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꽃을 잊듯이 잊어버립시다!

[중산] 2022. 4. 27. 17:34

진실을 찾아 시들어가리

 

최선의 인간들은 신념을 모두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혔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 <재림(The Second Coming)>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이다. “예이츠 시인이 말했듯이 오늘날 우리 중에 가장 나은 인간들은 신념을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열렬한 격정으로 가득합니다.“ 악에 맞서 싸우면서 신념을 잃지 말자". 우리는 IS를 격퇴할 수 있다는 미국의 자신감을 세계에 천명하는 게 오바마 대통령이 예이츠를 인용한 이유일 것이다.

 

재림(再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넓게 퍼져가는 소용돌이 속을 돌고 돌아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은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에 풀어진다.

핏빛 얼룩진 조수가 풀어지고

순결한 기쁨은 도처에 물에 잠기며

최선의 인간들은 신념을 모두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혔다.

분명 어떤 계시가 눈앞에,

재림이 확실히 눈앞에 다가왔다.

재림! 이라고 말을 하자마자

세계의 혼으로부터 이탈한 어떤 거대한 형상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사막의 어딘가에서

사자의 몸, 인간의 머리를 한 어떤 형상이.

태양처럼 무지비하고 텅 빈 응시가

다리를 느리게 움직일 때 그 주변 모든 것은

분노한 사막 새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또다시 어둠이 내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돌 같은 잠 속의 스무 세기가

흔들리는 요람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그리고 사나운 한 짐승이, 마침내 그 시간이 되어,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걸음을 떼는 것을.

 

‘재림’은 기독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다. 1차 대전 후에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시가 21세기 지금도 유효하며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한 때 형제국가였던 사람들이 지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다. 안락하게 살던 집들은 불타 없어지고 무자비하게 민간인들까지 학살을 자행되고 있다. 엊그제 성스러운 부활절 행사장 예배에 침략국가의 수장이 참석하는 걸 방송에서 보았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도 잊은 채 뻔뻔한 인면수심의 얼굴을 내밀면서 말이다. 먹이만 찾는 사나운 짐승처럼, 알다가도 모르겠다. 인간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중산>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파리는 많아도, 뿌리는 하나;

내 젊음의 거짓된 나날 동안

햇빛 속에서 잎과 꽃들을 마구 흔들었지만;

이제 나는 진실을 찾아 시들어가리.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쉽고도 어려운 시인. 예이츠의 영어는 어렵지 않다. 중학교 영어 수준의 일상적인 단어들로 인생의 핵심을 건드리며 우리를 무장 해제시킨다. 그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내 생각과 잘 맞을 거라는

재치 있는 생각 때문에, 어느 날

즐겁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엮인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내 뺨에 눈물을 닦아주고픈 그대의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사람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 속에서, 언제까지나 그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철없던 시절에 읽은 브라우닝의 시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 내가 이 시를 그때 제대로 이해했다면 다르게 살았을 텐데.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니, 무슨 뜻일까? 엘리자베스와 로버트 브라우닝의 러브스토리를 알았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곧 그녀의 남편이 될 로버트 브라우닝과 사귀던 1845년에 쓴 14행의 소네트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최고의 여성 시인이라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미래의 남편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진하게 녹아 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다면, 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면’이다.

 

그 만큼 절박하고, 아무 사랑이나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내비치는 대목이다. 대화체에 인용문이 삽입되어 자연스러운 현장감이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단어가 열 번이나 나오는데도 전혀 진부하지 않다. “그렇게 엮인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 그래 맞아. 쉽게 반하면 쉽게 떠나더라. ”그대의 위로에 익숙해진 내가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얼마나 재치 넘치는 표현인가. 연민과 사랑의 차이를 귀엽게 증명한 그녀. 여섯 살이나 젊은 미남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짐작이 간다.

 

장애인이었던 그녀는 지금은 뜨겁지만 언젠가 로버트가 병약한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웠으리라. 환자였던 그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았다. 미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상냥스러운 말투 때문에, 재치 잇는 말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마세요.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달라고. 그대에게 이래라 저래라 주문하는 말투에서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의 자의식이 엿보인다. 그녀가 활동하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기에 영국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열여섯 살에 척추를 다쳐서, 이때부터 극심한 두통과 척추통을 앓아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독서와 시작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849년, 엘리자베스는 마흔이 넘는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출산한 뒤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그녀는 1861년 여름,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죽은 뒤 로버트는 재혼하지 않고, 77세까지 장수하며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생산했다.

 

 

 

꽃을 잊듯이 잊어버립시다

 - 세라 티즈데일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

한 때 금빛으로 타오르던 불을 잊듯이,

영원히 아주 영원히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친절한 벗, 우리를 늙게 하지요.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말하세요.

오래 오래전에 잊었노라고,

꽃처럼, 불처럼, 오래전에 잊혀진

눈 위에 뭉게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

 

 

시가 쉬워서, 뭐라고 설명할 건더기가 없다. 그런데 이처럼 쉬운 시 쓰기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시를 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시인으로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언어가 솟아나는 순간이 있다. 일부러 쥐어짜내는 게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태우며 온몸으로 밀어붙인 시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잊어버립시다>는 세계의 명시라고 추켜세울 만큼 뛰어난 시는 아니다. 그러나 그 단순 명쾌한 언어와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한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이 있다. 세라 티즈데일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기초 교육을 받다 열 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숭배했던 필싱어와의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사업가인 남편은 여행이 잦아 자주 집을 비웠고 홀로 남은 그녀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1929년에 세라는 남편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집을 나와 석 달을 다른 곳에 살며 변호사를 통해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보냈다. 당시 미국 법은 석 달 이상 별거한 사실이 증명되면 부부가 합의가 없더라도 이혼이 성립했다고 한다. 느닷없는 이별을 통보받은 필싱어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혼 한 뒤에 세라는 옛날 남자 친구인 린지와 다시 접촉을 시도했다. 뒤늦게 결혼한 린지는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로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때는 1929년, 경제대공황이 닥친 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시인의 생활인데, 대공황이 닥치자 원고료만으로 가족을 부양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우울증에 빠진 린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33년에 세라도 수면제 과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꽃을 있듯이, 한때 타오르던 불꽃을 잊듯이, 영영 잊을 수는 없었던 건가. <‘시를 읽는 오후’ P242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최영미시인 지음, 해냄출판>

* 최영미 시인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1992년,창작과 비평>겨울호에 <속초에서>를 비롯해 여덟 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작활동. <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도착하지 않은 삶> 등과 장편소설<흉터와 무늬>,<청동 정원>. 산문집<화가의 우연한 시선>등 다섯 편의 작품 등이 있다. 2006년 시집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칠암 동백
기장 일광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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