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
사랑이 그대를 부를 때엔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품어 안을 때엔
그에게 온 몸을 내맡기라.
비록 그 날개 안에 숨은 칼이
그대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할 때엔 그를 믿어라.
비록 폭풍이 정원을 폐허로 만들 듯이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흩트려 놓을지라도
사랑은 사랑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사랑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살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한 것.
- 칼릴 지브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필요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한다. 외로움이 두려운 인간은 사랑이 필요하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배움을 좋아해서다. 지혜가 부족한 인간이 배움을 추구하듯 사랑이 부족한 우리는 사랑을 갈구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배려, 책임, 존중, 이해를 사랑의 네 가지 기본요소로 뽑았다. 나는 사랑의 본질은 배려라고 생각한다. 배려는 책임을 내포한다.
중국인들은 정(情)과 의(意)를 연결하기 좋아한다. 소위 유정유의(有情有意)란 말의 ‘정’은 사랑을 의미하고, ‘의’는 책임을 의미한다. 이해와 존중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사랑의 ‘질’을 높인다.
하지만 이해와 사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이들이 배제된 사랑은 가끔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랑의 유형
‘백행이효위선 (百行以孝爲先)’이라 했다. 백 가지 일 중에 효가 가장 먼저라는 의미이다. 이는 유가(儒家)의 가치관을 잘 반영한다. 하지만 ‘선(先)‘은 시간의 앞섬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효는 우리가 가장 처음 발전시킨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최초로 발전시켜온 덕목이 효라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이 최초의 사랑은 아니다. 갓난아기에게 너와 나의 구분이란 없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는 세계와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 최초의 사랑은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중요하다. 이는 사랑의 출발점이며, 다른 사랑으로 발전하는 토대다. 만약 초기에 어긋나 버린다면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남에 대한 동정심이란 찾아 볼 수 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질 공산이 크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사랑과 비인간 관계의 사랑으로 구분된다. 전자에는 가족 간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애정이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이란, 말 그대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다. 친구 사이의 사랑인 우정은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된다. 애정은 연인간의 사랑으로, 이르면 사춘기에 찾아오기도 한다.
가족 간의 사랑은 억지로 생길 수 없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연인과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사랑은 우선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 없이 연인 간의 사랑이다.
가장 황홀하고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짧게 끝날 수도 있는 만큼, 오래 지속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프롬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이와의 어우러짐에 있다고 주장한다. 연인간의 사랑은 가장 완벽한 어우러짐이다. 이를 토대로 한 완전한 사랑이라면 각자의 개성마저도 유지할 수 있다.
인간 간의 사랑 외에 사랑이라면 자연에 대한 사랑이거나 국가에 대한 사랑, 혹은 조물주에 대한 사랑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조물주의 사랑은 인간과의 사랑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어찌 보면 고차원적인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기 자식만을 위한, 조물주는 모든 이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조물주의 아들과 딸이 아니던가? 사랑의 대명사인 예수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참고 인내하며, 질투하지 않고 오만해선 안 된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득을 꾀하지 않는다. 함부로 분노하지 않고 다른 이를 험담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해설이다. 조물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극적 사랑
사랑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때론 고통과 증오, 질투와 파멸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랑의 이면을 안다면 그로 인한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는 겉으론 모차르트의 좋은 친구인 척 하지만, 뒤에선 그의 천재성을 질투한 나머지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혹자는 진정한 우정은 질투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은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이성적인 우정과 사랑에 국한될 뿐이다.
증오와 질투는 당연히 나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발생 요인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 볼만하다. 증오는 사랑에 대한 보답이 없을 경우 발생한다. 예를 들어 친구와 좋은 마음으로 지냈지만 그 친구가 당신을 험담하거나 괴롭힌다면 당신은 자연히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좋은 마음에 상응하는 보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당신을 험담한다면 대개 당신의 성과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됐을 공산이 크다. 증오의 경우 그 과정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질투의 고통은 순전히 내 몫이다. 결론적으로 헤어진 연인과 서로 증오하는 것이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인 셈이다.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량광야오 지음, 임보미님 옮김>
* 량광야오 : 홍콩 중문대학 철학박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중국 철학 및 종교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고 학당>,<예술의 죽음>등 이 있다.
지나간 시간에 후회하는 삶보다는
다가오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 훨씬 아름답다.
- 톨스토이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어라.
아무데도 상처받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라.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러라.
