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개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질서를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사회전체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결국 이성의 윤리학은 사회의 윤리이지 ‘살아있는 나’의 윤리학일 수는 없다. 욕망을 긍정하면서 스피노자가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살아있는 나’를 위한 윤리학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욕망을 억압한 채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유한자다. 우리가 유한자라는 것은, 신조차 누릴 수 없는 축복일 수도 있고 비극일 수도 있다. 우리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타자(他者)들이 내 삶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 미리 결정할 수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저주스러운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모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반대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 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피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예의 삶은 슬픈 삶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슬픈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살아도 살아가는 것이 안닌 우울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슬플 때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이것을 제외하고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치 않은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자신만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에 따라 어떤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스피노자-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강신주철학박사, 민음사>
<해운대 누리마루와 광안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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