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술
- M. 와츠
작은 씨 하나
뿌렸죠.
흙을 조금
씨가 자라게
조그만 구멍
토닥토닥
잘 자라라고 기도하면
그만이에요.
햇빛을 조금
소나기 조금
세월이 조금
그러고 나면 꽃이 피지요.
참 예쁜 발
-고두현
우예 그리 똑 같노
하모, 닮았다 소리 많이 듣제.
바깥 추운데 옛날 생각나나.
여즉 새각시 같네 그랴.
기억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아들 오빠 아저씨 되어
말벗 해드리다가 콧등 뜨거워지는 오후.
링거 줄로 뜨개질을 하겠다고
떼쓰던 어머니, 누우신 뒤 처음으로
편안히 주무시네.
정신 맑던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다리
가지런히 펴고 무슨 꿈 꾸시는지
담요 위에 얌전하게 놓인 두 발
옛집 마당 분꽃보다 더
희고 곱네. 병실이 환해지네.
병실에 도착해서 아들까지 못 알아보시다니 명치끝이 아릿해 왔다. “접니다, 어머니.” 하고 말씀 드렸는데도 계속 딴소리만 하셨다. 나중에는 “오빠” “아저씨”라고도 했다. 처음의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던 기분이 차츰 가라앉고 나자 나는 어머니의 “오빠”가 되고 “아저씨”가 되어 함께 맞장구를 치며 놀았다. “하모, 닮았단 소릴 많이 듣제. 오늘은 새각시 같네 그랴∙∙∙∙∙∙.”
오후들어 햇살이 따뜻해지자 어머니는 낮잠을 드셨다. 담요 위에 두 다리를 가지런히 펴고 잠든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정신 맑은 시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객지 공부를 시키면서 어머니의 발톱은 얼마나 많이 닳았을까. 햇살을 받아 눈부신 두 발이 옛집 마당가의 분꽃보다 더 희고 고왔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해마다 이맘때면 더욱 생각나는 어머니.오늘 그 예쁜 발을 다시 한 번 만져보고 싶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털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슬픔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최승희를 사랑한 영랑이
목매 죽으려 했던 나무가
시인 김영랑(1903~1950)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 거리 곳곳에 모란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 등이 보인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시. 기다림이 무산된 순간의 절망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뚝뚝 떨어지는 모란에 빗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면서 그토록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됐다. 상대는 훗날 한국 최고의 춤꾼으로 이름을 날린 무용가 최승희다.
오빠 친구인 영랑의 시적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다. 둘 사이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됐다. 봄날의 풋사랑 같은 사연을 뒤로 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다. 그러나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는 모란이 피는 5월이면 좋아하는 술도 끊고 노래도 멀리하면서 모란 옆을 지켰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 진한 향기만큼 깊은 슬픔을 혼자 견디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는 집 뜰에 300여 그루의 모란을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지금도 모란이 필 무렵이면 그의 생가에 사람들이 몰린다.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에서 극히 일부 발췌, 고두현님 지음, 쌤앤파커스출판>
* 고두현님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그의 시는 ‘잘 익는 운율과 동양적 어조, 달관된 화법으로 전통 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늦게 온 소포><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달의 뒷면을 보다>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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