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지지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극복하자
어김없이 앞을 가로막는 이차방어선: 부정적인 테이프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어떤 무엇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의 토대였던 엄격한 구조물에 금이 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곧 우리 앞에 강요된 자아의 경고와 비난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난다. 판단의 벽을 구성하는 벽돌들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걸.”이라는 비판적인 일침으로 우리를 신랄하게 자극하며, 이전의 위치로 서둘러 돌아가도록 유혹한다.
샐리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고 두려운 선입견에 사로잡혔다. 샐리는 자신이 ‘무신경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밥 역시 마찬가지다. 밥이 옥상의 의자에서 느긋하게 긴장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휴식을 방해하는 심판자가 다가왔다. “넌 게을러.” “넌 쓸모가 없어.” “왜 일 없이 이러고 있어?” 오래된 판단의 구조물을 떠받치는 벽돌이 낡은 메시지를 들고 나타나면, 그것을 길 가장자리로 던져버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우리 문화에는 자기지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해자들이 차고 넘친다. 예로 ‘거만한’ ‘주제 넘는’ 같은 라벨이 우리의 자아 확인을 질책한다. 또 긍정적인 성취를 하면 운에 공을 돌린다. “운이 좋아서 합격한 거야.”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결과의 책임은 당연히 자신이 되돌려 받는다. 이차방어선과 싸우는 것은 일차방어선 때만큼 힘들다. 하지만 과정은 다르지 않다. 새로운 자기 메시지를 벌하는 부정적인 라벨과 파국에 도전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니?” “이것이 도움이 되니?” 등의 기타 질문이 일차방어선을 타결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처럼, 이것들이 두 번째 장애물도 지나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자기지지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조종자: 가끔씩 이차방어선은 자기지지 대화라는 새 와인을 통과라는 낡은 병에 다시 집어넣으려고 한다. 이런 조종자들은 자기지지가 초기에 완전하지 못할 때, 혹은 부정적인 자기대화가 빨리 사라지지 않을 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리즈의 예를 보자. 리즈가 자신을 위해 했던 모든 지지행동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매우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리즈는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리즈에게 빈 의자에 자아를 앉히고 그것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보여 달라고 했다. 리즈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는 왜 그렇게 느리니? 뭘 해야 될지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도 있어.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그 순간 리즈는 즉시 그 스트레스의 원천을 알았다. 새 조종자, 즉 ‘서둘러라, 완벽해라, 열심히 노력해라’가 여전히 개입하고 있었고, 자기지지를 하려는 리즈의 새로운 결정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 조종자들이 리즈의 의식 레이다망 아래에서 스텔스기처럼 움직이면서 에너지와 열정을 끌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리즈는 빈 의자로 가서 다음과 같이 맞받았다. “나한테 맞는 속도로 좀 가게 해줘. 이 모든 압력이 날 완전히 지치게 해. 그냥 내가 갈 테니 날 좀 내버려 둬.”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게 하는 헛된 자존심: 자기지지 발달의 마지막 장애물은 정신분석가 카렌 호니가 ‘헛된 자존심’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요된 자아의 기대와 요구를 내려놓기를 거부하곤 한다. 왜냐하면 기대만으로도 자기 증오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부적절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정도만큼 이상적인 이미지로 우리 자신을 재창조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에 있는 기본 믿음은 “내가 이런 존재, 혹은 저런 존재가 되어 이루고 성취할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다. 이런 예는 박사학위를 따는 것에서 연봉 5억 원을 버는 것까지, 또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서 괜찮은 사회적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가치를 외적인 것에 두는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가 부족하다. 외적인 것만을 토대로 하는 자부심, 혹은 자기존중감은 내재된 자아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괜찮은 사회적 그룹에 소속되는 것이 지겨울 수도 있고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연봉 5억 원은 건강이라는 비용을 치르게 할지도 모르고, 고립과 때 이른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다. 헛된 자존심이 이토록 완강한 것은 강요된 자아의 표준을 유지하고 따르면 상을 받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신념 때문이다. 한편 이안 플레밍은 인간의 이런 갈망에 힘입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모델로 삼는 환상적인 이상형 제임스 본드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존 경쟁, 거부, 제한된 성공이 존재하는 진짜 세계에 대한 회피일 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다. 판단 모델의 덫에 갇힌 사람들에게 환상은 유일한 도피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탈출 방법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이미지로 재창조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할 수 없다.
<“더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파멜라 버틀러 지음, 역자 박미경님, 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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