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자아로서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사람은 참사랑을 알게 되고, 또한 그때에 사람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우리들 자신-우리들의 동물적 자아-보다도 다른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감정이다.
참으로 사랑은,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내적 활동이다.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이 이해하며, 또 그렇게밖에는 이해 할 수 없다. 사랑의 양은 분수의 양과 같다. 그 가운데 분자-즉, 다른 사람에 대한 편애.동정-는 나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으나, 분모-즉,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는 내가 자신의 동물적 자아에 무게를 두는 비율에 따라서 무한히 증감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사랑과 그 고도(高度)에 대하여 우리의 세계가 내리는 평가는, 분모를 고려하지 않고 분자만으로 판단한 분수의 양의 평가이다.
자기의 삶을 동물적 자아의 생존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에게 있어서, 정면으로 자기의 삶에 반대되는 활동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은 동물적 생존의 행복 속에만 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러한 행복을 희생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인생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가령 성심껏 사랑의 활동에 몸을 바치고 싶어도 인생을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자기의 모든 관계를 변경시키기 전에는 결코 그처럼 활동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의 삶을 동물적 자아의 행복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산을 모아서 쌓아 두고, 남을 강제로 자기의 동물적 행복에 공헌하게 하고, 자아로서의 자기의 행복을 안전하게 하는데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러한 행위에 의하여 한평생 자기의 동물적 행복의 수단을 증대시켜 나간다. 그러나 자기의 삶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것을 희생시킬 수 있겠는가, 또는 자기가 쌓아 둔 재산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에게 양도하면 좋은가하는 것의 결정이리라.
자기의 삶을 희생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들로부터 빼앗은 초과분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리고 또, 더욱 어려운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기 전에, 즉 자기 희생에 의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로 되기 전에, 그는 먼저 미워하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악을 행하는 것을 그치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좋아하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남들을 만족시키는 사랑의 활동은, 행복을 자아로서의 삶 속에 두지 않고, 따라서 거짓된 행복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그것에 따라서 인간에게 특유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박애를 자기 내부에서 자유롭게 해방한 그런 사람들만이 가능하다.
그러한 사람의 삶과 행복은 사랑에 있다.~.<톨스토이의 ‘참된 사랑’에서 일부 발췌 요약>
<기장 칠암 야구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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