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의식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점을 확신한 나머지 실존주의에 대한 위대한 저서에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에서 無는 의식의 존재를 가리킨다. 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무 혹은 비존재라는)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물질이나 원자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간은 물질인가? 우리는 시계로 시간을 잴수 있고, 흔히 말하듯이 시간이 빨리 혹은 느리게 흐른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한 줌 쥘 수 없고, 그 위에 핀을 꽂아 고정할 수도 없다. 시간은 실재하지만 물질이 아니다. 우리가 심리상태라고 부르는 믿음이나 기대, 불안 등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의식이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며 사물이 아닌 관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뇌가 없이도 의식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존주의자의 표현을 빌리면 의식은 ‘구현되어야’ 한다. 다소 재미없지만 실존주의자는 몸이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의식이나 유체 이탈 체험, 귀신이나 유령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뇌가 있어야 하며, 생명의 징후가 증명되는 대로 뇌가 파괴되면 의식도 파괴된다. 하지만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 뇌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의식이 ‘단지’ 뇌의 활동에 불과하다거나, 의식을 뇌의 활동으로 ‘한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사람의 욕구나 생각, 기대는 머릿속에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과 세계의 ‘관계’라는 성격을 띤다. 등산할 계획을 세운 산에 생각할 때 나는 마음의 눈으로 뇌 속에 있는 산의 작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저 바깥에 존재하는 산에 대해 생각하고, 산을 '지향하는(intending)' 것이다. 내가 산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 산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고 보는 관점은 ‘지향성 이론’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지향적 대상, 의식에 비춰서 나타나는 현상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가 빅토리아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사랑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데이비드가 빅토리아를 볼 때마다 느끼는 행복, 빅토리아를 생각할 때 일어나는 욕망, 데이비드가 빅토리아에 대해 호의적으로 하는 말, 빅토리아를 도와주고 보호하고 싶은 데이비드의 소망 혹은 의향 등으로 구성된 지향적 대상이다(이 경우 심리적 지향적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총체적으로 빅토리아아에 대한 데이비드의 사랑이라 지칭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또한 지향적 대상, 의식에 비춰져 나타나는 ‘현상’의 집합이 될 수 있다. 사르트르는 현상이 현상으로서 실재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존재와 무”의 명시하듯이 “현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나타나는 것’이란 본질적으로 그것이 누군가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머그잔이 머그잔으로 존재하는 것은 누군가의 앞에 나타날 때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던 사르트르는 위대한 독일 철학자 칸트풍의 소위 ‘초월적 관렴론’개념과 마주한다.
사르트르는 수많은 저서에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자신이 ‘획일적 존재(Undifferentiated being)'라고 부르는 존재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획일적 존재에는 아무런 속성도, 특색도, 성질도 없다. 의식은 획일적 존재에 특정한 무, 결여, 결핍, 부재를 부여하는 존재다.
사르트르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의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과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의식 활동의 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관망하는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의식과 존재사이에 있는 밀접한 ’관계‘의 산물이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 안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 안의 힘을 찾아주는 일은 실존주의자가 되는 계획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항목이다.
곡예사가 떨어지지 않고 줄을 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과 자신감이 필요하듯이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기를 선택하는 사람,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사고하고 자신 없게 행동하기를 선택하는 사람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 갈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무엇인가 결핍된 것, 빈 것,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일이 되기를 기다리고, 미래의 충족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음이 마지막으로 남은 충족, 유일한 가능성이 되는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숱한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우울해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라면 현실이 가혹해도 우울해하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일인걸. 신경 쓸 필요 없어. 난 그래도 내 인생을, 아무 데로도 향하지 않는 이 가혹한 여정을, 내 ‘자유’를 최대한 누려볼 작정이야.”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님 옮김, 황소걸음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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