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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고 성실한 삶!

[중산] 2012. 12. 26. 14:34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완벽한 행복을 손에 넣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그 이후에도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허황된 믿음에 철석같이 매달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결코 이루지 못할 일을 두고 끊임없이 상처 받고 좌절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좋은 날 이라도 곧 끝나며,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장미가 가득 핀 시골집 정원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날 오후처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에 후회할 수밖에 없다. 장미는 가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금세 시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이라도 며칠 보면 지겨워진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는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려고 결심하고, 자신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영화나 광고, 겉만 번지르르한 잡지에서 뭔가 주워듣고 인생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저기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는 완벽한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을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은 의자나 바위처럼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변하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불확정하고 불명확한 존재다. 우리 모두 자유로우며, 자유롭기를 그만둘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 삶은 욕망과 죄책감과 불안으로 가득하다.

쉽게 말해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對他存在, being for others)에 대한 불안이다. 우리는 이런 불안 탓에 죄의식, 수치심, 곤혹감 같은 감정에 시달린다.

이 모든 게 부족하기라도 한지 우리는 무의미한 우주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무의미한 우주에서 신은 있다고 해봐야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며, 최악의 경우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존주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반허무주의적인 철학이다.

실존주의 철학이 인간존재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불합리하다는 사실에도 우리가 성실하고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큰 줄기는 이렇다. 우리는 거짓(환상)에 기반을 두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치 있고 성실한 삶을 창조해낼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그 이해를 기반으로 인생을 창조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한 행복, 완전한 충족처럼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고 자신을 기만하며 살 뿐이다. 역설적으로 실존주의에서는 행복하지고 싶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완벽한 행복을 손에 쥐려고 아등바등하는 일은 당장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는 실망에 이르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는 삶이 본질적으로 불합리할뿐더러,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진실로 가득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 인생의 고난과 맞서는 노력을 통해 자신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부조리한 삶은-아니 차라리 죽음은-결국 승리를 거두고 말테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력하고 극복하는 여정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 처한 현실을 실존적으로 설명하면서 얼핏 염세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낙관적인 결론을 이끌어 낸다.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시의 고난처럼 부조리하고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그런 인생이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 인생 자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고 언제나 결과가 똑같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버둥 치는 노력을 통해 목적의식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에 참가하여 활약을 펼치는 방식으로 자기 인생에 목적을 부여할 수 있다.

 

덴마크의 기독교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와 무신론자이자 낭만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이 실존주의라고 불릴 철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들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20세기 초반 야스퍼스가 실존철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실존철학의 대열에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메를로 퐁티, 알베르 카뮈가 합류했다.

 

사르트르가 1946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에는 본질적으로 관념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 관점이 분명하게 요약되었다. 즉 어떤 사물에 실재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적이고 내세적이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의자나 바위 같은 사물 존재가 있고, 이런 일련의 사물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는 의식뿐이다. 여기에서 의식은 오직 ‘그 무엇인가에 관한 의식’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는 무(無)인 존재다.

 

인간존재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는 경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인간은 아무런 목적없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후 자신에게 결여된 의미나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풀이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본질 말고는 아무런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류 실존주의는 반관념론적이고 반형이상학적이며 무신론적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의미가 없는 나머지 부조리할 지경인 무심한 우주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발견되는 의미는 어떤 것이든 개인의 실존 범위 안에서 개인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정해졌다고 생각하거나, 신 혹은 신들에 의해 인간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의 늪에 빠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멍청이로, 어른답게 철이 들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실존주의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사상가들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와 덴마크의 위대한 기독교철학자 키르케고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실존주의 사상가가 분명하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또 다른 실존주의자 셰익스피어, 특히 ‘햄릿’‘리어왕’ 같은 위대한 비극을 비롯한 장중한 작품에서 성숙한 셰익스피어는 뼛속까지 실존주의자다.

 

실존주의자가 되려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다. 의지가 약하거나 소심한 사람, 난관에 부딪히면 바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근거를 파헤치기 위해서,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반이 지금보다 훨씬 단단한 곳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왜 남자의 본성은 본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실제로 실존주의는 인간 의식의 본질에 대한 이론에 기반을 둔다. 인간 의식의 본질을 다룬 이론은 위대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와 게오르크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져보면 실존주의는 ‘현상학’이라 불리는 철학 이론에서 갈라진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시간과 자유, 인간관계, 자기기만, 진정성 등에 대한 주장은 모두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이론으로 뒷받침된다.

 

사르트르는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확신한 나머지 가장 위대한 저서에 ‘존재와 무(無)’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에서 무(無)는 의식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시간은 물질인가? 우리는 시계로 시간을 잴 수 있고, 시간이 빨리 혹은 느리게 흐른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한 줌 쥘 수도 없고 그 위에 핀을 꽂아 고정할 수도 없다. 시간은 실재하지만 물질이 아니다. 우리가 심리상태라고 부르는 믿음이나 기대, 불안 등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존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철학자는 ‘사물과 관계“라고 짧게 답했다. 운동화나 테이프는 물질로 구성된 사물이다. 의식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사물이 아닌 관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뇌가 없이도 의식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존주의자는 몸이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의식이나 유체 이탈 체험, 귀신이나 유령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의식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뇌가 있어야 하며, 생명의 징후가 증명되는 대로 뇌가 파괴되면 의식도 파괴된다.

 

그 사람의 욕구나 생각, 기대는-물론 뇌가 없이는 어떤 욕구나 기대도 품지 못하지만-머릿속에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구나 기대는 오히려 그 사람과 세계의 ‘관계’라는 성격을 띤다.~.<“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님 옮김, 황소걸음출판>게리 콕스는 영국 버밍엄대학교 철학박사, 모교에서 명예 연구교수로 재직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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