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진리로서의 ‘죽음’과 ‘실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나면 양말에 난 구멍도, 셔츠가 재킷에 어울리는지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죽음을 주체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결정을 내릴 때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실존에만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실존의 미약함을 강조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주체적 진리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정해진 틀과 사회적 역할 안에서만 살다가 평생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평생 자신의 주체적 진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산다. 키르케고르는 “단 하루도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 날 일어나보니 죽을 때가 다가왔더라”고 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카뮈의 소설<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살인으로 사형당하기 전날 밤, 창살이 처진 창가로 다가가 장미꽃 향기를 맡는다. 이전에는 장미꽃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단두대 너머로 뜬 달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전에는 달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뫼르소는 처음으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영화<제7의 봉인> 또한 매우 키르케고르 적이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안토니우스는 고해실의 창살을 움켜쥔다. 공포에 질려 자신의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힘이 잔뜩 들어간 팔목의 핏줄과 근육을 의식하게 되고, 마침내 이런 독백을 한다. “이것이 나의 손이다. 이 손 안에서 고동치는 피를 느낄 수 있다. 해는 아직 높이 떠 있다.~” 긍정적인 것(실존)은 부정적인 것(존재를 관통하는 공허함)을 뼈저리게 통감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 말이다.
불안
인간의 의식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이론은 그의 불안에 대한 이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의식 또한 불안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의 미래는 나의 자유 안에서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선택과 결정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야 하며, 그 미래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래에서 나 자신을 기다린다. 내가 불안한 것은 그곳에서 나 자신을 기다린다. 내가 불안한 것은 그 곳에서 나 자신을 찾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불안은 우리 손으로 자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며,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다. 무지는 불안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무지의 상태에서도 불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안이 싫다면 비진정성을 대안으로 삼을 수 있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이며, 자유로부터의 회피이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선택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또한 선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자기(혹은 정신)는 두 개의 상반되는 축을 연결하는 행동이다. 이 두 축은 아주 단순화하여 생각하자면 ‘육체(유한한 것, 시각적인 것, 필연적인 것)’와 ‘영혼(무한한 것, 영원한 것, 가능한 것)’이다.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둘을 연결하는 행동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종합적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려는 이 시도는 ‘중용(결핍과 과잉의 중간에 놓인 덕의 길)’을 통하여 덕을 이루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도와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와 ‘타자’사이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상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헤겔은 우리 자아는 타인의 인정을 받음으로써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주인은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보기 때문에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노예는 주인이 그를 노예로 보기 때문에 노예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자아실현은 훨씬 더 복잡하다. 각자가 처한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환경뿐 아니라 유전적 자질까지 고려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키르케고르가 인간을 이러한 환경의 단순한 결과물이나 희생물로 본 것은 아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여 절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가 말한 절망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되려는 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육체적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죽음을 갈망하게 한다. 절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오히려 죽으러 해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잠재적으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여 절망에 빠지며, 그 결과 무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은 죽음을 열망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열망은 무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무의식적인 절망은 허무를 낳는다. “영혼의 뒤편에 문을 열어보아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의식적 절망은 조금 더 복잡하다. 절망을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자신만이 절망에 빠져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절망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절망은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잘못 인식된 절망은 내향성을 띤다. 이 경우 영혼의 뒤편에 놓인 문 뒤에는 “자아가 들어앉아 있기는 하지만, 그 자아는 자기가 될 의지가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자각이 클수록 절망은 강렬하다”고 말했다. 다행인 것은, 절망이 강렬할수록 이에 대한 해결책도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의식적 절망상태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자살이다. 무의식적 절망 상태에서는 무의식에만 머물렀던 죽음에 대한 열망이, 의식적 절망 상태에서는 의식적 영역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망을 의식하는 사람은 모두 자살을 택할까? 그렇지는 않다. 의식적 절망상태에서는 절망이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격렬함 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열망을 이겨내고 자살의 유혹을 무사히 넘겼다는 것은 스스로 실존을 바란다는 의미다. 그러한 경우 그는 자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스스로는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절망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형태의 절망이 한 걸음 나아가면 키르케고르가 말한 반항적 절망으로 진행된다. 절망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고 결국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고뇌와 분노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의도했던 바대로 자아를 가지게 되지만, 이는 ‘악마적 자아’다. 분노가 격해지면 반감의 대상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싸움은 이길 수도 없고 이겨서도 안 되는 싸움이다. 그 반감의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우리는 스스로를 잃게 된다. 자아를 잃은 우리는 무가 된다.
