 독점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과점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품질 향상의 일등 공신이며, 가격 절감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부의 교육 독점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패턴이 교육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시장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바로 그 때문에 교육 계획은 중앙 정부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개혁협의회에 따르면 교육 분야에서 정부 독점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노력은 번번이 연맹, 연합, 분과, 회의, 위원회, 협회, 무리, 떼 등 교육산업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갖가지 단체들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각각 나름의 비효율성을 지닌 이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폐쇄성은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들 지경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교원 노조이다. 이들은 “교사는 거지 같은 봉급을 받고 종일 뼈 빠지게 일만 한다.”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교사의 평균 연봉은 5만 달러에 육박한다. 근무 시간으로 나누면 건축가, 회계사, 간호사보다 많은 봉급을 받는다. 오늘날 공교육에 들어가는 돈은 1970년대의 3배에 달한다. 지난 40년간 공교육 종사자 수의 증가율은 학생 수의 증가율의 10배에 달했다. 들인 돈은 늘어났는데 교직원의 업무 능률은 그대로이다.
돈이 어디에 쓰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인가학교(Charter School) 중 대다수가 일반 공립학교보다 적은 돈을 가지고도 멀쩡히 굴러간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가학교란 기존 교육제도 및 규칙 중 일부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공립학교를 말한다. 오클랜드에 있는 아메리칸인디언 인가학교는 한때 밑바닥을 헤매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한다. 이 학교 교장 벤 채비즈는 이렇게 말한다. “난 교사 평가 같은 것은 하지 않소. 내가 수업시간에 들어가 봐서 애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당신은 잘리는 거야.” 대다수의 인가학교는 일반 학교에 비해 하루 일과가 길다. 교사들의 근무시간이 길다는 뜻이다. 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 교사가 나에게 “우리가 내고 있는 성과를 본다면 짜증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이것이 이들의 성공 비결이 아닐까? 더 근본적인 해답을 찾자면 정부의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허용하는 것이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어떤 학교가 우수한 학교인지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시장이란 본래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전자제품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소비자라도 아이폰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전해 듣게 되어 있다. 우수한 공급자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공급자는 점차 사라진다. 그러나 기성 교육 체제의 덩어리가 교육을 쥐고 흔드는 한, 학교는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다른 일은 몰라도 국방은 정부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미국 헌법에도 그런 조항이 있다. 나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전쟁을 시작했을 때 부시가 침대 곁에 두었다는 나탄 섀런스키의 책을 읽었다. 섀런스키는 책에서 “만약 중동이 자유로워진다면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좌익 성향의 사람들은 부시가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공격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부시는 민주화된 이라크가 진정한 평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믿었다. 그는 미국을 보호하고 세계를 돕길 원했다. 존슨과 닉슨 두 대통령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요즘 우리는 베트남과 거래를 하고 있다.
만약 군대의 임무가 방위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방위의 개념을 채택해야 한다. 미국이 세계 다른 나라의 문제를 떠나 우리 영토만 보호한다면 연간 약 7,5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쓸 필요가 없다. 오늘날 미국이 쓰는 국방비는 세계 다른 나라의 국방비를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다. 우리가 국방비를 반으로 줄여도 여전히 경쟁국보다 많은 국방비를 지출한다. 미국이 세계 곳곳에 군인을 주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예를 들어보자. 북한 정권은 한국 안보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력은 북한의 38배이다.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자원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부담할 수 있는 비용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미군이 주둔하고 비용도 부담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태가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까?
사람들은 냉전시대 레이건 대통령의 군비 증강이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믿는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 로큰롤의 전설 브루스 스프링스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8년 동베를린에서 시민 16만 명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스프링스턴은 공연을 멈추고 군중에게 말했다. “나는 언젠가 모든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여러분께 로큰롤을 선사하고자 여기 왔습니다.” 1년 뒤 베를린 장벽은 진짜로 무너졌다. 이처럼 냉전 시대의 종식에는 소련의 침체된 문화와 미국의 활기찬 문화 간의 명백한 대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장경제의 극적인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은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국방에 지출해야 하는 돈의 올바른 총액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국방비 지출이 물가 상승분을 감안하더라도 냉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국방비로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다<“왜 정부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존 스토셀 지음, 역자조정진, 김태훈님, 글로세움>
▣ 저자 존 스토셀
거침없는 자유지상주의자, 경제에 해박한 언론인, 솔직 담백한 인터뷰어. 존 스토셀을 설명하는 대표 키워드들이다. 독자와 시청자의 극찬과 질타를 당당히 즐기는 이슈 메이커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면목은 그가 진행하는 쇼와 스페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폭스TV의 경제 전문 채널인 <폭스비지니스 네트워크 쇼>에서 주간 스페셜을, 폭스뉴스에서 스페셜을 진행하고 있으며, <The O’Reilly Factor>를 비롯한 몇몇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공중파 TV ABC 등에서 30년 이상 소비자피해조사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에미상을 열아홉 차례나 수상했고, 미국 언론인클럽에서 주는 소비자를 위한 보도에 기여한 언론인상을 다섯 차례 수상했다. 두 권의 저서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목록에 20주 이상 오르기도 했다.
<녹차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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