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아주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75세가 되면 이따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더없이 편안해진다네. 왜냐하면 우리들의 정신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 존재이며, 영원에서 영원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활동이라고 굳게 확신하기 때문이야.
그것은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코 가라앉지 않고 언제나 계속 빛나고 있는 태양과 같은 것이네.“
“이 세상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려면 두 가지 요청된다네. 첫째로는 머리가 좋아야겠지. 그리고 둘째로는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는 것이네. 예컨대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 전쟁을, 루터는 사제들의 어리석음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고, 나에게는 뉴턴학설의 오류가 할당되었지.”
“나쁜 작품이라도 극장을 나와 버리지 않고 참으면서 듣고 볼 필요가 있어. 그러면 잘못된 점에 대해 온몸 가득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좋은 작품을 더 잘 알아보게 되는 거지. 하지만 읽는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던져버리고 말지. 그러나 극장에서는 참아야 하는 걸세.”
“바이런 경도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르게 성찰할 수가 없었어. 예컨대 ‘돈만 많으면 권력도 소용없다.’라는 그의 신조는 엉성한 것이었지. 왜냐하면 많은 돈과 권력은 결국 같은 존재니까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창작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성공리에 이루어내는데,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성찰 대신에 영감이 그 몫을 하고 있는 것이네. 그는 언제든 시를 써야만 했고, 그럴 때 인간성으로부터, 특히 심정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탁월했네. 이를테면 그가 자신의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마치 여인네들의 아이들을 다루는 것과 같았지. 아무런 생각도 없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여인네들 말일세.
그는 타고난 천재였네. 그 독특한 시적 능력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것으로 보이네. 외부 세계를 포착하고 지나간 상황들을 명석하게 통찰하는 점에 있어서 그는 셰익스피어 못지않아.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순수한 개인으로서 그보다 우월하네. 바이런도 이 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있네“
“영국의 시인으로서 높은 귀족 신분은 바이런에게 매우 불리했네. 왜냐하면 재능은 세상으로부터 성가심을 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지. 특히 그렇게 고귀한 태생에다가 그렇게 위대한 재능을 동시에 타고났으니 말할 것도 없겠지.
중류 계급 정도의 신분이 재능을 가진 자에게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네. 모든 위대한 예술가나 시인들이 중산층 출신인 것은 그 때문일세. 무제한적인 것을 향한 바이런의 성향은 만일 그의 신분이 좀 더 낮거나 능력이 좀 더 모자랐다면 훨씬 덜 위험했을 걸세.
그러나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리며 행동에 옮기는 기 질 때문에 그는 수많은 분규에 말려들었던 거네. 더군다나 자기 자신이 그렇게 고귀한 신분인 마당에 그 어떤 귀족을 존경하고 배려할 마음이 생겼겠는가? 그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발언했고, 그 때문에 세상과 끊임없는 갈등에 빠지게 되었던 걸세.“
“나는 요즈음 슈바르트를 읽고 있네.” 하고 괴테가 말했다. 그의 저작의 주된 관점은 철학을 배제한 하나의 입장, 즉 건강한 인간 오성의 입장을 지향한다는 데 있네. 또한 예술과 학문은 철학과는 별개로 자연적인 인간의 힘을 자유롭게 발휘할 때 가장 번성한다는 것이지. 이것은 정말 우리한테 꼭 들어맞는 견해이네.
나는 철학으로부터 늘 자유로운 관점을 견지해 왔으며, 건강한 인간의 오성이 언제나 나의 입장이었어. 그러므로 슈바르트는 일생 동안 내가 말하고 행동해온 것을 확인해 주고 있는 셈이지.
헤겔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독교를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철학은 그래 봤자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데 말이야. 기독교는 그 자체로 강력한 실체이며, 영락하거나 고뇌하는 인류는 때로는 그것에 의지하여 언제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왔네.
