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2/중산 담론

'내 남은 생애의 첫날'

[중산] 2009. 12. 4. 12:55

 

 

항암 치료를 받고 요양중인 이해인 수녀(64)가 “전에는 종이에 시를 썼다면 지금은 삶 자체에 시를

쓰는 느낌으로 산다”며 근황을 전한다.

12월이 되니 벌써 크리스마스카드들이 날아옵니다. 해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 늘

초조했는데 올해는 오히려 느긋하게 웃을 수 있는 나를 봅니다. 이별의 슬픔과 몸의 아픔을

견디어 내며 '아직'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임을 새롭게 기억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상의 여정을 다 마치는 그날까지

이왕이면 행복한 순례자가 되고 싶다고 작정하고 나니 아픈 중에도 금방 삶의 모습이 달라

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엔 담백하고 잔잔한 기쁨과 환희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전보다 더 웃고 다니는 내게 동료들은 무에 그리 좋으냐고 되묻곤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답으로 들려주던 평범하지만 새로운 행복의 작은 비결이랄까요. 어쨌든 요즘 들어 특별히

노력하는 것 중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첫째, 무엇을 달라는 청원기도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하려 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일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괴로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가끔은 위로의 편지를 쓰고 양로원과 교도소를 방문하기도 하지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진 못할지라도 마음을 읽어주는 작은 위로자가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눔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을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의 삶이 매 순간마다 축제의 장으로 열리는 느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것도,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얼마나 큰 감동인지

 모릅니다. 수녀원 복도나 마당을 겨우 거닐다가 뒷산이나 바닷가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적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길에서 만나는 모르는 이웃조차 왜 다들 그리 정겹게 여겨지는지! 최근에 읽은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화두처럼 뇌며 만나는 이들에게마다

'반가워요. 다 저의 일가친척 되시는군요!' 하는 사랑의 인사를 마음으로 건넵니다.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고 표현한 정현종 시인의 시집에서 발견한 '꽃시간'

이란 예쁜 단어도 떠올리며 '그래 나는 걸음걸음 희망의 꽃시간을 만들어야 해' 다짐합니다.


셋째,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지니도록

애씁니다. 부탁받은 일들을 깜박 잊어버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가고, 다른 이의 신발을

 내 것으로 착각해 한동안 신고 다니던 나를 오히려 웃음으로 이해해 준 식구들을 고마워하며

 나도 다른 이의 실수를 용서하는 아량을 배웁니다.


넷째,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는 흥분하기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

하면서 어질고 순한 마음을 지니려 애씁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질 적엔 '언젠가는 영원

속으로 사라질 순례자가 대체 이해 못 할 일은 무엇이며 용서 못 할 일은 무엇이냐'고 얼른

 마음을 바꾸면 어둡던 마음에도 밝고 넓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지나간다 / 천양희>


이해인 수녀는 지난해 여름 와병과 절필 소식이 알려진 뒤, 현재 한 수녀원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암이 발견됐을 당시) 순간적으로 당혹스럽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며 “1, 2기가 지난

상태여서 수술을 했고 그동안 방사선 치료 28번, 항암치료 30번을 받았다. 요즘도 하루에 약을 열 알 넘게 먹으며

정기적으로 체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수녀님의 빠른 쾌유를 빌면서... 좋은 말씀 잘 간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