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비만과 가정!

[중산] 2012. 12. 7. 17:13

 

 

 

시드니 항구에서 두어 시간쯤 가다 보면 시드니의 마지막 남은 녹지대를 침탈한 켈리빌이 있는데, 이곳에 모델하우스 단지인 홈월드가 있다. 홈월드는 빌드 어 베어(각 부위를 취향대로 골라 조립할 수 있도록 한 인형 판매점)처럼 집을 이리저리 합치고 나누고, 채울 수 있는 거대한 주택 대형마트이다. 이곳에서 천국에 온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건축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반나절만 보내도 깊은 실존적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절망, 내가 없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절망 말이다. 이는 단지 일률적인 거대한 성 같은 주택들 때문만은 아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죽고 싶도록 절망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이것을, 이 주택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맙소사, 정말 추하군. 하고 말한다면 속물로, 엘리트주의자로 혹은 그중 최악인 지성인으로 매도당할 것이다. 추하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판단적인 언어이다. 계층 간의 차별이 없다고 생각되는 호주사회에서조차 계층 구분에 대한 모든 비판을 계층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맥맨션랜드: 사실은 켈리빌의 추함은 계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문화나 부, 윤리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호주 건축가 로빈 보이드는 1960년 글을 통해 피처리즘(featurism, 최초의 디자인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 더욱 복잡해진다는 의미의 신조어)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농부건 왕자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은 전시적인 것을 경멸하며 피처리즘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반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지도 않고, 시각적인 것에 기민하지도 않으며, 외로움으로 생긴 약간의 신경과민을 겪고 있는 호주인은 피처리즘의 정도와 빈도도 거의 정하지 않는다.

 

 

사실 대충 훑어만 봐도 교외의 부유한 주택단지들은 출세 지향적 성향만큼이나 추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낸다. 이따금 나치처럼 획일화된 모습에 아직 물들지 않은 나무들로 그 추함을 우아하게 숨길 뿐이다. 모스크바에서 리옹, 덴버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도시들 역시 맥맨션주의의 확산으로 밤색 실내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드러난다. 1990~2003년 평균 가족 구성원이 40%가량 줄고 농지의 면적은 대략 절반가량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지역의 주택 평균 크기는 놀랍게도 60%가량 증가했다. 덕분에 270㎡라는 넓은 면적이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적정 주택 용지 크기가 되었다. 이들 주택은 단순히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리석 욕조, 금으로 도금한 욕조 수도꼭지, 홈시어터, 드레스 룸, 게임방, 욕실에 딸린 방, 4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 등 더욱 현란하고 더욱 화려한 군더더기들을 기대한다. 비대하게, 더 비대하게, 가장 비대하게.

 

 

골드코스트의 미셸은 방송 <60분>에서 말했다. 우리 첫 집은 12㎡ 정도이었지요. 지금 이 집은 260㎡랍니다. 공사가 끝나면 그녀는 남편 크리스와 7개의 침실과 9개의 욕실, 제습기가 달린 옷장들을 갖게 될 것이다. 비용은 약 1,650만 달러가 소요될 것이다. 관대하다고? 물론이다. 정부와 주택시장은 이러한 형태에 미소 짓는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결핍이 있다. 10만여 명의 호주인들이 거리에서 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택 구입능력 위기로 젊은 사람들이 주택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도 아니다. 이 속에는 왜?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왜 거대한 부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더 거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가? 왜 교외에 가득 들어선 집들은 그토록 추한 것일까? 이것은 미적인 혐오인가, 아니면 도덕적 혐오인가?

