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도 이만하면 예술이다. 바람둥이 찰스와 외도한 사실이 들통나자, 키티는 오히려 남편 윌터를 윽박지른다. “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잖아. 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갖는 것은 죄다 지루하기만 해.” 키티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이다. 키티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람둥이를 만난 것이 아니니까. 사실 그녀는 바람둥이를 만나 쾌락에 빠져서 순간적이나마 남편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육체적 욕망 때문에 망가지는 여자가 아니라는 자존심 때문일까?
키티는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강변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말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 키티는 지금까지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도리어 역정을 내고 있다. 지금 키티의 모든 말은 비수처럼 윌터의 가슴에 하나하나 제대로 꽂혔다. 칼은 칼로 상대하는 법. 자신의 사랑이 조롱당하자, 그토록 배려심이 깊었던 윌터도 지금까지 키티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 아내에게 한 번도 감히 하지 못했던 잔인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서머싯 몸의 소설“인생의 베일”(민음사)에서>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래야 나를 슬픔에 빠뜨린 그 사람을 내 삶에서 쫓아낼 수 있으니까.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학대를 견디면서까지 내 곁에 계속 머물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나의 기쁨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감정으로 작용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그는 되도록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의 곁을 떠날 수 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는 나의 존재가 그 사람에게 행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이타심은 늘 결국에는 이기심이라는 지적이 가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지.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분 나쁘게, 심지어 분노하게 만드는 감정이니까. 결국 이런 잔인함은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곁에서 떠나도록 만들게 된다. 불행히도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 쫓아낸다면,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남지 않게 된다. 당연히 우울함과 슬픔이 기쁨 대신 나 자신을 뜯어먹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잔인함으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된다. 그러니 잔인함에 ‘사랑의 자살’이라는 별칭을 붙여 줘도 되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멸이 잔인함의 최종 목적일 테니까 말이다. 칼자루 없는 칼. 그러니까 양쪽 모두 날이 퍼렇게 선 칼을 잡고 서로를 찌르니, 상대방도 피를 흘리고 칼날을 잡고 있는 나의 손에도 피가 흐르는 모양새다.
<인생의 베일>에서 세균학자인 윌터는 키티를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국으로 데려가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둘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한때의 열정에 휩싸여 남편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아내나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받아쳤던 남편이나 모두 사랑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콜레라에 걸린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윌터의 행동은 헌신적인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중국행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잔인한 칼날을 들이댔던 죄를 갚으려는 속죄 의식이었으니까. 그는 합법적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고 할까?
자신이 바라던 대로(?) 윌터는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리고 만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던 키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윌티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아직도 자신을 경멸하느냐고 묻는다. 죽어가면서도 윌티는 키티에게 잔인하게 군다. ‘아니 나 자신을 경멸해.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마침내 윌티는 ”죽은 건 개였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윌티의 마지막 말은 18세기 영국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시 한 구절인데, 개가 사람을 물었지만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서머밋 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교훈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 서머밋 몸(1874~1965)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등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영국작가.
<인간 베일>(1925)은 삼각관계를 다룬 연애소설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성장소설이다.
** 잔혹함이나 잔인함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에티카’에서-<“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극히 일부 발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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