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의미의 지도!

[중산] 2022. 9. 24. 02:39

이집트 신화에서 위대한 아버지를 상징하는 왕 오시리스에게는 그와 전혀 다른 악한 쌍둥이 동생 세트가 있는데, 세트는 결국 오시리스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4천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류는 위대한 이야기의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가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끝내 악의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잔인하고 선혈이 낭자했던 20세기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악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의 존재까지 부인했다.

 

신화는 혼돈과 질서는 물론 모든 인간에 내재된 악의 본성을 인격체로 담아낸다. 인간의 어두운 측면은 영웅의 적수이며, 자발적으로 다가가서 미지를 탐험하는 대신 미지와의 대면을 회피하거나 미지의 존재를 부인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선’이란 도덕 지식을 구축하는 과정이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돕는 환경이자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악인가?’의 문제도 이와 유사하게 다뤄야 한다.

 

악은 창조적 탐험을 거부하며 기를 쓰고 저항하는 것이다. 교만하게 미지를 거부하며, 사회를 이해하고 초월하고 혁신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결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그들이 고결하고 용감하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다.

 

스펜타 마이뉴와 앙그라 마이뉴, 오시리스와 세트, 길가메시와 엔카두,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사탄 등 신화 속 ‘대립하는 형제들’은 인간의 두 가지 성향인 적대자를 대표하며, ‘신의 쌍둥이 아들’이다.

 

그리스도나 부처는 악을 선택하라는 강력하고도 끈질긴 유혹을 받았지만 그 유혹을 거부하기로 선택한다. 반면 앙그라 마이뉴와 사탄은 결국 스스로에게 고통을 불러오게 될 선택임을 알면서도 악을 택하고 즐겼다.

 

그것도 왜 악한지를 알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악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악한 영과 인간의 본질이다. 밀턴의<실락원>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사탄과 인류의 타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추락하리라

그와 그의 부정한 자손들까지,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인가? 배은망덕하도다.

가지려 하는 모든 것을 주었건만, 추락하는 것은 자유이나,

충분히 일어서도록 옳고 바르게 만들었나니.

 

선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흔한 것은 자의식이 정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인생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 잔인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인식이 악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거대한 악은 쉽게 알아 알아차릴 수 있고, 대개 타인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수없이 세우고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누가 독일 사회로 하여금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명령을 따르는 마당에 도대체 히틀러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민주적인 방법으로 획득한 절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하려면 얼마나 인격이 올곧아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계속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은 인격에 누구나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은 사회 환경의 제약 아래 놓여 있다.

 

우리는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공격하고 힘으로 제압하며, 힘이 없을 때는 자신이 아프다거나 나약하다는 점으로 동정심을 이끌어 내고 교묘히 타인을 조종하려 한다. 수많은 왕들은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폭군이 되거나 타락한 삶을 살았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그 밖에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 폴 포트 치하의 캄보디아 등)과 같은 도덕적 재앙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치명적인 적수, 악한 쌍둥이 형제를 알아보고 이해해야 한다. 구세주로 표상되는 인간의 영웅적 성향은 인간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다. 하지만 영혼에 ‘대항하는’ 성향도 영원히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끝없이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존재를 고통 속에 몰아넣으려는 욕망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박힌 본성이다. 현대의 분석적 사상가들과 실존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생각을 ‘상위의식’ 차원으로 추상화하여 논리적이며 의미론적인 형식으로 담아냈다.

 

사탄이라는 ‘인격체’는 종교적 신화를 통틀어 현존하는 악의 표상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악마는 전체주의를 발전시킨 영혼이다. 이 영혼은 이성적 사고를 우위에 두고 완고하게 자기 이념을 고수한다.

 

오류의 존재와 변칙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 가지 적응 방식에만 의지한다. 그 결과 악마는 어쩔 수 없이 자기와 세계를 증오하게 된다. 이 같은 영혼의 특성은 본질적, 인과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이 불과분의 관계는 개인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인격으로 개념화된다.

 

악마는 힘없고 나약한 인생은 존재 가치가 없다며 인류를 몰살하려 한다. 20세기에 악마는 특히나 악마의 심상이 무용하다며 폐기해 버린 사회에서 끔찍한 고통을 초래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고통에 빠져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악한 본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과 스스로를 더 잘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톨스토이는 <고백록>에서 우리 모두가 처한 끔찍한 상황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무지이다.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해 성립되는 수단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와 솔로몬, 석가모니가 본 삶의 문제를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 해결 방법은 쾌락주의이다. 삶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즐기는 데에서 성립되는 수단이다. 솔로몬은 이 방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한다. 하늘 아래,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서 즐거이 그대의 빵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그대의 포도주를 마셔라∙∙∙∙∙∙, 이 모든 무의미한 삶의 날들에, 그대의 이 모든 헛된 날에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과 삶을 향유하라. 이것이 하늘 아래 애쓴 그대의 노고와 삶에 주어진 몫이므로 ∙∙∙∙∙∙.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무엇이든지 하라.

 

그대가 누울 무덤에는 일도, 성찰도, 지식도, 지혜도 없으니.“ 나와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번째 방법을 추구한다. 이들이 처한 조건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고, 이들의 둔감한 도덕성은 신분이나 지위의 이점이 우연적인 것임을.

 

세 번째 해결방법은 ‘힘’이다.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을 없애 버리는 것으로 성립되는 수단이다. 오로지 대단히 강하고 논리적으로 한결같은 사람들만이 이렇게 행동한다. 죽은 자의 축복이 산자의 것보다 더 위대하고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서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밧줄에 목을 매든지 물에 뛰어 들든지 심장에 비수를 꽂든지 삶을 끝장내는 것이다.

 

네 번째 해결방법은 나약함이다. 삶이 약하고 무의미하며 삶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을 연명해 가는 것으로 성립되는 수단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것을 안다. 나 자신도 네 번째 범주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회피하거나 부인하는 것들은 현재의 해석으로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바로 그것이며, 열등하고 실패하고 부패하고 나약하고 유일한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의식할 때만, 다시 말해서 신의 무서운 얼굴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의식을 충분히 고양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견딜 수 있다.

 

인간적 한계의 핵심은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이다. 그 능력을 외면하고 타락하는 까닭은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인생을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지진이나 홍수나 암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견뎌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고결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인생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타락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안기는 무의미한 고통, 우리 자신의 악이다. 

 

정확히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탐욕과 욕망은,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온 마음과 행동을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그 무엇보다 진리를 섬기라는 뜻이다.

 

주위 사람을 자기처럼 대하라는 뜻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꺾는 동정심으로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여전히 빛을 볼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서 존중하라는 뜻이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진리이다. ~~

 

<‘의미의 지도’ P927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조던 B. 피터슨 지음, 김진주님 옮김, 앵글북스 출판>* 조던 B. 피터슨 : 토론토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학자, <12가지 인생의 법칙>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관악산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25) 2022.10.01
너 자신의 이유로 살라!  (32) 2022.09.27
세컨더핸드 타임!  (26) 2022.09.21
당신은 모르실 거 에요!  (34) 2022.09.17
‘참된 자기’와 ‘거짓 자기’  (14)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