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세컨더핸드 타임!

[중산] 2022. 9. 21. 14:31

희생자와 망나니는 둘 다 똑 같이 역겹다.

수용소가 일깨워 준 교훈은

그 둘이 함께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다비드 루세, <우리 죽음의 날>에서

 

악의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에 대한 첫 번째의 책임은

그 악의 눈 먼 수행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정신적으로 방관한 신의 추종자들에게 있다.

- 표도르 스태푼,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못한 일들>에서

 

왜 우리가 스탈린을 심판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으시다고요? 제가 알려드리죠, 간단합니다. 스탈린을 심판대에 올리려면 먼저 우리의 가족, 친지, 지인들을 심판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요. 제 가족을 예로 이야기해드릴게요.

 

우리 아버지는 1937년도에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다행히도 되돌아온 아버지는 살고자 하는 의욕이 남다르셨어요.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던 유일한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것, 죽음에 대한 것뿐이었어요. 아버지들은 잘 웃지 않았고, 말이 없었어요.

 

그리고 계속 술을 마셨어요. 마시고, 또 마시고 ∙∙∙∙∙∙. 결국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곤 했습니다. 반면, 다른 그룹에 속하는 아버지들도 있었어요. 아직 수용소에 가지 않은 아버지들이죠. 이런 아버지들은 수용소로 끌려갈까 봐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수용소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왜 모두가 수용소로 끌려갔는데 나만 안 끌려간 거지? 내가 뭔가 잘못 행동하고 있나? 라고 자책할 정도였으니까요. 평범하고 전혀 무섭지 않은 망나니들∙∙∙∙∙∙. 우리 아버지를 밀고한 사람은 이웃에 사는 유라 아저씨였대요. 유라 아저씨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 심지어 착하기까지 했어요.

 

아버지가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버지께서도 체포되고 말았어요. 큰아버지를 밀고한 사람들 중 올랴 누나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누나, 그런데 그때는 왜 그러셨어요?” “예, 스탈린 시절에 정직한 사람이 있었겠나?” (침묵한다)

 

반대로, 우리 가족 중에 파벨 삼촌이란 분은 시베리아 NKVD(소련정부기관이자 비밀경찰)군에서 복무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요. 화학적으로 순수한 절대 악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악에는 스탈린과 베리야만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옆집 유라 아저씨, 예뻤던 올랴 누나도 속해 있었으니까요.

 

5~6년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만이 집을 떠올리며 얘기를 했고, 10~15년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집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대요.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할머니가 외투를 두르고 문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을 발견하셨어요. “여보게, 군인 양반! 누굴 찾으시오?” “엄마, 날 몰라보는 거예요?”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그만 혼절을 하셨어요.

 

전쟁 후에는 아버지는 닭 한 마리,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셨지요. 종류를 막론하고 죽은 동물을 보거나 뜨끈한 피 냄새를 맡으면 진심으로 슬퍼하셨어요. 또 아버지는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두려워하셨어요. 그런 나무에는 어김없이 ‘뻐꾸기’라고 불렀던 핀란드군 스나이퍼들이 숨어 있었대요.(침묵한다)

 

지금 보드카 한 병 값이 옛날 웬만한 외투 한 벌 값이에요. 안주는 또 어떻고요? 햄500그램이면 내 연금의 반이 사라진다고요! “자유를 마셔요! 자유를 마셔요!” 그토록 대단한 나라를, 그 강대국을 단 한 번의 총성 없이 그렇게 내 주다니∙∙∙∙∙∙.

 

1941년∙∙∙∙∙∙. 모두가 울었던 그때, 난 행복한 탄성을 내질렀지, ‘전쟁이다! 내가 전쟁에 나간다! 전쟁에는 나가게 해주겠지. 내보내주겠지.’ 난 전선에 보내달라고 사정하기 시작했어. 꽤 오랫동안 날 받아주지 않았어. “자네 부인이 반혁명적 활동을 한 대가로 수용소에서 형을 살고 있잖아.” 내가 적이라는 거야.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되어서 ‘쥐드(유대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어요. 이웃들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거든요. “이 유대인놈들아! 이제 너희는 끝장이야! 그리스도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우리가족은 혼혈가족이었어요. 아버지는 유대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거든요.

