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답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다.
소박하게 먹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마라.
- 호피족
석가모니도 항상 말했지만 인간으로 되돌아갈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일이 있어도 그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해야 합니다.
몸이 비록 건강해도 마음은 항상 병들어 있습니다. 몸의 감각은 ‘고뇌’입니다. 몸의 신경은 고뇌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즐겁다’고 말하고 있는 감각도 엄밀히 관찰하면 고뇌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성을 극복하는 사람은 인간의 이 고뇌의 차원도 극복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잘났다.’ 라는 자존심입니다.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상처 주는 것입니다. 적을 만드는 것도 같은 방법으로 매우 간단합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상대를 미워합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바보이기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대의 입장을 망가뜨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적을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화를 내고 있는가.“라는 등의 얼빠진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미움을 받는 것일까요?” 하고 말하는 경우,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말한 쪽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면 그 상처는 낫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커져서 조만간 상대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싫다
부모의 얼굴을 보면 몹시 증오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꾸중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나의 마음을 타일러도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당장 부모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그리고 괴롭히는 부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너무 싫다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당장 부모에게서 떠나라.’ 이것뿐입니다.
부모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다면 보지 않도록 하면 될 것이고, 함께 있으면 싸움이 되니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작정으로 집을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옳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에 한에서 그것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실은 이 사람은 부모에게 몹시 응석부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응석받이로 있고 싶어서 부모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부모 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알고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연히 부모와 서로 상의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설날에 함께 떡국을 먹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우선 부모 곁을 떠나는 것. 그것이 맨 처음 해야 할 행동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법 마음을 담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루보물레 지음, 홍영의님 옮김, 파주북스출판>
* 알루보물레 : 스리랑카 상좌불교의 장로, 1945년 4월 스리랑카에서 태어났고 13세에 출가하여 득도했다. 1980년 코마자와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현재 일본 테라바다 불교협회에서 불교전도와 명상 지도에 종사하고 있다. <희망의 구조>, <왜 고민하는가>, <자신을 변하게 하는 깨달음의 명상법>,<사후는 어떻게 되는가?>등 저서가 있다.
내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에게 부드럽게 대해요. 사랑하는 이여
오랜 세월 바람에 떠돌던 별들 아래
지쳐 주체할 수 없이 외로우니
우리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해요.
하지만 사랑의 숭고한 말들을
함부로 말하지는 말아요.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싣고 다니는 바람에
수많은 가슴들이 괴로워해야 할지 모르잖아요.
우리 마치 오래된 숲길을 떠도는 공기 방울 같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오직 바람만이 알 수 있지요. 내 사랑하는 이여.
우리 외로우니
서로 머리 기대고 살아요.
오래전부터 불어오던 바람 안에 침묵하면서
마지막 아껴두었던 꿈을 함께 나눠요.
수많은 사랑이 바람에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바람이 원하는 걸 우린 알지 못해요.
그러니 다시 서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 서로에게 부드럽게 대해요. 내 사랑하는 이여.
- R. 홀스트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 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사별의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부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 하나를 들어보자.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한 친구가 죽고 그의 아내와 두 자식만 남았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던가? 그의 아내는 집을 다시 꾸미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그가 생전에 남긴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딸은 아버지의 유골을 뿌릴 호수에 띄울 종이 등을 만들었다.
내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나는 이 말에서 위로를 받았고, 그녀의 편지를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에도 내가 과연 그 고통을 즐기게 될 것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막 진입 단계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나는 아내를 기억하는 가장 주된 사람이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살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자살하면 나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아직까지도 내 인생의 매일, 내 하루의 거의 매 시간 세라를 생각한다. 아내가 좋아했을 법한 것을 보면, 종류를 막론하고 ‘저걸 사서 아내에게 갖다줘야지’라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이는 사별의 회귀선을 건너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선 대개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작가 새뮤얼 존슨은 비탄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결핍’임을 깊이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고립주의와 내면으로의 침잠을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중립과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려는 태도는 비합리적이고 무익하다. 만약 즐거움을 배제하는 것으로 비탄을 차단할 수 있다면, 그 계획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가령‘<마음을> 억지로 즐거운 장면을 끌어다 놓으려는’ 시도나, 그 반대로 ‘더 끔찍하고 더 괴로운 고통의 상태에 이골이 나도록 만들어 무념무상의 상태로 이완시키려는’ 시도 같은 극단적인 조처도 소용이 없다.