 

 

뚱뚱한 도시: 2006년 9월, 모나쉬 대학의 국제당뇨연구소 소장인 폴 짐맷 교수는 국제비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밀하고 서서히 퍼지던 비만이 이제 전 세계를 뒤덮었다. 서양 선진국의 생활습관과 식습관이 불행히도 개발도상국에 정착되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들은 자전거 전용 도로나 운동장, 혹은 운동경기를 할 수 있는 공간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 곳에나 맥맨션을 허용해서 비만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도시의 확산과 비만과의 상호관계를 여전히 부인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 상관관계에 수긍하는 공중 보건 전문가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인 앤서니 캐폰(호주 보건정책 연구소)은 이렇게 말한다. 교외지역 개발에 따른 건강과 사회의 잠재적 결과를 보면, 현재 우리가 도시를 개발하는 방식을 재고하게 된다.

 

 

집의 크기는 두 배가 되었을지 몰라도 도시 구획은 평균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가족 구성원 역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1950년대와 비교했을 때 주택의 뒷마당은 거의 사라질 정도로 줄어든 데 비해, 1인당 집 안에서 차지하는 공간의 비율이 4배가량 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병적일 정도로 강박적인 양육방식 때문에 아이들은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거나, 방과 후 친구 집이나 이웃집을 배회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집에서 과자를 먹으며 게임을 한다. 미 국무부는 67%의 아동들이 하루에 최소 2시간은 TV를 본다고 발표했다. 인터넷과 게임을 하는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하루에 4시간 이상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맥맨션주의, 공동체, 두려움: 리차드 세네트는 저서 『눈의 양심』에서 현대 서구 문화는 내면성과 외면성의 분기점에서, 주관적인 경험과 세속적인 경험, 즉 자아와 도시의 분기점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이 분기점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결과적으로 소비와 관광을 조장하는 제한된 공간과 하나같이 몰개성적인 공간으로 중립화된 도시를 만든다. 현대 도시에서 공공장소는 촉감과 질감을 부정하는 감각상실 훈련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세네트는 다른 저서 『살과 돌』에서 그 원인이 안락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TV 시청처럼 안락만 추구하는 많은 다른 행위들은 우리가 체중감량에 병적인 수준으로 집착하게 하는 것 같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도 낳는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이 평화롭게 되는 것을 지켜본다. 맥맨션은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밀폐되고, 냉난방이 조절되고, 막다른 골목에 위치하고, 해충이 방제되고, 안전설비를 갖추고 보통 문이 달린다. 세네트는 이러한 고립을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연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실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두려움은 아름다움, 물질, 건축 등과 같은 것들을 배제라고 하는 무기로 바꾼다. 물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두 필요 이상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근사한 자동차, 고급 주방용품들 등 단순히 갖고 싶다는 이유로 소유한 물건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물건에도 잔인한 배제의 규칙이 있다.

 

 

어떻게 비용을 들이지 않고, 지구를 망가뜨리는 것들에 표지를 달 것이며, 어떻게 그들이 아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건축은 공동체의 기본 도구이다. 그리고 건축 역시 고유의 제외 규칙이 있다. 건축의 기본은 선이다. 모래 위의 선, 제도판 위의 선, 준공도의 선, 그리고 이 선은 가장 궁극의 배제 장치이다. 선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안과 밖을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나눈다. 선은 밖을 만듦으로써 안을 만든다. 밖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그들이다.

 

 

안에 있는 것은 우리이다. 우리는 밖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우리가 된다. 그래서 현대의 개발업자들은 집이 아니라 가정을 판다. 부동산이 아니라 공동체를 판다. 진짜 공동체라 해도 공동체는 규칙들이나 배제, 순응주의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는 공동의 목표가 필요하다. 하나는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가장 귀중한 상품, 바로 시간이다. 다원적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응집력은 생기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원칙만은 확실하다. 공동체가 다원주의, 솔직함 혹은 민주주의를 희생양 삼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체가 순응주의를 강요하고, 반대를 금지하고, 포괄적으로 되려 한다면, 그것은 가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정교한 보호 장치와 전환 장치가 있는 맥맨션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수많은 부인 전략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역효과를 낳는다. 창조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움직이는 가면이 아니라, 봉인되고 단단해진 죽음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경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역자 박여진님, 베이직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