 

유럽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을 ‘함부르크’ 유대인이라고 불렀어요.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그들은 힘센 남자 두 명을 골라 구덩이 두 개를 파라고 지시했어요. 깊은 구덩이요. 제일 먼저 어린아이들을 한쪽 구덩이에 집어 던졌어요. 그리고는 흙을 덮었어요.

 

부모들은 울지도 사정하며 매달리지도 않았어요. 고요했어요. “왜 그랬나요?”라고 물으실 테지요. 저는 한번 생각해봤어요. 만약 사람이 늑대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늑대에게 사정하며 살려달라고 할까요?

 

우리 차례가 되었지요. 지시를 내리던 독일놈이 우리 가족을 보더니 엄마가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눈치고는 손짓으로 “너는 저쪽으로 가”라고 했어요. 아빠는 엄마에게 “어서 가!”라고 소리 쳤어요. 하지만 엄마는 아빠와 나를 꼭 붙들었어요. “난 같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엄마를 밀어 냈어요. 제발 가라고 애원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제일 먼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난 통증 때문에 소리질렀어요.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여기 한 놈이 살아있는데.” 삽을 든 남자들이 날 위로 끌어올려 줬어요. 나는 구덩이에 주저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비가 내렸어요. 흙은 아주 따뜻했어요. 그들이 나에게 빵 조각을 주면서 “꼬마 쥐드야. 어서 도망가렴. 어쩌면 살아남을지도 모르잖니.”

 

독일군들이 점점 가까워졌고, 심지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어요. 어두워지자 우리는 죽은 말의 배를 가르고 거기에서 내장을 꺼낸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렇게 이틀을 숨어 있었어요.

 

독일군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소리, 총을 쏘는 소리를 들으면서요. 마침내 완전한 정적이 감돌았고 그제야 우리는 그 속에서 기어 나왔어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내장과 똥을 뒤집어쓴 채였어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죠. 밤이었고, 달이 빛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녀를, 그 여자를 잊지 않고 있어요. 그 여자에게는 두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어요. 그 여자가 지하의 창고에 부상당한 빨치산을 숨겨주었죠. 그런데 누가 그걸 밀고한 거예요.

 

마을 한가운데서 그 여자의 가족이 전부 교살됐어요. 아이들을 제일 먼저 매달았어요. 그걸 보며 그 여자가 어찌나 괴성을 지르던지! 인간은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아요. 그건 짐승의 울부짖음이었어요. 인간이 그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건가요?

 

전쟁을 격은 사람들은 이미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어. 나조차도 난폭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스탈린은 우리 세대를 좋아하지 않았어. 우릴 증오했지. 그건 우리가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이야.

 

우린 승리했어.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승리가 우리나라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지는 못했어. 열 살부터 여든 살까지 몸이 더럽혀지지 않은 독일 여자는 없었어! 그러니까 1946년도에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러시아 민족’이야.

 

우리의 승리다! 전쟁 내내 사람들은 전쟁만 끝나면 잘 살게 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살았어. 한 2~3일 정도는 축제가 벌어졌지. 그런데 나중에는 뭔가가 먹고 싶어졌고, 몸에 걸칠 것도 필요하게 되었어. 삶을 살고 싶어졌던 거야.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어.

 

모두가 독일군복을 입고 다녔어.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그걸 꿰매고 또 꿰매서 입었어. 빵은 배급표대로만 지급했고, 배급을 받는 줄은 몇 킬로미터씩 늘어서 있었지. 분노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어. 그땐 아무 이유 없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정도였지.

 

우리 도시에는 ‘장애인의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팔 다리가 없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어. 모두 훈장을 갖고 있었지. 나중에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 그들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게 했어. 공식적으로 허가가 된 일이었어.

 

하지만 머지않아 그 남자들은 다시 되돌려 보내졌어. 그 남자들은 장난감이 아니잖아. 반 토막이 난 시늉만 남자인 그들을 사랑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이었겠어. 그 남자들은 분노에 차 있었고 상처받은 사람들이었어.

 

러시아 남자들은 고행자들이에요. 러시아 남자들은 모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어요. 전쟁 때문이든, 감옥이나 수용소 생활 때문이든∙∙∙∙∙∙. 전쟁과 감옥, 이 두 단어는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에요.