마치 지상의 천국처럼 살아라.
- 윌리엄 퍼키
<‘좋은 글 대사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좋은글연구회 이민홍엮음, 씽북출판>
* 이민홍 : <시사문단>을 통해 등단 후 <한류문예>발행인, 저서로는<묵언수행>,시집<이보시게>가 있다.
임사체험!
라디쉬 : 당신의 심장 박동이 몇 분 동안 정지되고 나서 9년이 지난 후 당신은 <나 자신의 죽음>이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왜 그 제목이 되었나요?
나더쉬 : 그것이 실제 사실이니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죽음이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고, 내게서 떼어 낼 수도 없습니다.
라디쉬 : 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잖아요.
나더쉬 : 과학자들은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빈사 상태라고 하지요. 의사들은 나를 되살려 놓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짓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되살아난 사람이 의사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알지요.
라디쉬 : 어떤 것을 안다는 말씀인가요?
나더쉬 : 의사들은 죽음을 우리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죽음 속에서 어떤 위대한 것이 시작되지요. 이 점에 있어 나는 기독교-유대교적 내세관에 동의합니다.
라디쉬 : 그러니까 우리가 내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나더쉬 : 지구 중력이 사라지고, 의식의 내용 전부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의식의 내용은 우리가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이 없는 경험을 불충분하게 옮겨 놓은 것뿐입니다.
라디쉬 : 프리드리히 실러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전해집니다. “영혼이 말을 할 때는, 말을 하는 가 싶더니 아! 벌써 입을 다물어 버리는구나!” 우리는 세계문학과 과학이라는 막강한 가용 수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건가요?
나더쉬 : 영혼은 과학의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거나 종교적 열락을 느끼는 순간처럼, 특정한 계기로 영혼에 대해 경험하고 느낄 수 있지요.
죽음의 문턱에는 언어와 결부되지 않은 매우 추상적인 사고가 존재합니다. 그와 동시에 감각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 하지요. 하물며, 우리가 나중에 말로 추론할 수 있을 지도 모를 몇 가지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요.
라디쉬 : 그 세계에 표상들이 있나요?
나더쉬 : 그 표상들을 기억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없습니다.
라디쉬 : 서정시에서 우리는 절대적 은유를 거론하는데, 그것은 오직 그 시와 연관해서만 의미가 있고 현실과는 연결되지 않은 표상들입니다. 죽는 순간의 표상들은 절대적 은유인가요?
나더쉬 : 네, 나 같으면 서로 다른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의식 내용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내용은 내가 평생 동안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고, 처리했거나 처리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라디쉬 : 당신은 죽어 가는 순간에 당신에게 나타난 그 빛을 몰랐던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하더군요.
나더쉬 : 출생 이전의 인상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의식은, 말은 없고 표상으로 변형된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자궁에서 몸의 방향이 출산 통로를 향해 반대로 바뀌며 미끄러져 빠져나왔던 것을 느끼고 봅니다.
내가 죽는 순간에 그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졌어요. 이러한 것들은 전혀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그렇게 몸이 도는 것과 터널 끝에 있던 전혀 몰랐던 빛은 실제의 사실입니다.
라디쉬 : 기독교 세계에서 빛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양초에서부터 신비주의자들이 이르는 깨달음의 열락까지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세상의 빛이다.” 당신은 구원의 빛을 본 겁니까 아니면 그건 분만실의 불빛에 지나지 않았습니까?
나더쉬 : 어쩌면 출생과 죽음이 서로 맞닿아 있는 분만실의 불빛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내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갈 때 변한, 혹은 내가 해체될 때 변한 빛입니다. 거기에 관해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전기 충격을 통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으니까요.
라디쉬 : 그 일이 벌어질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나더쉬 : 우주에 있었지요. 이 말은 하나의 비유일 뿐입니다. 나는 우주 속에 있는 나 자신을 과거 어느 때보다, 나의 연인에게서보다 더 명확히 느꼈습니다.
라디쉬 : 책에서 당신은 우리의 세계를 단지 ‘망상의 세계’라고 부르더군요.
나더쉬 : 나는 예전부터 관념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플라톤이 주장한 내용, 위대한 종교들이 주장하는 내용, 티베트의 <사자의 서>가 주장하는 내용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라디쉬 : 그 지식이 문학에는 어떤 의미가 될까요?
