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1억 명 중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만큼 좋은 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자연에서, 어머니인 모노라에게서 태어났다. 내가 이 산에 온 첫 날 밤에 할머니가 노래하신 것처럼 자연 속에 모든 것을 형제자매로 가질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무와 새와 시냇물, 게다가 비와 바람에게서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좀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집과 형제들이 있는 셈이다.
인디언들은 절대 취미 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동물을 잡는다. 즐기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할아버지는 분개하곤 하셨다.
위스키 제조업이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던 할아버지는 옥수수로 100%위스키를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하얀 옥수수를 주로 썼지만 우리는 붉은 인디언 옥수수만 길렀기 때문에 그것만 썼다. 옥수수 알들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통속에 넣고 발효가 다 되려면 4,5일 정도가 걸린다. 할아버지는 위스키 속에 설탕조차 넣지 않았다. 설탕은 위스키의 농도를 흐려서 양을 불리는 데 사용되곤 했다.
대도시의 범법자들은 위스키의 품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많이, 빨리 만들어내는 데만 신경을 쓴다. 그런 사람들은 엿기름을 빨리 발효시키고 위스키를 그럴듯한 ‘거품’을 주려고 양잿물이나 산화칼륨을 쓴다. 게다가 위스키를 거를 때는 체 대신에 철 그물이나 주석그물, 때로는 트럭의 라디에터를 쓰곤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목사와 교회 집사들이 종교를 융통성 없이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들은 누가 지옥행이고 누가 아닌지 까지 자기들 멋대로 결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아니라 목사와 집사를 숭배하게 된다. 정말 그런 일은 딱 질색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불평하지는 않으셨다.
할머니 자신에게도 비밀 장소가 있으며, 할아버지에게도 있다. 할아버지의 비밀장소는 산꼭대기 가는 길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가지려 할 때도 이 마음을 써야 한다.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약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 영혼의 마음은 줄어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그래서 평생 욕심 부리면서 살아온 사람은 죽고 나면 밤톨만한 영혼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그보다 더 커지면, 영혼의 마음은 완두콩 알만하게 줄어들었다가 결국에는 그것마저도 완전히 살아지고 만다. 말하지면 영혼의 마음은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할머니는 어디서나 쉽게 죽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여자를 봐도 더러운 것만 찾아내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쁜 것만 찾아내는 사람,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덩어리로만 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죽은 사람들이었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이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 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할머니는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며 억지를 부려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다.
영혼의 마음이 자꾸자꾸 커지고 튼튼해지면, 결국에는 지나온 모든 전생의 삶들이 보이고 더 이상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모든 것이 새롭게 탄생되는 봄이 되면 흔들림과 소란이 일어난다.
영혼이 다시 한 번 물질적인 형태를 갖추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에 부는 매서운 바람은, 아기가 피와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탄생을 위한 시련이다. 그러고 나면 생명을 한껏 꽃피우는 여름이 온다.
그보다 더 나이가 들면 우리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특이한 느낌을 갖는 가을이 지나가는데,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애잔한 그리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죽거나 죽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몸이 죽었을 때처럼, 하지만 봄이 되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그히 일부 요약 발췌, 포리스터 카터 지음, 조경숙님옮김, 아름드리미디어 출판>
* 포리스터 카터 : 1925년 미국 앨라배마 주 탄생, 48세에 작가로 출발, <텍사스로 가다>감독,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책으로 제1회 애비상을 수상했다.
철학 산책
당구를 치며 철학한 유덕한 철학자이며, 우울증을 극복한 철학자!
당구를 치면서 철학적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흄이 살던 시대는 당구가 보급되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리가 당구 큐대로 당구공A를 때려(사건 A라고 하자) 당구공B에 충돌하는 것(이것을 사건B라고 하자)을 본다면, 우리는 사건 B의 원인이 사건 A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해 흄은 이렇게 의문을 나타낸다. 우리가 실제로 관찰한 사실은 사건A가 있고 난 다음 사건B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건을 연결해주는 인간관계는 관찰하지 못합니다.