악마적 자아의 분노가 극한에 다다라 벼랑 끝에 몰리게 되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진정한 자아로의 ‘도약’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된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눴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이다.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을 두고 살아가며 거치는 ‘삶의 단계라 칭하곤 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실존 방식은 각각 독립적인 이상과 동기, 행동 양식을 갖춘 온전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키르케고르는‘심미적 삶’으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아로부터 소외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심미적 실존의 가장 높은 단계에는 귀족적 쾌락주의가 있으며, 이들은 미를 함양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부류와 다르다. 심미주의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심미주의‘는 쾌락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쾌락 원칙에 따르는 삶의 결과는 어떨까? 원초적 심미주의든, 고상한 심미주의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바로 자아에 대한 통제력 상실이다. 심미주의자의 삶은 어제라도 변할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외부 요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실존방식’ 윤리적 영역에 진입한 후에는 그 결정을 중심으로 자아를 형성해나간다. 물론 추상적인 선택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며, 선택은 구체적인 헌신이나 약속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는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처음의 윤리적 선택에 부합하는 결과로 보았다. 그 두 조건은 바로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이었다. ‘도약‘, 다시 말해 근본적인 선택을 한 후에는 그 선택에 맞춰 자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선택했다면 개인의 역학은 더 이상 분열을 멈추게 된다. 여러 역할을 맡았어도 각각의 역할에서 자신의 도덕적 헌신이 표출되어 일관성이 생기게 된다.
‘종교적 실존방식’ 두 번째 도약은 첫 번째에 비해서 훨씬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심미주의에서 윤리로의 도약은 낡고 병든 자아로부터 멀어지는 일이지만, 윤리에서 종교로의 도약은 어찌 보면 전 인류를 등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포기하며 자신을 희생했고, 키르케고르는 또한 사랑하는 레기네를 포기하며 자신을 희생했다.
키르케고르는 플라톤의 표현을 빌려 아브라함의 상태를 ‘신성한 광기’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광기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 물론 그가 장려한 것은 ‘광기’가 아닌 ‘신성함’이다.~믿음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역설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며,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믿음의 기사가 되는 길에 동반자는 없다.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종교적 실존의 기준은 혹독했다. 말만 듣고도 겁이 나서 떨어져 나간 사람은 애초에 종교적 영역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자아를 얻을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선택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밀려드는 절망 속에서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지점까지 내몰려야 한다. 예전의 병든 자아를 소멸시키고 진정한 자아를 찾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폭발하는 지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은 선과 악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과 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선과 악의 문제는 완전히 배제할 것인가 사이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은 선과 악 중 어느 것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며, 삶의 안에서 선과 악이라는 요인 자체를 원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다. 선택을 하고 나면 선과 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종교적 영역 : 추론, 인지, 행동의 동기, 사회화 등을 포함한 모든 세계관이 오직 시성함에 대한 헌신에만 의존하는 실존의 영역이다.
* 쾌락주의 : 쾌락을 가장 높은 가치로 보는 철학. 기원 전 3세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와 17세기 토마스 홉스의 철학이 대표적이다. 키르케고르의 심미주의자들은 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 심미주의 : 추론, 인지, 행동의 동기, 사회화 등을 포함한 모든 세계관이 오직 감각주의에만 의존하는 실존의 영역.
* 실존주의 : 급진적인 자유, 책임, 자아창조, 개별주의, 주체성, 헌신 등의 요소를 강조했다. 1940년대 사르트르가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실존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저서의 영향을 받았다.
* 믿음의 기사: 무한한 체념을 통하여 유한한 세상을 상실하는 동시에, 부조리의 힘을 빌린 믿음의 행동을 통해 상실했던 모든 것을 다시 찾은 사람을 뜻하는 용어.<‘키르케고르 실존 극장’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도널드 파머 지음, 정영은님 옮김, 필로소픽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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