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일까?: 오랫동안 호응을 얻어온 민주주의는 실제로 안정성이 보장된 보증수표였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서 민주주의의 견고함은 무력해졌다. 자본주의 연맹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이는 민주주의의 강점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그것이 우리의 권리이다.
원하는 것과 권리 사이에 편리하게 생략된 부분은 광고(당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속삭이는)와 법제도(누구를 고소할까?), 그리고 풍족한 생활(늘 육체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는 체제) 등이 채운다. 그리고 늘 책임을 전가하는 환경이 조성된 보모 왕국에 의해, 죽음이나 질병 따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닌 불쾌한 것들을 상영하는 무대 밖으로 밀쳐버리는 현대 의학에 의해 유지된다.
이제 욕망을 성취하려는 바로 그 강박이 민주주의의 덫이 되어버렸다. 환경에 지대한 해악을 끼치는 고기를 먹고 싶다면 먹어야만 한다. 조용한 도시의 외곽까지 도시를 확장하고 싶다면, 맥맨션에 살고 싶다면, 밤새 불을 켜두거나 물을 틀어두거나 TV를 켜놓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욕망으로 우리와 지구는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다. 심지어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규제하는 데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석탄을 때는 전기 외에 다른 전기를 선택해야 한다면, 월권을 행사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에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세를 실행해야 한다.
정부지침은 양육과도 같다. 현대의 잘못된 양육방식은 잘못된 정부지침과도 상당 부분 연관이 있다. 현대의 부모들은 두려움이 자식들에게 부정적인 정서를 유발한다고 생각해 훈육을 하려 들지 않고,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요구 조건이 많고 성미 고약한 유권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정치를 하려 들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권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유권자에게도, 정책결정을 내리는 정치인들에게도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면서 집단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행자의 권리를 더 많이 달라고 주장하면서도, 운전을 할 때면 보행자의 권리 때문에 만든 과속방지턱이나 이런저런 도로안전장치들을 성가셔하지 않는가? 세금을 낮춰준다는 정치인에게 투표를 하면서도, 지루한 병원의 대기 시간에 염증을 느끼지 않는가? 이러한 대부분의 갈등에 대부분 사람들의 양면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갈등은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사사건건 집단적인 본능을 강화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모순이다. 이는 그릇된 욕망의 형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욕망은 현저성 증후군에 의해, 늘 행위의 결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에 의해 이끌려 다니게 되며, 그러다 보면 멀고,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욕망보다는, 나를 위한 욕망에 더 이끌리게 된다. 여기서 빚어지는 충돌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나 강의 댐 수위 등이 ‘내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소 누그러진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사람을 선출한다. 비만이나 소비주의, 도시확산 등과 마찬가지로 기후 변화도 본질적으로 규율 혹은 규율의 부재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기후문제가 정치화되면서 보수진영의 로비스트들은 마치 규율이 간신히 사회주의자의 부활을 위장한 것처럼 군다. 기후 변화와 관련한 예측성 논의들은 좌파의 책략 취급을 받는다. 피해망상에 걸린 미친 짓이지만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관대함, 선견지명 혹은 당치도 않게 이타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철저한 이기주의에 기반을 두고 위선의 탈을 쓴 전체주의이다.
속도 낮추기와 두드러진 변화-실제 비용: ‘큰 변화’가 대중의 무의식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얼마나 진짜여야 꿈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진짜 비용은 얼마일까?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힐 앤드이다. 이 마을에는 제대로 된 커피와 진정으로 술집다운 술집이 있다.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용기 없는 사람들은 이 마을 여행에 적합하지 않다. 외지인을 경계해 마을 전체를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이 성벽 때문에 힐 앤드는 다른 호주 마을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벽 마을을 보호했는가? 내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들은 여러 차선의 도로들과, 여러 대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 창고형 마트, 호주에 도시 생활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상징하는 대형 교회 등에 굴복당했다. 반면 힐 앤드 같은 내륙 도시들은 관심 밖에 있었던 덕에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힐 앤드 같은 마을을 찾지 않았다. 바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무리 지어 찾는 해변의 마을들은 바로 그 무리들에 의해 그 명성이 손상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딜레마이다.