나더쉬 : 중요한 문학․철학적 문제는 이것입니다. 즉, 나는 우주 속에서, 사회 속에서 나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어떻게 적응하는가? 이것은 자각에게는 근본적인 문제죠.
나는 삶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삶은 어떤 것에서 생겨나지도 않고 어떤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완결된 통일체인가? 나는 이제는 시작과 끝을 거론하는 것이 단지 문화적 고정 관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라디쉬 : 그 지식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도 하나의 문화적 고정 관념에 지나지 않나요?
나더쉬 : 기독교 세계와 유대교 세계는 하나의 속임수를 이용하죠. 즉,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는 거죠. 어떤 근원에 대한 인과관계는 속임수이며, 따라서 거기서 생겨나는 모든 것도 가짜입니다. 이 속임수는 우리들 모두가 느낄 수 있으며, 문학이 다루는 것도 다름 아닌 이 속임수입니다.
라디쉬 : “신은 유감스럽지만 … 곤혹스러운 착각이다.‘ 당신의 죽음 보고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죽은 사람을 감싸는 창조의 힘에 관해 말하는군요?
나더쉬 : 네, 그것은 매우 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외부에 있거나 위에 있는 창조의 힘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들어 있는 창조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나는 그것을 내가 죽어 갈 때 깨달았던 매우 구체적인 출생 경험과 결부시키는 것이지요.
라디쉬 : 임사 체험에 관해 방대하고도 부분적으로 읽을 가치가 높은 문헌들이 있습니다. 티베트의 <사자의 서>에서 시작해서 레이먼드 무디(사망 선고를 받은 후 소생한 환자들의 시례를 엮은 임사체험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미국 정신과 의사)의 사례 연구와 그 외의 사람들까지, 거기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시간의 해체, 터널, 그 터널 끄트머리의 빛과 같은 늘 동일한 모티브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라디쉬 : 얻어 온 메시지가 있습니까?
나더쉬 : 아뇨 메시지는 없습니다. 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우리를 결속시켜 주고, 우주에 통합시켜 주는 전인(全人)적인 계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부를 수 있고,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의 관계나 개인의 이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올바른 상관관계가 밝혀집니다.
라디쉬 : 철학에는 그 개인 이전의 계층을 지칭하는 대단한 강력한 개념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초유일자로 시작해 존재의 근거를 거쳐 부정하는 무와 비동일자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나더쉬 : 하이데거와 헤겔은 선별되어 있고 또 지양되는 어떤 것에 관해 논합니다. 나는 이중으로 결합되어 있는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중이란 ‘개인적-개념적인 것’과 ‘개인 이전적-비개념적인 것’입니다.
라디쉬 : 다음번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나요?
나더쉬 :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죽음과 싸움을 벌인다는 말은, 나의 체력은 싸우지만 나 자신은 그 싸움과 죽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고, 모든 게 더 나아집니다.
라디쉬 :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나더쉬 : 죽음의 문턱을 헤매기 전에는 어느 정도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문화적으로 옳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잘못 옮겨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종교는 사명도 아니고, 피안도 아니고,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한 문화도 아닙니다. 종교는 결과를 놓고 따질 수 없는 열광입니다. 초월성에 대한 나의 믿음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초월성이 통합되어 있고, 우리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그것에 경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초월성은 척추동물인 우리들 모두를 결속시킵니다. 심지어 초월성은 인간을 나뭇잎들과도 결속시킨다고 생각하죠.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이리스 라디쉬 지음, 염정웅님 옮김> * 이리스 라디쉬 : 1959년 베를린 출생,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독일 대표적인 주간신문<차이트>의 문에부 편집자, 집필을 맡고 있다.
* 나더쉬 피테르 :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소설가이자 사진작가이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그는 열세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열 여섯 살에는 아버지마저 공금횡령 모략의 희생자가 되어 자살한 뒤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거부하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로베르트 무질과 마르셀 프루스트에 비견되기도 하며, 수전 손택은 그를 ‘우리 시대의 토마스 만’으로 칭하며 극찬했다. 그는 부다페스트의 한 병원에서 3분 30초 동안 심장 박동이 멈추는 화를 당했다. 이 체험은 <기억의 책>의 저자인 그에게 - 그의 방대한 소설 <평행 이야기>는 인터뷰를 한지 10년 후에 발행된다. 인터뷰 직전에 <나의 죽음의 이야기>이라는 제목의 얇은 책자에서 서술하기도 했다.