그는 인과관계뿐만 아니라 당연히 전제되는 ‘자아’라는 실체도 의심했다. 풀이 초록색을 띠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이 원래 초록인색인지 모른다. 우리의 자아가 눈을 통해 그렇게 자각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흄은 더 나아가 그렇게 자각하는 우리의 자아라는 ‘실체’도 ‘존재’하는지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자각의 주체인 ‘나’는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실제로 우리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각 ∙ 사고 ∙ 정서 ∙ 기억 등 ‘나’가 경험한 내용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진술할 있지만, 그러한 경험을 하는 ‘자아’라는 실체를 만날 수 없고, 그에 대해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흄은 자각의 주체는 허구라는 것이다. 그는 미신적이고 인간의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허구적 궤변을 담은 반계몽 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서적들은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흄을 이렇게 평가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수년동안 빠져 있었던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나게 했고, 사변 철학 분야에서의 나의 연구에 완전히 다른 방법을 제시해주었다는 것이다.(PH259)"
데이비드 흄은 1711년 스콜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1726년에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지만 무미건조한 법학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3년 만에 법학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키케로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책에 몰두했다.
1729년에 흄은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더욱 철학에 몰두했다. 그가 생각한 자가 치료는 날마다 억지로라도 두서너 시간씩 철학적 성찰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한 설탕 상회에 상인 보조로 취직했다.
그러나 그 일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몇 개 월 만에 상점 주인과 다투고 상회를 나왔다. 주인의 편지를 그냥 받아 적지 않고 주제넘게 문법에 맞추어 문장을 고치고 문체에 손을 대어 정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1734년 그는 조용하게 철학적 문제에 몰두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데카르트가 공부한 왕립예수회학교를 둘러보며 철학자의 꿈을 키웠다. 1744년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윤리학 및 정신철학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인성론>이 자연신론과 무신론, 회의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성직자들이 반대하여 좌절되었다.
마침내 흄은 <영국사>로 인해 유명해졌다. 볼테르는 이 책에 대해 “아마도 언어로 쓰인 것 중에서 최고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흄이 죽은 뒤에도 거의 100년간 베스트셀러이자 역사서로서 권위를 누렸다.
흄은 본인이 스스로 평가한 대로 “온화한 성격과 자유로운 기질의 성품과 개방적이고 사교적이며 유쾌한 해학”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담 없이 가까이 할 수 있었다.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으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고,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1748), <도덕원리에 대한 탐구>(1751) 같은 철학 작품을 썼다.
1766년에 흄은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갈 때 루소를 데리고 갔다. 루소는 그의 이단적인 종교적 견해 때문에 많은 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동변상련이라고 흄과 루소는 서로 좋아하고 또 존경했다. 흄은 루소와 살만한 집을 찾아내어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루소는 피해망상증이 있었다. 윌폴이라는 사람이 루소에 대해 풍자문을 썼는데, 루소는 그것을 흄의 탓이라고 굳게 믿었다. 루소는 자신을 비난하려는 음모에 흄과 철학자들이 가담한 것으로 굳게 믿었다. 사람 좋은 흄도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루소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라는 책을 개정했다. 그는 자연신론,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걱정해 그것을 생전에 출판하지 않았다. 그 책은 나중에 그의 조카가 출판을 했다.
흄이 철학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인간의 인식능력과 관련된 흄의 회의론은 섣부른 자만에 빠질 수 있는 철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제기다. 칸트는 흄은 “철학이라는 배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의 배를 해변(회의주의)에 정박시켜놓았다. ”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러셀이나 에이어 같은 사람들이 흄의 글쓰기를 본보기로 삼았다. 애덤 스미스는 흄을 “현 시대에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생시에도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항상 그는 완벽할 만큼 현명하고 유덕한 사람이며, 또 어쩌면 인간의 단점까지도 용납할 사람으로 평가했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 있는 철학 이야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이동희지음, 휴머니스트 출판>* 이동희 : 한신대 연구교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겔과 자연><변증법과 해석학의 대화>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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