 

러시아 여인들은 한 번도 정상적인 남자들과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 여인들은 치료자들이에요. 남자를 영웅처럼 대하기도 하고 아이처럼 대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아무리 불행한 삶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바람도 쏘이고 정원도 거닐 수 있잖아요.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흙덩이인 거예요. 행복한 사람들이나 사랑받는 사람들은 죽고 싶어 하질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행복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흐루쇼프도 곧 공산주의가 올 것이라고 약속했었고, 심지어 고르바초프는 맹세까지 했어요. 약속을 못 지키면 철로에 드러누울 것이라고도 했죠.

 

난 말이에요, 이제나저제나 좋을 때가 오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아이였을 때도, 아가씨였을 때도 기다렸어요. 이제 난 늙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두가 거짓말을 했고 사는 건 더 팍팍해졌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고 참으라고 뻔질나게 말들을 하더군요.

 

그러다가 남편도 죽었어요. 밖을 돌아다니다 넘어졌는데 그만 심장이 멈춰버렸어요. 우리가 살면서 겪은 일들은 자로도 잴 수 없고, 저울로도 잴 수 없어요. 그런데도 난 계속 살고 있어요. 우리 집에는 이콘 성화가 모셔져 있고, 입에 거미줄 앉을까 봐 말동무나 하려고 개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요.

 

신이 인간에게 개도 보내주고, 나무와 새도 보내주셔서 정말 좋아요. 인간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인생이 너무 길다고 느끼지 말라고 보내주셨을 테지요. 내가 아직까지 질리지 않고 좋아하는 건 바로 밀밭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이에요.

 

평생토록 하도 배를 곯아서 곡식이 익어가고 이삭이 물결치는 모습이 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조금만 더 참아, 조금만 더 참아∙∙∙∙∙. 마치 참는 것이 그 어떤 아픔도 다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들을 했다고요.

 

내 인생은 그렇게 훌쩍 지나가버렸어요. 희망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린 한때 학교에서 레닌이, 칼 마르크스가 하느님이라고 배웠잖아요.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스탈린이 성당을 다시 개방했고 러시아군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죠.

 

스탈린이 연설을 할 때 ‘형제자매 여러분, 친구 여러분’이라고 호칭이 달라지더군요. 그 전까지 뭐라 불렀던가요? ‘인민의 적, 부농과 부농의 추종자들.’ 우리 시골에서는 좀 산다 싶으면 바로 부농으로 간주했거든요. 말 두 필, 소 두 마리만 있으면 그 사람은 부농인 거예요.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고 아무것도 없는 타이가 숲에 내팽개쳤어요. 여자들은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다 못해 제 손으로 자식들의 목을 졸랐다고요. 어휴, 그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요. 이 지구상의 모든 물을 끌어 모아도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더 많을 거예요.

 

그런데 그랬던 스탈린이 “형제자매 여러분!“이라고 호소하지 뭐에요? 그래서 우린 그를 믿었고 용서했어요. 그리고 히틀러를 무찔렀어요! 히틀러는 장갑차를 타고 강철로 무장한 채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는 승리했어요!

 

이젠 우리를 가리켜 유권자가 되었대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올바르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 그것뿐이라네요. 이젠 행복을 더 구걸할 수도 없어요. 어서 빨리 천국을 보고 싶어요. 이젠 기다리는 것도 지쳤어요. 사샤도 그랬을 거에요. 그 양반 이제는 땅 속에 묻혀 푹 쉬고 있겠지.(성호를 긋는다.) ~

 

* 이 책을 읽고 정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리더군요! 창밖을 멍하니 보며 한참 생각했습니다. 21세기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그대로 자행되고 있는 인간세계의 현실입니다. 개인은 전체속에서만 존재가치를 찾고, 그 중심에는 권력의 욕망에 도취된 무서운 괴물이 있습니다. 이른바 전체주의의 산물이 지금도 꿈틀대며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인간 내면이 성숙되어야 세상이 변할 수 있습니다. 많은 걸 생각케 합니다. 끝까지 읽으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중산> 

 

<‘세컨더핸드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P661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스베틀리나 알렉시에비치 지음, 김하은님 옮김, 이야기가있는집출판> * 스베틀리나 알렉시에비치 :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1948년 우크라이나 군인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이 책은 소련이 붕괴된 20년 후 ‘붉은 인간’이라 명명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2013년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 문학잡지 <lire>의 ‘최고의 책’으로 선정, 2015년 노벨문학상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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