우리는 바다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바다를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에 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외생활과 똑같은 문제가 바닷가에도 존재한다. 타지 사람들이 들어오고, 땅값은 치솟는다. 심지어 땅을 팔기를 거부했던 지역 주민들도 부동산세의 압박을 받는다. 잎이 무성한 곳에 있던 오두막집들은 돌출되고, 부담스럽게 바닷가 전망을 해치는 번쩍거리는 아파트들로 바뀐다. 작은 상점들은 주차장이 딸린 대형 마트로 바뀐다. 멀티플렉스 극장도 들어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닷가 마을은 사라지고, 눈앞에서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던 그 교외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가능성은 ‘느린 건축’이다. 도심에서 유행하는 슬로우푸드와 같은 개념이다. 느린 건축은 굳이 아름다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공간의 유기적인 일관성을 알릴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느린 건축은 보통 인내심을 가지고 건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건축 환경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다시 도입하게 되며 영원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빠르거나 저렴하게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을 좋은 건축물의 으뜸 요소로 꼽는 건축 시장에서, 저렴하지도 않은 느린 건축물은 지나치게 값싸지 않은 적절한 가격으로 지을 수 있다. 호주에서 느린 건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남부 산악 지대에 있는 툴림바 신도시이다.
툴림바는 네빌 프레드릭의 머리에서 나온 산물이다. 프레드릭은 전통적 양식의 집을 짓는 건축가들 중 한 명이다. 프레드릭은 현재 양을 기르는 농장주로 이전에는 전통적인 토지 분할 계획에 불만을 품고, 계획적으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루하게 여기던 개발업자였다. 프레드릭의 해결책은 효율적인 농촌마을을 짓는 것인데, 이 계획은 매우 현명하고, 사려 깊으며, 혁신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빠른 복귀는 중요하지 않다. 매각 계획은 없다. 도로와 농지, 마을이 우선 세워질 것이다. 둘째, 주주가 없다. 프레드릭의 회사는 가족 소유이다. 따라서 그들만의 방식대로 재량껏 ‘이윤을 추구하는 동기’를 설명할 수 있다. 셋째, 프레드릭과 그의 딸들 그리고 지배인 제니퍼 맥쿼리는 베가나베리, 베리마, 티로울 등과 같은 호주의 전통적인 지역에 대해 열심히 연구를 했고, 세계의 지도적인 신흥 어버니스트들에게 자문을 구하고는, 느림, 거리 주소, 규모와 밀도 등과 같은 원칙을 모방했다. 하지만 그들의 건축형태는 모방하지 않았다.
프레드릭은 새로운 시도를 위해 투쟁을 해야 했다. 대형 슈퍼마켓을 짓고자 하는 업자들에 맞서, 기존에 있던 가로수를 가지고 싶어 하는 지역 협회에 맞서, 더 넓게 확산하기를 원하는 지역 자치단체에 맞서. 그리고 그 첫 번째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깜짝 놀랄 만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친근하고, 마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고, 적당하며, 조밀하다. 전력 공급이나 물 공급이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아껴 쓰고 조밀하게 모여 살며 에너지 낭비의 최소화를 지향한다. 학교는 현재 공사 중이며 4층짜리 마을 회관과 아파트, 상점, 상업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느린 건축은 땅 소유주와 경작, 어느 정도의 이타심 등의 조건이 골고루 맞아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개발업자들에게는 다소 지루한 일정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가? 네빌 프레드릭도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정부는 하지 못하는가? 효과가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는 확산을 억제함으로써 전통적인 유산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개발 관리법이 20년 동안 워싱턴, 텍사스,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주 등을 포함해 13개 주에서 실행되고 있다. 계획을 구상한 사람들은 이러한 법이 효과가 없다고 말하고, 개발업자들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호주에는 이와 비슷한 법조차 없으며 생길 가능성 또한 없다.
왜 이런 법을 제정하지 않는가? 부분적으로는 정부가 시장의 신성한 원칙에 끼어들기를 주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호주인들이 미국을 온갖 쓸데없는 것들의 원천으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호주에는 없는 구조적인 문명화 장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의미 있는 법제도 등과 같은 장치 말이다. 특히 호주에는 ‘제3부문(국가나 지자체가 공공 목적으로 행하는 사업과 민간 기업이 영리 목적으로 행하는 사업의 중간 정도에 있는 부문)’이나 ‘직접민주제’에 상당하는 제도도 없다.
미국에서는 제3부문 혹은 비영리 부문이, 국가를 주변의 잘 만들어진 조직으로 활용하여 ‘디자인에 의한 활동적인 삶’ 등과 같은 도시의 확산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압력 단체들을 만들고, 건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각기 다른 100여 개의 환경 단체들의 연합인 ‘슬기롭게 성장하는 미국’, 도시계획 전문가, 반확산 정책 등을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적 차이점들을 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편협한 이기심에 굴하지 않고, 광범위하고 더욱 공동체적이며 더욱 이타적인 수준의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행복의 경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역자 박여진님, 베이직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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