종교의 이러한 작용을 인정하는 이상, 종교는 모든 철학을 초월하며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지.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어떤 종류의 이론, 이를테면 영혼불멸설과 같은 것을 입증하기 위해 종교의 명성에 의지할 필요는 없네.
인간은 불멸을 믿어야 하며, 그럴 권리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본성에도 들어맞는 것이므로 종교의 약속을 믿어도 좋아. 그러나 철학자가 우리들의 영혼 불멸을 전설로부터 이끌어내려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허약하기 짝이 없고 그다지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마네.
내가 볼 때 영혼 불멸에 대한 신념은 활동의 개념에서 생겨나는 것일세. 왜냐하면 내가 인생의 종말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는 가운데, 현재의 생존 형식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게 된다면, 자연은 반드시 나에게 다른 생존의 형식을 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일세.“
이러한 말을 듣는 동안 내 가슴은 경탄과 사랑으로 두근거렸다. 나는 이보다 더 인간으로 하여금 고귀한 활동을 하도록 촉구하는 가르침은 지금까지 언급된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발견한다면 그 누가 자신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활동하고 행동하지 않겠는가!
나는 괴테가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는 매우 행복한 것 같았다. 그곳 높다란 언덕에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광경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저 아래쪽으로는 초원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흘러가는 잘레 강과 함께 생기에 넘치는 골짜기가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괴테가 말했다. “ 여기서는 낯이건 밤이건 정말 좋아. 이따금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나 창문을 열어 놓고 누워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빛을 발하고 있는 세 혹성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또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노을을 보며 생기를 얻기도 한다네.
그리고 나서는 거의 하루 종일 바깥에 머물면서 나에게 훌륭한 생각을 말해 주는 포도나무 덩굴과 영원한 대화를 나눈다네. 그중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려줄 수도 있어. 또한 그렇게 졸작이 아닌 시를 다시 쓰는 일도 있지. 정말이지 이 상태로 계속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오늘 식사 후에 파우스트가 ‘어머니들’에게로 가는 장면을 괴테가 낭송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기뻤다. 어머니들! 어머니들! 이 얼마나 신비한 울림인가! 괴테가 말했다. ‘더 이상의 말은 자네에게 해줄 수가 없네. 다만 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으로서의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또 내가 그 사실을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찾아내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말해 두기로 하세.“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이 거대한 천체의 내부를 텅 빈 공간으로, 즉 일정한 방향으로 몇 백 마일이나 그 속에서 계속 나아가더라도 그 어떠한 물체와도 전혀 부딪치지 않는 그러한 공간으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공간이야말로 파우스트가 찾으러 내려간 저 미지의 여신들의 거처가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그녀들은 모든 장소를 초월한 곳에서 살고 있다. 그녀들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살고 있다. 왜냐하면 떠오르고 지고하면서 밤과 낮의 교체를 알리는 그 어떠한 별도 그녀들의 머리 위를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들은 이러한 어스럼과 고독 속에서 창조한 존재이며, ‘창조하고 보존하는 원리’로서, 과거에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하게 될 모든 영혼과 형상은 그녀들의 거처인 무한 공간 속에서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돌면서 어머니들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므로 마술사라 할지라도 그녀들이 사는 나라로 가야 한다.
생성과 성장, 파괴와 재생이라는 이 세상 존재의 영원한 형태 변형은 어머니들이 끊임없이 이루어내는 작용이다. 저 창조하는 신들을 ‘여성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하며, 그들에게 ‘어머니들’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근원이나 신적인 것의 존재에 대해 추론하지만, 어떠한 개념이나 표현으로도 그것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거기에다가 인간의 모습을 부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막연한 예감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포착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기에서 세기로 민족들 사이에 전송되어온 모든 신화는 그런 식으로 생겨났다. 괴테가 지어낸 이 새로운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 신화는 자연의 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신화들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
어쨌든 자연과 우리 인간은 모두 신성(神性)으로 차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지상에 머무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법칙에 따라 고통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법칙을 이행하고 또 그 법칙들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그 법칙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빵 굽는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서도 아이는 과자를 맛있게 먹고, 참새도 버찌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맛있게 먹지 않는가.