존슨은, 오직 노동과 시간만이 비탄을 완화한다고 본다. ‘슬픔’은 영혼에 녹이 슨 것과 같으며, 그것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온갖 새로운 발상이 동원된다.
고독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도 당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고독은 본질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사랑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느끼는 고독과,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빼앗겨서 느끼는 고독이다. 두 가지 중 첫 번째가 더 고통스럽다.
청년기의 고독에 필적하는 고독은 어디에도 없다. 1964년에 처음으로 파리에 갔던 때가 기억난다. 당시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지하철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리고 혼자 벤치에 앉아서, 필시 실존적 고독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을 사르트르의 소설을 읽었던 공원에서도.
작가 루이스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위로받을 길 없이 남아 있는 열망’이라고 정의 했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며, 우리의 경우엔 누군가에 대한 열망이 될 것이다.
두 번째의 고독은 그와 정반대의 조건에서 생겨난다. 바로 특별한 사람의 부재이다. 그녀의 존재가 줄어든 상태에 비견할 만한 고독은 많지 않다. 그리고 나는 자살을 거부할 확고한 논거를 갖게 되었음에도, 그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녀의 부재를 견디며 그 유혹의 싹을 베어낼 수 없다면, 나는 대신 나 자신을 베어내버릴 것이다. 시인 마리안 무어는 ‘고독의 치료제는 홀로됨’이라고 조언한다. 반면에 피터 그라임스는 “나는 혼자 산다네. 습관은 점점 커져간다네”라고 노래한다. 이런 말들 사이엔 균형이, 격려가 되는 조화가 존재한다.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내겐 불필요한 자기학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말이 일말의 진실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고통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헛되지 않다. 고통은 당신이 아직 잊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고통은 기억에 풍미를 더해준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이다. 비탄에는 수많은 함정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시간이 흐른다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자기연민, 고립주의, 세상에 대한 경멸, 자기만 특별히 예외라는 생각은 모두 허영의 면면들이다.
30년 전, 나는 한 소설에서 아내(남편)를 잃은 한 육십 대 남자(여자)의 심정을 상상해보려고 다음과 같이 써보았다.
아내(남편)가 죽었을 때, 당신은 처음에는 놀라지 않는다. 사랑의 일부는 얼마간 죽음에 대비하고 있다. 아내(남편)가 죽을 때, 당신은 당신의 사랑 속에서 검증을 받는 기분이다. 당신은 그 검증을 통과한다. 이것은 사랑의 모든 과정의 일부이다.
그런 후, 광기가 찾아온다. 그다음엔 고독이 찾아온다. 그것은 당신이 예상했던 비장한 홀로됨이 아니라, 아내(남편)를 잃었다는 사실이 가져온 흥미로운 순교자적 고통이 아니라, 그냥 고독이다.
당신은 거의 지리학적인 감정 - 협곡의 완만한 비탈에서 느끼는 현기증 - 을 예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작업에 종사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비참한 상태이며 ∙∙∙∙∙∙ [사람들은] 당신이 그 아픔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고 말하고 ∙∙∙∙∙ 실제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터널을 빠져나와, 다운스(잉글랜드 남동부 구릉지대)를 돌파해, 쏜살같이 덜컹거리며 햇빛 속으로, 영국 해협을 향해 내닫는 기차처럼 벗어나는 게 아니다. 기름 막을 뒤집어 쓴 갈매기 같은 꼴로 벗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한평생 타르 범벅이 된 깃털에 뒤덮여 살 것이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님 옮김, 다산책방출판>
* 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 1946년 1월 영국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메트로랜드>로 서머싯몸 상을,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영국 소설가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미국 포스터상을, 독일 구텐베르크상을, 프랑스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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