저는 시인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 어떤 현상이나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재고품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모든 종교는 신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이해가능성을 감안하여 뛰어난 인간들이 만든 작품의 형태로 생겨났다. 만일 종교가 신의 작품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작품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도달 불가능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양 수준이 높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도달 불가능한 것을 특별한 신들의 형태로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운명의 이념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이 운명의 이념을 그 모든 것의 상위에 올려놓았으나 이것 자체가 다시 도달 불가능한 그 어떤 다양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완결되기보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제가 살아오면서 자주 겪었던 일이지만, 그 어떤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에 포도주 몇 잔을 마시면, 금방 할 일이 분명해지고 곧장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결심을 한다는 것도 일종을 생산성이므로 포도주 몇 잔으로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런 수단도 완전히 배제해 버릴 수야 없는 것이겠지요.”
괴테가 말했다. “자네 말은 반박하지는 않겠어. 하여간 진리가 다이아몬드에 곧잘 비교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네. 다이아몬드는 한쪽으로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빛을 발하니까 말이야. 나의 <서동시집>의 구절을 기억하겠지.
사람은 술에 취했을 때
올바른 것을 알게 되는 법.
어떤가. 이 시구는 나와 자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네. 사실 포도주 속에 생산적인 힘을 불러일으키는 상당히 중요한 성분이 들어 있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모두 상황과 때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로울 수도 있는 걸세.
그 밖에도 사람을 생산적이게 만드는 힘으로는 휴식과 수면, 그리고 또 운동을 들 수가 있네. 드넓은 들판의 신선한 공기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여서, 거기에서는 마치 하느님의 영이 인간에게로 직접 불어와 그 신성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네.
바이런 경을 예로 들어보세. 그는 날마다 몇 시간씩 야외에서 보내면서, 금방 해변에서 말을 달리는가 하면 또 금방 돛단배를 타거나 노를 젓기도 했네. 그리고 나서는 또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체력을 단련하였네.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사람의 하나였던 걸세.“
괴테가 말했다. “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 중년기에 전환점을 맞이한다네. 청소년기에는 만사가 순조롭고 행복하게 돌아가던 사람도 어느 순간 그 운명이 돌변하여 재난과 불운을 잇달아 겪게 되는 법일세. 내 말의 의도를 알겠나? 사람이란 결국 무로 돌아가는 거라네!
모든 비범한 인간은 그가 이루어야 할 그 어떤 소명을 타고 나는 법이며, 그것을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사람의 모습으로 지상에 머물 필요가 없어지는 게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섭리는 그를 또다시 다른 용도로 돌려쓰게 되는 걸세. 이 지상에서는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데몬은 차례차례 사람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는 거네.
나폴레옹도 그랬고 다른 많은 사람도 그랬지. 모차르트는 서른여섯 살에 죽었고, 라파엘로도 거의 비슷한 나이에 죽었으며, 바이런은 그보다 겨우 몇 년 더 살았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천명을 완벽하게 이루었지. 그들은 가야 할 나이에 갔네. 그리고 이 땅에 더 오래 살도록 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세.“~
<‘괴테와의 대화1,2’ P1140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요한 페터 에커만지음, 장회창님 옮김, 민음사출판>
* 요한 페터 에커만 : 1792년 독일 빈젠에서 출생했다. 1823년 <시학논고>라는 원고를 괴테에게 보내 관심을 끌었고, 괴테의 초청을 받아 바이마르를 방문햇다. 1823년부터 1832년까지 대략 천 번 가량 괴테를 만났다. 그는 만녀에 접어든 괴테의 조력자이자 동료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화를 기록해두었다가, 후에 그것을 정리하여 괴테의 사후인 1836년에 1,2부를, 그리고 1848년에 3부를 출간했는데, 이것이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평한 <괴테와의 대화>다. 그는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1832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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